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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okurinn  lv 1 56% / 212 글 2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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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승달의 레퀴엠 - Requiem Kyrie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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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okurinn[kokurinn]
조회 916    추천 0   덧글 1    / 2007.05.22 01:33:10

Requiem Kyrie
#01.

내 기억의 가장 오래된 페이지.

내게 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이웃이 있었고, 마을이 있었고, 숲이 있었던 옛날이야기.

그 날, 하얀 하늘이 있었다.
그 날, 하늘보다 하얀 불꽃이 한 줄기 떨어져 아득한 저 편으로 사라졌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숲 속에서 나는 소망했다.

이 아름다운 세계가, 언제까지나 별빛으로 가득하기를.
이 아름다운 바람이, 언제까지나 그 빛을 머금기를.
이 아름다운 호수가, 언젠가 마르더라도.
이 아름다운 나무가, 언젠가 마르더라도.

사랑스런 대지에 서서 눈을 감고,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영원을 소망했다.

아침놀이 나의 그림자를 빚어낼 때, 나는 그 소망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았다.
저녁놀이 나의 그림자를 빚어낼 때, 나는 그 소망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아침놀과 저녁놀이 나의 고향 에를라흐 숲에서 보낼 수 있던 마지막 날을 비추고, 저물었다. 내가 소망하지 않았다면 사랑스런 숲과 함께 나는 지금도 그 곳에 서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루어진 소망을 취소해주는 신(神)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원동력은 결코 흔들림 없는 맹목적(盲目的)인 의지니까.

잔혹(殘酷).
끝없이 붉은 피, 피, 피…….
비명 소리, 단말마(斷末魔), 그 누구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기묘한 모습.

희열(喜悅).
점점이 붙은 무엇이었는지 모를 파편.
태엽인형처럼 오로지 한 가지만 반복하던 일그러진 오브제 : 살육.

환락(幻楽).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 생명 있던 것, 생명 없던 것.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불태우며 그들은 노랫말 없는 노래를 읊었다.

종언(終焉).
모두 검게 변한 피와 살육과 불꽃.
그렇게 우리는 하루라는 짧은 시간으로, 영원히 고향을 잃었다.

후유(後遺).
없어진 팔, 없어진 눈, 없어진 다리, 없어진 목소리.
우리는 점점 몇 십에서 몇으로, 다시 몇은 하나로 바뀌어갔다.

잔존(殘存).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
그 전을 기억하고, 그 날을 기억하고, 그 다음도 기억하는 나.

망향(亡鄕), 망향(忘鄕), 망향(望鄕). 사람들이 나의 숲을 잃고, 잊어 가는 가운데 홀로 남은 에흘라흐 숲의 정경은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다시 한 번 나무에 오르고, 나무를 타고, 그 열매의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작은 수확물을 자랑스러워하며 호숫가의 꽃에 묻혀 그 평화에 취할 수 있기를, 나의 소망은 어느 새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미래로 흘려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고. 아픔이 조금씩 옅어져가는 가운데 나는 홀로 그 날에 묶여 있는 것만 같이, 웃지도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 그저 그렇게 과거와 함께 미래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이 두 눈에 새겨진 그 참화(慘禍)가, 너무나도 확실하게, 그 날을 매일, 매일, 매일, 매일, 매일, 매일, 매일, 매일…….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 새겨지기라도 하듯 선명하니까.
결코 잊을 수 없는 환상, 아니, 환상이었으면 차라리 좋을 영상. 그리고 차가운, 오히려 비현실적인 현실감. 세상의 어떤 저주도 이렇게나 괴로움을 줄 수는 없겠지. 세상의 어떤 힘이라도 이렇게 아픔을 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나는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숙명, 운명, 카르마, 다르마,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 또 한 사람……. 차례로 내 곁을 떠난, 에를라흐 숲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들. 따스한 그 표정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미소들.
그렇다.
나는 부여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나를 만들었다.
에를라흐 숲 유일의 생존자인 레나테 클로에 카린 폰 에를라흐라는 소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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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okurinn  lv 1 56% / 212 글 2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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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비 09/03/07:01
뭔가 글이 심오하네요. 글 대박 잘쓰시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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