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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장수와 사진찍는 소녀 by 먼지.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웃는 매드헤터와 사진에 미친 삼월 토끼. 현실세계에 등장하는 괴물 들. 싸우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이상한 현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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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38    추천 0   덧글 0    / 2008.03.18 21:33:47

16.
우리와 합류한 도르트는 주린 배를 쥐어잡고 용케도 허기를 참으며 나와 템포를 맞춰 걸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바델의 넓적다리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울상을 지은 바델은 내팔에 매달리다시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키가 오센티가 커 보이는 청년을 옆구리에 끼고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바델의 넓적다리를 향해 침을 흘리는 도르트에게 그만두라고 할 용기도 없어서 잠자코 걸었다. 왜 도르트는 생선만 먹는다고 해놓고 바델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걸까. 덕분에 가운데 낀 나만 고생이지 않은가. 참다못한 내가 도르트에게 질문했다.
 “바델에게 무슨짓을 했길래 이모양 이꼴로 내 곁에 붙어서 안떨어지는거에요?”
 도르트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이라는 뻔뻔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침을 닦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결백하다는 표정이었다.
 “이길은 여왕의 거처로 가는 길이 아닌데?”
 게다가 그는 말까지 돌렸다.
 “......우리는 모자장수의 집에 들릴거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바델이 대꾸했다. 나는 그가 도르트의 말에 대답한 걸 기특하게 생각해 그의 귀를 톡톡 쓰다듬었다. 축 쳐진 바델의 두 귀가 약간이나마 생기를 찾았다.
 “삼월토끼.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길가에 난 커다란 빨간색 버섯을 뜯어 입에 집어넣으며 도르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제 이름은 은하은이에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한다면, 현실에요.”
 “여기가 현실이잖아.”
 나는 그가 날 놀리나? 싶어서 도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바깥세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현자라고 하기에 정말로 현자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기운이 빠졌다.
 바델은 도르트와 삼미터의 거리를 두고 경보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걸음걸이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걸어야했다. 내 팔을 자꾸 끌어당기는 바델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슬쩍 힘을 줘 그를 밀쳐내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포기하고 비탈길을 걷기로 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은 공기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중간중간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개구리를 만난 건 무척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과거의 여운에 잠기려는데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뭔일인가 했더니 도르트가 개구리 뒷다리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내 낭만을 사정없이 깨는군요.”
 “미안. 배가고파서 말이지. 바델의 넓적다리가......아니 생선이 먹고 싶어져서.”
 도르트의 여유작작한 대꾸에 바델이 흠칫 몸을 떨더니 거의 뛰다시피 앞장서 걸었다.
 어디까지 걸어야하지? 이십분은 걸은 것 같다. 슬리퍼는 이미 진흙범벅이고 새하얗던 양말은 진갈색이 됐다. 게다가 교복은 모조리 젖어 축축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실과 달리 앨리스의 나라는 봄이라는 거다.
 “봄이어서 다행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도르트가 끼어 들었다.
 “앨리스의 나라는 계속 봄이야. 이상기후지.”
 “이상기후라뇨?”
 “나는 삼월토끼, 네가 사라져서 계속 삼월만 지속되는 줄 알았어.”
 “내 탓이라고요?”
 “아냐, 네 탓이 아냐. 앨리스는 지금 풀이죽어있어서 그래. 그렇지, 내가 먹었던 조그마한 생쥐처럼 말이야. 풀이 죽었어.”
 도르트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생쥐맛이 퍽이나 좋았던 듯 하다.
 “가정불화로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보다 바델? 나 배가 고파.”
 바델은 도르트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작게 신음하더니 내 팔을 끌어안은채로 이번엔 뜀박질을 했다.
 “좀 천천히가요 바델! 도르트는 아무짓도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 믿을 수 없어. 난 체셔만큼 거짓말 잘하는 동물을 본 적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나만큼 정직한 고양이도 없어.”
 도르트는 선량한 미소를 띄고 눈웃음을 쳤다. 그는 걷고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뛰고 있는 우리들과 같은 속도를 내고 있었다.
 “네 귀 한짝만 떼주면 안될까?”
 그 말에 바델은 경기를 일으켰다. 나는 상황을 중재하기위해 엄숙한 표정으로 도르트를 나무랐다.
 “도르트! 바델의 귀는 얇아서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거에요.”
 그러자 바델은 내 팔을 놓고 혼자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의 꽁무니를 쫓았다. 내 곁에서 달리던 도르트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너와 제대로 대화해 본 건 거의 처음이로군.”
 오른팔로 내 허리를 안고 왼손으로 바델의 귀를 낚아채며 도르트가 말했다. 바델은 또 흠칫놀라 몸을 떨었지만 나는 말리지 않았다. 날 두고 도망간것이 괘씸해서였다.
 “과거의 나는 무슨 성격이었어요?”
 내 질문에 도르트는 난처한 기색으로 날 내려보다가 히죽 웃었다. 아니 그는 이미 웃고 있다. 언제나 웃는 입모양이다.
 “사랑에 미친 삼월토끼. 발정기여서 아주 예민했지.”
 “그래서요?”
 “그것 뿐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그럼 됐어.”
 그는 나지막히 미소 지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게 매드해터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굴 열혈이 사랑하고있고, 매드해터는 날 사랑했다. 내가 사랑한 게 매드해터든 다른 사람이든, 매드해터는 내 인생에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다.
 새삼스럽게 그를 떠올릴 때 바델은 화색을 띄고 매드해터의 집을 가리켰다. 그게 매드해터의 집이란 걸 알기 위해서 내가 아주 대단한 천재일 필요는 없었다. 집은 거대한 모자를 거꾸로 얹어놓은 듯 보였다. 실제로 그건 매우 커다란 모자같이 보였다.
 피로와 겁에 찌든 시계토끼는 문이 부서져라 두들겨댔다. 나는 바델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큰 소음이 아니면 집 안에 사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시끄럽게 무슨 일이야. 어라? 넌 삼월토끼아냐? 그리고.... 바델씨도 오셨네. 이리 와서 앉으세요. 그리고...... 그리고.......”
 “체셔 도르트.”
 “아아, 고양이는 돌아가주면 기쁘겠는데 말이죠.”
 생쥐가 톡톡 쏘아붙였다. 나는 어딜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체셔가 조금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생쥐씨. 저는 은하은이라고해요. 도르트는 우리 손님이에요.”
 “삼월토끼 너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서 왔구나. 어디서 신부수업이라도 하고 왔어?”
 이름을 강조했지만 생쥐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날 삼월토끼라고 불렀다. 신나게 떠들던 생쥐는 도르트가 집안에 발을 들여놓자 정색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별 제지는 하지 않았다.
 생쥐가 커다란 테이블에 우리를 앉혔다. 그러나 도르트의 자리는 마련해주지 않았다. 생쥐는 자리가 없어, 라고 나지막히 도르트에게 속삭였다. 바델의 대꾸엔 능글맞았던 것과 달리 도르트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구석에 있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차는 없나요?”
 “너 완전 미쳤구나? 차가 있을리 없잖아.”
 내 질문에 생쥐는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더니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도르트와 생쥐사이의 묘한 기류를 무시한 채 나는 바델에게 속삭였다. 바델은 바다 한가운데서 산소호흡기라도 발견 한 사람처럼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저 쥐는 누구에요?”
 “비잉니스. 줄여서 비잉이라고하고, 더 줄여서는 빙이라고들 하지. 그리고 도르트의......”
 바델은 말을 하다말고 도르트의 눈치를 봤다. 도르트는 예의 그 미소를 띄고 얌전히 앉아있었는데 언뜻 풍겨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바델이 한마디라도 더 지껄였다가는 뺨이라도 갈기고 귀를 쪽쪽 찢어 먹어버릴 분위기였다.
 “내 친구야.”
 도르트는 쌀쌀맞은 어투로 바델의 뒷 말을 이었다.
 “친구는 무슨 친구. 너 같으면 널 좋아하겠니?”
 생쥐의 대꾸에 도르트는 완전히 울적해져서 손톱으로 탁자를 긁었다. 보라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길다란 인공손톱이 나무탁자에 흠집을 냈다.

 \"...저기, 사진 한장 찍어도 될까요?\"

 어색한 공기를 풀어보려 내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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