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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장수와 사진찍는 소녀 by 먼지.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웃는 매드헤터와 사진에 미친 삼월 토끼. 현실세계에 등장하는 괴물 들. 싸우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이상한 현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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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69    추천 0   덧글 0    / 2008.03.12 00:13:59

4.

 \"반장이 선생님 좀 불러와.\"
 누군가 말했다. 그러자 떠들던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는 눈빛이었다. 공기가 옅은 에메랄드 빛을 띄었다. 미묘한 눈빛이 아이들 사이를 휘감았다.
 \"그냥 내버려둬. 올 때 되면 오겠지.\"
 너희가 언제 공부했냐? 자유시간인데 즐기자고. 라는 말투였다.
 \"그래도 혼나지 않을까.\"
 \"괜찮아. 출장이라도 나간 모양이지. 조용히 하고 있으면 돼.\"
 합의를 본 것 같았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떠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목이 졸렸다. 이렇게 합의가 나는 구나. 내가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을때도 이런 식이었을까? 자기 편한쪽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납득지어 결정을 내렸을까. 그래서 난 입학 초부터 괴상한 소문에 휩싸이고 남자아이들의 눈요기로 전락하고 친구라곤 정연이 하나밖에 없는 것일까.
 머리가 욱씬 쑤셔서 또 진통제를 씹어 먹었다. 정연이는 내 곁에 앉아 괜찮아? 하고 물었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문득, 정말 문득 민준선배가 생각났다. 날 이성의 눈길로 보지 않는 사람. 어린애취급하며 실실대는 남자. 이 학교 내에서 날 여자로 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를 남자로 보고 있었다. 편견이라도 상관 없으니 성적대상으로 봐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가 이성으로 대하는 사람은 오직 정연이 뿐이었다. 정연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버릇처럼 사진기를 꺼내 사진을 봤다. 민준선배의 모습이 사진 곳곳에 찍혀 있다. 작은 사진부터 큰 사진까지. 디카의 좋은 점은 클로즈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선배의 얼굴을 확대해서 들여다보았다. 아- 좋다. 이런 맛에 사진을 그만 둘 수가 없어. 이렇게 선명하게, 눈앞에서 살아있다.
 정연이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다가 내 사진기를 힐끗대길래 재빨리 전원을 껐다. 전원이 꺼지자마자 쉬는시간 종이 쳤다. 아싸, 시간 때었다,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정연이와 함께 화장실을 갔다.
 \"너~민준선배 좋아하지?\"
 정연이가 헤실 웃었다.
 나는 손을 씻다가 이게 뭔 이야긴가 싶어 정연이를 바라보았다.
 \"다 알아~ 선배만 보면 얼굴 붉히잖아. 선배도 너 좋아하는 눈치고.\"
 그게 어딜 보면 날 좋아하는 눈치인가. 선배가 날 보는 눈은 완벽히 어린애를 보는 눈이다.
 \"내가 밀어줄게! 은하야, 민준선배한테 네가 선배 좋아하는 거 같다고 말했더니 말이야, 싫어하는 반응은 아니었......\"
 \"너 무슨 짓이야?\"
 알고 있다. 정연이는 악의가 없다는 걸. 순수하게 동정하고 날 돕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아저씨에게 떼를 쓴 것 처럼.
 \"하은아?\"
 \"누가 그런 짓 하래. 참견 좀 하지마. 멋대로 말해 버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그 정도 생각도 없어?\"
 정연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미아가 된 어린애처럼 갈 곳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넌 내 말은 하나도 믿지 않잖아?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거지? 강간당했다고 생각하지.\"
 대답하지 못하는 정연이를 두고 나는 화장실을 나왔다. 어린애처럼 앙앙 우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화장실에 사람이 꽤 많았다. 다 들었을것이다. 이제 소문이 퍼지겠지. 어쩌면 정연이는 날 멀리할지도 모르겠다. 사회엔 언제나 아웃사이더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웃사이더는 필요한 존재다.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특히 학교같은 곳은 더더욱. 아이들은 이 기회에 정연이를 끌어 들이고 날 혼자로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교복 치마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정연이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받지 않자 이번에는 일분 간격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사과를 하고 있었다. 신경질을 낸 건 난데. 딱히 사과할 건 없는데. 정연이가 착각한 거라고 민준선배한테 웃어 넘기면 되는데.
 \"멍청이!\"
 감정이 북받혀서 눈물이 나왔다. 겨울의 새파란 공기가 입속으로 들어왔다가 하얀 색으로 변해 밖으로 나왔다. 울고 있는 동안은 열이 나 괜찮았지만 막상 울고 나자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생각보다 추웠다.
 시계를 보니 수업이 시작한지 15분이나 지났다. 이제와서 들어가느니 양호실로 가는 편이 낫다. 하지만 양호실에 정연이가 있으면 어쩌지?
 단 하나뿐인 친구를 피하게 되다니. 웃음이 나와서 실실 쪼개고 있자니 이성의 비웃음이 들렸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 째냐? 한심아. 과민반응은 늘어서는 정연이에게 상처나주고.
 \"미안해.\"
 됐어, 어떻게 할 거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이성이 화를 냈다.
 \"미안하다니까! 사과 하면 될 거 아냐!\"
 \"사과할 필요 없어. 아가씨. 이 학교는 포위됐으니까.\"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났더니 헛소리가 들렸다. 옆을 바라보니 괴이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알았다! 나는 또 환각을 보고 있구나. 이번에는 다행히 얼굴과 팔다리는 멀쩡해지만 옷이 매우 수상쩍었다.
 \"너만은 지켜줄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네모 반듯한 모자를 쓴 그가 빙그레 눈웃음쳤다. 모자엔 은빛 쇠사슬이 감겨있다. 알 수 없는 문양도 그려져 있다. 턱시도를 쫙 빼입은 사내는 어쩐지 낮이 익은 얼굴이었다.
 자세히 봤더니 아침에 봤던 그 남자였다.
 \"아, 아까 봤던 최재현씨.\"
 \"아니, 난 매드해터. 만나서 반가워 아가씨.\"
 안경을 쓰지 않은 그의 하얀 오른쪽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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