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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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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1219    추천 0   덧글 1    / 2008.03.24 07:02:43
보는 눈이 시리도록 흰 눈이 쌓여 있는 세계.
그렇게 많이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곳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은.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오직 눈(雪)만이 존재할 뿐.
그때 문득 소리가 들려왔다.
“흐흑…, 흑.”
누군가의 흐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자, 그곳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누군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눈 속에서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던 것은….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리고 눈에 띄도록 길쭉한 귀를 가진 한 소녀였다.
“흐흑….”
10,11살쯤 되었을까 가녀린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녀였다. 나는 소복이 머리에 눈이 쌓여있는 그 소녀가 슬퍼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다독여주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앙증맞아 보이는 양손으로 닦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물방울이 소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얼마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새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발걸음을 향하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주며 말하고 있었다.
“울지 마.”
그러자 흐느낌을 잠시 멈추고 소녀는 뒤돌아보았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소녀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 * *
눈을 뜨자, 책상이 코앞에 보였다. 그리고 이마를 짓누르는 이 느낌. 이건 아마 양팔을 교차시켜 이마에 갖다 댄 채로 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마가 얼얼한 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하지만 여기까진 좋았다.
평소에는 없던 다른 감촉. 머리 위에 딱딱한 무언가가 올라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싱긋 미소를 보이고 있는 베트남의 얼굴이 있었다. 그새 2교시인가.
그나저나 손바닥이었냐? 항상 갖고 다니는 그 흉기가 아니라?
난 베트남을 올려다보며 왠지 미소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그때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나와.”
상쾌하게 말하는 베트남의 협박성 어조로 인해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내 옆은 이미 공석이었다. 그 앞을 본다.
“미안~ 머리를 두들겼는데도 안 일어나더라.”
한희가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하고 있었다. 웃지 말아줘.
교단으로 걸어가던 나는 먼저 나가서 대기하고 있는 동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너도냐?”
“깨워달라고 했는데…, 망할 놈.”
“미안, 나도 수면부족이었거든.”
나의 진심어린 사과에도 불구하고, 성호 녀석은 원망의 눈초리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승태를 슬쩍 바라보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베트남은 나와 성호 녀석의 따뜻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것조차 싫었던 것인지, 드디어 그의 미소를 보여준다는 테러를 그만두었다.
“수다 떠는 건 쉬는 시간에 해라. 그렇게 교단에 서서 수다 떨고 싶던? 어쨌든 열 대 더하기 두 대. 도합 열 두 대씩만 맞자.”
…열 대면 열 대고 열 두 대면 열 두 대지 왜 그렇게 되는 겁니까? 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더 맞을까봐 그러한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물어본 적도 없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친절하게 풀이해주는 우리의 베트남.
“기껏 시험기간이랍시고 자습할 시간을 줬더니 잠을 자서 열 대, 두 놈이 잤으니 플러스 두 대다. 맞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리고 웃었다. 아니, 후자는 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게다가 왜 웃는 건데?
성호 녀석도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어느새 구겨져있었다. 베트남은 흥얼거리듯이 콧소리를 내며, 구석에 세워 둔 하키 채[…]를 집어 들었다.
아무런 비명도 없이, 그저 고통에 의한 신음소리가 한 동안 교실 내에 울려 퍼졌다.
* * *
한 번 꾸었던 꿈을 이어서 꾸는 것, 혹시 당신이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난 알 수 없다. 이런 경험이 그렇게 흔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나 역시 두 번째니까. 첫 번째는 어떠한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두 번째는 바로 지금이었다.
나와 소녀는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웠던 탓인지 소녀의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소녀에 대한 첫 인상은 귀엽다. 라는 한 마디로 일축할 수 있었다.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 소녀는 그 선해 보이는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난 눈을 마주친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양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더니 입을 열었다.
“──.”
소녀가 무언가 말한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
한 번 더 말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세 번째 소녀가 벙긋거리는 것으로 나는 그 입모양으로 인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었다.
‘고마워.’
* * *
왠지 모를 기분에 사로잡힌 채 나는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수업이 끝난 정도가 아니라 종례조차 끝나 있었다. 어느새 반 아이들은 대부분 하교했는지, 교실에는 청소하고 있는 녀석들 몇몇밖에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 시간 이후로 줄곧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도 아픔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흉기에 맞았으니 나이○문신이 새겨져 있을 터였다. 망할. 엉덩이가 얼얼하다.
나는 마치 갓 깨어난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학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그러다….
-짜악!
조용히 가방을 챙기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내 엉덩이를 가격했다. 베트남에 의하여 생긴 성흔에 불로 지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을 만큼 아프다.
“크아아악…!”
“사내대장부가 그거 갖고 엄살은…. 자.”
눈물을 살짝 머금은 채 뒤를 돌아보니 네모난 파스를 팔랑거리고 있는 한희가 있었다.
“뭐, 제대로 못 깨운 내 탓도 있으니까. 받아 둬.”
나는 조용히 그녀가 내민 파스 한 장을 받아들었다.
“후, 어찌 됐든 고맙다.”
조용히 주머니에 꾸겨 넣으며 말한다. 그게 뭔 불만이었는지 한희가 말했다.
“이런, 바로 붙여야지. 뭣하면 붙여줄까?”
그 환상적인 문신이 새겨졌음이 분명한데 다른 사람에게 파스 같은 걸 붙이게 놔둘까 보냐. 애초에 스스로 한다고 해도 엉덩이 같은 곳에 파스를 붙이고 떼는 나 자신의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정중하게 거절한다. 근데 넌 오늘 부 활동 안하냐?”
“슬슬 하러 가야겠지? 그러면 내일 보자.”
뭐가 그리 좋았는지 한희는 까르르 웃으며 먼저 교실을 나갔다. 저 녀석은 뭐가 그렇게 매일 같이 즐거운 지 알 수가 없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나 역시 가방을 메고 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야자는 없다. 그래봐야 대다수의 애들이 학원을 가지만. 학교수업은 등한시하고 학원교육에 목을 매는 무언가 뒤집힌 생활을 나란 녀석은 하고 있었다. 아니, 나뿐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서도. 하지만, 오늘은 결국 수면이 평소보다 더욱 부족했던 탓인지 학원에서조차 졸고 말았다. 아니, 대놓고 잔 학교와 졸은 것이 차이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결국 학교에서는 육체적으로 까이고, 학원에서는 정신적으로 까여버렸다. 성적도 하위권이니,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그러한 존재밖에 될 수 없겠지.
수업이 끝나고 학원을 나온 나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뭐가 5퍼센트냐, 망할 기상청.”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근처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 * *
“후….”
우산만 사기엔 배도 좀 고프고 뭐했기 때문에, 삼각 김밥을 두 개 사서 하나는 그 자리에서 먹고, 하나는 주머니에 박아두었다. 두 개는 먹어야 배가 좀 찰 듯싶었는데, 입맛이 없었던 것인지 하나 먹었을 뿐인데도 단숨에 식욕이 날아갔다. 왠지 모르게 전체적인 의욕 또한 급격히 감소했다.
“수능이라….”
딱히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남들도 다 가는 것이고, 요즘 들어 대학이란 심한 말로 그래, 개나 소나 다 가는 곳이라고들 하니까.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하고, 외어지지도 않는 영단어를 하나라도 더 외우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녀지고, 유치원에 다녀지고, 초등학교에 다녀지고, 중학교에 다녀졌다. 거기서 알게 된 인맥들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 나는 수동적으로 살아왔고 지금 역시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만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된 나이도 되었다. \'자의\'로 행해 온 일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19년 동안 그렇게 많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변하고 싶었다.
수동적인 자신을 타파하고 싶었다.
능동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남들과 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계기가 없었고 목표 또한 없었다. 나란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지금의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문득 처량해져버렸다. 이럴 때마다 나는 항상 도망쳐왔다. 그리고 이럴 때, 내가 현재의 나 자신에게 도망치는 방법이 있었다.
우산을 펼치고 걷기 시작한다. 3월부터 곧잘 다니기 시작한 학원 근처의 초등학교로. 3월부터 배우기 시작한 ‘그것’을 위하여.
초등학교 안에 있는 등나무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같으면 잔디가 깔린 초등학교의 그라운드에서 어두워져도 축구공 하나로 펄쩍펄쩍 신나게 잘도 뛰어노는 꼬맹이들이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비가 오기 때문인지, 인적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우산을 쓰고 조용히 교복 안주머니에서 ‘그것’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 나는 불량이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초등학교 안에서 ‘그것’에 불을 붙인다.
“…후우.”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는다. 수면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조금 어지럽다. ‘담배’라는 것을 배운 지는 아직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었을까? 학교에서 채이고 학원에서 채이고 하던 중, 나는 담배를 피우는 친구 녀석에게 부탁해서 담배 한 대를 얻어 피워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제대로 담배를 피워본 첫 ‘계기’였다. 첫 감상은 어지러움. 그뿐.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시절에 장난삼아 아버지가 피우시던 담배를 얻어 한 모금 빨고 기침을 엄청 하면서 아버지한테 돌려드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약 8년의 시간이 흐를 동안 수많은 간접흡연을 한 탓인지 기침은 거의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의 현재 위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 거기에 무언가 답답한 일이 있을 때면 곧잘 물게 되었다. 가슴 속에 응어리 진 것이 있는데 생각으로 정리되지도 않고 말로 할 수도 없는 그러한 것들이 있을 때 말이다.
담배를 반쯤 태우고, 어지러움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본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 나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응?”
처음엔 인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움직임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갈색의 털을 가진 자그마한 동물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등나무의 의자 아래에서 비를 피하듯이 가뜩이나 작은 그 몸을 더욱 움츠러든 상태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왠지 모를 호기심에 동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하지만, ‘그 녀석’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인지 도망갈 수가 없었던 것인지 내가 접근해도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애플 푸들’
나는 이 종류를 알고 있었다. 잡학박사인 승태가 언젠가 나에게 사진을 들이대며 열심히 설명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우산을 쓴 채로 쪼그려 앉아 가만히 그 녀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기 시작한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배꼽시계가 울렸다. …당연히 내 시계는 아니었다.
-꼬르륵
“…….”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개도 배고프면 저런 소리가 나는 거였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다. 승태에 의하여 억지로 주입되긴 했지만 잡다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 했었는데 단순히 개인적인 착각이었던 것 같다. 허나 결론은 어떻든 상관없다. 배가 고파보이니 먹을 것을 주면 된다.
“…너도 불쌍한 견생(犬生)이로구나.”
난 자리에서 일어나 빗물에 젖은 모래에 담배를 떨어트리고 밟은 후 주머니에서 아직 뜯지 않은 삼각 김밥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포장을 뜯은 후 강아지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조차 감고 있었다. 먹을 것이 눈앞에 있다는 자각이 없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먹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군.”
딱 보니 새끼다. 애초에 강아지의 코 기준으로 몇 십 배는 커다란 것을 들이댔으니 먹으라고 줬던 내가 멍청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군.”
나는 내 입으로 삼각 김밥을 가져갔다. 그리고 적당하다 싶을 정도의 크기로 자른 뒤 녀석 앞에 두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전히 반응이 없다. 그 녀석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뭔가 살짝 짜증이 나서 그 녀석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끼잉….”
그제야 눈을 조금 뜨고 눈앞에 있는 타겟을 확인한다. 내가 알기로 개라는 것들은 후각이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이 녀석은 원래 이상한 건지 비가 와서 후각이 개판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녀석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역시 개는 개였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그 작은 입을 벌려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입을 놀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한동안 단조로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 삼각 김밥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이 녀석 앞에 놔주고 이 녀석은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고. 지나가던 행인이 보면 웬 미친놈 다보겠네 하는 소리 딱 좋을 듯싶었다.
식사가 끝났다.
드디어 다 먹였다. 라는 성취감도 잠시, 이 녀석이 여전히 떨고 있는 것을 눈치 챈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을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플 푸들, 복슬복슬한 갈색 털을 갖고 있는. 일반 푸들과는 좀 다르다. 마치 인형처럼 보이는 외견에 부드러워 보이는 털을 갖고 있는 그 강아지는 안아보니 실제로도 부드러웠다. 또한 세게 안으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먹이를 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반항할 힘조차 없던 것인지 녀석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아니, 품속에 안기자 따듯함을 느낀 건지 오히려 더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삼각 김밥 같은 거 먹여도 되는 거였나? 이도 제대로 안 난 것 같은데.”
왠지 모를 불안함에 나는 내 품의 가장 깊숙이 묻혀있는 녀석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려보았다. …뽑히지 않으려고(?) 조금 발악을 한 것 같지만 고작해야 개 한 마리, 그것도 강아지가 웬만큼 다 자란 남자의 힘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의 앙 다물고 있는 입을 천천히 벌려보았다. 이빨은 조금 나 있었지만 무언가를 씹어 먹을 만한 정도는 되어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제대로 실수했다. 내가 먹인 게 잘못이었다. 분명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꿀꺽꿀꺽 잘도 삼켰을 것이다. 근데 역시 버려진 개일까. 비가 오는데 이런 곳에 놔두기는 역시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던 나는 어느새 나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녀석’을 품에 안고서.
* * *
8시 40분.
예정에도 없던 녀석을 품에 안고서 돌아온 나를 맞이해준 것은 빈 집이었다.
토요일. 하굣길에 어머니가 회식이 있을 거라고 문자를 보내왔던 것 같다. 즉, 한동안은 집에 나 혼자만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우선….
“씻어야겠군.”
아무리 우산을 쓰고 있었다지만 달렸던 탓에 교복 바지가 무릎까지 젖어있었다. 마침 내일은 일요일이다. 한 벌밖에 없는 교복이니 빨아서 말릴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옷을 술렁술렁 벗어재꼈다.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 들어가려 했을 무렵.
“…….”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내가 한 손으로 안고 달리는 바람에 조금 젖은 것 같다. 그냥 수건으로 닦아주기만 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래갖고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고 마른 뒤에 냄새가 나겠지. 나는 그 ‘한 마리’를 녀석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 하나씩 껴서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비를 맞아서 추웠던 것인지 끼잉 하는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은 감고 있었다.
“…그럼 같이 씻도록 할까.”
2006년의 4월 말.
난 예정에도 없던 개와의 혼욕을 하게 되었다.
* * *
살아있는 다른 무언가를 씻긴 다는 것은 의외로 힘들지 않았다. 물을 좋아했던 모양인지 물을 뿌리면 뿌리는 대로 가만히 있고 비누칠을 하면 하는 대로 가만히 있고 말이지.
그렇게 녀석을 씻기고 나도 적당히 샤워를 한 후 거실로 나와 몸을 말리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이리저리 털어가며, 드라이기의 바람을 적당히 쐬게 하니 녀석의 털은 금세 말랐다.
-딩동
그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씻고 나와서 간단히 츄리닝만 입고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어머니가 돌아온 거겠지. 갑자기 집에 개가 있으면 필히 놀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녀석을 순식간에 낚아채 잽싸게 내 방 안의 침대에 집어던져놓고 인터폰을 살폈다.
-시영아, 엄마 왔어~.
아니나 다를까,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머니였다.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숨긴 꼬맹이가 된 기분이었다. …사실 숨긴 게 있는 것은 맞지만. 문을 열자 어머니는 서둘러 들어오더니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아, 지금 막 씻고 나와서요.”
“이거 보렴. 우리 시영이 좋아하는 게 사왔단다. 영덕 대게야!”
어머니는 검은색의 큰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올려 나에게 들이대며 말한다. 어라, 근데 이 냄새는….
“…혹시 술 드셨어요?”
“으응~? 아냐~ 술 먹었다 할 정도는 아니구~ 아주 쪼~금. 아하하.”
“…….”
이제 보니 얼굴이 꽤나 붉으신 것이 조금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말해보세요. 몇 병?”
“으응? 아니라니까~ 그냥 아주 조~금….”
“네, 솔직히 말 안하시면 다음부터 마사지 없습니다.”
“…….”
그렇다.
어머니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그것은 바로 마사지인 것이다. 젊음 유지의 비결은 꾸준한 마사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고 해도 비밀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내 말에 약점을 찔렸는지 여사께서는 게가 든 봉지를 힘없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으, 두 병.”
“주량이 한 병도 안 되시는 분이 뭘 그렇게 많이 드신 거예요? 그거 주시구요.”
“그래, 자~”
나는 봉투를 받아 일단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풀린 얼굴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이끌었다. 어머니는 침대 위에 대(大)자로 그대로 뻗어버렸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화장 지우지 않고 주무셔도 괜찮아요?”
“으음, 괜찮아. 괜찮아. 지우고 잘 거….”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말을 붙여본다.
“여사님, 강초연 여사님.”
“…Zzz.”
반응이 없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은데. 다음날 아침에 무슨 말을 들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화장 지우고 주무시라니까요. 옷도 갈아입으시고요.”
“…음냐. 게가 한 마리…. 두 마리….”
대체 무슨 꿈을 꾸고 계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 보였기에 나는 조금 더 격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강초연 여사님! 일어나세요!”
“후앗, 알이 많이 들어있네. 음냐….”
그리고 주먹을 휘두른다. 빠악! 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안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잠시 어머니의 잠버릇을 잊고 있었던 것이 부주의했었다. 나는 주먹이 가격된 볼을 문지르며 방에서 나왔다.
* * *
나는 소망했다. 나라는 존재가 변하길.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길.
언젠가부터 나는 바라고 있었다.
타의에 의한 자의를 행하는 자가 아닌 자의에 의하여 자의를 행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기를. 밤마다 잠들고 눈을 뜨기 전까지, 눈을 떴을 때 바뀌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기를 하고. 아무것도 변해오지 않았던 나의 일상. 언젠가부터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일상.
4월 25일.
나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 * *
평소와 다름없는 천장을 보며 깨어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요 며칠 수면이 부족했었기에 조금 더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면 잘수록 머리가 멍해진다는 진리를 생각해내자 나는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일어나려 했을 때 나는 내 어깨 근처에서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전날 밤에 여사님 방에서 나와 어질러진 내 방에 기어들어가 잠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한 마리의 개를 안고서.
시선을 옮긴다.
민무늬의 새하얀 이불을 지나 위를 향하고 있던 내 눈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엔 있었다. 적어도 함께 잠들었던 녀석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커다란 귀가.
“…뭐?”
그러고 있기를 몇 초.
“우아아아악!!!!!”
나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침대에서 벗어났다.
“허억…, 허억….”
슬리퍼를 신을 시간 따윈 없었다. 아니,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19년 동안 겪어보지도 못했던 일에 대해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할 만큼 나는 유능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위 눌리는 것은 들어본 적만 있고 실제로 눌려본 적도 없었기에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꿈? 꿈인가? 볼을 살짝 꼬집어보니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다는 것은 꿈도 아니다. 심장은 터져버릴 듯이 뛰고 있었고 등에는 어느새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분명 지금까지 살아왔던 어떠한 사건들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땀이 흐르는 것 따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앞으로 이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속으로 장담했다.
“뭐…, 뭐야!”
내가 악을 쓰는 것에 반응했던 것인지 내 옆에 있었던 ‘그것’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움찔거렸다. 그것은 마치 이불이라는 것을 뒤집어 쓴 거대한 애벌레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그것’의 움직임을 살폈다.
“…….”
1분 1초가 1년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것보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기다린 나는 이불을 삐져나온 ‘그것’의 신체 일부를 볼 수 있었다. 삐져나온 그것은 가늘고 새하얀 것이었다.
“손?! 손이라고?!”
이것이 공포를 컨셉으로 한 몰래카메라라면 아주 훌륭하다는 평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미안해지게도 몰래카메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관람할 수 없는 신작 공포영화를 찍는 주인 주인공의 심정이 되어 나는 그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삐져나온 손은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침대 위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힐 리가 없었다. 그곳에 있던 존재는 이미 도망친 뒤였기 때문에.
“…….”
잠시 동안 지켜보고 있자니 이불에서 내가 있던 곳으로 삐져나온 가늘고 새하얀 그것은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귀로 추정되는 것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만 같아 하는 행동이다.
“…웃.”
나는 사뭇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금 침을 삼킨다.
침대에 있던 그것은 마치 애벌레와 같이 꿈틀거리던 그것은 그 모습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서 신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커다란 갈색의 귀를 가진, 잠이 덜 깨기라도 한 듯,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침대로부터 일어나는,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를.
그러고 있기를 1초.
이 세상의 물리법칙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불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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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5/01/12:03
헤에...그 강아지가 소녀였던건가....
.........그나저나 은발이라니, 너무 제 취향이잖아요 <-어이
문장은 괜찮습니다. 다만 문제라면 \'일상의 대화\'가 조금 길달까요. 매맞으면 그냥 맞는거지 뭔가 독백이 너무 많달까.... 약간 양을 줄여보시는건 어떨까 싶네요. 저도 이전에 1인칭으로 쓰다보니 쓸데없는 내용을 너무 많이 쓴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크게 지적할 만큼은 아닙니다. 제가 이전에 그런 지적을 받은 탓인지 신경쓰고 있는 것 뿐인지도....)
일단 흥미롭습니다. 과연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 다음 화를 한번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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