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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 by Pa3NDA

이건 말야. …줄 거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에게. 약한 사람을 돕고 그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에게.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혼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아직 누군지 이름은 모르지만. 그 사람에게 줄 거야. ———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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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빛도 사람도 모두 자리를 떠난 밤의 거리.
그 도시를 가득 채운 빌딩의 숲.
그 중 가장 높은 한 건물의 옥상.
그 위에서 지금 이 도시의 유일한 광원인 푸르스름한 달빛을 등에 지고 한 남자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 찬 잔주름과 턱부터 가슴까지 감싸는 긴 흰 수염은 너무나 ‘노인’ 다운 인상이었지만, 2미터에 가까운 장신과 그 속에 꽉꽉 들어찬 근육은 마치 ‘노인?’ 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의 의지를 대변하는듯한 굵고 곧은 흰 눈썹. 그 위로 깊게 폐인 이마의 주름살은 시간의 나이테. 수염만큼 긴 백발을 뒤로 넘기고 머리 위에는 중세 시대의 제상과도 같은 기다란 투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왕관 같기도 한 특이한 관이 얹어져 있었다.
몸에 두른 복장도 어느 쪽인가 하면 중세시대의 갑옷을 연상시켰다. 과장된 어깨의 장갑과 그의 등 뒤에 펄럭이는 망토가 더욱더 그 분위기를 살렸다.
새하얀 갑옷에 새까만 망토의 이 노인은 옥상의 난간 위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때.
그의 등 뒤로 갑자기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라 들었다.
슈욱 하는.
공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하지만 노인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등 뒤로 날아온 그 무엇인가를 받아냈다.
“…왔나.”
짝. 짝. 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역시 대단하군요.”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
“진심으로 던졌다고요. 웬만한 철판 정도는 순식간에 댕강 인데.”
“‘그녀’는?”
하지만 노인은 여성의 감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자신의 용건을 물었다. 마치 쇳덩이가 말을 하면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무거운 목소리로.
“없어요.”
여성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고양이과의 동물처럼 조금 사납지만 탄력과 애교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고양이과의 동물이라는 거지 작고 귀여운 집고양이의 그것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동물원이나 오지의 깊은 산속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진정한 육식동물의 그것. 포식자의 위용과 거만도 그녀의 목소리엔 함께 숨어있었다.
“남은 건 그것 뿐.”
여성의 말에 노인은 자신이 받아 들은 무엇인가를 확인했다.
그것은 카드.
노인의 손가락 사이에 잡혀있는 그 카드에는 세 마리의 괴이한 짐승들이 한 원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카드 맨 위에 쓰인 X의 문자.
“운명의 수레바퀴인가.”
“무슨 의민지 아시나요?”
여성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노인의 뒤로 다가왔다.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 감추어져 있던 여성의 검은 실루엣이 달빛에 의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빛을 잃은 도시의 그림자에 지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긴 머리카락은 그녀의 눈까지 덮어,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얹어져 있는 건 검은 코이프(coif). 즉, 수녀가 쓰는 두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녀라기엔 몸에 두른 검은 복장이 너무나 대담했다.
등이 깊게 파인 원피스.
아슬아슬하게 짧은 스커트.
그 속에 보이는 검은 가터벨트.
거기에 이어진 검은 스타킹.
그리고 머리카락과 코이프에 가려 슬쩍 보이는 등에 새겨진 짐승의 문신.
하지만 노인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안주고 대답했다.
“…변한다는 뜻이지.”
여성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허리에 양손을 집었다.
“대단하군요.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하고 마지막엔 한방 먹이고 도망가다니.”
“서로 이용한 건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던 거에요.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으로.”
여성의 말을 들은 노인의 입가가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쓴웃음에 경멸을 한 스푼 넣고 노인 특유의 무감동에 부어 잘 저어준 듯한 표정이었다.
“네 입에서 배신이란 소리가 나오다니 웃기는군. 시스터 페이후(黑虎).” 
“어머, 무슨 소리를 크라켄 카이저. 전 언제나 당신의 충실한 부하랍니다.”
시스터라고 불린 여성은 어딘가 연극하는듯한 과장된 어조에 과장된 포즈로 한 손을 가슴 아래로 갔다 대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흥.”
카이저라 불린 노인은 여성을 무시했다. 시스터 역시 그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길 계속 했다.
“그래도 그 금발. 아름다웠는데 말이죠. 목덜미 부근의 피 색깔이 꼭 보고 싶었는데. 유감이에요.”
“그만두는 게 좋아. 너 따위가 어떻게 해볼 만한 인간이 아니다.”
“어~머. ‘따위’라니. 꽤 혹독하잖아요. 후후후.”
시스터는 입가에 손을 대고 쿡쿡 하고 웃었다.
“뭔가 이상은 없었나?”
“모르겠네요. 그 사람의 운명순환인지 뭔지 하는 실험은 나 ‘따위’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시스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어깨를 으쓱 해 보인다.
“F.R.e.E.이론인가. 우리들은 그녀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위기의 원인 역시 그녀. 지금 우린 ‘오리지널’을 잃었다.”
“그래서 그걸 되찾기 위해 지금 이렇게 우리들 간부진까지 소집된 거란 얘기.”
“그렇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실종. 그리고 그 남자는…”

“그 인간 이야기는 관둬줘요. 죽일 거에요?”

카이저의 말에 히죽히죽 웃고 있던 시스터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치 시선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겠다는 듯한 눈빛.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강렬한 육식동물의 위압감.
하지만 카이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뭐, 좋아. 결국 간부도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다.”
“……흥.”
“더 이상 놀고 있을 시간은 없다. 오늘 밤, 오리지널을 되찾는다.”
“…그 전에. 들리나요? 이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대화음. 타겟 외의 인간이 이 에어리어로 접근해오고 있어요.”
귓가에 손을 대고 뭔가를 듣는 듯한 연기 같은 포즈를 취하는 시스터의 모습에서 위압감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리석은.”
물론 카이저에겐 들리지 않는다. 그건 보통 사람의 몇 십 배에 달하는 청력을 가지고 있는 시스터만이 허락 받은 영역이었다.
“제가 가지요. 당신은 당신 할 일을.”
“됐다. 지금은 우리의 목적만 생각하면 된다. 외부인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아, 그래요?”
시스터는 카이저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옥상의 난간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건가.”
“그냥 구경 가는 것뿐이에요. 조금 보는 것 뿐.”
“…”
시스터의 말에 카이저는 처음으로 시선을 시스터의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눈빛은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는 불량학생을 반쯤 포기한 선생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어머,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나는 페이후(黑虎). 검은 호랑이라고 써서 페이후. 호랑이는 고양이과. 고양이는, 우유랑 호기심을 먹고 살지요.”
즉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뿐일 듯하다.
“호랑이는 고양이과일뿐 고양이가 아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하하하.”
여자는 아무 주저 없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중력을 거부하고 솟아오른 머리카락 아래에 보인 등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카이저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멀리. 구름에 숨은 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리더, 왼쪽입니다.”
리더에게 방향을 지시한다.
“응.”
코너를 도는 오토바이의 움직임에 리더의 허리를 감싼 팔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차가운 밤공기 안에서 느껴지는 리더의 등은.
따듯해.
따듯했다.
꼬옥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 온기가 도망가 버릴 것 같아서.
아주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그게 부끄러워서 머릿속에 떠오른 아무래도 좋은 이야깃거리를 꺼내 들었다.
“…리더의 오토바이에 타는 건 이걸로 두 번째네요.”
“그래? 내 에페트의 뒷좌석을 허락한 사람은 아직 아르메리아뿐이야.”
왠지 모르지만 리더는 웃었다. 얼굴은 볼 수 없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에? 여, 영광입니다.”
뭐가 영광이란 거야.
머릿속 한구석의 냉정한 부분이 스스로를 지적한다.
하지만 왠진 모르겠지만.
기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제어할 수가 없다.
그때 문득 ‘    ’이. 전신이 검고 작은 몸집에 험상궂은 표정에 박쥐 같은 날개에 꼴사나운 꼬리를 단 기분 나쁜 생김새를 하고 있는 ‘    ’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저, 선배는?”

나도 모르게 ‘   ’의 속삭임을 입에 옮겨버렸다.
기분 나빠. 자신의 입에서 나온 거지만 그 검은 의구심은 매우 불쾌했다.
“리? 아 리는 의외로 둔한 구석이 있어서 말야.”
“……”
당연하겠지만 리더는 내 마음속의 소악마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렸을 때 나랑 자전거를 타다가 크게 구른 적이 있어서 말야. 그 다음부터는 바퀴가 두 개 늘어서 있는 탈것이라면 아주 학을 때서 말이지.”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상상이 간다. 그립다는 듯이 가늘게 뜬 눈에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 꼬리의 상냥한 표정. 과거 난 이걸 마음속으로 ‘선배생각표정’이라 명명했다. …비슷한 걸로 ‘리더생각표정’이란 것도 존재한다.
“……”
“이상하지? 다친 건 내 쪽이었는데 말이지.”
검은 ‘    ’이 날 가만두지 않는다.
그만둬. 제발.
넌 뭐지? 왜 내 가슴부근에서 살고 있는 거야?

“저, 전 자전거 탈줄 알아요!” 

“응?”
졌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져버렸다.
‘    ’은 심장에 붙어서 산다.
‘    ’은 기다란 끈같이 생겼다. 그래서 때때로 심장을 꽉 조여 온다.
‘    ’은 끔찍한 가시가 잔뜩 달려있다. 때때로 따끔따끔하고 아픈 건 그것 때문.
하지만 ‘    ’은 몸에 굉장히 부드러운 부분이 있어서. 때때로 이유도 없이 매우 기쁘고 마음이 상냥해진다.
‘    ’이 뭔지는 어떤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    ’이 뭔지는 어떤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다.
단지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건.
‘    ’은 리더와 함께 있으면 얌전해지고.
리더가 선배와 함께 있으면 사나워진다.
단지 그것뿐. 
“하핫. 아르메리아는 때때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어.”
“으으.”
“하하하.”
“…그렇게 웃으시면 저 꽤 진심으로 우울해집니다.”
정말이다. 온 힘을 다해 우울해진다.
만약 세상에서 우울한 사람을 뽑는 시상식이 있다면 1위는 전쟁에 핍박받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2위는 연인을 잃은 외로운 반쪽들에게. 3위는 꿈과 희망이 성적표에 실려 있다고 새뇌당하는 불행한 수험생들에게. 그리고 3위 자리를 두고 경합하다 안타깝게 입상에 탈락한 나에겐 심사위원 특별상. ‘저 아이는 스스로가 저 위의 1,2,3위를 다 합친 것 보다 더 불행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의기를 높이 사 특별상을 수여합니다.’
수상소감은 ‘이럴 수가. 사실 내가 더 불행한데!’
하지만 대충 계산해서 약 4위. 세상에서 4번째로 불행한 사람.
대단해. 이건 진짜 어두운 녀석이다.    
“아냐 그런 게 아냐.”
리더의 목소리에 어두침침한 시상식장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이런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잖아.”
이런 거 란 무엇?
“…그렇게 이상한가요.”
“아니. 난 아르메리아의 그런 점이 귀여워서 좋다고 생각해.”
‘    ’이 갑자기 상냥해진다.
검은 박쥐날개가 하얀 깃털로. 험상궂은 표정에 환한 미소가.
…리더의 등은.
따듯해.
따듯해요.
리더. 사실 저 리더한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있어요.
저,
저는 말이죠.
리더를.

——— ‘    ’하고 있어요.

언제부터?
글쎄요.
언제부터였을까요.

스테이지에서 노래 부른 날?
솔직히 고백할게요.
발표회 같은 건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그날 부른 노래는 제가 프랑스를 떠나기 전에 유행하던 그냥 평범한 유행가였어요.
한 소녀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왕자님에게 뒤돌아봐주길 원한다는.
그런 평범한.
유행가.

아니면 단둘이 무인도에 갇힌 날?
여전히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유령은 있어요.
맞아요. 저도 사실 ‘유령은 없어’파였어요.
하지만 실제로 봐버린 이상 ‘봤지만 그래도 유령은 없어’라니 되려 그쪽이 더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날의 얘기만 나오면 어색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돌리는 건 그만둬주세요.
그날 제가 갑자기 딴사람이 된 거 같았던 건 다 그 아이 때문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성불할 때 말한 ‘미리는 조금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라는 말뜻은 아직도 수수깨끼.

그렇다면 혹시 제가 처음 팀에 들어왔을 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요.
새로운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겉돌고만 있던 나에게 상냥했던 두 사람.
하지만 건방지고 철없던 당시의 나.
솔직히 말할게요.
…저 처음엔 두 사람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그렇잖아요.
매일매일 아무런 긴장도 없이.
항상 나사 빠진 듯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 두 사람.
주변의 모든 상황적 조건에 개의치 않고 ‘우린 비교적 행복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듯한 그 얼굴.
그게 미웠어.
두 사람의 그 모습은 내가 포기한 그것.
다신 내게 돌아오지 않을 시간.
너무 빨리 지나쳐버린 내 인생의 시침. 따듯한 오후 2시.
나라를 떠날 때 두고 온, 가져가기엔 너무 큰 침대와 오래된 목제 책상과 같이 버리고 온 빛나는 그 무언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부러웠던 걸지도 몰라요.
사람이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는 게 빛나 보이면 하는 행동은 두 가지. 
하나. 무시한다.
둘. 더럽힌다.
전 후자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전 언제나 생각했어요.
나에겐 각오가 있어.
나에겐 하고 싶은, 아니 해야만 할 일이 있어.
그걸 위해서 난 날 이루고 있는 것의 대부분을 버렸는데!
당신들은 대체 뭐죠?! 싸울 의지는? 전사의 마음은?! 하고.
마음속으로 매도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랬던 거죠?
정말 각오가 부족했던 건 바로 저였던 거죠?
그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첫 임무.
선상파티중의 호화 여객선.
미리 예고되었던 폭탄테러.
그 폭탄과 융합한 기생 크리쳐.
바다 한 가운데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니 대피할 수 없는 수백 명의 승객들.
이걸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
그렇게 기다려온 활약의 찬스. 복수의 찬스.
그런데도.
그렇게 잘난 척해놓고 가장 먼저 포기한 건 저였어요.
‘할 수 없어.’ 하고.
그날 처음 봤어요. 리더의 화내는 얼굴은.
——— ‘해야만 하는 사람의, 할 수 있는 사람의 ‘할 수 없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처 입히는지 그 무게를 생각해!’ 라면서. 화냈어.
그때는 너무했어요. 저한테 손댄 사람은 지금까지 웬디아줌마 한 사람뿐이었는데.
네. 지금은 알 것 같아요.
각오가 부족했던 거죠? 당시의 나는 ‘할 만큼은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안녕. 어차피 난 이런 상황에서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미 다 죽고 없으니까.’ 하고 순식간에 포기해 버렸으니까.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다음에 제가 성공 했을 때.
선배는 아무말없이 절 꼬옥 끌어안아 줬어요.
리더는 이상한 논리로 반 억지로 오토바이에 태워주셨죠,
그때 리더가 말해줬어요,
——— ‘아버지의 입버릇 같은 거였어. 해야만 하는 사람이니 할 수 있는 사람이니 하는 건. 아버지의 설교는 매번 그거였지. 그 뒤론 이런 내용이었어. 하지만 의무+능력=당연이 아니다. 누구라도 어려운 건 어려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남보다 조금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억지로 의무를 부여해놓고 성공하면 당연, 실패하면 무능이라고 비방하는 건 잘못된 거다. 사람은 누구나 ’고마워‘를 듣고 싶어서 힘내는 거다. 네가 ’고마워‘하고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을 기억한다면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힘내준 누군가에게 꼭 ’고마워‘라고 말해줘라.
…고마워, 아르메리아. 힘내줘서. 포기하지 않아줘서.’   
울어버렸다.
눈물이 나버렸어요.
이상하죠? 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고맙다고 말을 해준 사람은 웬디아줌마 빼곤 없었던 기분이 들어요.
고맙다는 말은 이런 제가 도움이 됐다는 뜻이죠?
여기에 있는 나는. 누군가의 힘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서.
그날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것도 아닌가요?

그러면.
그러면.

아아, 역시 무리.
너무 많아서 하나 꼽아서 말할 수 없을 만큼.
샐 수 없는 추억들. 샐 수 없는 기억들.

“…리아.”
“……”

역시 정확히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리더.
저 당신을 ‘    ’하고 있습니다.
이건 평생 변하지 않을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르메리아?”
“예, 예?! 왜, 왜, 왜요 리더?”
깜짝.
또 리더의 목소리에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갈림길이야.”
“그, 그렇네요. 인생은 분기의 연속이죠?!”
…뭐라는 건지.
“아니 인생까지는 너무 멀고 지금은 그저 바로 앞길의 좌우만 알아도 충분한데 말야.”
“아, 예! 오, 오른쪽이네요!”
오른쪽으로 코너링.
잠시 침묵.
“아르메리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 아, 아뇨?! 왜요?!”
“아까부터 계속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해서.”
“아니 그저. 그. 저도 혹시 오늘 비가 오는 게 아닐까 싶어서!”
‘리더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같은 바보 같이 솔직한 대사는 죽어도 할 수 없으니까, 아까 들은 리더의 왠지 모르게 멋있었던 대사를 한번 따라 해봤다.
왠지 멋없었다.
“아르메리아는 비, 좋아해?”
난데없는 리더의 질문.
비는 좋아한다. 방안에 앉아있으면 들려오는 조용한 빗소리가 좋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비가 만드는 선의 모양도 좋아한다. 비가 내려 만들어진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만들어지는 둥근 원들도 예쁘다고 생각한다.
“예? 비? 저, 리더는요?”
“…글쎄. 좋아하는 편은 아니랄까.”
…그런데 지금 문득 비가 매우 싫어졌다.
“저, 저도 비는 싫어해요! 방에는 습기 차고, 읽던 책은 눅눅해지고, 말려놓은 빨래에는 비극인데다가, 길에는 질퍽한 물웅덩이에, 겨우 집에 도착하면 끈적끈적한 옷의 감촉이! 비 같은 건 정말 싫어! 란 기분이랄까! 비 같은 것 보단 차라리 그 눈 같은 게!”
“그래? 나도 비 보단 눈을 더 좋아해. 추운 건 싫지만 말야.”
“에?”

——— “난 추운 건 싫지만 눈은 좋아해.”
리더의 목소리에 겹쳐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마음속에서 ‘    ’가 다시 날뛰기 시작한다.

“…왜요?”
“…글쎄. 왤까?”
리더가 웃는다.
난 저걸.
‘선배생각표정’이라고 부른다.
“…그래요.”
“아르메리아도 눈을 좋아했구나. 처음 알았어.”
“…별로. 눈 같은 건 싫어요.”
“그, 그래?”

아파.
아파요 리더.
알고 있어요.
이건 공기 탓도 아니고, 수면 탓도 아니고, 식사 탓도, 멀미 탓도, 피로 탓도, 방사선도 자외선도 수맥도 꿈자리도 병도 외계인 탓도 아니라.
가슴 깊은 곳 심장 옆에 숨어사는 ‘    ’ 때문에.
피도 공기도 마음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을 꽈 조여 맨 ‘    ’ 때문에.

‘    ’란 뭐지?
‘    ’란 뭐죠?
어린애는 아직 모르는 건가요?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사실 아무리 저라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건.
아침 출근길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찻집에서 틀어주는 조용한 유행가에서.
극장 앞에 붙어있는 영화의 포스터에서.
무심코 펼친 소설책에서.
뉴스 하기 전의 드라마에서.
언제나 말하고 있어.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하기까지 한 그것을.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찾아와서,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변하게 해버린다는.
바로 그것.

하지만 리더가 보고 있는 방향이 어딘지 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 마음속의 ‘    ’에 그 이름을 써넣으면.
내 세상이 변해버려. 그것도 나쁜 쪽으로.
 
제게 리더와 선배는.
잊어버린 줄 알았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아준 사람들.
마음의 시침을 다시 돌려준 내 가장 소중한 보석.
그 보석의 색이 흐려져 버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이름 짓고 싶지 않아.
무책임 하게 단정해버리고 싶지 않아.

셋이서 계속 함께 있고 싶으니까.
셋이서 영원히 같이 있고 싶으니까.

리더 때문에 선배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선배 때문에 리더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두 사람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오늘은 밤인데도 구름이 느껴질 정도로 흐리네요. 뭐라도 내릴 것만 같아.”
“그렇구나.”

“……차라리 눈도 비도 영원히 내리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    ’는 공란.
영원히 빈자리.
난 아직 어리니까 모르는 걸로.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는 걸로.

그런 걸로 좋아요.
그걸로 만족해요. 전.

“아, 미안. 지금 못 들었어. 무슨 말 했어?”
“아뇨. 그저.”
“그저?”
“선배는 지금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하고.”


○○○


……
“아, 저런데 거울이 붙어있어.”
………
“소향. 이건 뭐야?”
……………
“테레비라도 볼까.”
“자, 자, 자, 잠깐! 스톱!”
리는 TV의 전원 바로 앞에까지 내밀은 히이라기의 손을 겨우 캐치하는데 성공했다. 리의 얼굴이 마치 잘 익은 토마토 같이 빨갛다.
“…왜.”
어째서인지 히이라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신 없이 방을 휘젓고 있었다.
그건 곤란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곤란하다.
리는 붙잡은 히이라기의 손을 그대로 끌고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색의 초대형 원형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정좌포즈로 마주 앉았다.
어째서인지 히이라기도 같은 포즈로 고쳐 앉았다.
“흠, 흠.”
별 의미 없이 입 앞에 주먹을 대고 헛기침을 한 번.
“이시겠어요. 히이라기씨? 딱 한번만 말할 태니까 잘 들으세요.
자꾸 이런 시면 많이 곤란해요. ‘이건 뭐야?’ 하고 물어도 곤란합니다. ‘그건 풍선이야~’하고 농담으로 받아주는 게 꼭 어른스러운 거다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갑자기 TV를 틀어서 부끄러운 방송을 시작해도 곤란합니다. 그런 거보면 잠 못 자요!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까 이런 곳에서 묵게 되었지만 그 기회를 타서 어른을 놀리는 건 그만두고 서로 ‘오늘 밤은 하늘에 별이 참 예쁘구나~’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게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닐까요?! 응? 응?!”
리는 별 의미 없이 손바닥으로 침대를 팡팡 치면서 설교했다.
“그런 말해도 나 아직 어린앤데.”
히이라기의 말에 리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리는 아직 이 소녀의 나이를 모른다.(아니 사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얼핏 보기엔 이젠 학교에 갈 때 사복대신 교복을 입기 시작할 나이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겉보기엔 모르는 것. 혹시 아직도 학교 준비물로 아코디언과 캐스터네츠를 가지고 다닐 나이일지도 모른다.
“나기 몇 살?”
어째서인지 5살짜리 조카에게 묻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렸다.
“14살.”
“…역시 놀리고 있는 거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 이런 대라니 여기가 어딘데?”
“어디냐니…”
천장과 벽 한 면을 완전히 뒤덮은 초거대 거울.
방의 1/3은 차지하고 있는 원형 침대.
미묘한 조명. 은근히 속이 비치는 욕실.
그렇다. 여긴 어떤 특정한 목적의식에 매우 투철하게 지어진 기능성 숙박시설.
그리고 여긴 그곳의 맨 위층, 최고급 특실이다.
…참고로 비상시라는 미명하에 마음대로 대여 중.
“그야 그…”
“뭐하는 덴데?”
히이라기, 무서운 아이.
하지만 지지 않아!
리는 이를 악물었다.
자꾸 이렇게 나온다면 무지 부끄럽고 현실적이며 직설적인 대답으로 어른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겠어!
“그 뭐하다니 그…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뭐랄까. 거, 건강한…서, 성인이!”
“성인이?”
“……”

우주.

그 넓고 광활한 끝이 보이지 않는 별의 바다에서, 우리는 이 작은 별 지구에서 생명 탄생의 신비를 기적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에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
“……그, 암술과 수술이……우물쭈물.”
“꽃 말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아, 아기를…”
“아기를?”
“……마, 만드는…”
“응?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히이라기의 코웃음.
동시에 리의 링사이드에서 하얀 수건이 던져졌다.
땡땡땡.
“이제 됐어! 내가 졌으니까 더 이상 그만해! 나 창피해서 진짜 눈물 날 것 같아! 나기는 악마! 사람도 아냐!”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기를 만들다니 소향, 혹시 지금 날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아기는 펠리칸이 물어다 주는 거잖아.”

아마존 강에 서식하고 있는 분홍돌고래는 지금 현재 멸종의 위기라고 한다.
“……”
“…그 표정은 뭐야?”
“아니 어째서인지 갑자기 예전에 본 내쇼널 지오그래픽이 생각나서.”
이 동물들은 지금 수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완전히 다 없어진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연을 아끼고 사랑합시다~ 하는 내용의.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그 표정 열 받아.”
히이라기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리는 여전히 무언가에 감동받은 듯한 표정으로 히이라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기는 말야, 스스로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어.”
“?”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 샤워! 오늘 땀 많이 흘렸으니까 샤워를 하자! 아니 욕조도 있겠다 차라리 목욕을 할까? 물 받아둘게? 응? 그러니까 절대 텔레비전은 틀지 마? 알겠지? 약속이야? 저건 에덴동산의 선악과야? 이브가 유혹에 넘어가서 동산에서 쫓겨났듯이, 나기도 약속 어기면 오늘 밤은 다락에서 재울 태니까?”
리는 괴이한 뒷걸음으로 반투명 유리로 속이 반쯤 비춰 보이는 욕탕으로 사라졌다.
“…다락이 어딨어.”
하아. 이상한 여자. 히이라기는 한숨을 쉬었다.
욕탕에서 박자와 음정을 대폭 무시한 콧노래와 함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히이라기는 힐끗 욕탕을 확인했다.
욕탕 쪽에서 탁하게 비춰 보이는 리의 실루엣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정도라면 이쪽은 보이지 않아.
히이라기는 확신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작업’을 시작했다.
숨을 죽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기.”
“쳇.”
TV를 틀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뭐하고 있는 거야?”
히이라기는 TV의 전원부로 내민 손가락을 그대로 돌려 의미 없이 방 한구석에 장식되어있는 반나체의 여자 조각상을 향했다.
“이브가 시켰습니다.”
“……”
히이라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었다.
“물 받는다더니 빠르네.”
“혹시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빨리 나온 거예요.”
리는 TV 뒤 선반 밑으로 제주 좋게 손을 넣더니 한두 번 더듬은 후 코드를 찾아 뽑아버렸다.
“아, 나기. 물 다 받았으니까 먼저 목욕해.”
리는 순간 히이라기의 표정이 살짝 굳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목욕? 먼저?”
“응.”
리는 웃었다. 리는 목욕을 좋아한다. 좋은 욕탕에서 하는 목욕이라면 더더욱 좋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는 최고. 고급 입욕제에, 거품 안마기에. 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리고 리는 목욕을 좋아하는 만큼 한번 욕조에 들어가면 쉽게 금방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까 히이라기를 먼저 들여보낸 후 나중에 여유롭게 즐길 생각이었다.
“…혼자서?”
“응?”
“……잘 자.”
“……”
히이라기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자, 잠깐, 나기. 일어나! 자기 전엔 씻어야지!”
리는 소라 껍데기처럼 이불에 둘둘 말린 나기를 흔들었다.
“오늘의 럭키 칼라는 핑크.”
리에게 이불을 반쯤 빼앗긴 나기는 껍데기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목욕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써있었어.”
다시 쏙 들어간다. 동시에 좀 더 견고하게 껍질을 말았다.
“나기! 이 언니는 양말을 뒤집어서 벗어 놓는 거랑 자기 전에 안 씻는 것은 용서 못해요!”
“안돼. 안돼.”
히이라기는 다시 리에게 이불을 빼앗기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꾸물꾸물 구석을 향해 이동했다.
“어째서.”
리는 자기 허리에 양손을 대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뭔가 애벌레 같지 않아?하고 생각하면서.
“난 목욕하면 거품이…”
히이라기가 멈췄다.
“거품이?”
“…거대화.”
“일어나!”
리는 다시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몸을 청결히 하지 않는 건 자신에 대한 예의의 문제라고. 특히 여자아이는! 진단서와 의사소견서가 없다면 얌전히 포기해랏~”
“단호히 거부.”
이번 히이라기의 방어는 튼튼했다. 꿈적도 하질 않는다.
“거품을 잔뜩 일으킨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그 엄마 뱃속 같은 감촉이 좋지 않아? 아니면 그 발부터 담갔을 때 느껴지는 온도 차라던가,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등의 따끔따끔한 느낌이라던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느껴지는 몽롱한 현기증이라던가?”
“그런 매니악한 쾌감에 동조를 원해도 말이지.” 
크으. 요즘 어린애들은 정말 좋은 게 뭔지 모른다니까.
“그러면 그거! 목욕 후 마시는 녹즙이라던가.”
“……그런 강아지가 야채만 먹다 토해 놓은 거 같은걸 마시는 거야?”
발끈.
“에잇, 내버려둬 난 그게 좋단 말야! 대체 왜 목욕하길 싫어하는 거야?”
“그걸 모르겠어?”
리의 말에 히이라기가 껍질을 벗고 상반신만 벌떡 일으켜 리를 노려봤다.
“뭐가?”
히이라기의 박력에 리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머리를 감을 때 눈을 감으면 뒤가 신경 쓰이지 않아? 욕조 안에 가득 찬 물 속이 기분 나쁘지 않아? 살짝 열린 작은 창문은? 때때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환기통은? 뿌옇게 서리가 낀 거울은?”
리는 겨우 이해했다.
요컨대 무섭단 소리군.
즉 목욕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란 뜻?
“…나기 14살이잖아.”
“나이는 관계없어. 욕탕 속에 숨어 있는 그 수많은 이상 현상들을 눈치 못 채는 사람 쪽이 더 이상해.”
나기는 단호했다.
그때 리의 머리 옆에서 아이디어 전구가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그럼 이런 건 어때?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가 자신의 등을 닦을 수 없어.”
“긴 타올을 써.”
“그건 내 목욕인으로서의 프라이드가 용서치 않아. 집에서도 언제나 후배한테 부탁했는걸.”
“…목욕인?”
“거기서. 나기가 내게 협조해주면.”
거기서 때마침 울려주는 히이라기양 제공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육체의 외침소리.
이불 속에 감춰진 소녀의 육체는 그 가냘픈 겉모습만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박력 있게 울부짖었다.
꼬르륵하고.
글 안 써지기로 유명한 히이라기의 얼굴 칠판에 아주 잠깐 ‘이런, 낭패다!’하고 써졌다 다시 금방 지워졌다.
“나기에게 근사한 저녁을 선물할게. OK?\"
리가 씨익하고 웃었다.
“,…어쩔 수 없군.”
히이라기는 투덜대면서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리는 왠지 조금씩 이 아이를 다루는 법에 눈을 뜨기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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