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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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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990    추천 0   덧글 0    / 2008.04.09 20:38:51

저녁이 되었다.
“오늘 저녁은~ 영덕 대게 전골입니다~”
흐흥, 하고 콧소리를 내시며 어머니는 전골이 든 커다란 냄비를 식탁 위에 내려 놓으셨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골을 덜어 먹을 접시를 돌리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집에는 나와 어머니. 두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무단침입을 했던 소녀가 있고 접시는 또 세 개가 있는 거냐.
“시영이가 처음으로 집에 데려온 여자 친구인데 최소한 저녁을 같이 먹는 건 당연하지 않니? 아, 미안해. 그러고 보니 나랑 세인트는 이미 점심 같이 먹었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슨 친구라는 거예요. 오늘 처음 만났다 말 했잖아요!”
“아아, 그렇게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어머니는 웃으면서 내 접시에 전골을 담아주기 시작하셨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시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 딸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라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시곤 옆에 앉아 있는 세인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세인트는 어머니의 그 손이 기분이 좋았던 것인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전골을 먹기 시작했다. 다들 그렇게 식사하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가 세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맛있니?”
세인트는 마침 게살을 열심히 씹고 있었던 중인 듯, 말을 하는 것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행 중이라고 했고?”
마찬가지로 끄덕. 근데 여행 중이었던 건가.
“이 마을에는 한동안 있을 거니?”
세인트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응응 하고 긍정의 의사를 표하며 계속 물었다.
“머무를 곳은 찾았니?”
두리번.
“돈은 있고?”
두리번.
“그럼 여기서 지내는 게 어떠니? 마침 창고로 쓰는 방이 하나 비어있는데 말이야.”
뭐?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 가운데 세인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정을 내렸다.
끄덕
?!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셨다.
“그거야 머무를 곳도 없고 돈도 없는 아이를 어디로 내보내겠다는 거니? 이런 날씨에 바깥에서 자면 얼어 죽어. 시영이 네가 데려온 앤데 너무하다. 얘.”
그리고 세인트를 바라보더니 어느새 강제로 껴안기+부비부비 Lv Max를 시전하시는 강초연 여사님.
세인트는 전골을 먹던 자세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친 채, 그대로 켁켁 거리며 식탁에 손을 치는 것으로 그만하라는 의사를 표했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로 인해 마스터 한 지 오래된 스킬을 시전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극에 달하자 나는 세인트가 어머니의 그 커다란 것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어 죽기 전에 질식사 할 것 같습니다만.”
“핫, 내 정신 좀 봐.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사께서는 세인트를 놔주었다. 그제야 세인트는 살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후아, 먹고 있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요.”
“미안, 깜박했단다.”
외견상으로는 이거 뭐, 국적불명이다. 머리카락이 은색이라는 것을 빼면 별 다른 차이도 못 느끼겠다. 피부가 희긴 하지만, 한국어에 능통하며 오죽하면 한국 속담도 안다. 갈수록 정체가 궁금해져 갔다.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 번 더 묻는데, 누구냐 넌.”
“세인트라고 불러 줘.”
순간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지나간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원래의 활발해 보이는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세인트. 누구냐 넌.”
“바람의 요정이야.”
“그래, 바람의 요정. 누구냐 넌.”
“세인트야.”
“…….”
이거 지금 대화가 제대로 성립되고 있는 거냐?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사님께서 나에게 말하신다.
“여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몇 개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란다. 너무 뭐라 하지 마렴.”
…아니, 이건 그 이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이 자리에서는 2:1이니 승산은 없다. 세인트가 이곳에 줄곧 있게 된다고 가정할 때 캐물을 기회는 언제든지 올 테니 오늘은 이만 여기서 철수하도록 하자. 아니, 그런데 어째 이 녀석이 여기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된 것 같은데. 여사님. 이 여자애, 아니 세인트는 단순히 무단가택침입범일 뿐이라고요!
밤.
나는 밖에 나와 있었다. 정확히는 마당.
사실 이 단독주택은 넓은 마당이 있었다. 바닥에 잔디가 깔려있을 정도로 호화롭지는 않지만 나름 어머니가 정성껏 꾸미고 있는 화단도 있었고 각종 화분들이 각자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에도 갈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곧잘 아버지와 함께 올라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던 아버지로부터 별자리 강습도 받았던 추억의 장소였다. 어머니한테 그 때마다 곧잘 지붕이 무너진다고 잔소리를 듣기도 했었지.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보고하듯 그곳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혼자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하곤 했었다.
오늘은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리를 좀 해야 할 듯 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부터 줄곧 혼자 올라왔던 장소에 어김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적당히 지붕 위에 대충 걸터앉아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기에 나는 계속 말했다.
“오늘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날로부터 줄곧 잊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추억의 사람.
“그 사람은 미소가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저는 그 소녀와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소녀의 미소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날, 그 소녀도 함께 잃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미숙한 채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호흡을 정리한다. 현재 나의 위치를 파악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저에게 닿는 것도 어느새 알아채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이 저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제 ‘상처’를 건드리는 것도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않아 왔습니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저는 변하고 싶었습니다. 줄곧 강한 인간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타파하고 싶었습니다. 주변 환경에 의해 변해만 왔던 저 자신이 처음으로 스스로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변하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날 이후로 어쩌면 저는 그것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이 어긋나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저는 제가 고장나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 뇌이고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앞으로 강하게 살아갈 준비가요. 진정으로 제 자신이 변할 수 있는 준비가요. 오늘 전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기에 약속하겠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되어 보일 것이라는 것을.”
말을 마치고 눈을 다시 떴을 무렵. 내 앞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있는 소녀는 검은색과 흰색이 조화된, 비록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 보이긴 해도 훌륭해 보이는 상의와 그에 걸맞아 보이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마에 달려있는 보석 장식이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나는 그 소녀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얼굴보다도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이마에서 깊은 바다의 색과 같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는 소녀는 하늘로부터 비치는 달빛과 여러 가지 문양이 그려진 그 복장이 조화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소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세인트, 너 뭐 하는….”
“미안하지만 다 들었어.”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엄청나게 창피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세인트는 그러한 나를 보았던 것인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단순히 바보인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의 일면이 있었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 역시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에?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세인트는 나로부터 등을 돌린 채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기에 무어라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사실 제 이름은 세인트가 아닙니다. 본래 저에게는 이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세인트라 불리어지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세인트라 소개했던 소녀는 지금에 와서 자신의 이름을 부정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정한 소녀는 슬픈 어조로 계속 말했다.
“고아였던 저에게는 이름 같은 것이 애초에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아니,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은 갖고 있었지만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과 달리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저는 늘 혼자였고 외톨이였습니다. 애초에 저는… 저 자신이 바람의 요정이라는 것도 어렸을 때는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고아원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소녀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속에서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전 누더기 하나 만을 걸친 채 홀로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바람의 요정 중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존재인 엘더는 그러한 저를 찾아내었고 엘더에 의해 처음으로 세인트라 불리어졌습니다.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라는 존재에게도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고. 다른 이들에게는 모두 있지만 저에게는 없는 이름이라는 것. 그것이 드디어 저도 갖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소녀가 살짝 고개를 틀며 말을 마친 덕에 나는 소녀가 자조적으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누구인지에 대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나였으니까.
“저는 이름을 받았다는 그 생각과 동족을 만났다는 생각만으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십 년 뒤, 엘더 세인트를 지망하는 세인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의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타의에 의한 자의로 행해진 일이었습니다.”
타의에 의한 자의.
누구보다도 나는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도. 얼마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소녀는 계속 말했다.
“그곳에서 저는 제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타인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세인트라는 존재. 그것만이 제 존재 의의였습니다. 그리고 엘더 세인트가 되어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순수하게 타의만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 역시 제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기쁠 것이라 믿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해가 갈수록 그러한 존재에 더욱 더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사람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은 세인트와는 달리 엘더 세인트는 개개인의 소망보다 이 세계의 균형을 더 소중히 여겨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의 소망도, 이 세계의 균형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저는 결국 반쪽짜리 세인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엘더 세인트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엘더 세인트의 후보생으로 있습니다. 거기다 그 후보생을 뜻하는 세인트라는 단어를 이름으로써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는 소녀는 계속 말했다.
“이 세계에서 말하는 마법사라는 존재에 제가 속한다면 저는 반쪽짜리 마법사. 반쪽짜리 세인트였습니다.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반쪽짜리일지라도, 완전해지지 못하더라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앞으로 해나가겠습니다. 그 의지가 꺾이지 않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소녀는 옆으로 돌았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제가 고백하고 있는 당신에게 한 가지 더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소녀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저 역시 제 의지로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가만히 놔둘 수 없었습니다. 변화하는 것에 대해 번뇌하는 사람을. 당신의 아들, 김시영을 말이지요.”
소녀는 말을 마치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어느새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성스러워 보인다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바람결에 너풀거리는 흰색의 치마마저 성스럽게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여신이라도 강림한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던 소녀의 반짝이는, 폭포수처럼 파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보였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차가워 보이지만 실은 따듯하게 내리쬐는 달빛과 어울렸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어떠한 사람보다도. 외견뿐만이 아니라 그 속내조차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는 나에게 그 아름다운 미소를 여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연결되었다.
스스로에 의한 변화. 그것을 바라는 자들로서.
* * *
나는 지붕 위에서 소녀와 나란히 쪼그려 앉아 밤하늘의 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며 얼마나 있었을까, 내 쪽에서 먼저 침묵을 깼다.
“보리.”
“응?”
소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밤하늘을 응시한 채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 네 이름이야.”
“…나의, …이름?”
소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러한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
“보리(寶利). 보배 보자에 이로울 리. 이로운 보배라는 뜻이야.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바람이 이루어지는 사람들은 너를 보리라고 부를 수 있게 되겠지.”
…사실, 갈색의 개였다면 붙여주려 했던 이름(곡식으로서의, 단순히 색깔을 의미하여.)이었다고는 죽어도 말하지는 못하겠기에 나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감격이었는지. 소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잘 쓰도록 할게.”
진심으로 쓸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러본 것이 아니기에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없던 존재에게, 아니. 호칭을 이름으로써 불리어졌던 자에게 이름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소녀, 아니 보리를 보자 아무리 바보 같은 나라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소녀와 함께 집 안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창고로 쓰던 방을 정리하고 계셨다. 과거 아버지의 서재였던 장소로 더 이상 사용할 사람이 없자 창고로 쓰게 됐던 그 방이었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선풍기나 대청소 때나 가끔씩 사용하는 진공청소기 등을 수납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었기에 사실 정리보다는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청소에 가까웠지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던 것인지 어머니는 먼지 털이를 드신 채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흘끗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본 것은 어느새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무렵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모습의 서재였다. 그 서재를 만들고 사용하였던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사님은 나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보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따라와 보렴.”
보리는 어머니의 행동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나를 쳐다보았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그녀는 이내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곤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 보리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아버지의 서재였던 그 공간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그러한 두 명을 따랐다.
이제부터 보리가 살게 될 방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아늑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가진 그녀에게 있어 안정이 될 곳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느새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보리의 손을 잡고 있던 어머니는 살짝 눈을 감으며 입을 여셨다.
“앞으로 네가 살아가게 될 공간이야.”
보리는 대답하는 것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이라는 것을 난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따듯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힘들다 지치면 언제든지 이곳으로 와도 돼. 기대고 싶을 땐 얼마든지 기대도 좋단다.”
보리는 어머니의 말에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살며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 모습은 마치 사이좋은 자매를 연상시켰다.
“그래도 잘 만한 침대가 없으니 잠은 내 방에서 같이 자도록 하자. 알겠지?”
“…네.”
보리가 여기에서 얼마나 머무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의견에 조용히 따르도록 했다. 여자들만을 남겨둔 채 나는 조용히 서재였던 그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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