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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 우리들이 서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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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19    추천 0   덧글 0    / 2008.01.26 09:55:08

5장-우리들이 서있는 곳-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반 친구라도, 결석을 한다면 어느 한 부분이 허전해 보이는 법이다. 평소의 수련은 급우들과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어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감을 항상 뽐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비어있는 수련의 자리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자룡아!”
봄이는 조례가 끝나고 1교시 수업 직전의 쉬는 시간에 내 자리로 달려왔다. 그 때문에 방금 내 자리로 오려던 성윤과 병윤이 멈칫 하고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봄이는 온 몸을 휘두르면서 내 책상을 손바닥으로 철퍽! 하고 때렸다.
아, 아프겠다.
그렇지만 봄이는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수련이가 결석했어!”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건 조례시간에도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다. 물론 결석한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다만.
봄이는 다시 입을 열어서 큰 소리를 지르려다가, 주변의 눈치를 보고 나에게 까딱까딱하고 손짓을 한다. 그리고 귀를 가리키며, ‘할 이야기가 있어’ 라고 입 모양만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슬쩍 귀를 내밀자, 봄이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귀에 입을 가까이대고(우, 우옷!) 속삭였다.
“수련이가 내일 약혼식을 한대.”
그리고서는 엄청 놀랐지!? 라고 말하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지만 난 놀라지 않았고, 봄이는 조금 맥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 놀라?”
“놀랐어.”
아니, 실은 안 놀랐지만. 어쨌든 어제 상은을 만난 뒤로 나는 이상하게도, 매우 침착해져 있었고, 어지간한 일이 아닌 한(예를 들어 봄이가 날 좋아한다거나) 평상심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어저께 수련이네 기사 아저씨를 추궁해봤거든?”
봄이는 다시 속삭였다. 수련의 기사 아저씨라. 이야기를 해본 것은 한번 뿐이지만, 그래도 수련을 끔찍이 아낀다는 느낌이 든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는 수련의 약혼을 어떻게 생각할까?
봄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수련이가 결석한 이유는 수련이네 아버지랑, 그 파래머리의 가족들이랑 같이 어디서 약혼식을 올릴 건가, 그 장소를 알아보러 갔다나봐.”
조례 시간에, 29세의 담임선생님은 수련이 단순히 몸살감기에 걸려서 부득이하게 결석을 했다고만 말했었다.
하긴, 고등학생이 약혼을 한다는 건 여기저기 떠벌일게 못되지.
“어떻게 하지?”
봄이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어제 수련에게 들은 충격적인 말의 후유증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수련을 미워하지 않고 여전히 생각해주는 것을 보면, 역시 봄이는 천사가 틀림 없다. 아니, 그만큼 착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침착성이 부족해 봄이야. 축구에서는 골문 앞에서 골키퍼와 1대 1의 찬스를 맞더라도 침착성과 적극성이 부족하면 골키퍼에게 막혀버리기 마련이라고. 현실에서도 똑같아. 결정적인 상황을 맞았다면, 그것이 위기이든 기회이든 적극성과 침착성, 그리고 대담성이 필요해.
그래서 나는 연신 몸을 가만히 못 놔두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걱정 마. 계획은 있으니까.”
“응?”
봄이가 움찔 하며 몸을 굳힌다.
“계획?”
“그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란, 어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면서 만약 이렇게 된다면, 저렇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을 하며 꾸민 계획이다. 그래도 실제로 그 생각을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제는 단순히 망상으로 한 것이지만 말이야.
물론, 내 계획이 엄청 터무니없는 것이고, 아무리 봄이라도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정도는 말해보기로 했다. 어쩐지 봄이라면 이 계획을 기뻐할 것 같고.
“그게 뭔데?”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봄이에게,
“방법이 뭐냐고? 그건... 범죄와, 결투야.”
“범죄와, 결투?”
호기심을 느끼는 다람쥐처럼 귀여운 눈망울로 날 쳐다보는 봄이에게, 나는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터무니없지만, 그래도 엄청난 임팩트와 대담성을 자랑하는 계획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의 계획을 들은 봄이는...
“자룡아.”
윽, 역시 퇴짜인가.
“어쩐지... 엄청 멋지게 보여.”
봄이가 한 말에 나의 가슴이 벌렁벌렁했지만, 나는 쿨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야, 뭐.”
“좋아. 그걸로 가자.”
우리 둘은 끈끈한 눈빛을 서로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우선적으로 할 일은...




봄이가 나를 끌고 간 것은 교내에 단 하나뿐인 만화 동아리였다. 그 곳의 부장을 맞은 학생은 우리 반의 남석진이라는 남학생이었는데, 그는 인터넷에서 말하는 소위 오덕후였다. 그렇지만 방송매체나 인터넷에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는 방안에 처박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취미를 전파하는데 힘썼고, 음습하다기보다는 특이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입학한 이후 생겨난 오덕 전설의 TOP 5. 그리고 그가 입학한 이후 결성된 오덕 파이브는 학교에서 상당히 유명했고,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자신이 직접 집필한 원고지 3000매 분량의 오덕론 전파 사건과 오덕 전설의 TOP 1에 랭크되어 있는, 교내 모든 컴퓨터실과 교실에 일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을 설치해 놓은 일화가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주일간의 정학.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오덕론을 지키는, 어떻게 보면 대단한 녀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녀석을 봄이는 왜 만나러 가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충격’ 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동아리실의 문을 여는 봄이. 그리고 그 안에는, 컵라면을 먹고 있는 오덕 파이브가 있었다.
“오, 무슨 일이신가?”
오덕 파이브의 레드, 남석진이 컵 라면을 먹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나 물었다. 컵라면의 옆에는 PSP가 있었고, 액정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되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찬장에는 미소녀 피규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중간에 있는 TV에서는 귀엽게 생긴 2D의 미소녀가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혹시 신입부원?”
보통 사람이라도, 아니, 애니메이션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들어가기가 상당히 망설여지는 이 방을 봄이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무, 물론 나도 사람 취미가지고 차별을 두지는 않지만, 역시 뭔가 수상한 기운이 감도는 이 곳은 들어가기가 힘들다.
그래도 역시 봄이가 들어가니,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가야지.
“한봄 양이 아니신가!”
과장되게 양 손을 벌리며 봄이를 환영하는 석진. 오덕 파이브도 자리에 앉은 채 오오오-! 하고 열광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미소녀의 입부는 환영이오.”
“입부를 하려는 게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들어줄 수 있어?”
석진은 봄이가 입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페이스를 회복하고는 영국 신사를 흉내 내듯 품위 있는 표정과 동작을 취했다.
“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드리리다.”
...나는 저 녀석의 말투에 엄청난 위화감을 느끼고 있지만, 봄이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입을 열었다.
“이 애한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복장이 있어.”
“그대는, 조자룡 군?”
석진의 눈이 나에게 향한다.
“입학식 때 소질이 있어 보여서 눈여겨 본 사내였지. 기억나는군.”
기억나긴 뭘 기억이 나. 우리 둘 같은 반이잖아.
“조자룡 군도 드디어 코스튬플레이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이오? 환영할만한 일이지. 그래, 무슨 의상을 원하시오?”
봄이는 나를 살짝 쳐다보고 씽긋 웃었다. 그리고 석진을 바라보며, ‘그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연실색했고, 석진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호오... 그것을 입겠다는 말인가.”
“그, 그건 무리야! 절대 못해!”
“자룡아! 남자가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끝까지 해야지!”
“그, 그래도 그건!”
임팩트가 크다 못해 정신이상자로 보일수도 있다고! 나는 봄이를 최선을 다해 말렸다. 그렇지만 봄이는 막무가내였다.
“못써!”
“그, 그래도!”
“죽어도 못하겠다는 말이야?”
주, 죽는 게 나아! 코스튬플레이가 취미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만약 내가 그런 꼴을 하고 있는 장면을 아는 사람한테 들켜버리면 정말로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으음.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임팩트가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양보할 수 없어. 이 정도에서 타협하자.”
“그, 그것도 조금.”
“좋아. 그럼 여기까지.”
나는 봄이를 바라보았다. ‘이 이상은 봐줄 수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힘을 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다음 날 있을 흥분되는 계획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나와 봄이는 체육창고에서 잠시 빌려(슬쩍해)온 테니스공 바구니와 축구공 몇 개를 들고, 어제 내가 상은을 공중으로 날려버린 놀이터에 와있었다.
“좋아, 이제 마지막 연습만이 남았어!”
봄이는 두개의 테니스공을 양 손으로 들고서는 기운차게 외쳤다.
“좋아!”
나도 맞장구친다.
어제 본 바로는, 파래머리의 무력은 예상외로 강하다. 취미로 복싱을 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좋은 몸과 주먹을 가지고 있다. 결투를 한다고 해도, 나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것. 그렇지만 나는 파래머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근성과 지력, 그리고 지금부터 키울 민첩성이다! 녀석의 주먹은 빠르고 강하다! 그렇지만 맞지만 않는다면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즉! 봄이와 나는 때리는 연습이 아니라 피하는 연습을 하려 하는 것이다!
...아니, 별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내일 결행할 계획 때문에, 어쩐지 흥분도 되고, 겁도 나고, 기대도 되서...
방법은 간단하다. 연습에서 직접 치고받을 수도 없고, 게다가 연습 상대는 봄이니까.
즉, 수련 방법이란 봄이가 테니스공을 던진 다던가 축구공을 발로 차고, 그 공을 내가 피하는 것이다.
“좋아, 간다, 자룡아!”
“와라!”
나는 양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서는 봄이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있는 힘껏 테니스공을 나에게 던졌다.
공이! 날아온다! 좋아, 다리에 힘을 주고선!
살랑살랑~
툭.
내 앞에 허무하게 떨어진 공을 바라보았다.
“......”
“......”
침묵이 놀이터를 지배한다. 말 그대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는 것 같이 살랑살랑 날아와 사뿐하게 지면에 내려앉은 공을 보고 봄이는 엄청나게 무안해하고 있었다.
“...시, 시간차 공격!”
“으, 응?”
“유인구!”
말도 안 되는 말을 소리치는 나를 보고 봄이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 그래! 이건 유인구야! 다시 한번, 이번에는 진짜로 간다!”
봄이는 마치 자신이 프로 야구선수라도 되는 양 투구 폼을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높게 들어 올려서, 이번에는 진짜야! 라고 하는 듯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졌다.
툭.
그리고 하늘하늘하게 내 머리위로 날아가, 등 뒤로 떨어지는 공을 보고 침묵했다.
“...이, 이번에는 제구에 그다지 신경을 안 썼네.”
“...그, 그래. 이번에는 축구공으로 하자. 팔 힘보다는 다리 힘이 훨씬 센 법이니까!”
...그렇게 말은 했지만 봄이의 저 작은 몸집과 가느다란 다리로 얼마만큼의 힘이 나올지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봄이는 좋아! 라고 외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앞에 축구공을 놓은 다음, 봄이는 아주 멀리까지 걸어가서 코뿔소가 돌진하듯이 단숨에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담은 슛을-!
데굴데굴. 툭.
찼지만 공은 허무하게 굴러와 내 발에 안착되었다.
휘이잉~
우리들의 분위기를 표현하듯, 여름에는 도저히 불 것 같지 않은 삭막한 바람이 놀이터를 휩쓸고 지나간다.
“다, 다리 공격!”
“그, 그래!”
나의 오버가 가득 담긴 외침에 어색하게 맞장구치는 봄이.
“.....”
그리고 또다시 침묵.
“좋아! 이번에는 테니스공으로 다시 한번!”
“그래!”
살랑살랑~ 툭.
“축구공으로!”
데굴데굴~ 툭.
“다, 다시 한번!”
살랑~ 데굴~ 툭.
“......”
대, 대책이 없다. 봄이는 풀이 죽어있고, 나는 그런 봄이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고, 이걸 어쩐다지?
“...너희들, 뭐하냐.”
놀이터의 울타리 바깥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얼굴을 한 2명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축구소년 이성윤과 평범소년 김병호다. 그런데 학교가 끝난 때가 언제인데 이 둘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여긴 어쩐 일이야?”
내 물음에 답한 것은 병호였다.
“아, 너도 요즘 만나기 힘들고, 그냥 심심해서 남자들끼리 노래방 좀 갔다 오는 길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뭐하는 거냐?”
뭐 하는 거냐고...? 그야 파래머리의 주먹을 피하는 연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야, 너희들이 좀 도와줘라.”
나는 성윤과 병호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계속 봄이를 무안하게 한다면 그녀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남자로써 크나큰 죄!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이 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래바람이 부는 삭막한 배경의 놀이터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성윤과 병호, 그리고 봄이가 있었다.
“좋아, 사정 봐주는 거 없다! 전력투구!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차는 거야!”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공을 피할 준비를 했다.
“...좋아, 간다!”
먼저 공을 던진 것은 병호였다. 과연! 봄이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좋아! 피한다!
퍽!
“크억!”
나는 옆으로 뛰려다가 테니스공을 이마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푸하하하하!”
그 모습을 보며 기똥차게 웃는 병호. 제, 제길. 얄미운 자식. 피할 걸 알고 일부러 그렇게 던졌겠다. 게다가 성윤도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고, 봄이도 웃음을 참는 듯 배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이런 망신이!
그렇지만!
“계속 와라!”
이번에는 성윤이다. 축구 부 에이스의 기가 막힌 각력! 그러고 보니, 성윤이 녀석은 팀에서 프리킥을 전담하고 있었지! 발로 찬다 해도 정확도는 상당할 것이 틀림없다!
이번에야 말로 피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공에 온 시선을 집중했다. 축구 선수 특유의 프리킥 차는 모션과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온 공은...
뻑!
“푸허어헉!”
터졌어! 터졌다고! 으악! 나는 목욕탕에 가서도 남들에게 보이면 부끄러운 곳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이거, 분명히 터진 것 맞지? 계란이 깨지듯, 짤각! 하는 소리가 났다고! 그럼, 나 어떻게 되는 거야?
으흐허허헉! 내,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자, 자룡아! 괜찮아?”
봄이의 목소리.
“크, 크흑! 내, 내가...!”
“야, 자, 자룡... 괜찮아? 미안하다. 좀 실수해서 찼어. 안 깨졌어?”
그렇다고 그 로베르토 카를로스나 주닝요의 먹고 죽어라 슛! 같은 엄청나 파워는 대체 뭔데!
한참을 남자의 급소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던 나는 5분 정도가 지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으윽. 아직까지 고통이 남아있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방울이 깨진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조, 좋아. 계속하자.”
나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고통에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계속 한다고?”
어이없어하는 성윤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짓는 성윤, 그렇지만 내 말대로 다시 축구공을 들고 걸어가, 이번에는 좀 더 먼 거리에 놓았다.
“자, 그럼 다시 간다.”
“좋아! 와라!”
이번에야 말로 피한다!
성윤이 다시 공을 찬다. 그리고 그 공은 또다시 사라져...
뻐벅!
“ouch!!!”
다, 다시! 그, 그곳을!
“괘, 괜찮아? 미안, 이번에도 잘못...”
으, 으윽. 나는 모래판을 처절하게 굴렀다. 이, 이, 이,
“이... 놈...”
나는 육두문자를 내뱉으려는 것을 겨우 억제하고 성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계집애같이 훈훈하게 생긴 얼굴이 지금은 악마라도 보는 듯 하다.
“변태 오빠랑, 봄이 언니. 거기서 뭐해?”
그 때, 또다시 등장한 낯익은 목소리. 모래판을 굴러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나이에 매치되지 않는 몸집. 그리고 외견에 어울리지 않은 교복을 입고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은이 있었다.
“아, 이건 피하는 연습 중이야.”
“피하는 연습?”
“응. 내일 있을 파래머리와의 결투를 위해 특별 훈련 중이거든.”
봄이의 친절한 설명에 상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짓을 하네.”
그렇지만 저 말투에는 ‘별 바보 같은 짓을 하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으, 으윽.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한 짓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만히 저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고 있을 수는 없지.
“뭐야, 그런 말 할 짬이 있으면 너도 도와주기나 해!”
나는 쪽팔림을 숨기기 위해 상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나는 도와준다고는 안했어.”
이런 소리나 하고 앉아있다.
“그리고 수련 언니에게 변태 오빠를 주기도 싫고.”
어, 엉?
내가 그 말에 당황 하자, 상은이 몸을 돌려 나를 보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나, 변태 오빠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렇게 말하고 타타탁 소리를 내며 놀이터의 바깥으로 달려가 버리는 상은.
“에, 엥? 야! 너!”
나는 상은을 큰 소리로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뭐, 뭐야. 저 녀석...”
별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그런 말 하면 나나 봄이가 이상한 오해를 해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옷에 묻어있는 모래를 털고 있자,
“저 여자애는 누구냐, 자룡.”
어째서인지 싸늘한 눈을 하고 있는 병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김수련의 동생인데...”
“도옹새앵!?”
병호의 눈매가 엄청나게 험악하게 변했다.
“자매 덮밥이라는 거냐! 이 부러워서 죽여 버리고 싶은 자식!”
“그, 그게 뭔데!”
나는 느닷없이 화를 내며 테니스공을 던져대는 병호 덕분에 원 없이 피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파래머리의 주먹을 피할 수 있는 민첩성을 길렀는지는 의문이지만.


@


“여길,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는 거지.”
“잠깐 봄아. 그건 너무 대담하지 않아?”
“아니야. 이 정도는 해야 그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인상을 줄 수 있어.”
나와 봄이는 노트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노트에는 우리 계획에 아주 중요한 사항이 그려져 있는데, 그건 바로 어제 봄이가 조사를 해온 수련과 파래머리가 약혼반지를 교환할 레스토랑의 건물 도면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오늘 있을 계획에 대한 의논을 하는 중이다.
오늘은 수련이 등교를 했다. 그녀는 앞자리에서 관심이 없는 척을 하며, 나와 봄이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흘끗흘끗 훔쳐보고 있었다. 자기는 티를 안낸다고 하는 것 같지만, 우리 역시 수련의 행동에 신경을 쓰고 있다보니 다 티가 나는 것이다.
지금도 수련이 이쪽을 바라보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수련에게, 나와 봄이는 장난을 꾸미는 개구쟁이 꼬마처럼 짓궂은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였다.
정작 수련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려서 우리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은 듯, 나쁜 듯, 애매한 긴장감이 등골을 훑고 지나간다.
어쨌든 계획의 실행 장소는 오늘 밤, 수련이 약혼식을 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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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완벽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계획을 결행하는 것 뿐. 계절은 여름. 남색의 하늘에는 달이 떠있었다. 얼마 보이지는 않았지만, 별도 간간히 보였다. 핸드폰의 디스플레이에 표시되어 있는 시간은 오후 열시를 막 지나가는 중이었다.
대한민국 표준시.
PM 10:02
역사적인 대작전이 결행되는 시간이다.
나와 봄이는 커다란 레스토랑의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됐겠지, 자룡아?”
“물론. 그러는 너는?”
“나 역시.”
봄이 역시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온 몸을 누르고 있는 긴장감 때문에 숨을 들이마셨다. 뜨거운 밤바람이 폐안에 가득 차고, 잠시 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자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좋아. 현 시각 22시 02분 35초. 정확히 1분 뒤에 작전명, 신부 탈환 작전을 결행한다.”
들릴 리가 없는 시계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불이 켜진 레스토랑을 바라보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건투를 빈다. 전우.”
내 말에 봄이는 빙긋 웃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그리고 자룡아, 그거 잘 어울려. 꼭 써야 돼. 알겠지?”
“으, 으윽!”
봄이의 말에 주머니에 들어 있는 천 재질의 그것을 나는 손으로 쥐었다. 꼭... 써야 할까? 안 쓰면 안돼? 내가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을 때 봄이는 이미 “화이팅!” 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러 달려가고 있었다.
자, 지금은 복잡한 것은 생각하지 말자.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엉뚱한 것을 고민해봐야 시간을 쓸모없이 낭비하는 것 밖에 안된다.
좋아. 각오는 충분해.
나는 아두를 안고 10만 대군을 돌파하는, 중국 삼국시대의 무장. 조자룡같이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레스토랑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수련이 자신의 아버지와 파래머리,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약혼반지를 교환하는 장소는 레스토랑의 3층. 봄이가 기사 아저씨에게서 캐내었다는 정보에 의하면 3층을 통째로 빌렸다고 한다. 과연 부자들이란 돈이 남아돌아서 주체를 못하나보다.
한 분이십니까, 손님? 라고 카운터에서 예의바르게 묻는 점원을 지나치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저, 저기, 손님!”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따라오는 점원의 소리. 띠잉-!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그것, 그러니까 박쥐 가면을 꺼내어 얼굴에 썼다. 얼굴을 숨긴 레슬러, 레이 미스테리오... 가 아니라.
“소, 손님!?”
점원이 달려오기 전에 나는 3층의 버튼을 눌렀다. 역시 고급 레스토랑의 엘리베이트는 뭐가 다른지, 소음이 거의 없었다.
2층...
3층....
띠잉! 좋아. 도착이다. 나는 문이 열리기 전에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붉은 양탄자가 깔려진 로커, 천장에는 작은 샹들리에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과연, 척 봐도 나 같은 서민은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 같이 고급스러운 곳이군. 박쥐 가면을 쓰고, 로커의 직원이 날 보고 입을 쩍 벌리는 것을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걷는다.
그리고, 식당의 벌컥 열어젖혔다.
스무 개 정도는 되어 보이는 고급 테이블, 가운데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언젠가 본 수련의 아버지와 수련과 상은 자매. 그리고 파래머리와 얄팍한 덩치를 가진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고,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사 아저씨가 서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를 보고 상당히 놀란 듯 했다.
“누구냐?”
“너는!”
“변태 오빠!?”
“너, 여긴 뭐하러, 그리고 얼굴에 그건 대체...!”
각양각색의 반응 앞에서, 나는 쓰고 있는 마스크 아래의 입을 위로 끌어 올렸다. 즉, 웃었다는 말이다.
봄아, 역시 박쥐 가면 같은 걸로 얼굴을 속이긴 무리였어. 네 말대로 파급은 엄청났지만.
뭐라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박쥐 가면을 쓴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괴인, 박쥐남자다!”
“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나는 미리 주머니에서 인터넷을 뒤져서 만든 세제와 연막 바퀴벌레 퇴치 약, 기타 등등을 사용해서 만든 연막탄을 던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인체에 해가 없는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로커의 직원들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통을 틈타서 나는 박쥐 마스크를 벗고 수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입과 코를 막은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뭐, 뭐야!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보면 몰라? 범죄지.”
“뭐!?”
나는 수련을 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납치다.”
그리고 수련의 옆구리를 끌어안았다. 수련의 몸무게는 모르지만,(물어봐서도 안 될 것 같고) 적어도 40킬로그램은 넘는 사람의 무게다. 한손으로 쉽게 들어올려지지는 않았어도, 나는 “끄응!” 하고 힘을 주어서 수련을 어깨에 들쳐 메었다. 일명, 보쌈 자세라고도 하지.
“뭐, 뭐야! 하지 마! 내려 줘!”
어깨 위에 빨래처럼 걸쳐진 수련의 당황한 목소리.
“싫어.”
나는 그 말을 간단하게 무시하고는 식당의 문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에 다다랐을 때...
기사 아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수련을 어깨에 들쳐 메고 있는 나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봄이 아가씨에게서 이것저것 캐물을 때부터 어떤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황당한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막을 겁니까?”
시간이 없다. 연막탄이 그리 오래가는 것도 아니다. 레스토랑 직원들이 언제 창문을 열었는지, 이제 슬슬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주변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가 된 것이다.
내 말에 기사 아저씨는 빙긋 웃었다.
“저는 아가씨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그 말은 곧...
“빨리 가세요. 봄이 아가씨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를 지나쳐서 달려갔다.





버둥대는 수련을 어깨에 멘 채 레스토랑을 나왔을 때, 봄이가 길가에서 택시를 붙잡아놓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빨리 와!”
그리고 뒤에서는 레스토랑 던전의 몬스터. 웨이터들이 육두문자를 끝없이 내뱉으며 나를 잡으려고 달려오는 한시가 급박한 상황.
나는 봄이가 열어둔 택시의 뒷문에 얼른 수련을 집어던졌다. 그 충격으로 수련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수련의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봄이에게 손을 내미려는데.
“빨리 가! 나는 상관하지 말고!”
‘여긴 내가 막고 있을테니, 내 시체를 넘어서 진격해라!’라고 말하는 듯한 봄이의 표정. 어디선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라는 군가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외쳤다.
“아저씨, 신곡 고등학교로, 빨리요!”
봄아, 네 희생은 절대로 잊지 않겠어!





열한시가 다되어가는 학교는 조용했다. 택시에 타고나서부터, 수련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택시에 내려서도, 학교까지 걷는 나를 조용히 따라 걷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녀의 진실 된 속마음이 어떻던, 원치 않는 약혼을 수련은 받아들였고, 체념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걸 방해한 거니까.
“...왜... 그런 짓을 한거야?”
어두운 운동장을 반 쯤 걸어갔을까, 수련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말했잖아. 널 도와주러 왔다고.”
“누가! 누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수련은 막혀버린 댐에서 순식간에 물을 토해내듯이, 순식간에 말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짓이라.
언제까지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는 여자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면서 나를 윽박질렀다.
“내가 말했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쓸데없이 폼 잡지 말라고. 그런 짓을 해봤자,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아!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너나, 봄이나,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왜 나를 가만 놔두지 못하는 건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 건데!? 왜 자꾸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거냐고!!”
그래, 난 수련에 대해 알기는커녕, 그녀의 상처, 아픔, 속마음, 그 어떤 것도 모르고 있다. 그녀가 왜 파래머리와의 약혼을 참고 견디는지, 아버지에게 거짓된 얼굴을 보여주는지, 동생에게 싸늘하게 대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그래!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네 말대로 난 아무것도 몰라. 네가 왜 남자를 차버리는지, 왜 내 고백을 받아들였는지, 왜 파래머리와 참으면서도 너희 아버지에 말을 따르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외면하는 짓은 절대로 못해!”
“어째서! 날 그냥...!”
“잠자코 들어! 널 도와주는 이유 같은 것은 아무것도 상관없어!”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철로에 떨어진 승객을 구해준 사람, 불타는 건물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한 사람, 아니면 실연을 당한 친구를 위로해주는 사람, 그 누구도 어떤 이유를 가지고 도움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그저, 도와주고 싶으니까.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으니까 도와줄 뿐이다. 사정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왜 철로에 뛰어든 건지, 어떤 이유로 불이 난건지, 왜 연인과 헤어진 것인지,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나는 수련의 사정을 모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냐? 모른 척 외면하라는 거냐? 그런 짓은 못해, 내가 널 도와주는 이유는 단순히,
“널 그냥 놔두지 못하겠다는 거야!”
“그냥 놔둬! 내버려 두라고! 난 도움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아!”
수련은 끝까지 고집불통이었다. 자신을 인정하려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밀어진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에게 내밀어진 수많은 손을 모르고 있다.
“그럼 왜 그 파래머리를 따라갈 때 그렇게 슬픈 눈을 했던 건데!”
“나, 난!”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을 하라고! 이 멍청한 여자야!”
머리에 꿀밤이라도 강하게 한 대 놓아주고 싶었다.
“혼자서만 세상을 사는 것 같은, 언제나 외톨이 같은 표정만 짓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언제나 도움을 청하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흔들리는 눈빛을 하고 있는 수련을 보며 말했다.
“너에게 내밀어진 손은 네 생각보다 많단 말이야. 혼자 모든 것을 떠안은 듯, 그런 얼굴만 하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
수련은 침묵했다.
“그, 그런 말을 해도, 나는.”
“바보야.”
아직까지 손을 붙잡길 망설이는 수련에게, 나는 말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하면 돼. 나는 어떨지 몰라도, 너에게는 한봄이라는 아주 착한 친구가 있잖아? 그리고 나 역시 널 생각해주고 있어. 혼자서 끌어안고 끙끙 앓지 말란 말이야.”
수련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아까보다 많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넌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네.”
“뭐?”
“학기 초에, 네가 날 도와줬을 때부터, 가끔가다 나도 모르게 널 지켜볼 때가 있었어. 그때마다 넌 항상 밝고, 막힘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 어쩌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다른 애들이 곤란해 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당연하다는 듯이 나서고, 나도 모르게 그런 성격을 부러워했던 것 같아. 그래서 도서실에서도, 잡초를 뽑을 때도, 너에게 지고 싶지 않았어. 만약 그런 것으로라도 이길 수 있다면, 무언가 변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수련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너를 동경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네 고백을 받아들인 것이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는 꽤 충격을 받아서, 울을 뻔도 하고.”
수련을 나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말이야. 아빠가 조그만 회사를 하던 시절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교통사고였지. 저녁에 편의점에 갔다 오신다고 하고, 혼자 집기 싫다고 떼를 쓰는 나한테 ‘TV보고 있으면 금방 돌아올게’ 그런 말을 하고, 하늘로 가버린 거야.”
오랫동안 감춰왔던 비밀 이야기를 하며, 수련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말을 안 듣는 나에게 벌을 주려고 하느님이 엄마를 빼앗아간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어린 마음에 아버지까지 잃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지. 그 뒤 아버지는 엄마의 죽음을 잊어버리려는 듯 일에만 집중하고, 곧 재혼도 하게 되었어. 새 엄마가 데리고 온 딸은 좋은 애였지만, 나는 그 애가 아버지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이 못마땅했어. 그래서 아버지가 있을 때에는 사이가 좋은 척, 아버지가 없을 때에는 차갑게 대했지.”
“......”
“아버지의 회사가 커지면서, 아버지와 만나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나는 무서워졌어. 아버지가 어디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엄마처럼 영원히 못 만나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였을 거야. 희미해진 가족끼리의 유대감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앞에서 억지로 웃음 지었던 건.”
그리고 수련은 허무한 듯이 살짝 미소 지었다.
“습관이 되었던 걸까, 억지웃음을 짓는걸. 자신을 속이고, 아버지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버지는 너무해, 왜 날 바라보지 않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고. 동생인 상은이도 좋은 애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 엄마와 상은이는 아버지를 빼앗아가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하게 대하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나는 그 상태로 멈춰서있는 걸지도 몰라. 그 누구의 손길도 외면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 거야.”
“그래서, 파래머리의 약혼도 억지로 받아들인 거였군.”
“그래. 이제 1년에 몇 번 못 만나는 아버지와의 유일한 유대라고 생각했거든. 바보 같지, 정말.”
정말, 바보 같은 아이다. 게다가 엄청나게 마음 약한 아이. 결국,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주저앉아 있던 건가.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한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주었겠지.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손을 외면했겠지.
“이제, 슬슬 일어나도 되지 않아?”
내 말을 들은 수련은 고개를 나를 바라보며 응? 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 손.”
나는 수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수련.
“언제까지고 그 시절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언제까지고 과거에 사로잡혀서 그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친구 하나도 안 생긴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너 평소에 엄청 심심하잖아? 친구도 봄이 밖에 없고.”
수련은 아직까지도 내 손을 잡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 역시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짓기에 너는 너무 일러. 그런 표정은 세상을 더 살아본 뒤에, 좀 더 힘든 일이 있을 때에 잠깐 지어도 되는 거야.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장소는 청춘의 한가운데. 좀더 솔직한 표정을 짓고, 좀더 쉽고 웃고, 좀더 쉽게 울고, 별것 아닌 일로 쉽게 고민하고, 그래도 될 때란 말이야. 너에게 내밀어진 손은 수없이 많아. 너는 예쁘잖아?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많다고. 그러니까 그 손을 잡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거야. 걸어가는 것은 네 역할이지만, 만약 네가 또 다시 주저앉았을 때 손을 내밀어줄 사람들은 많으니까.”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수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이 묻고 있었다. 잡아도 되는 거야? 날 싫어하지 않아?
“잡아도 돼.”
수련은 익숙하지 않은 동작으로, 머뭇거리면서 내 손을 잡았다.
“아버지한테 응석도 부려. 싫으면 싫다고 하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싶다고 하고, 동생에게 좀 상냥한 언니가 되도록 해. 상은이, 그 애는 널 싫어하고 있지 않으니까.”
고개를 숙이며, 수련은 작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볼가에 살짝 흘러내린 눈물이 달빛에 반짝였다.
나는 고개 숙인 수련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잘했어, 라고 칭찬을 하는 듯이.
부우우웅-
그리고 차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수련의 마음은 어떻게든 해결을 보았지만, 저 파래머리가 남아있었지.
“생각보다 빨리 왔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교문으로 들어오는 두 대의 고급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한 대는 몇 번 본적이 있는 수련이의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세단, 그리고 한 대는 아마도 파래머리와 그 아버지가 타고 있을 검은색의 벤츠였다.
생각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뭐, 상관없다. 이 늦은 시간에 학생들이 갈 곳이란 집 아니면 학교밖에 없겠지. 나도 그런 생각쯤은 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니까.
두 대의 고급 승용차는 우리들에게서 약 10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예상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왔다.
수련의 아버지, 상은이, 기사아저씨와 파래머리, 그의 아버지, 그리고 나대신 붙잡혀 주었던 봄이까지.
나는 그들이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 수련을 뒤에 둔 채 앞으로 나가며 외쳤다.
“결투다, 파래머리!”
“뭐?”
파래머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수련을 데리고 가고 싶다면 받아들이는 게 좋을걸!”
“이봐, 무슨 소리를...”
어울리지 않게 착한 척을 하려는 파래머리를 제지하고 수련의 아버지가 나섰다.
“자네, 분명 수련이의 친구라고 했었지? 한번 만난 기억이 있군.”
“예.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의 아버지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 같이 여유롭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봄이와 네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봄이는 내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더군. 이유에 따라서, 용서해줄수도 있네.”
나는 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사아저씨의 옆에 선 채,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기서 봄이가 원하는 것은 분명히 내가 수련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저런 쓰레기에게 수련이를 넘겨줄 수 없기 때문이죠.”
“쓰레기? 형태군이 그렇게 불릴 이유는 없는 것 같네만.”
좋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저 녀석의 정체를 까발려주겠어.
“당신들 앞에서 저 파래머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은 전혀 수련을 생각해주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
“하!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아들이 쓰레기라고? 일개 고등학생이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수련의 아버지가 한 말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파래머리의 아버지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그리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가진 강직해 보이는 국회의원은 나를 윽박질렀다.
“자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네. 어서 당장...”
더 말하려는 자신의 아버지를 제지하고 파래머리가 나섰다. 그는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양이었지만, 잔뜩 찌푸려진 미간과 부들부들 떨리는 억지 미소가 지어진 입 때문에 누가 봐도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만두세요. 아버지. 이 학생은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어쩔수 없지만, 제가 대신 해결해도 되겠죠?”
“으, 으음. 그렇지만 고등학생일 뿐이니 너무 심하게 대하지는 말거라.”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파래머리는 입고 있는 양복을 벗은 다음, 목에 매고 있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팔목을 조이고 있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좋아. 드디어 할 마음이 생기셨나보군.
내가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수련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하자. 여기서 내가 싫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수련의 입을 막고, 나는 웃었다. 최대한 남자답게. 여자를 지키는 남자의 표정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남자에게 맡겨둬.”
그렇게 말한 다음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있는 파래머리의 앞으로 나갔다. 역시 복싱 자세로군. 평소 같으면 분명 내가 지겠지. 그렇지만, 나는 여차하면 굉장한 녀석이라고. 내 이름이 괜히 조자룡인줄 아냐?
파래머리는 내 앞에 다가오며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멍청한 자식.”
“뭐야?”
“네가 한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거냐? 수련이 아버지의 회사가 더욱 커지기 위해서는 우리 아버지의 힘이 필요해. 지금 여기서 훼방을 놓는다면, 꽤나 큰 타격을 입을 걸? 너 같은 꼬맹이는 모르겠지만, 정치와 사업은 꽤나 밀접한 관계라고.”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그래, 난 그런 거 전혀 몰라. 수련의 사정도, 그녀의 아버지의 사정도, 이 앞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손가락만 빨며 수련이 불행해지는 것을 구경할 수만은 없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방법인가, 그런 것을 고민할 틈은 없다. 나는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달려갈 뿐. 그리고 그 도중에 주저앉아있는 녀석이 있다면, 다시 붙잡아 끌어올려줄 뿐이다.
“잔소리 하지 말고, 어서 덤벼.”
“바보 녀석. 네가 날 이길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파래머리는 나에게 날카로운 잽을 날렸다. 그렇지만 역시 이 녀석이 저번에 말 한대로, 폼만 잡으려고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배운 것인지, 그 궤적은 뻔히 보였다. 죽어라 맞기만 했어도, 허튼 짓이라고 생각은 했어도, 대충대충 피하는 연습을 한 것은 아니라고!
“이게!”
내가 주먹을 피하자, 파래머리는 흥분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주먹 역시 쉽게 피한다.
뭐야, 이거 의외로...
“쳇!”
얼굴로 날아온 주먹을 다시 한번 피한다.
상당히 약한 녀석이잖아?
저번에 나는 왜 허무하게 당했던 거야?
“이익!”
나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파래머리가 저번에 나에게 한 기술을 먹이기로 했다.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평소와 다르다고!
퍼억!
내지른 나의 주먹이 파래머리의 코에 명중했다. 얼굴 한가운데 카운터! 그리고 파래머리는 코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뒤로 날아가서...
꿈틀꿈틀.
움직이지 않았다.
“형태야!”
국회의원이 달려와 기절한 파래머리의 몸을 들어올렸다. 파래머리는 자신이 맞고 기절한 것이 믿기지 않는지, 넋이 나간 웃음을 지은 채 “네가, 이길, 거, 생각.” 이런 말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네들, 뭐하는가! 어서 저 녀석을!”
국회의원이 수련의 아버지와, 기사아저씨를 보며 외쳤다. 그리고 내 뒤에서 수련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를.”
수련은 예의바르게 파래머리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련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설마, 설마? 그렇지만 다행이도 수련은 나를 보고 한번 싱긋 웃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지 않는 수련을 보고, 파래머리의 아버지는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수련의 아버지를 보고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김 회장! 우리 아들에게 이런 망신을 주다니! 이 약혼은 파기요! 그리고 당신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씩씩거리며 파래머리를 들쳐 업고 벤츠로 걸어가는 파래머리의 아버지. 그는 도움을 주려는 기사 아저씨의 손도 뿌리치고는 파래머리를 차에 싣고 돌아가 버렸다.



“아버지...”
“수련아, 대체 왜 이런...”
“죄송해요.”
수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수련의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싫었던 거니?”
“...예.”
“그렇다면 어째서 말을 하지 않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수련이 아니라,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봄이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봄이는 아직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련을 대신해서 말했다.
“수련이는, 그저 아버지... 아저씨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수련의 슬픔과, 생각과, 감정이 들어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봄이는 수련의 가장 친한 친구고, 어렸을 때부터 수련과 함께 해왔기 때문에, 수련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수련이가 말을 못할 때,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고 있을 때, 대신 입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수련은 고개를 숙인채로,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 동안 아버지를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 울고 싶을 때도 웃었어요.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도 참았어요. 안 그러면, 아버지도, 엄마처럼, 흑, 나를, 떠나가 버릴, 까봐.”
그리고 수련은 지금까지 그녀의 아버지에게 숨겨왔던 많은 것을 토로했다. 아버지가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을 때, 항상 외로웠다는 것, 엄마가 보고 싶어서, 집에 들어가면 TV를 켜놓았던 것, 아버지에 대한 불만, 아버지에 대한 바램, 아버지에 대한 사랑, 그리고 더욱 여러 가지의 것들을.
그리고 나와 봄이는 그 곳에서 조금 물러서, 상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울고 있는 수련과, 수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양 아버지의 얼굴을 침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상은의 어깨를 툭 쳤다.
“가봐.”
“변태 오빠?”
나는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는 상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상은이 머뭇거리면서도 수련에게 걸어가는 것과, 그런 그녀에게 수련이 뭐라고 말을 하자 울음을 터뜨리는 상은을 보고는 기사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수련 아가씨를 설득하신 겁니까?”
“네?”
“지금까지의 수련 아가씨는, 그 누가 어떤 말을 하던, 모조리 외면 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어떤 말로 수련 아가씨를 설득했는지 궁금하군요.”
글쎄요, 어떤 말로 수련을 설득했냐고요? 언변이라던가, 혹은 다른 무엇, 그것 때문에 수련이 내 위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끝까지 도움을 주려는 손을 거두지 않아서겠죠.”
“예?”
수련에게 내밀어진 많은 손길, 친구가 되려는 손길, 도움을 주려는 손길은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련은 그 손을 잡지 않았고, 그 손길을 쳐내는 수련의 매정한 말에 많은 사람들이 그 손을 다시 거두어들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수련이 한번, 두 번 나의 손을 쳐낸다 해도, 다시 손을 내민다.
“한번 손을 내밀어서, 만약 그걸 수련이 잡지 않는다면, 두 번 세 번, 그것도 안 되면 계속 손을 내밀면 되요. 그 녀석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계속 무시할 정도로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요.”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잡을 때까지 내밀고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아무리 매정한 사람이라도 그 손을 잡을 때가 있을 테니까. 분명 그럴 테니까 말이다.
내 말을 듣고 기사아저씨는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수련 아가씨가 자룡 군의 손을 잡은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죠?”
어리둥절한 눈을 한 나를 보며, 기사아저씨는 봄이를 바라보았다.
“봄이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물론이죠. 자룡이가 아니었다면 수련이를 설득하는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문을 모르고 눈을 껌벅거리는 나를, 기사아저씨와 봄이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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