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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 by Pa3NDA

이건 말야. …줄 거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에게. 약한 사람을 돕고 그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에게.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혼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아직 누군지 이름은 모르지만. 그 사람에게 줄 거야. ———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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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해.

[……치이익.]

그 아이랑 약속했으니까.

[……치이익.]

저 사람만큼은 만나선 안 돼.
절대.

절대 ‘할아버님’만큼은…

[…치이익.]

도망가야 해.
도망가지 않으면…
난…난……

[…치이익…치이익.]

난…

어떻게 되는데?
왜? 
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혼나니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뭘 잘못했는데?
뭘? 왜?

[…치이익……기…]

잘못한 거 같은 건 아무것도 없잖아?
왜 이렇게 고생하면서 도망가야 하는 거야?
편해지자.
이젠 아무것도 생각 말고…
쉬고 싶은 만큼…

[…나…치이이이이익.]

그만해!!!
이건 내가 아냐.
이건…?
이 목소리는…
‘위스퍼(whisper)’?
할아버님이 날 조종하려고 하고 있어?
아아 머리가 아파.
누가 이 지직거리는 소리 좀 어떻게 해줘!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지금 그 아이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왜 내 옆에 없는 거야?

[…나……치이익……기…치익…]

어디 있는 거야?
어두워.
여긴 아무도 없어.
옆에 있어줘. 날 혼자 두지 마.
혼자는 싫어. 혼자는 무서워.
혼자서 눕는 침대는 싫어. 곁에 아무도 없는 밤이 무서워. 혼자 걷는 길도 싫어.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 무서워. 도와줘. 제발!

[…나……기…치익. 치익…]

대체 어디간 거야?
보이지 않아.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찾아 헤매도.
없어.
없어.

싫어… 이런 건 싫어…!

“히이라기!”

“……!”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히이라기는 정신이 들었다. 초점을 잃어가던 소녀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있던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몸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히이라기의 정신은 아직도 몽롱했다. 잠에서 깬 직후처럼. 흐릿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희미한 전등. 빨간 방. 커다란 침대. 자신의 손에는 매다만 하얀 목도리.
그리고 눈앞에는 특과의 여자.
“……소향.”
“난 여기 있어.”
리는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린 히이라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이라기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진정해 나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땀이…”
땀에 젖어 이마에 늘어 붙은 히이라기의 머리카락을 리는 상냥하게 뒤로 넘겨주었다.
“소향.”
히이라기는 리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그대로 손을 잡은 체 입구를 향했다.
“도망가자.”
“에? 갑자기 왜 그래?”
“빨리.”
“잠깐 난 아직 옷도…!”
리는 갑작스러운 소녀의 행동에 당황해 하면서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와이셔츠를 집어 들었다. 지금 리의 하반신엔 제복의 스커트가 입혀져 있었지만 상반신에는 베이지색 스포츠 브라 뿐이었다. 분명 자기 전엔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아마 언제나처럼 잠결에 벗어버린 게 틀림없다.   
“그럴 시간 없어.”
“에?”
“…벌써 왔으니까.”

챙그랑!

마치 시간약속이라도 한 듯이 히이라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리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의 창문이 창틀째 박살이 나있었다. 창문이 깨지며 함께 튀어 들어온 창문의 파편에 리가 들고 있던 하얀 와이셔츠가 조각이 났다.
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걸레가 된 와이셔츠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자기 전에 의자 위에 개어둔 자신의 상의 속에서 권총을 꺼내 사격자세를 취했다.
7층의 창문을 깨고 안으로 침입한 것은.
2미터가 넘는 하얀 괴물.
“엔트?!”
“소향, 빨리!”
히이라기는 사격자세로 굳어버린 리의 스커트를 당기며 문밖으로 재촉했다. 리는 옷을 챙겨 입을 시간도 없이 브라와 스커트뿐이라는, 한겨울에 돌아다니기엔 매우 곤란하고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언제나 곤란한 복장 그대로 히이라기를 따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에는 어슴푸레한 붉은 광원이 듬성듬성 빛을 밝히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분명히 껐을 터인 복도의 전등에 불이 들어와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켰는지는 같은 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리는 머릿속으로 호텔의 구조를 되새기며 계단 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쪽은 안 돼.”
하지만 히이라기는 리의 팔을 당기며 저지했다.
“이쪽으로.”
히이라기는 계단의 반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
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리의 기억으론 저쪽은 아무것도 없는 방향이었다.
“계단 쪽은 엔트가 가깝게 느껴져.”
“…하지만.”
“괜찮아. 이쪽에 ‘비상용’이 있어.”
히이라기는 리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리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목 끝에서 다시 되삼켰다.
지금은 이런 몇 초의 망설임조차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리는 조용히 히이라기의 확신을 믿고 그녀의 유도에 따르기로 했다.
히이라기의 뒤를 따라 리는 다시 달렸다.
호텔은 쓸데없이 복잡한 구조에 의외로 넓기까지 해서 리는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달린지 몇 분.
아니, 몇 초?
“소향, 멈춰!”
갑작스러운 히이라기의 브레이크에 리는 멈춰 섰다.
직선통행의 복도의 코너에서 몇 마리의 크리쳐가 길을 막고 서있었던 것이다.
“하아, 하아. 그런데 저 녀석들 못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
리는 히이라기에게 물었다.
딱히 예상이 틀렸다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이 아이의 말이 틀렸다는 거 자체가 리에겐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어쩌면 마을에 있는 걸 전부 데려온 걸지도 몰라.”
히이라기의 머릿속에 느껴지는 이 호텔 안에 있는 엔트들의 숫자는 그녀가 알고 있던 마을 안 동일종의 전체 숫자와 상당히 가까웠다.
“이쪽으로!”
이번엔 리가 앞장서던 히이라기의 손을 끌고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니 뛰려고 했다.
하지만.
“…막혔어.”
반대쪽에도 이미 크리쳐가 길을 막고 서있었다.
 “위스퍼 때문에 적의 반응에 잡음이…”
히이라기는 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혼잣말을 하며 쯧하고 혀를 찼다.
“……”
앞뒤로 막혔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리는 눈앞의 적의 공격을 견제하기 위해 총을 조준했다.
크리쳐들은 어째서인지 전혀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벽처럼.
길을 막고 서있는 게 목적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리는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얌전히 자극하지만 않으면 의외로 무사?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
근무시간 끝날 때까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때까지 계속 얌전히 있어 줄 거라고 믿는 거야?
단 한 마리의 크리쳐라도 맘만 먹으면 지금 여기 있는 무력한 여자 두 명 정도는 순식간에 믹서에 갈린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초단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리는 총의 조준을 크리쳐의 머리로 고쳐 잡았다.
눈을 노린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크리쳐 3마리의 시야를 빼앗으면서 동시에 뇌에는 충격이 가지 않을 각도로. 대부분의 사람에겐 무리일지 몰라도 자신에겐 가능하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무리일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언제나 해왔던 일이다.
적이 어떤 형태든 상관없이. 
어떤 존재인지도 관계없이.
과거의 의미도. 현재의 모습도.
모두 잊고. 간단하게. 그저 방아쇠만 당기면.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머리를 뚫고. 가슴을 찢고. 다리를 잘라서.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폭력을. 파괴를. 당연한 미움. 정당한 증오. 권리가 있다. 이유가 있다. 할 수 있어. 해야 해. 쏴! 쏴! 쏴! 쏴!

팔이 떨려왔다.
적은 그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과녁처럼.

조준이 흔들린다.
여전히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쏠 수 없는 거지?
저건 원래 인간이니까. 아니, 지금도 인간이니까, 그래서?
인격체라서. 인권이 있으니까. 사람은 어떤 형태라도 살 권리가 있으니까.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살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양심의 가책이란 게 녹은 고무처럼 팔목에 진득하게 잔뜩 매달려있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아. 그전에 자신은 대체 언제부터.

이 감정을 잊은 채 총을 쏠 수 있게 된 걸까.

…언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생물’을 쏴서 죽일 수 있게 돼버렸던 걸까.
당연? 정당?
그런 게…
폭력에 과연 그런 핑계가 성립 가능할까?!
모르겠어.
가르쳐줘.
제발 누가 좀 가르쳐줘!!!

탕! 탕!

리는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쥐어 틀듯이.
괴성과 함께 총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탄환을 뱉어냈다.
적의 머리가 아닌.
복도에 놓여있는 소화기를 향해서.
가스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소화기에서 하얀 분말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는 그 사이의 허점을 틈타 히이라기의 손을 잡고 복도를 막고 있는 3마리의 크리쳐들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역시 쏠 수 없어. 이젠 쏠 수 없어.
리는 생각했다.
혹시 지금 자신이 무언가를 향해 총을 쏠 수 없게 된 건,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 걸지도 몰라. 하고.
그 답을 찾을 때까지.
지금은 담아두는 수밖에 없어.
갑자기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된 크리쳐들은 당황해서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리와 히이라기가 그들의 옆구리를 빠져나간 뒤였다.
“나기! 이쪽으로!”
리는 복도 끝에서 ‘비상용’ 엘리베이터을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버튼 위의 액정화면에 가동 중이란 표시가 뜨면서 일반 엘리베이터에 비해 좀 더 묵직한 기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냥 보통의 엘리베이터가 아니다.
이건 테러네 전쟁이네 크리쳐네하는 점점 흉흉해져 가는 세상에 맞춰 만들어진, 이름 그대로 \'비상용\'의 엘리베이터. 일반적인 대중시설이나 공공기관에는 무조건적으로 설치해야 해야 한다고 일년 전쯤에 법률로 제정 되었다.
하지만 시설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직 잘 지켜지지는 않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이 호텔이 지어 진지 얼마 안된 건물이란 게 다행이었다. 
기준대로만 만들어져 있다면 총알도 튕겨내는 특수 방탄합금장갑으로 만들어져 있을 이 엘리베이터는 리와 히이라기를 수 분 이내에 대피용 지하도시로 보내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는 되겠지만 자신의 아이디카드를 사용한다면 지하도시의 군사용 심부 섹션도 이용이 가능하다.
거기라면 도망치거나 숨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다.
만약 이대로만 간다면 이 상황을 탈출하는 건 의외로… 

땡.
엘리베이터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굳은 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디 가는 거죠?”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공기가 얼어붙었으니까.
아니 이건 그렇게 \'귀여운\' 종류의 물건이 아니었다.
공기가. 
아니 세상이.
마치 떠는 것조차 허락 받지 못해서 마비가 되어 버린듯한.
그런 경직.
등 뒤에 서있는 무언가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
이 경직의 주인을 향해 히이라기는 입을 열었다.
“…페이후.”
히이라기는 딱딱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헬로. 히이라기. 오랜만이네요.”
분위기와 정반대인 긴장감 없는 목소리.
리도 히이라기를 따라 천천히.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몇 걸음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는 ‘그것’은 온몸에 검은 옷을 두르고 있었다.
눈을 덮은 검은 머리카락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은 수녀가 쓰는 듯한 두건.
하지만 저건 절대 수녀가 아니다. 저런 게 수녀면 악어는 새다.
저건 수녀가 아니다. 그전에 사람도 아니다.
정체를 떠나 종(種)부터가 의문인 그것은 그저 눈앞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리는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수녀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이모를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죠.”
“…지옥에나 떨어져.”
수녀와 히이라기는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했다.
그러나 히이라기의 반응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어머, 어머. 여전히 귀여운 소리를 하는군요♥”
수녀가 가볍게 웃었다.
리의 마음속 ‘세상에서 제일 기분 나쁘게 웃는 사람 랭킹’의 순위가 지금 방금 바뀌었다.
저거랑 비교하면, 그 본부 과장 특유의 ‘크크큭큭’하고 웃는 소리는 차라리 애교 있는 편이었다.
“…이모?”
리는 히이라기를 감싸듯 자신의 등 뒤로 보내면서 물었다.
“모르는 사람.”
“너무하네요~”
수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아까부터 계속 입가에 손을 대고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폭력에 가까운 위압감.
아니면 위압감이라는 이름의 폭력일까?
어느 쪽이던 리는 더 이상 그걸 견디지 못하고 눈 앞에 있는 수녀를 향해 총을 겨눴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위협하듯이.
“당신은 누구죠?”
리의 질문에 수녀가 처음으로 리를 바라봤다. 아니 눈이 보이진 않으니까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지만.
“남에게 이름을 묻기 전에는 먼저 자신부터. 아닌가요?”
수녀의 빨간 입술이 씨익하고 기울어진 초승달 모양을 만들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재밌어 하는 거뿐인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여자는 정말 기분 나쁘다. 라는 것.
“난…”
“아, 역시 됐어요.”
수녀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려는 리를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저지했다.
“이미 알고 있는 걸 또 듣는 건 꽤 지루한 일이거든요.”
“무슨…”
수녀는 갑자기 양손을 과장되게 넓게 펴보았다.
“내 이름은 시스터 페이후(黑虎)! 저주받은 피조물들을 이끌고 피의 강을 건너 시체의 산을 넘어, 찾는 곳은 단 하나.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신이 버리고 간 이상향. 난 이 머리 나쁜 유량극단의 단장대리. 앞으로 잘 부탁해요.”
수녀는 팔을 펴 보인 자세 그대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느 센가 그런 수녀의 등뒤로 크리쳐들이 모여있었다.
“…크리쳐의 우두머리?!”
“놀랄 것도 없지 않나요? 들었잖아요? \'그 여자\'한테.”
“…\'그 여자\'.”

——————— 숙제를 내줄게요. 리.

“……”
‘그 여자’라는 키워드에 리는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꼈다.
하지만 등뒤로 느껴지는 히이라기의 불안한 시선에 애써 평정을 위장했다.
“흐음~”
수녀는 팔짱을 낀 체 마치 물건이라도 감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리의 얼굴을 훑어봤다.
“…뭐죠?”
“당신, 그거죠? 이름은 까먹었지만 특과의 쿠…뭐더라 하는 팀의 핑크색. 얼굴은 처음보지만 냄새로 알 수 있어요.”
“……”
리는 냄새라는 단어에서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맞죠? 근데 좀 이상하네요?”
수녀가 리와 히이라기를 향해 한걸음 다가왔다.
“가까이오지 마.”
리는 겨누고 있는 권총으로 수녀를 위협했다.
“혹시 어디 아픈 곳이라도?”
하지만 수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발포하겠어요.”
“전에 봤을 때는 분명 좀더 다른 느낌이 들었던 거 같았는데 말이죠?”
“……”
“사실 저 부끄럽지만 싸움 구경이 취미라서. 우리 애들이랑 당신들이랑 싸우는 걸 종종 구경하곤 해요. 그래서 악명 높은 당신도 잘 알고 있어요. 말하자면 숨은 팬?
그래요, 팬. 매직만 있었어도 티셔츠에 사인 받고 싶을 정도로.
전 말이죠, 당신 싸움방식이 정말 좋아요. 특히 그 가차없이 죽도록 잔혹한 부분이라던 지가 말이에요. 오싹오싹한단 말이죠.”
“…무슨.”
“눈을 으깨고! 뼈를 분지르고! 살을 자르고! 피를 뽑아서! 악한 자에겐 죽음을! 약한 자에겐 폭력을! 개미집에 물을 붓고 빠져 나오는 개미를 하나하나 눌러 으깨듯이! 심심해서 잡은 잠자리의 날개를 다 뽑고 사마귀에게 던져주듯이! 실컷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힌 다음에! 질린 장난감은 결계라고 써 붙인 쓰레기통에 쳐 버리는!!”
수녀는 기도하듯이 손을 모아 잡고 황홀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틀려! 난 한번도 그런…!”
물론 지금까지 수도 없이 싸웠고. 일일이 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적들을 죽였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한번도. 단 한번도.
“아니라고 하지 말아요. 난 칭찬하고 있는 거니까! 난 그런 싸움이 정말 좋아요! 그건 강한 사람만의 특권이니까요. 약한 녀석들 따윈 다 쓰레기잖아요? 강해지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으니까 약한 거고. 약한 채로 산다는 건 언제 어떻게 죽어도 좋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스트레스 해소용이던 분풀이 용이던 마음대로 괴롭혀도 불만 없는 거 아닌가요?”
“나, 난 한번도 그런 생각으로…”
총구가 흔들리고 있었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지금까지 싸워온 건, 모든 건 다…
“…소향?”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싸움이 뭐가 나쁘다는 거야! 동물이던 사람이던 먹이피라미드 밑에 깔린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위층한테 씹혀 먹히는 게 운명이잖아요?!
토끼가 풀한테 양해를 구하고 뜯어 먹나요? 아니면 사자가 들소한테 사과하고 잡아 먹나요? 아니잖아요. 모르겠나요? 이건 양식이에요! 꽃이 물을 먹듯. 사람이 밥을 먹듯.
‘우리’ 같이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있는 고장난 육식동물들은 풀이나 뜯어 먹는 멍청이들 매일 씹어 삼키지 않으면, ‘폭력’이 없으면 하루도 살수가 없는 거예요!”
“틀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짐승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건 다!”
아무 잘못도 없는 선량한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괴물들이 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분명 누군가가 다친다. 그걸 막아야 하는 건 자신들의 사명이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악을 벌하는. 모든 건 단 하나의 대의. 그건. 
“저, 정의…를 위해…”
하지만 리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게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건 마치 싸구려 사탕같았다.
겉에는 달콤하게 코팅 되어 있지만 그 얇은 막 속에는 전혀 다른 게 비어져 나오는.
검고 추악한 무언가가 흐물흐물하고 비어져 나오는.
“하하하!! 바로 그거에요! 바로 그 위선이 너무 멋져!!”
“위선이 아냐!!”
리는 수치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마음 속의 목소리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외쳤다.
그게 진실이란 듯이.
눈 앞의 수녀와.
등뒤의 소녀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외쳤다.

탕!

총성.
“어디다 쏘는 거에요.”
리가 쏜 총알은 수녀가 서있는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위선 같은 게… 그런 게…”
수녀는 피식하고 코웃음 쳤다.
“정의라… 그거 자주 나오지 않나요? 여기저기서 잔뜩 떠들잖아요. 마지막엔 반드시 정의가 이긴다! 라던지. 용기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다! 라던지. 그런 거 있잖아요. 왠지 매우 화나지 않나요? 그렇잖아요? 자기 스스로조차 재대로 납득 못 시킬 어설픈 논리로 무책임하게 지껄이는 게 말이죠.”
“……”
“거기에다 정의라는 게 항상 마지막에 꺼내 드는 건 꽃이 아니라 칼. 결국 자기 이론만 중시하고 남의 생각은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고 적이라고 이름표 붙여 못박아서 완전 무시하고 부정해서 잔뜩 두들겨서 죽이던지 꺾어버리잖아요. 그리고 자기 뜻에 동조하는 ‘착한 놈’들끼리만 만족하고. 좋아하고. 결국 그런 단순히 자기 만족만을 위한 포장지는 위선이라고 밖엔 이름 붙일게 없지 않나요?”  
“……위선.”
“그래요, 위선. 그런 건 어찌되든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포장지에 연연하는 건 결국 약해서니까. 약한 쪽이 옳다는 증거가 필요하니까. 싸움 같은 건 결국 힘 쌘 늑대들만 득을 보니까 양들의 입장에선 무조건 나쁜 것. 질서를 흩트리는 늑대들은 잘못되어 있다.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양들은 옳다. 하면서.  
하지만 만약 그 치졸한 양들 중 한 마리가 우연히 늑대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늑대의 힘을 얻은 그 양은 그때도 이빨을 숨기고 양의 정의를 따를까요? 아니면 양들을 잡아먹으면서 그 위에 군림할까요? 힘이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는 건 잘못되어있다. 어째서 이 몸이 너희들이 만든 좁다란 형틀에서 같이 갇혀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약자의 위선 다음엔 강자의 위선. 어느 쪽을 고를지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인지 반격할 수가 없었다.
수녀는 그런 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은 위선자에요. 아 물론 위선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만약 그걸로 속에 숨긴 모든걸 뱉어낼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죠.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위선에 묶여있어요. 난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양 쪽에 있었던 건 양을 위해서가 아냐. 양보다 더 맛있는 게 있어서예요. 그걸 다 먹어 치우면 그 다음엔 양들을 잡아 먹기 시작했을 걸요? 그게 바로 올바른 육식동물. 예전에 봤던 당신은 분명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를 진짜 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빨을 분지르고 풀을 뜯어 먹으면서.”
“……양?”
리는 현기증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정신차려요.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을 둘러싼 포장지가 아니니까요.”  
순간 리의 시야에서 수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냥 맨몸의! 그 날카로운 이빨을 보고 싶다고요!!”
리의 몽롱해져 가는 정신이 순식간에 각성했다.
“나기, 피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던 수녀는 순식간의 도약으로 뒤로 빠졌다. 회피라기 보단 공격을 위한 거리를 만든 것이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위험해! 싸우면 이길 수 없어!
리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망가는 게 이롭다. 하지만 만약 엘리베이터를 탄다면 그 약간의 허점에 순식간에 몰살당할 것이다.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적의 움직임은 빨랐다. 고무공처럼 복도의 벽을 이리저리 튕기면서 잔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건 굉장한 움직임이었지만.
동시에 허점투성이.
“하하하! 안 덤빌 건가요?!”
알고 있다. 저건 그저 퍼포먼스다.
적은 지금 이쪽에서 공격해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다.
공격의 허점을 노린다 같은 의미가 아닌.
그저 그게 보고 싶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뭔가 조금씩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오면 이쪽에서 먼저 갑니다?”
수녀가 벽을 튕기는 움직임 그대로 이쪽을 향해 날아 왔다.
리는 그 동선을 따라 총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쏠 수 없다.
왜냐면 자신의 정의는 위선이니까.
자신의 폭력은 포장 밖에 없으니까.
포장이 벗겨진 속살을 완전히 썩어서. 지금은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쏠 수 없어.
당연하다.
왜 쏘는지 조차 알 수 없으면서,
그래도 쏠 수 있는 쪽이 되려 이상한 게 아닐까.
“바보네, 정말!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싸움이 재밌지 않아?! 가슴이 떨려오잖아!”
수녀가 날아 들어 온다.
떨리는 총구는 이미 탄환을 뱉어내는걸 포기하고 있었다.
리의 집게손가락은 이미 방아쇠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젠 알았다.
특과 대특수태러직접타격반 소속. 이서향 25세는 이미 전사가 아니었다.
여기 있는 건 그저 힘없는 여자가 한 명.
그 뿐이었다.
수녀가 다가온다.
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 세이지!


○○○


“…리?”
세이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듯한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곧 그의 입가에선 자조석인 쓴웃음이 자리잡았다.
방금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은 죄의식이다.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자기혐오의 조각이다.
꼴사납다.
너무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에 세이지는 아까 전부터 계속 자신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으음 …리더?”
그때 침대에 누워있던 소녀가 눈을 떴다.
“…아르메리아.”
미리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미리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세이지는 가볍게 어깨를 감싸 상반신을 일으켜준 뒤 그녀의 등에 베개를 대주었다.
“정신이 들어?”
“…꿈을 꿨어요.”
“꿈?”
“선배가 갑자기 사라져서. 제가 리더와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선배를 찾아 밤길을 누비는 꿈. 그런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서 제가…”
미리는 말꼬리를 흐리며 이불의 끄트머리를 양손으로 강하게 쥐어 잡았다.
“…꿈이 아냐.”
“예?”
지끈.
“아파.”
그 때, 미리의 머리에 순간적인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머리에 손을 갔다 대본다. 자신의 이마에서 피부가 아닌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이건…”
“붕대를 감았어.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라는군. 다친 사람에게 다행이라고 하는 건 뭐하지만, 그래도 흉터는 안 남을 거라니 다행이다.”
몽롱했던 미리의 머릿속의 안개가 걷혔다.
커튼에 가려진 창 밖은 어두웠다.
지금이 아직 12시 전이라면 오늘. 그 이후라면 어제.
자신은 분명 리더와 함께 선배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세이지는 침울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 그 위에 무표정을 덧칠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겨우 구출한 선배가 이번엔 또 대마왕에게 잡혀가서 그런 선배를 구하기 위해선 전설의 황금 스파게티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걸 찾아 목성으로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도……”
“…그건 꿈이다.”
세이지의 대답에 미리는 어째서인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는?”
그제서야 미리는 자신이 있는 장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낮에 왔던 임시본부다. 학교시설의 양호실을 잠깐 빌리고 있어.”
그러고 보니 방에는 소독약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는 강렬한 병원의 그것이 아닌 은은한 양호실의 그것이었다.
왠지 마음을 안심시켜주는 그런 은은한.

“아, 리더. 선배는 괜찮은가요?”

미리는 세이지에게 물었다. 아무런 사심 없이.
“……”
의심이라곤 1ml도 섞여있지 않은 순 원료 100%의 신뢰로 이루어진 소녀의 의문에 세이지의 덧칠은 순식간에 색을 잃었다.
“옆에 침대에 있는 건가요?”
미리는 반대쪽 침대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설마, 먼저 집으로 가버린 건 아니겠죠? 제가 이렇게 다쳤는데 최소한 매론 정도는 들고…”
“……”
세이지는 말이 없었다.
미리는 그의 시선이 조금씩 무거워 지는걸 느꼈다.
“…혹시 안 좋은 건가요? 저, 많이 다쳤다던지…”
“안심해.”
세이지는 미리를 보면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매우 힘없고 지친 미소였지만 미리는 그것만으로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구조대가 출동했다.”

“네? …구조…대?”
미리는 순간 세이지가 무슨 소릴 한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해범위 안에선 그의 말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
잠시간의 침묵 후 미리는 자신의 뇌가 내놓은 계산결과 중 최악의 답안을 세이지에게 되물었다.
“설마, 그냥 두고 온건가요?!!”
그리고 자신이 낸 목소리에 스스로도 놀랐다.
리더에게 이렇게 큰소릴 낸 건 아마 처음이 아니었을까?
“진정해 아르메리아. 너의 부상은 뇌진탕이나 뇌출혈의 위험이 있었어. 눈 앞에 있는 위급한…”
그는 지금 자신이 걱정돼서 자신을 먼저 구했다고 말하고 싶은듯하다.
왤까.
어째서인지 요만큼도 기쁘지 않았다.
“거짓말!”
미리의 표정은 급속도 굳어갔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알고 있으니까.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선배를 추월하는 것 따위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는 지금 자신을 핑계로 쓰려고 하고 있다.
억지로 행동의 이유를 찾아 몸을 숨기려고 하고 있다.
그런 건 아르메리아가의 자존심까지 갈필요도 없이 미리라는 개체 자체의 프라이드가 용서할 수 없었다.
“……”
미리는 세이지를 노려봤다. 아니, 자신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리는 스스로가 자각하는 범위 이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걸 이해하는 이성 부분이 마비될 정도로.
“……미안.”
세이지는 그런 미리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흠씬 두들겨 맞은 권투선수처럼 아픈 표정으로.
그리고 그의 마음을 퍼렇게 물들여준 강펀치가 자신의 시선이라는 사실에 미리는 죄의식을 느꼈다.
미리는 약간 수그러진 말투로 세이지에게 물었다.
“진짜 이유를 가르쳐 줘요.”
“……상부의 명령이다.”
미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사람의 귀에는 사실 작은 귓속 요정님이 사는데 그 요정은 단순한 공기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귀의 주인에게 번역해주게 일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머리를 다치면서 그 요정님도 크게 부상. 그래서 그의 부제기간 동안 배우는 건 늦지만 성실한 게 장점인 그의 제자가 지금 대신 번역을 하고 있는 거다. 사전을 잔뜩 꺼내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지만 아직 어린 제자는 1/3도 재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실력.
그래서 지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다 이상하게 뒤집혀서 들리는 거다.
그게 틀림없다.
차라리 이런 ‘사람 귀에선 요정이 살아요~’ 같은 메르헨풍의 망상이 휠씬 더 그럴싸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게… 그런 게…
“지금 뭐라고…”
“상부에서 귀환명령이 떨어져서 급히 되돌아온 거다.”
미리는 아까와 같은 분노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비된 게 아니다.
그저, 현실성이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렸다.
“…그럼 돌아왔으니까 된 거 아닌가요! 이럴 시간에 지금이라도 다시!”
“대기명령 중이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미리를 세이지는 조용히 저지했다.
미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명령! 명령! 아까부터 대체 뭐에요! 세이지란 남자에게 리란 사람은 명령 다음의 위치였나요?!”
“…아르메리아. 넌 지금 부상 중이다. 조금은 안정을 취하도록 해.”
“당신은 누군가요?!”
“…아르메리아. 전정해.”
“이럴 리가 없어. 정작 가장 필요로 할 때 이런 게 어딨어요!! 평소 때 행동은 다 거짓말 이었나요?! 다 연기였어요?!!”
“…목소리를 낮추도록 해, 아르메리아.”
“리더!!”

“네가 뭘 알아!!!”
 
“……!!”
“가장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지금 위기에 빠져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 옆엔 내가 없어. 그 이유조차 한심해. 난 내 모든걸 포기해서라도 지켜야 할게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그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니! 한심하다! 미치도록! 않아 있을 수도 없고, 서서 있을 수도 없어! 언제나, 언제나 이런 식이야! 너 말대로 난 중요할 땐 언제나 도움이 안 되는 남자야! 어렸을 때도, 지금도!  이 괴로움을. 넌 알 수 있겠어?! 가슴이 타는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이 괴로움을!”
세이지는 외쳤다. 지금까지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
솔직한 감정을.
“……몰라요.”
아르메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아르메리아. 미안. 잠깐 내가…”
세이지는 금방 후회하는 표정이 되었다.
“모르니까. 그러니까 알고 싶어. 좀더 알고 싶어요.”
혼자 있을 때나 책을 읽다가 지루해 졌을 때.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잠깐.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욕실에서 샤워기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종종 상상한다.
상상 속에 자신은 어째서인지 갑작스러운 위기에 빠져있고.
그때 누군가가.
——— 자신이 평소 때도 잘 알고 있는 그 누군가는 상상 속에선 현실보다 조금 더 상냥하고, 현실보다 조금 더 멋있는. 진짜와 한없이 닮았지만 절대 진짜는 아닌 그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서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다. 하는 내용의.
아니면 그 반대.
그 누군가가 전후 관계 완전 무시의 위기에 빠져있고.
우연히 자신이 그걸 해결해준다던 지 하는.
과정은 위기와 좌절이 가득하지만 결과적으론 그것마저도 달콤한.
중학생 대상의 순정만화처럼. 살짝 쓴 그 맛이 매력인 커피처럼.
그런 상상.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인생의 행복이 1이면 불행은 3이라고.
성격 탓인지. 아니면 누구나 다 그런 것인지.
상상 속에서 조차도 자신은 쉽게 그 3에 빠지곤 한다.
상상 속에서도 자신은 쉽게 행복해 지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난입자에. 갑작스러운 사고에. 갑작스러운 실수에. 해피앤딩를 위한 스파이스인 약간의 이벤트가 점점 심해져서 결국은 불행해진다.
현실의 불안이 만들어 내는 망상의 배드앤딩.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자신은 상대도 안될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다던지. 상상도 못했던 교통사고가 일어난다던지. 알고 보니 혈연? …은 있을 리가 없고. 가문의 격차. 해외로 유학. …유학? 알고 보니 불치병?! 어느 쪽이?
아니면 시시하지만.

———— 치명적인 말실수 라던가.     

미리는 그런 쉽게(혹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는 최저확률의 불행의 주인공에 당첨 될 때마다 생각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너무너무 슬퍼져서. 주변은 보지 않고 마악 울어버리지 않을까.
완전히 끝났어! 이제 난 영원히 불행해질 거야! 하면서.
하지만 망상과 현실은,
닮았지만 전혀 달랐던 거다.
리더의 이런 감정적인 큰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슬프다. 괴롭다.
하지만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되려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삐뚤어진. 잔뜩 뒤틀린. 변질적인 기쁨마저 느끼고 있었다.
————— 지금 리더의 분노는. 그 감정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만의 것이니까. 하고.
“……아르메리아.”
“하지만 리더도 선배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질 않으니까. 전…”
“…미안.”
세이지는 시선을 피했다.
“왜 가주지 않는 거에요.”
미리 역시 쥐여 잡은 이불의 끄트머리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뭐가 중요한 건지 이미 미리에겐 잘 알 수 없었다.
“…미안.”
“…믿으니까? 선배는 강하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요즘 선배는…”
——— 약하다.
미리는 다음 단어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주저했다.
“……알고 있어. 그녀는 약해. 처음부터 그녀는 약했어.”
세이지는 창 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


하지만 전사가 아니라고 해서.

——————— 세이지!
용기를 빌려줘!

싸울 수 없다는 법은 없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리는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녀의 수도를 그것을 뛰어넘는 속도로 쥐어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허리의 회전을 이용해 바로 뒤의 벽을 향해 거꾸로 집어 던졌다.
유도의 업어치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하지만 수녀는 리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 벽에 충돌하는 그 짧은 시간에 중심을 잡고 바닥에 사뿐히 안착했다. 무서울 정도의 유연함과 반사신경이었다.
“아직! 아직이야! 좀더 보여줘요!”
수녀는 웃었다.
“난…”
“응?”
“난 그다지 똑똑한 편이 아니라서!! 말로 당신을. 아니면 나 자신을 설득하진 못하겠어!! 하지만, 하지만 말야! 당신 말을 듣고 있으면!”
리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강하게 쥐어 잡았다.
“여기가 아파! 여기가 ‘그건 틀렸어’라고 외치고 있어! 머리만으론 알 수 없어요! 누군가에게 도움 받았을 때의 그 상냥함과 기쁨은! 그걸 알아 버린 이상 좀 더 많은 사람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게 정의든! 사랑이든! 이름 같은 건 어찌되던 좋아! 그게 만약, 그게 만약 위선이라면!!”
리는 수녀의 눈을 직시했다.
“…난 그걸로 좋아.”
“……”
수녀는 아무 말 없이 리의 눈을 바라봤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지금까지의 의무적인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마치 다른 감정 위에 덧쓴 듯한, 옅은 화장 같은 웃음이었다.
“……소향.”
“괜찮아, 나기?”
리가 등 뒤의 소녀의 무사를 확인했다.
“응, 난…”
그 때.

[…치이익…]

다시 히이라기의 귀에 잡음이 들려왔다.
마치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노이즈가.
“윽!”
히이라기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왜 그래?!”
“…으으…”
꾸욱. 리의 스커트 자락을 잡은 소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사람이 온다.
지금 상황은 한없이 불리하다. 페이후만으로도 상황은 이미 최악에 가깝다.
그런데 거기에 할아버님까지 나타나면…
도망가야 한다. 그게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아니 유일한 방법.
하지만 완전 포위된 이 상황에서 그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만약 방법이 있다면 누군가가…
눈 앞의 여성의 등이 눈에 들어온다.

———— 누군가가 미끼가 되면 된다.

히이라기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마치 머리에 징그러운 벌레라도 붙은 것처럼.
흔들어서 떨쳐낼 기세로 강하게 흔들었다.
“나기.”
리는 그런 소녀에게 말했다.
“먼저 가.”
“…에?”
히이라기는 놀랐다.
“내가 시간을 끌게. 가.”
“…잠깐, 난…”
“괜찮아! 금방 따라갈 테니까.”

“풉.”

그 때 둘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수녀의 입에서 공기가 새어져 나왔다.
“아하하하하하!!!!!”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손가락질 하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웃겨서. 가 아닌 조롱을 위한 듯한 그 연기 같은 웃음에 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는 거야.”
“아하하! 당신! 당신 말야. 정말 이상해요. 혹시 바보?”
수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와버렸네’ 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듯 눈가를 훔쳤다.
“뭐가 말이죠?”
“그치만 그렇잖아요. 그런 건 이유가 안되지 않나요? 상냥? 기쁨?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봉사활동이 하고 싶으면 어디 노인정 같은 데라도 가서 푸딩이라도 떠 먹여주면 되잖아요? 왜 이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허덕이고 있는 거죠! 생판 전혀 모르는 꼬마 하나를 위해서! 당신 히이라기에 대해서 뭘 알죠? 쫓기는 이유는? 목적은? 정체는?”
“……”
“모르잖아요! 왜 모르는 거죠? 난 그 이유를 알죠. 사실은 별 관심이 없는 거잖아요? 당신은 그저 히이라기라는 위선의 대상으로 필요한 것뿐이니까요! 사실은 그저 싸움이 필요하니까! 싸울 동기가 필요하니까! 피가! 절규가! 폭력이 필요하니까!”
“……”
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녀는 잠깐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말에요. 그 아이가 당신이 생각하는 ‘착한 쪽’이라는 근거도 없잖아요. 그쪽은 약해 보이는 여자아이고, 이쪽은 흉악한 괴물들이라서? 사실은 어떨지 모르는 거잖아요? 안 그런가요? 혹시 모르잖아요? 지금 당신을 버리고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을지?”
흠칫.
히이라기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마치 마음이 전부 다 읽힌 듯한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추악함에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럴 리는 없어.”
하지만 리는 그 가능성을 전혀 주저 없이 부정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이 아이는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어. 그걸 지키기 위해 찾고 있다고. 나와 같이 차로 도망칠 때도 내려달라고 그랬어. 내가 위험해 질지도 모르니까. 약속을 잊지 않는.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주는 그런 상냥함을 아는 아이가 절대 나쁜 사람일 리가 없어요.”

[...치이이이익...]

“……소…향.”
“내 이유란 건 당신이 말하는 대로 위선일지도 몰라요.”
리는 등뒤의 소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지만 난 나기를. 이 아이를 도운 행동만큼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어요.”

“눈물 나는 자기변명이로군. 결국 자네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아. 생각을 멈춘 자에게 남는 건 퇴화. 그리고 죽음뿐이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익!!!!]

“으윽!”
히이라기의 머릿속의 노이즈가 한계를 돌파한 그때. 잡음의 주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시스터의 등 뒤에서. 크리쳐가 가득 매 꾸고 있는 복도의 끝에서 나타난 것은 근육질의 덩치 큰 노인이었다. 커다란 갑옷과 투구를 몸에 걸친 이 노인은 복장만 놓고 본다면 시대착오적인 코미디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 남자를 앞에 두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한 마을에 내린 저주의 주인이.
크리쳐라는 악마들의 총수가.

“...카이저.”
히이라기는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리 역시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걸 느꼈다.
저건 위험하다. 짐승으로서 본능이란 부분이 거의 퇴화되어버린 인간. 하지만 그 마모되어 거의 사라져버린 희미한 동물부분에서 큰소리로 위험을 외치고 있었다.
그저 한결같이. \'저것\'에겐 절대 다가가면 안 된다고.
수녀는 웃는걸 멈추고 노인에게 말했다.
“손 대지 말아줘요. 내 거니까.”
“마음대로 해라.”

땡.
스르륵.

수녀가 노인에게 시선을 돌린 아주 잠깐.
리는 등뒤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수녀가 달려들었다.
이번엔 벽을 튀기는 퍼포먼스 같은 건 일절 없이 자로 잰듯한 일직선. 마치 탄환이었다. 리는 손을 잡고 있던 히이라기를 그대로 등뒤의 엘리베이터 쪽으로 밀쳤다.
“가! 나기!”
“소향!”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다. 리는 등뒤로 히이라기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도 전에 수녀는 이미 바로 눈앞까지 와있었다.
리는 어차피 쏴 봐야 맞출 수도 없는 총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근접격투전의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특별히 특기로 하는 격투기가 있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특과에서 배운 기본적인 군용격투술 정도가 전부였다. 그건 일반인과 비교하자면 꽤 강한 축에 들지도 모르지만 크리쳐와의 상대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수녀의 수도가 말 그대로 공기를 갈랐다. 수도는 마치 빠르게 휘두른 예리한 검에서 나오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리를 향해 날라 들었다.
푸슉.
리의 걸친 게 없어 그대로 노출된 하얀 어깨에 붉은 실이 그어졌다.
하지만 그건 히트의 의미가 아니다.
피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아니면 일부러 얕게 공격한 걸지도 모른다.
“큿.”
“강의는 끝이에요! 이제부턴 실습시간!”
수녀의 쉴 틈 없는 연속 공격. 수도의 태풍.
그걸 가드 하는 리의 양팔은 맨 살로 콘크리트 바닥을 뒹군 것처럼 순식간에 배인 상처와 긁힌 상처로 붉게 뒤 덥혔다.
“뭐 하는 거죠! 아까 친 큰소리를 조금이라도 증명해 줘요!!”
“……”
마치 샌드백.
지금의 리는 한없이 불리했다.
쓸 수 있는 무기도. 상황을 역전시킬 변신도 불가능 하다.
하지만 지금 리는 모든걸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무기는 아직 남아있다.
싸움에서의 무기란 꼭 총과 칼만이 전부는 아니니까.
“이대론 지루하니까, 팔 한 짝 정도는 받아 가야겠는걸요!!”
수녀는 지금까지의 빈틈없는 연속공격을 멈추고 오른팔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리의 팔을 향해 내려 찍듯이 휘둘렀다.
———— 지금이다!!
리가 지금까지 숨겨뒀던 마지막 무기를 꺼내 들었다.
수년간 축적된 수많은 전투의 경험과 지식이란 무기.
그 무기가 몇 십분. 아니 몇 백분의 1초의 타이밍을 잡아낸다!
날아 들어오는 수녀의 수도를 왼팔로 고정시켜 오른팔은 수녀의 어깨 뒤로. 그대로 왼팔의 팔꿈치로 적의 팔꿈치를 젖히면서 바닥에 쓰러트린다!
“뭐, 뭐죠?!”
부러뜨릴 각오로 꺾었지만 적은 예상보다 튼튼했다. 하지만 일어날 시간을 주진 않는다.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수녀의 얇은 목에 왼팔을 밀어 넣는다. 동시에 오른팔은 스커트 뒤 춤에 꽃아 놓은 권총을 꺼내 적의 관자놀이에. 목을 조인 왼팔은 그대로 오른팔을 잡으면서 고정시킨다.
“크윽.”
“움직이지마!”
마지막 경고는 목을 조른 체 일으켜 세운 수녀에게 한 것과 동시에 복도를 가득 메운 크리쳐와 그 크리쳐의 우두머리에게 외친 것이었다.
“맨몸으로 시스터를 제압하다니. 역시 AA랭크를 받을 정도의 실력은 있군. \'킬러핑크\'”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를 노인은 무덤덤하게 감탄했다.
“\'킬러핑크\'?”
리는 이제 적이 자신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그다지 놀랍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지칭한 듯한 미묘한 대명사는 조금 신경 쓰였다.
“신경 쓸건 없다. 우리 나름대로 자네를 강적으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 같은 거니까.”
“그런 건 어찌되던 좋아요. 이젠 쫓아오지 않을 거죠?”
“그건 어째서지?”
“당신의 동료가 다칠 태니까.”
철컥. 수녀의 관자놀이에 총구가 닿았다.
“자, 잠깐! 농담은 그만둬요!” 
수녀는 기겁을 했다.
“농담 같은 거 아니에요.”
“어쩔 셈이지?”
“쏠 거에요. 주저 없이.”
“호오? 그렇다면 할 수가 없군.”
“그럼…”
“다소의 희생은 약자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뭐…?”
“자, 잠깐 카이저! 부하를 버릴 셈인가요?!”
지금까지의 위압감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수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흠.”
리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건 보통 총이 아니에요! 아무리 당신들이 튼튼해도 이렇게 근거리에서 직격되면 죽는다구요!”
“왜 그런가? 겁나는 건가.”
“동료를 버린다는 걸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자신의 논리가 남에게도 꼭 통용한다고 볼 순 없지. 효율성의 문제다.”
“그, 그런!”
“살려줘요! 제발!”
애원하는 수녀는 적이지만 애처로웠다.
“…언제까지 그런 바보 같은 장난을 하고 있을 건가.”
하지만 노인은 냉담했다.
“난 장난 같은 게!”
리는 흥분했다. 적의 냉철함에 화가 났다.
“이젠 끝내라. 시스터.”
“쳇.”
리에게 잡혀있던 수녀가 씩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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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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