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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怪力亂神) by Dr.L

굳이 따지자면, 한여름날 할머니가 해주던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한국적인 이야기. 라고 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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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마당 - 돗까비 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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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Dr.L[ceaser]
조회 5262    추천 0   덧글 28    / 2007.05.24 21:09:30
괴력난신怪力亂神 - 돗까비뎐 -



여는 마당
돗까비 놀음


눈뜨면 등교시간.
어쩌다 보면 점심시간.
반쯤 알 수 없는 외계어에 정신이 팔려 선잠에 들다보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다.
정신이 팔려 가방을 맨 채로 세뇌를 당한 듯 학원으로 향한다. 수업이 끝나면 이미 시계는 저녁 11시. 소년은 터덜터덜 아파트 단지의 뒷골목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다들 겪고 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히 시계는 7시에 향해 있을 테고, 엄마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학교가라는 소리에 떠밀려 학교를 향해 가고 있을 거다.

기대하는 것도 없고, 무언가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타인의 파도에 떠밀려 다니고 있는 기분. 이렇게 대학생이 되면 그 다음에는 또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남들처럼 대학에 붙어 캠퍼스 라이프를 시작하거나, 떨어지면 재수를 하거나 둘 중의 하나란 점이다. 친구들과 함께 신나는 고등학교생활?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없다. 옆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죄다 경쟁자다. 평소에는 친한 척 굴어도, 결국엔 시험이 시작되면 누구 점수가 더 올랐느니. 반 석차가 어떻게 되니 운운하는 녀석들뿐이니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어 보지만 쉽사리 우울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아파트엔 벌써 하나 둘 불이 꺼져간다. 시간이 시간이니 다들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거겠지.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에 진 책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툭.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걷던 소년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발치에 굴러다니고 있는 전단지며, 휴지조각. 담배꽁초. 그리고 특이한 물건이 있다. 촘촘한 망사의 모자와도 비슷한 그것은 언뜻 보기엔 용도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한 번도 그러한 것을 보질 못했던 소년이 그것이 감투라는 것을 알리가 없다. 다만 신기한 물건이 발에 걸렸기에 관심을 가진 것뿐이었다.

\"뭐야 이거.\"

아주 오래된 물건인지 꽤 낡아 보인다. 가던 길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쿡쿡 찔러 보며 이게 어디서 떨어진 건지 궁금해 하던 찰나, 소년은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기척을 느끼고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 역사책에서 걸어 나온 듯 옥색 두루마기에 갓을 쓴,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어. 송첨지가 당했구나. 쯧쯧. 살아생전 자식 복이 지지리도 없던 양반이 안 되었구나.\"

기가 차게 혀를 차며 이리 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그 남자가 소년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이놈아. 내가 보이느냐?\"
\"예? 예.\"

느닷없이 면식도 없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기에 화들짝 놀라며 엉겁결에 대답한다. 내심 침착하며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허어. 본디 살아있는 자라면 우리가 보일 리가 없는데……. 거 참, 해괴하구나. 이름이 무어냐?\"

뜬금없이 한복을 입은 남자가 말을 걸어오기에 소년은 처음엔 어디선가 몰래카메라라도 찍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을 몰래카메라로 찍는 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조금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소년은 의문을 마음속에 품으며 대답했다.

\"윤영민이라고 합니다.\"
\"호오. 파평 윤 씨더냐?\"
\"네.\"

영민이라 불린 소년은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힐끗 그를 보았다. 생김으로 봐서는 꽤나 호탕한 얼굴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누군가 붓으로 그린 초상화에서나 나올법한 복장인 옥색 두루마기다. 요즘 같으면 명절에나 몇 번 입어볼까 말까한 옷인데, 상투에 망건이며. 갓까지 삐뚤지 않게 딱 갖추어 입은 것이 신기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계시던 영민의 증조할아버지가 저런 복장으로 올라오셔서, 대충이라도 복색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앞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 깊은 밤중에 젊은 도령이 어디를 다녀오는 게냐? 해가 떨어지면 부모님 걱정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마침 잘 되었다. 충남 송 첨지가 서양역귀에게 불귀의 고혼이 되었으니 네가 나와 잠시 가야겠다.\"
\"예?\"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영민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기도 전에 발치아래 놓인 감투를 들더니 대뜸 영민의 머리 위에 씌웠다.

\"호오. 감투가 어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네 녀석도 귀한 집안의 적손이로구나. 내 복을 베풀지는 못하나, 한양 판서도 지내본 윤 대감이 네 녀석을 보면 좋아할 터이니. 서둘러 갈 채비를 하거라.\"
\"갈 채비를 하라뇨?\"
\"어허. 가보면 다 알게 되느니라.\"

그러면서 두루마기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휘적휘적 팔자걸음을 하는데, 그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 순식간에 눈앞에서 삽시간에 사라질 지경이었다. 영민은 그저 놀라 눈을 뻐끔뻐끔 거리며 쳐다보고 있을 즈음, 다시 그 옥색 두루마기의 남자가 어느새 걸어와서는 등 뒤에 매단 곰방대로 머리를 툭 치며 느닷없이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놈! 평생에 한 번도 구경 못할 진귀한 잔치에 초대하겠다고 하거늘, 그렇게 걸음걸이가 느려서야 쓰겠느냐! 나를 잘 따라오너라!\"

그렇게 호통을 치는 판에 놀라 영민이 다시 앞에서 휘적휘적 걷는 남자를 좇아가는데 길가의 가로등이 차를 탄 것 마냥 뒤로 휙휙 지나가니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앞선 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그저 휘적휘적 시내로만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쯤 걸었을까? 선두가 멈추어 서자 영민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가빠진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펴보니, 자기가 살던 강동에서는 아주 한참 먼 경복궁 앞이었다.

\"내 살아생전 나라님을 뵐 기회가 없었으니, 그 계신 처소에라도 읍하여 그간의 원을 풀련다.\"

그렇게 말하며 인적이 끊긴 고궁의 앞에 서서는, 복식을 갖추고는 크게 큰절을 하며 읍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세 번을 큰 절을 올리더니 영문을 모른 채 멀뚱하게 서 있는 영민에게 곧 불호령이 떨어진다.

\"네 녀석도 썩 절을 하지 못할까.\"

엉겁결에 큰절을 덩달아 세 번 올리자, 흐트러진 갓을 고쳐 매며 영민을 향해 말했다.

\"나는 충남 홍성 고을의 김 광연이라 한다. 돗까비로 태어나 고을의 서생 노릇을 하다, 인연이 있어 마을의 처자와 혼인하고. 글 깨나 익혀 과거를 치르러 갔더니 왜놈들이 나라님을 끌어내려, 망국의 한을 품고 홍성에 눌러 앉아 어느덧 100여년. 오랜만에 서신이 닿아 돗까비들의 모임이 있어 한양으로 올라왔더니, 서양역귀들이 판을 치고 있구나.\"
\"저기……. 돗까비가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영민이가 되묻자 광연이라 불린 그 선비는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왜놈들이 가르치길 머리에 뿔이 있고 형상이 역겹게 생겨먹어 사람을 골리기 좋아하는 도깨비가 있질 않느냐? 그것은 그 못 배워먹은 왜놈들이 우리 것을 시기하여 그런 것이니라. 돗까비라 함은 마을의 뭇 신들이니라.\"

그렇게 자기소개를 마친 광연은 몸가짐을 정갈하게 하고 다시 걸을 채비를 했으므로, 영민은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휘적휘적 걷는 그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이번에는 그리 오래 걸은 것이 아니라, 얼마 걷지 않자 어느 골목에 딱 서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인사동에 다다라 허름한 민속주점 앞에 멈추어 선 것이다. 주변은 이미 밤이 깊어 인적도 뜸해진 주점의 문 앞에서, 갑자기 광연이 문짝이 떨어져나가라 크게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리 오너라!\"
\"뉘시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안에서 대답하자, 광연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충남 홍성에서 김가가 왔다고 큰 어르신께 여쭈어라.\"
\"홍성 어르신이 아닙니까? 어서 드시지요.\"

주점 안은 영민의 생각보다 넓었다. 넓은 안은 짚 멍석을 깔아 옛날 잔칫집 분위기에, 이미 주변에서는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안으로 두루마기 소맷자락 펄럭이며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는 광연을 따라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인사치레가 이어진다.

\"이게 누구신가? 홍성의 김 영감이 아니오?\"
\"반갑소이다. 대구 감골 정 대감은 안녕하시오?\"

이런 식이니 영민의 눈의 휘휘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색색가지 두루마기에 망건을 두르고 곰방대를 툭툭 털며 탁주사발을 들이키는 사람들이 모인 곳. 이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생김도 가지가지에 분홍저고리가 단아한 아가씨도 곳곳에 겸상을 하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광연을 보고 고개를 숙여 다소곳이 인사를 보내는 것을 보니. 영민은 부식불간 앞에 선 광연이 보통내기가 아닌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어느새 상석까지 다다른 광연 일행을 모신 자가 큰 소리로 가객을 부르니, 모든 시선이 가운데로 쏠린다.

\"모두들 보시오. 멀리 홍성에서 오신 김 영감이 오셨소. 그간 기별이 당도하지 못하여 서양역귀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으셨을까 염려스러웠는데, 이렇게 모임이 오시었으니 모두 박수로 맞아주시오.\"

일제히 장안에 박수가 터진다.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하게 광연의 옆에 서 있는 영민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안녕들 하시었소. 그간 얼마만의 모임인지 모르겠소만. 먼저 안타까운 소식부터 전해야 할 것 같소이다. 충남 서산의 송 첨지가 서양역귀에 변을 당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소.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오만, 해가 지날수록 서양역귀들이 준동하여 나라꼴이 말이 아니오. 나라님도 아니 계시는 마당에 이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잠시 목을 가다듬은 광연은 다시 장광하게 설을 풀어낸다.

\"해마다 서양 역귀는 많아지는데, 우리 돗까비들은 민중에게조차 잊힌 존재가 아니겠소? 하물며 세월까지 흐르고 흘러. 서양역귀가 준동하여 천하대장군조차 코를 싸쥐고 외면하는 꼴이 되었으니. 이젠 우리가 마지막이 될 런지도 모르오. 자~ 어려운 이야기들은 하지 맙시다. 우리 모였으니 신명나게 한판 놀다 갑시다!\"
\"좋지요!\"

그러고선 모인 사람들은 잔치판인데, 영민은 눈을 화등잔 만하게 뜨고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구석에 앉아있는 떠꺼머리의 총각부터 시작해서, 주변을 훑던 영민의 눈에 들어온 놀라운 광경은.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거나하게 피우고 있는 호랑이와, 어찌된 일인지 눈에 기미가 끼어 어두운 표정을 하고 겸상을 하고 있는 금발의 상투머리였다. 마침 광연이 그 자리에 합석을 했기에 주춤거리며 호랑이의 옆에 영민이 앉아야 했다.

\"허어, 텁텁하다. 거기 탁주 한 사발 좀 주시구려.\"
\"이거이 홍성 김 영감 아님메? 일단 한잔 받으시라요!\"

놀랍게도 호랑이는 완벽한 함경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호랑이가 말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서 놀라야 하건만, 영민은 처음 듣는 함경도 사투리에 놀라며, 그 생뚱맞은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연초를 태우는 호랑이, 아까부터 파전만 끼적거리고 있는 금발의 기미낀 외국청년. 아무런 말없이 탁주를 들이키는 광연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에만 앉아있는 영민. 다른 곳은 왁자지껄하게 즐기는 마당에, 서로 말 없이 술이며 음식만 들고 있는 풍경이 이상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던 중 광연은 호랑이가 건넨 사발을 받아들어 탁주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파전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뜯어 입에 넣어, 수염에 뭍은 술을 훑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커어~ 시원하다! 거 호형께서는 개성 송악산에 칩거하신다던 개성 호 선생이 아니시오?\"
\"허허허! 알고 계시는 구만요. 기린데 이 역귀 닮은 양이는 도대체 누굽네? 고조 아까부터 말도 없이 참새새끼마냥 파전만 쥐 뜯고 있으니 속이 다 탑네다. 니보라우, 고 말좀 해보디 앙이하겠네? 내 양이洋夷라 했다고 앙심 품은기야?\"
\"그러지 말고 호 선생도 한잔 받으시구려. 내 할 이야기도 있고.\"

마지못해 앞의 금발 청년에게 퍼붓던 속사포 같은 사투리가 멈추고, 호 선생이라 점잖게 부른 호랑이에게 사발이 갔다. 탁주가 부어지고 솥뚜껑 같은 그 커다란 발로 사발을 받은 호대감은 시원스럽게 술을 넘기고 파전을 입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이런 분위기가 영 껄끄럽기만 한 영민은, 우물쭈물 거리며 곁눈질로 이리저리 살피며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고조 이 도령은 누굽네? 윤 초시는 후손이 없어서 망하지 않았슴메?\"
\"이 친구는 감투 빌린 친구라네. 윤 초시 유품을 건네받은 사람이네.\"
\"기리쿠만요. 고조 통성명이나 하자우. 내레 개성 호 선생이야.\"

솥뚜껑 손을 내미는 것을 마다하지 못하고 영민은 그 손을 붙잡았다. 북실북실한 털과 발바닥의 연한 살이 묘한 감촉으로 다가왔다. 호탕하게 악수를 한 후 호 선생은 탁주를 손수 따라 한잔 거하게 마시곤 이번엔 묵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애초에 어른의 술판에 어린 아이가 끼게 되면 할 것이 없는 노릇이지만, 광연의 말은 영민으로 그 초점이 이동하고 있었다.

\"이놈아 한잔 할 테냐?\"
\"미성년이라 술은 못 마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학업에 고달파 파김치가 되어버린 몸뚱이가, 대뜸 영문도 모르게 끌려와 지금까지 자리에 앉아있으니, 영민은 그야말로 속이 타다 못해 숯이 될 지경이었다. 어차피 새벽 2시까지는 잠도 못자고 책을 펴 볼 팔자였지만, 생판 얼굴 한번 본적도 없는 갓 쓴 남자에게 끌려와 이런 요상한 자리에 앉아있으니 긴장감이 높아졌을 법도 하다. 거기에 술까지 권하니 가시방석에 앉은 것 마냥 더 불편해질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광연은 더 신경 쓰지 않고 옆자리의 외국인에게 관심을 두었다.

\"자네는 외국인이로군. 혹시 인천 박 대감의 후계라고 하지 않았는고?\"
\"……박 유여라고 하옵니다.\"

고개를 슬며시 숙여 인사 대신으로 한 그는, 영민을 쳐다보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파전을 끼적였다. 다들 성격이 호탕한 반면에 이렇게 소심한 사람도 있구나. 라며 영민이 생각한 사이에, 어느새 그 금발남자는 손을 내밀고 인사를 청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아, 예.\"

자리에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영민은 빙긋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애초에 별 시답지 않은 이유였지만, - 그것도 자기 본의가 아니라 광연의 반강제적인 인도 하에 - 기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술 정도라도 마셔주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뜻 여기저기에 음식을 나르고 있는 거구의 거한은 영민 앞에 작은 사발 하나를 내려줬을 뿐이었다. 밥알이 동동 띄워져 있는 멀건 하얀색 음료. 식혜였다.

\"떽. 벌써 어린 녀석이 술은 무슨 생각이냐! 냉큼 식혜나 퍼마시지 못할까!\"
\"왓핫핫하!\"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지고 졸지에 창피를 당하게 된 영민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생각은 옆의 호 선생이 일어나 구성진 가락을 뽑으면서 중단되고야 말았다.

\"판을 벌렸는데 소리가 앙이 없으면 안되갔디요? 이 호생 타령 한가락 뽑아보갔습네다 .\"

그러며 걸어 나오는 데 키는 엄청나게 커 190은 넘어 보이고 두발로 걷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본디 호랑이랑 네발로 걸어야 하는 산짐승인데, 두발로 땅을 디디고 있는 것은 네발보다는 두발이 더 어울려 보인다. 이마의 왕자가 문신마냥 선명한데, 인상은 기묘하게 더 없이 푸근해 보이는 인간의 형상이다. 솥뚜껑만한 손에는 부채가 들려있고, 쪽빛으로 맞추어 차려입은 마고자와 바지가 더 없이 어울린다. 영민은 생전 한복이 저렇게 어울리는 호랑이는 처음 본다며 속으로 생각했고, 어떻게 알았는지 호생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조선팔도에 나처럼 한복이 잘 어울리는 호랑이 있으면 나와 보라 이르거라~\"
\"얼쑤!\"

어느새 북을 들고 나온 짓궂게 생긴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추임새를 넣는다. 얼굴은 얽어 일견 괴짜처럼 보이지만, 옆집 아저씨처럼 더 없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어느새 술상에는 관심이 없어, 구성지게 가락을 뽑아내는 호생에게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거 신명나게 한판 놀아 봅시다! 조선 팔도 개성 송악산에 호랑이가 살았는데!\"
\"얼쑤!\"
\"이 놈이 철이 없을 때 호환 깨나 일으키고 다니니 개성 원님이 머리를 싸쥐고 누웠다 이 말이지. 군관여럿 데리고 호랑이 몰러 송악산에 가니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이게 골치란 말이지. 커흠, 흠.\"

걸진 목소리로 목청을 가다듬더니 아니리로 구성지게 가락을 뽑아낸다.

\"삼수~강산에 호랑이 있어 금강산의 호랑이, 설악산의 호랑이, 지리산의 호랑이 백두산의 호랑이 송악산에 호랑이 있으니. 눈은 화등잔이오~ 손은 솥뚜껑이니 눈빛만 부라려도 꼼짝없이 죽은 목심이니 이를 어찌하오? 나무꾼이 고개를 수그리고 하는 말이 \'아이고 형님. 이제야 잃은 형님을 찾았는데~ 오늘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니, 주린 배곯지 말고 냉큼 아우을 잡수시고 홀어머니 뵈러 가시오~\' 하는 게 이게 영락없는 아우인지라. 화등잔 모냥 눈을 끔뻑이고 호랑이가 하는 말이. \'내 아우가 인간이니 어머니가 호랑이인게냐? 내 어머니는 이미 죽어 가죽을 남겼으니. 물 건너 되놈에게 닷냥 서푼으로 그 가죽이 팔리지 않았겠느냐! 어찌하여 아우가 인간이며 내가 또 호랑이냐?\' 허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니. 지나거던 참새 한 쌍이 오금이 저려 땅으로 떨어지는구나. (얼쑤!) 아 이놈이 재주가 있어 구르던 곰도 벌떡 일어서 손뼉을 치겠구나. \'야 이놈아. 내가 형님이면 네 거죽도 되놈에게 닷냥 서푼으로 팔았느냐? 하늘님이 정해주신 생이 있어, 넌 오늘 내 점심으로 옥황상제 면전에 가 이르기를. \'송악산 호랑이가 숭하여 호환을 당하였으니, 홀어머니 영전 돌보지 못한 불효를 뉘우치오.\' 허며 입을 벌리니.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허니 \'아이고 형님. 이 아우가 점심거리가 되어도 천추의 한이 없으나, 홀로 남으실 어머니 걱정이 태산이니 어찌 이 아우가 옥황상제며 염라대왕을 뵈오리까.\' 허고 읍을 헌다.\"

그러니 낄낄거리며 여기저기서 손뼉 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호생은 큼큼 거리며 목을 가다듬고는 박수노릇을 하는 얼굴 얽은 중년사내에게 말한다.

\"박수양반 내 목이 칼칼하니 탁주 한 사발 마시고 더 해봅시다.\"
\"좋지~\"

그러고는 옆의 의관을 갖춘 점잖은 장정이 탁주 한 사발을 건네니, 보는 사람 시원하게 들이키고 다시 소리를 시작한다.

\"그러니~ 이 호랭이 놈 눈을 꿈뻑꿈뻑 뜨고 바라보니. 이놈이 아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허다 이 말이여. 조선팔도 어디를 뒤져봐도~ 이 몰골이며 솥뚜껑 손아귀를 보니 영락 없는 호랑이 몰골이라. 이보다 잘생긴 호랑이 보셨소?\"

하고 박수를 향해 이를 내밀며 빙긋이 웃으니 얽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익살맞게 \"예끼 이놈. 그럼 너보다 더 완벽한 호랑이가 있으렷다!\" 하는 것이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부채를 펼친 호생은 신명이 난 듯 현란한 몸짓을 구사하며 구성지게 가락을 뽑는다.

\"네발로 걷는 짐승이 따로 있더냐? 조선 팔도 유람을 해보자. 재 너머 당골 박첨지 소가 네발이라. 어제 먹은 윤 대감댁 개도 네발이렷다. 탐라국 양 대감댁 여식 장원급제하면 태울 조랑말도 네발이며, 나라님 수랏상에 오르는 산돼지도 네발이라. 그런데 어찌하여 네놈이 내가 네발로 걷는 걸을 알면서도 형님이라 호號하는게냐. 성을 내니 소변을 지릴 듯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목소리만은 침착 허다.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피난길에 형님을 산에 잃었으니, 밤낮으로 그저 호환당하지 않고 잘 살아있기를 빌고 빌다 속병이나 누우셨으니, 불효막심한 자식 나뭇짐이라도 허다 공양허기를 십여 년이니. 아직 장가도 가보지 못하였소. 그러하니 자리에 누우신 어머니 쾌차하시거들랑, 창귀가 되어 넋이라도 있어 형님이라도 보필하기를 바라오.\'라고 넙죽 엎드리니 호심이 동하더라 이 말이오.\"

장난기 어린 동작으로 고수에게 대뜸 넙죽 절을 하니 모두들 박장대소를 한다. 영민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는 광연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저기 어르신. 지금 이야기는 전래동화가 아닙니까?\"
\"그렇지. 호 선생의 이야길세. 개성 송악산에 호환이 있어, 평양 감사가 잡아들이라 명하니 할 수 없이 인왕산으로 피하여 토끼나 산돼지를 잡아 근근이 살아가다, 연이 닿아 나무꾼 아우를 두고 홀어머니를 그 명이 다할 때까지 극진히 모시어. 그 효행이 네발 달린 짐승으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나라님이 친히 어전으로 불러 잠원에서 친히 비단 여섯 필을 거두어 지은 두루마기에 저고리를 내어 그 효행을 치하시고 정 구품의 벼슬을 내리신 분이지.\"

그러고는 사발에 탁주를 부어놓고 열창을 하고 있는 호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민도 따라 시선을 주곤 식혜로 눈을 돌렸다. 아직 채 녹지 않은 살얼음이 둥둥 떠 있는 식혜를 단숨에 들이키곤, 넋을 놓은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소리로 엮어내는 호선생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

심사기준 하며 이러저러한 사정 덕분에 기존에 있던 작품을 내리고 새 작품으로 응모합니다.
아무쪼록 읽어주신 분들께는 사죄의 말씀을 올리고. 신작 어여삐 보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 짧고도 긴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낼까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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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Dr.L  lv 9 16.3% / 4663 글 157 | 댓글 895  
등급으로 따지면 F, 레벨로 따지면 0. 사상최약의 허접글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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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오네코 05/24/09:14
어제 보다 많아졌군요+_+!! 연참 연참!
21 UWO 05/24/09:34
우, 우와 드디어 은거기인 한분이 모습을 드러내셨군요. 다음 편도 기대합니다 건필!
5 소쿠리 05/24/11:49
우...우와!!!!!기...기대되요!
0 친한척 05/24/11:50
아아(...) 식혜 먹고 싶어요오오(...혹시 악플?)
0 무스타디오 05/25/03:15
멋지네요.
2 푸른하늘 05/26/04:36
최고네요! 감동 받았습니다!
다음 소설도 기대하겠습니다!
6 이향 05/26/08:07
여기서 이런 분위기를 내는 소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했습니다.
0 골방철학자 05/26/09:23
한국형 라이트노벨이라는 직함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0 번우드 05/27/12:59
박광연 이 맞습니까? 김광연이 맞습니까?
이름 소개할 때는 홍성의 박광연이라 했으나 그 이후에는 홍성의 김영감으로 나오는군요.
아무튼 독특한 글 잘보고 갑니다.
9 Dr.L 05/27/01:06
미처 수정이 안된 부분이로군요. 제보 감사합니다 번우드님. 김광연이 맞습니다.
0 복구 05/27/08:01
우와 @_@:: 근대 읽기가 조금 어렵네요 ㅎㅎ 옛사투리 예전의 국어 책을 보는듯한.. 그러나 이렇게 보니 정말 새롭네요. 무척 잼있습니다 ㅎㅎ
0 류안劉安 05/27/09:21
우와, 무려 도깨비인겁니까?!! 우와, 새롭습니다아+_+ 허허, 한국형 라이트노벨... 기대작입니다. 부디 끝까지 가주세용!
0 05/28/04:36
신선합니다 ;ㅅ; 멋져요!
1 laugh 05/28/05:47
멋지네요//!
0 05/28/07:35
오옷! 나도 파평윤씨인데 ^^ 왠지 끌리는것이 신선하고도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쓰세요 ^_^乃
13 天理行人 05/29/03:38
이런 게 한국형 라이트 노벨이라 할 수 있네요. 한국적인 색채를 잘 살린 게 인상적입니다 +ㅁ+/
0 kashumir 05/29/06:25
.....우와. 재밌네 이거?
1 다크엘 05/30/05:25
정말 떡하니 눈에 띄는 작품이군요.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
0 무늬뭇잎 05/30/11:41
이야. 확실히 이게 한국형 판타지지요
0 쿠모스 05/30/11:53
1000hit 축하+ㅁ+
2 풍선구름 05/31/09:58
우윽...왜 이제서야 이런 대작을 읽은거지?...
0 카레 06/01/12:59
일본에 전혀 물들지 않은 한국형판타지라는게 이런거구나...ㅜㅜㅜㅜㅜ다음편 어서 읽으러 두근두근
0 샤유 06/01/04:32
1등 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역시.
0 06/02/05:01
흔하지만 잘 선택하신 소재와 맛깔스런 대사와 사투리,지루하지않고 빠른 글진행들이 돋보이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글이 아주 구수하고 재밌고 술술 읽히는데 아쉬운점이 있어서 작가분께 도움이 됬음하고 몇자 더 적어봅니다..
단어와 조사(특히 보조사)의 선택이 글과 맞지않아서 문법적 관계가 순간 어긋나 매끄럽게 보이지 않을때가 종종 있고, 문장대로 보면은 틀리지 않으나 접속사등이 번복되어 글의 집중도를 떨어트리는 부분도 조금 잦은듯합니다.
글의 개성이라기보단 진행에 방해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고 글의 완성도가 더 높아졌으면 하고 적는글이니 도움됬음 하네요
앞으로도 재밌는글 기대할게요 건필해주세요!
0 클루 06/03/12:07
좋네요, 진정한 한국 소설. 이라는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좋다고만 말하는건 너무나 무책임하죠.

한국 전통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는것은 좋지만. 그만큼

정확성이 첨가되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가 허구를 전재로 하고있기는 하지만. 너무 사실과 동떨어지지는 않기를 빌며.
15 zero in 03/01/08:43
워헉.. 정말 시드노벨에서 처음보는 문체.. 멋드러진 문체올시다! <-
0 카카오99% 04/01/08:19
웃, 설마 등장인물들 중에 파평 윤씨가 나올 줄이야!
같은 파평 윤씨로서,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야 말겠습니다!
0 여름 12/08/08:17
아주 좋아요~~!!! 아주좋아요!아주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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