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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축복이라 할지라도…. by 사다메

처녀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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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이야기 / 그것이 축복이라 할지라도 [Vol.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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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사다메[scvmetal]
조회 2082    추천 0   덧글 1    / 2008.02.22 04:27:30

세 번째 이야기 / 그것이 축복이라 할지라도

 

다음날, 화요일 아침 등굣길.

지현은 유라와 함께 언제나 익숙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아, 정말. 귀찮구나.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 헐레벌떡 학교에 가야하는 이 현실이. 게다가 시험기간이고. 젠장.

시험걱정은 전혀 없는 그였지만, 시험기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앞으로의 일주일에 짜증을 내는 그였다.

화창했던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 아침은 상당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늘에 잔뜩 끼어있는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 기분 나쁘게 꾸물거리고 있었으니까.

무더운 여름에 잠깐 내리는 비는 땡볕에 혹사당하고 있는 대지를 적셔주며 활기를 북돋아주지만, 지현은 그래도 비가 싫었다. 때문에 그는 그런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에이, 젠장. 난 비가 싫어.”

들고 있는 접이식 우산을 뱅뱅 돌리며 말하는 지현. 그런 그의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유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응? 비가 왜? 시원하고 좋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비가 왔었거든.”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지현의 모습에 유라는 잠시 흠칫하고 말았다. 아. 내가 말을 잘못한 건가?

“미, 미안해 지현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 본 지현은 이내 괜찮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 괜찮아. 내가 슬퍼한다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도 내가 자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원하지 않으시겠지. 한 번도 실제로 본적 없는 아버지지만 엄마에게 항상 들었던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으니까.”

“….”

“그리고 이젠 나에게 미래예지라는 능력이 있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져도 그 전에 미리 예지만 할 수 있다면 걱정 없어.”

“으응.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 지현이가 가지게 된 능력은 왠지 엄청난 것 같아. 미래예지라니…. 나 같으면 그 능력으로 로토복권이나 사겠어. 당첨번호만 미리 보면 될 것 아냐?”

순간 지현은 그녀의 말에 가슴 한편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로토당첨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숨기고 있던 그였으니까. 때문에 그는 임기응변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뭐? 이 녀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내 사리사욕으로 소중하게 얻은 이 능력을 사용 할 것 같아?!”

그렇게 펄쩍뛰면서 반응하는 지현의 모습에 유라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우산으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꽁 때리며 말한다.

“바보야. 너 분명히 어제 은혜네 집에서 나랑 얘기하면서 그랬잖아. 미래예지로 시험 답안을 다 봤었다고. 그러면서 사리사욕으로 쓰지 않겠다고?”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현은 그저 발끈하며 외칠 뿐이었다.

“시, 시끄럿! 너는 절대기억으로 교과서를 몽땅 외워버린 주제에!”

유라는 그런 그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나는 어쩔 수가 없는걸. 내가 외우기 싫어도 다 외워 진다니까?”

“이건 뭔가 불공평해. 어째서 나는 하루에 한번이고 너랑 은혜는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거지? 응? 아니지. 너 같은 경우엔 그냥 보면 다 외워진다며? 이건 RPG 게임의 페시브 스킬 같은 거잖아! 따로 발동시키지 않아도 그냥 보이는 족족 외워진다는 소리잖아! 으아~! 불공평해! 이건 뭔가 불공평해!”

발악하듯 머리를 움켜쥐며 말하는 지현. 그런 그를 바라보던 유라는 빙긋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그는 그저 몸이 굳어버리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아, 왜 우리엄마가 유라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자기랑 성격이 똑같으니까. 우리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랬을까? 갑자기 아빠가 존경스러워 지는구나. 에라. 이런, 젠장. 어쨌든 폭력반대!

그런 지현의 모습에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리는 유라. 그녀는 문득, 능력을 주었던 그 정체불명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지현아.”

“응?”

“그 전화를 했었던 여자애 말이야. 언제나 우릴 지켜보고 있겠다고 그랬지?”

“뭐, 그랬었지.”

“그럼 지금도 바라보고 있을까? 집에 돌아갔을 때도 어디선가 몰래 바라보고 있을까?”

말하는 그녀 자신도 어디선가 모르게 소름이 돋고 있었다. 우으윽, 그, 그런 건 정말 사절이라구!

지현도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 글쎄. 요즘 능력에 대한 것 때문에 은혜랑 자주 만나서 얘기 해보긴 했었는데, 잘 모르겠는걸. 뭐 아마도 괜찮겠지. 뭐 어때?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은혜랑 자주 얘기 했었어?”

“은혜네 집에서 몇 번. 근데 별로 영양가 있는 얘기는 안 나오더라. 이젠 안 가려고.”

능력… 때문이었다고?

순간 그녀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그러면 저번에 은혜 집에 가는 모습은 그냥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갔었던 거였어? 에이, 그랬던 거였어? 나, 난 또 괜히 걱정했잖아. 요즘 둘이 몰래 자주 만나는 것 같아서 사귀는 줄 착각했었는데.

헤헤. 역시 지현이랑 은혜는 사귀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아무 관계도 아니었잖아? 후후. 뭐 역시 그럴 리가 없겠지? 아무리 예전에 알았던 사이라고 다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뭐야? 괜히 불안해했었잖아?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놓친 뒤에 후회하긴 싫으니까. 은혜도 능력자라고?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흥. 좋아. 거기까진 봐 줄게. 그래도 있지? 나 지현이는 그냥 못 내줘.

한지현. 넌 이제 내꺼야.

유라는 그렇게 속으로 뭔가 의미심장한 대사를 웅얼거렸다. 어두운 하늘의 먹구름처럼 그녀에게 어딘가 알 수 없는 어둠의 기운이 폴폴 풍겨 나오고 있었다.

 

@

 

시험이 끝난 오후.

아침부터 끼어있던 먹구름이 신나게 비를 쏟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던 지현은 이내 집에 가기위해 짐을 챙기며 큭큭거렸다.

‘아, 정말 세상사는 게 즐거워서 미치겠네. 매일 시험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뭐 하긴. 이제 매일 이렇긴 하겠네. 크큭.’

그렇게 가방을 챙기던 지현은, 곧 자신의 우산이 어디론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엥? 어라? 내 우산이 어디 갔지?”

분명 여기 책상 옆에다가 걸어놨었는데? 그는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차마 돌아가지 않는 목이 마치 딱딱하게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최악이다.

그가 바라보자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듯,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며 폭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큭, 젠장. 누구야! 어떤 자식이 내 우산을 훔쳐갔어?!

옆에 있던 가연은 그런 당황한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어이구, 우리 예쁜이 어떡해? 집까지 비 맞으면서 가겠네?”

“시끄러 이 녀석아!”

그렇게 한참동안 행방이 묘연해진 우산을 찾아 교실 안을 샅샅이 뒤지던 그는,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우산으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곤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정녕 신은 날 져버린 것인가. 그러던 그는 포기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잘 구슬려 보기로 했다. 제일 첫 번째 타깃은 앞집에 살고 있는 천은혜였다.

“은혜야.”

“응?”

“집에 갈 때 우산 같이 쓰고 가자.”

그의 말에 은혜는 난처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아아, 미안. 나 오늘 가연이랑 같이 청소당번이야.”

“뭣?!”

“후음. 조금 늦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기다렸다 같이 갈래?”

아, 이런 젠장.

그는 안 되겠다 싶어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이, 우리 집까지 같이 가 줄 친절한 친구 어디 없는 겐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고 있는 시선은 모두 냉혹한 것들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애에게 한 우산을 쓰고 가자고 말하다니 저런 파렴치한 자식! 도대체 얼굴에 무슨 철판을 깔고 있는 거야!?’

그렇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반 친구들의 모습에 지현은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키게 되었다. 어이, 친구들? 당신들 눈빛에 살기가 담겨져 있어?!

그러던 그에게 한줄기 광명과도 같은 구원의 손길이 내려졌으니.

“내가 같이 가줄게. 집도 가까운데.”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소꿉친구 유라였다. 때문에 지현은 왠지 모르게 주변 친구들의 분노게이지가 더욱 더 상승하고 있다고 느껴버렸다.

 

@

 

“아, 정말 살았다.”

가까스로 교실에서 도망쳐 나온 지현은 그렇게 유라와 함께 오늘 아침에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걷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진 지현. 하지만 그 우산은 없어졌다기 보다는 숨겨졌던 것이었다. 유라가 이렇게 그와 둘 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그의 우산을 숨겼었으니까. 그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자신의 사물함 안에 그의 우산을 집어넣고 자물쇠를 잠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괜히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기는 유라였다.

‘아냐. 미안해 할 것 없어. 지현이의 마음을 나에게 돌리려면 이런 작은 이벤트부터 필요해.’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합을 넣는 그녀. 아잣! 파이팅이다 최유라!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어둑어둑해 질 때 돌아가던 평소와는 다른 하굣길 풍경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이고인 도로위로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들.

그 옆의 인도에서 같은 우산아래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걷고 있는 두 남녀.

바닥을 수놓는 비의 파장, 물기를 잔뜩 머금은 가로수, 귓가를 울리는 빗소리.

상큼한 빗 내음과 함께, 곁에서 걷고 있는 사람에게서 은은하게 전달되어오는 달콤한 체취.

무슨 멜로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모습에 유라는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현은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비를 맞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행이라며 가슴속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유라가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소녀라 할지라도 지현에게 그녀는 그저 11년 지기 소꿉친구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유라는 조금 불만이었다. 그는 자신을 전혀 이성으로 봐 주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어필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우산을 들고 있는 지현에게 팔짱을 끼며 조금 더 몸을 밀착 시켰다. 이, 이러면 어때?

“야. 왜 이렇게 달라붙어?”

자신의 생각에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 지현의 모습에 말없이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마는 유라.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던 지현은 곧 그녀의 어깨가 비에 의해 조금 젖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아? 그거 때문에 그런 거구나.

그렇게 멋대로 착각을 해버린 지현은 피식 웃으며 우산을 조금 더 그녀 쪽으로 기울여주었다.

“됐냐?”

됐긴 뭐가 됐어! 유라는 여전히 별 말없이 찌릿한 눈빛을 보냈다.

“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얻어 쓰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거 조금 젖으면 어때서 그래?”

그녀는 그런 눈치 없는 그에게 퍽퍽 주먹을 휘두른다. 맞아도 싸. 네 녀석은 맞아도 싸!

“야! 네가 주먹 휘두르면 살인미수라니까, 이 태권소녀야!”

“시, 시끄러! 시끄러우니까 그냥 맞아!!”

문득, 최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유라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현.

‘흐음. 요즘엔 더 자주 화내고, 더 잘 삐지는 것 같다니까. 설마 너 아직까지 그날인거냐?’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툴툴거리며 자신에게 매달린 채 붕붕 주먹을 휘두르는 그녀를 내려 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퍽! 퍼억! 윽, 야? 아얏…!

“야 이 계집애야. 진짜로 아프다니까? 너도 설마 자신의 주먹은 아무리 때려도 아프지 않을 거라고 맹신하는 그런 철없는 여자애들 중 한명은 아니겠지?”

유라는 그런 지현의 투덜거림에 대뜸 화를 내었다.

“흥! 여자애? 네가 언제 날 여자애로 봐 준적이 있어?!”

그렇게 의미심장한 대사를 내뱉는 그녀였지만 지현에게는 그다지 의미심장한 이야기로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 워낙에 잘 어울리던 사이라서 그런지 역시나 그런 그녀가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뭐야? 태권소녀 주제에 이제는 가녀린 여자아이 대우 좀 해달라는 거야?”

“여, 여자아이인걸!”

비가 수놓는 길 위로 이어지는 가벼운 발걸음.

계속해서 내리는 빗줄기가 우산위에 떨어지며 주변의 모든 소리들을 지워버린다. 둘 만의 작은 세계 안에 남겨진 소년과 소녀. 그렇게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같은 우산을 쓰고 가는 그들은 각자 저마다의 감정의 품은 채, 학교 주변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어쨌든 난 지현이가 좋아. 안 그러면 내가 이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을 거 아냐? 이렇게 떨리진 않을 거 아냐? 여, 역시, 지현이 우산을 숨기길 잘 한 건가? 이렇게 내 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으니 잘 한 거겠지?’

그렇게 머릿속에 온통 지현에 관한 생각으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때.

유라는 갑작스레 옆에 있던 지현이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모습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유라를 꼭 끌어안는 지현.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멍청히 서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 에엣? 꺄악! 뭐야 너! 갑자기 왜 그래?!

그렇게 그녀가 당황 속에 빠져있을 때였다.

<촤아아아~!>

시원한 물보라를 그들 쪽으로 뿜어대며 차 한 대가 쌩 하니 지나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그들 쪽으로 빗물을 시원하게 쏟아 내버린 그 차는 그런 것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잽싸게 그들에게서부터 멀어져만 갔다.

‘아이 씨! 뭐 하는 작자야 저 사람?! 이런 비가 잔뜩 고인 길에서 저런 식으로 운전하다니! 저런 식으로 달려들면 피하고 싶어도 피하질 못하잖아! 게다가 이제 조금씩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는데! 이이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지현에게 안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발끈해 연신 속으로 투덜거리던 유라는 문득 정작 자신에게는 그다지 빗물이 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응? 이, 이건….

“푸핫. 씨, 제길. 뭐야 이거.”

유라를 감싸며 차가 뿜어낸 그 빗물을 혼자서 다 받아낸 지현. 그는 그렇게 우산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유라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물을 잔뜩 뒤집어써서 군데군데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교복도 그녀를 보호하느라 빗물에 완전히 엉망이 되어있었다. 말이 좋아 빗물이지 완전 흙탕물에 가까웠으니까.

유라도 완전히 빗물에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현이 이렇게 보호를 해주는 통에 그나마 멀쩡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그가 보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지금의 그와 같은 꼴이 되어버렸을 테지.

유라를 보호해준 지현.

그리고 그녀 대신 피해를 입어버린 그.

때문에 유라는 놀라움과 갑작스레 솟아 올라오는 미안함. 그리고 말로는 형용 못할 어떠한 미묘한 감정으로 인해 어쩔 줄을 몰랐다. 당황한 그녀는 그저 커다래진 눈망울로 지현을 바라보며 금붕어마냥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상태에서 몇 초 정도가 더 흐른 뒤에야 그가 자신을 꼬옥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그녀는 그렇게 방금 놀랐던 것과 또 다른 감정 때문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젠장, 정신 좀 차리고 다녀! 무슨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렇게 유라를 내려다보며 소리 지르는 지현.

하지만 유라는 그런 그를 보고 어떠한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이 두근거리는 묘한 감정에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으, 으응? 이, 이건…. 왜, 왜 이러지?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지?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거야? 이, 이럴 땐 어쩌면 좋은 거지?

그렇게 당황한 듯 움찔거리는 그녀.

….

…?

…??

응?

뭐, 뭐야 이건? 이게 왜 여기 올라와 있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뒤늦게, 볼록 솟아오른 자신의 가슴위에 누군가의 낮선 손길이 닿아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꼭 껴안은 지현의 손이 자신의 한쪽 가슴을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순간 사고가 정지하는 것을 느낀 그녀는 다시 한 번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뀌어 버렸다.

너,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게 경악이 가득 찬 시선으로 그의 얼굴과 그가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바라보는 유라. 그녀의 표정에 지현도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자신의 손이 지금 아무런 생각 없이 저질러버린 짓에 대해 사려 깊은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어? 아? 아아. 이, 이건 말이지…?

그리고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빙긋 웃더니 그녀에게 우산을 건넨 후,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미안. 불가항력이었어.”

마치 이대로 도망이라도 가 버릴 것 같은 그의 모습. 지현은 그렇게 움찔거리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멍청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응, 그래. 불가항력이지.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유라는 빙긋 웃는 지현을 마주보곤 똑같이 빙긋 웃어주었다.

예상외로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에 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다행이네.

하지만 그녀는 빙긋 웃는 표정으로, 안심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혼신의 힘이 담긴 필살의 하이킥을 선물해 주었다.

내 가슴이 어때?! 만져보니까 부드럽고 좋더냐?!!

<퍼억! 퍽 퍽 퍽…!>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야잇! 젠장 왜 때려! 야! 진짜 아프다고!! 발차기에 살의가 담겨 있잖아!!”

“시끄러! 그냥 맞아! 부탁이니까 그냥 좀 맞아!!”

비오는 거리에서 서로간의 뜨거운 감정(?)을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있은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같은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 그들. 곁에 있는 유라는 웬일인지 볼이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현은 그런 그녀의 옆에서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폭삭 젖어버린 머리카락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 젠장. 그나저나 큰일이네, 교복이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바지는 한 벌밖에 없는데 낼 학교는 어쩌란 말이야? 집에 가서 빨아도 비 때문에 빨리 마르진 않을 텐데.”

그런 그를 힐긋 바라보는 유라.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말을 꺼내려다 삼키는 그녀. 그녀의 그 말은 웬일인지 밖으로 쉽사리 나오지가 않았다. 어, 어쩌지?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려줄 절호의 찬스일 수도…. 지금밖에 없는데.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데….

그렇게 망설인지 얼마나 되었을까. 결국 결심을 내려버린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마른침을 삼키며 외치듯 말했다.

“내, 내가 빨아줄 테니까, 우리 집에 잠깐 들렸다 가지 않을래?”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 지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라고?”

유라는 황당하다는 그의 눈빛에 왠지 모를 긴장을 느끼며 대답했다.

“내가 빨아준다고!”

“야, 뭣하러? 우리 집에서 빠나 너희 집에서 빠나 똑같잖아? 설마 미안해서 그러는 거냐?”

그의 말에 유라는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 그래 이 멍청아! 게다가 우리 집은 드럼세탁기니까 건조도 금방 될 거야.”

그녀의 말에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반가워하는 지현.

“아? 그래? 그거 다행이네! 야, 잘 됐다. 그럼 신세 좀 지자.”

유라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며 눈썹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홍조가 띤 볼을 애써 감싸는 그녀. 조,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바보야. …두근거리잖아.

우산을 쓴 사람들로 가득한 역 앞과 지현의 집 쪽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어느 아파트 단지. 카드키로 공동현관을 통과한 그들은 곧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21층에서 멈추는 엘리베이터. 그렇게 지현은 유라의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카드키를 꺼내 대문을 여는 유라. 쳇. 역시 고급 아파트는 대문도 카드로 여는구나. 언제 봐도 부럽구만.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문이 열린다.

그녀의 집안은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호화스러운 모습이었다. 현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넓은 거실. 그 거실에 자리 잡은 52인치 벽걸이 TV와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장. 그리고 그 위에 놓여있는 작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분수.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이며 각종 장식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주눅을 들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락날락하던 곳이라 면역이 되긴 했지만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부러움을 느끼는 그였다. 젠장. 우리엄만 뭐하는 거야? 기껏 고생해서 50억 로토 맞게 해줬는데, 우리도 이런 집으로 이사 좀 가자고! 그렇게 유라의 집안을 둘러보던 지현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응? 그런데 아무도 없는 거야? 왠지 휑하네?”

그런 지현의 말에 유라는 유난히도 새침하게 대답한다.

“당연하지 바보야. 지금 시간이 몇 시 인데. 아빠랑 엄마는 지금 태권도장에 있고 언니는 회사에 있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생각했다.

말 했어.

말 하고 말았어.

우리 집에 아무도 없다고 말 하고 말았어.

집에 너와 나 둘 뿐이라고 말 하고 말았어.

이, 이쯤 되면 저 둔탱이도 뭔가 눈치를 챘겠지? 내 마음을 알아봐 주겠지?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지현은 그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래?” 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납득하고 말았다. 야, 이…! 너, 너무 하잖아 진짜!

그렇게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흙탕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신발을 벗던 지현은 문득 자신의 신발과 함께 양말까지 물세례를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현은 한숨을 내 쉬며 먼저 집안으로 들어선 유라에게 말한다.

“야. 수건 좀 가져다 줘.”

“응?”

“양말까지 젖었어. 이대로 너희 집 거실에 발자국을 남기긴 싫다고.”

유라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 욕실로 뽀르르 들어가 새 수건을 하나 꺼내서 그에게 홱 던졌다.

“아, 땡큐.”

날아오는 수건을 잡아챈 지현은 이내 양말을 벗더니 푹 젖어버린 머리와 발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닦아내며 귀찮다는 듯 연신 툴툴거리는 그.

‘이런 젠장, 이걸로는 턱도 없네.’

그러던 그는 이내 유라에게 말했다.

“야. 이왕 신세지는 김에 욕실도 좀 빌리자. 머리 감아야겠다. 냄새나네.”

유라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그렇게 지현을 뒤로한 채 거실에서 벗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는 그녀.

‘일단은 갈아입을 옷을 줘야겠지?’

그녀의 집에는 남자 옷이라곤 아빠 옷밖엔 없었다. 지현에게 아빠 옷을 입히자니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드는 그녀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뭐 지현이랑 우리 아빠랑 키는 비슷하니까 입혀놓으면 대충은 맞겠지.’ 그렇게 옷장에서 그에게 입힐만한 적당한 옷을 챙겨든 그녀는 이내 다시 그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그녀가 옷가지들을 들고 나오자 이내 ‘저게 뭐야?’ 라는 표정을 짓는 지현. 유라는 그런 그를 향해 별 말없이 그 옷가지들을 건네주었다.

“아? 이거 나 입으라고? 갈아입으라고 주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그녀.

“그래. 들어가서 샤워나 해. 옷은 그 틈에 빨아 둘 테니까.”

지현은 그런 그녀의 말에 씨잌 웃으며 말한다.

“아? 고마워 유라야. 신세 한번 질게.”

“옷은 갈아입고 문 밖에다 내놔.”

지현은 그렇게 옷가지를 들고 재빨리 욕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 30초쯤 지났을까? 유라는 그가 들어가며 닫아버린 욕실 문이 작게 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열린 문의 작은 틈새 사이로 지현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며 말한다.

“자, 여기.”

그렇게 그의 손이 문틈에서 나와 더러워진 자신의 교복을 내놓았다. 살짝 드러난 그의 상체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유라는 그런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에…, 이거 왠지 부끄러운 걸? 지금 저 욕실 문 너머로 발가벗고 있는 지현이가 있다는 거잖아?’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발개져버린 그녀는, 뜨거워진 볼을 감싸며 지현의 옷을 냅다 집어 들었다. 그리곤 혹시라도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들킬까봐 도도도도 재빠른 걸음으로 부엌 옆의 세탁장에 몸을 숨기고 말았다.

‘하아, 하아. 뭐야?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저런 녀석의 알몸 따위, 관심 밖이라고!’

그렇게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한숨을 크게 ‘후우-’ 하고 내쉬는 그녀.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애써 감싸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의 옷을 세제와 함께 세탁기 속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그녀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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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어... 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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