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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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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1103    추천 0   덧글 0    / 2008.04.14 05:59:00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조금 전부터 만개하기 시작한 벚꽃 잎이 휘날리고 있었고 나와 보리는 그 아래에 서 있었다. 조용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만을 제외하고는. 나와 보리, 양쪽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폭풍전야와 같았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이거 다른 말을 꺼내야 하나 해서 다른 화제에 대해 말을 꺼내려 하고 있는데, 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을 꺼내는 그녀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서글퍼 보였다.
“죽은…사람?”
“응.”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은 거야?”
“…….”
딱히 아버지를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라는 범주로 보자면 아버지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않자 활발해 보였던 소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와 동시에 후회했다. 나는 말실수를 했다. 꺼내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아무리 마법사라 하더라도, 아무리 세인트라 하더라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전지전능한 존재. 애초에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 나에게 있어 ‘바람’이 있다면 그것 하나뿐이었을 테니까. 시간이 늦든 빠르든,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보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소녀는 계속하여 사과의 말을 나에게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보리는 어째서 나에게 그러한 사과의 말을 건네는 것일까. 그것은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혹시 나를 향한 말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말이 아니었을까. 왠지 모르게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보리야.”
“미안해….”
소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원체 나보다 머리 하나 작은 녀석이긴 했지만 그 모습이 더더욱 작게 보였다. 지금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어떠한 상처를 이 녀석에게 안겨준 것일까.
“흐흑…, 흑.”
흐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보리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앙증맞아 보이는 양손으로 닦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얼마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새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발걸음을 향했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러자 흐느낌을 잠시 멈추고 보리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보리의 깊은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이만 돌아가자.”
나는 애써 그녀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흐끅 하는 소리를 내며 울음을 억지로 참은 그녀는 간신히 응 이라고 대답하고 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언가 읊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샤프와 노트들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는 책상, 보리를 만났던 첫 날에 날아가서 박혔던 책꽂이, 그저께까지만 해도 앉아있었던 컴퓨터 앞의 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워있던 침대. 보리가 인도했던 곳에서 꿈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떠 보니 집에 와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다녀왔다. 그 증거로 거기서 보리에게 받았던 반지가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보리는 더 이상 바닥에 무릎 꿇고 있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꽤나 어두웠다. 나는 그러한 그녀에게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가서 잠이나 자.”
“미안해. 나…, 어쩌면 너에게 너무 상처 주는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보리는 더욱 침울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상처 준 것은 나다. 사과하고 싶은 것도 역시 나 자신. 어째서 보리에게 그러한 말을 들어야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런 것 말고 내가 바라는 게 있을 거야. 단순히 지금 당장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나는 억지로 등을 떠밀듯이 내 방에서 보리를 내보냈다. 잘 자. 라고 한 마디를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리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내 방에서 나갔다. 그 때 나는 진심으로 나에게 다른 바람이 있길 간절히 원했다.
* * *
아침이 되자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잠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어느 때와 같이 수면은 항상 부족하지만 오늘은 새벽에 깬 이후로 그래, 전혀 못 잤다. 보리에게 한 말에 대한 자책감으로 나는 잠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밤새 그 녀석 생각만 해버렸다. 무슨 놈의 생각이 이렇게 자꾸만 떠오르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신경 쓰인다. 그것도 꽤나.
교복을 입고 적당히 아침밥을 먹기 위해 거실로 나온다. 내 방의 공기와 달리 환기가 잘 돼서 시원했다. 여사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토스트를 접시에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 보시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시영이가 웬 일이니? 평소보다 빠른데?”
“뭐, 좀 그렇게 됐어요. 보리는요?”
“잘 자고 있단다. 깨울까 하고 생각도 했는데 말이지. 자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 보여서 말이야.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라니까?”
“…그 정도인가요.”
어쨌든 잘 자고 있는 것 같다. 도로 여사님 방에 들어간 후, 밤새 시달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조금 들기도 하지만.
평소와 같이 토스트를 입에 우겨넣고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차가운 우유를 들이마신다. 슬슬 학교로 가려고 했을 무렵, 여사님의 방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눈가를 비비며 보리가 나왔다. 새벽에 입고 있던 딸기 무늬 잠옷 그대로였다.
“잘 잤냐.”
“으음, 아직 졸려…. 아…, 맛있는 냄새.”
어느 정도 잠이 깬 것인지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여사님은 그런 보리를 보고 자애롭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이런, 이런. 조금만 기다려 보리야. 곧 맛있게 구워서 가져다 줄 테니까.”
“네에.”
잠이 덜 깬 것인지 목소리를 늘어뜨리는 보리였다. 그녀에게 있어 처음으로 겪는 상황이겠지만 순조롭게 아침 식사는 거행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르게 나는 안심했다. 새벽에 있던 일로 마음을 그다지 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나는 현관 앞에 서서 밥을 대기하고 있는 보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것인지 여사님이 말했다.
“한동안은 보리 혼자 집에 두지 않고 엄마가 같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렴.”
그러고 보니 나와 어머니, 이 집에서는 두 명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다들 제 할 일 하러 나가고 정작 집안에 보리 혼자 남겨질 상황을 신경 쓰지 않았다니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역시 이럴 때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의외로 보리도 어머니를 잘 따르는 것 같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차 조심하고.”
“어디 가는 거야?”
“응?”
현관문을 열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고개를 갸웃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보리의 모습이 있었다. 길쭉한 귀가 쫑긋거린다. 그러한 보리에게 나는 말했다.
“학교 간다.”
“학교가 뭔데?”
“공부하는 곳이지.”
“흐음, 그렇구나. 사원 비슷한 곳이구나.”
웬 사원? 보통 사원이라면 수도승이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사원이라는 곳이 공부하는 곳이라면 뭐 비슷한 거겠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할 거다. 아마.”
“응, 그럼 잘 다녀와.”
말을 마치며 보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배웅해주었다.
강하구나. 이 녀석…. 새벽에는 그렇게 풀이 죽어있기에 걱정했더니 괜한 염려였던 모양이다.
“그래, 다녀올게.”
나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교실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책상에 엎어져 있는 곰 한 마리였다. 그 녀석은 타다만 재처럼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나는 조용히 걸어가 그 곰에게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이냐. 네가 아침부터 이렇게 뻗어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만.”
“…다.”
“뭐라고?”
“…괴롭다.”
이놈은 또 뭐가 괴롭다고 아침부터 이 모양인거지. 나는 시선을 곰에서 주변으로 옮겼다. ‘후후후…, 수험생활에 찌들어 청춘이 이렇게 가는 구나….’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린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도록 했다. 어차피 딴 놈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정 여자 친구를 원한다면 성호 녀석처럼 공부를 포기하고 여자에만 집중해도 될 노릇이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아도 평소보다 일찍 온 덕인지 학생의 모습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승태를 포함하여 다섯 명 정도일까. 한희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고. 성호야 뭐 거의 지각만 해대는 녀석이니 없는 것이 당연할 테고. …인데 웬일인지 성호 녀석이 또 있다.
나는 교실의 뒤쪽에 위치한 서랍장 위에서 편안한 자세로 수면을 취하고 있는 성호를 발견하여 조용히 다가갔다.
“드르렁….”
…학교에서 코까지 골면서 자는 거냐.
복부에 주먹이라도 한 대 심어줄까…하다가 만약 꿈을 꾸고 있다면 낙하하는 꿈을 꾸게 해 주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며시 성호의 양다리를 집었다. 그리고 재빨리 서랍장 바깥쪽으로 돌려버렸다. 꿈이라는 것은 은근히 꾸는 사람의 신체 상황이 반영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소변이 마려운데 화장실이 가고 싶은 꿈을 꾼다고 가정 했을 때, 꿈속에서 화장실을 갔을 때. 그거 위험한 거다. 꿈이라는 것을 안다면 꿈속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안 된다. 덧붙여 이렇게 강제적으로 지면에 발바닥을 붙이게 만들면 자연적으로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꿈을 꾸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깨우는 방법은 후환이 두렵지 않은 사람에게나 시전 하도록.
“우아악!”
역시나 반응은 빨리 왔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높은 곳에서 자유비행을 마친 꿈으로 종결되었을 테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성호에게 말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즐거웠겠지?”
“이런 망할…, 네 짓이냐.”
그럼 누가 한 것으로 보이냐. 애초에 불량한테 이런 짓 할 놈은 불량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만.
“담탱이 일수도 있지.”
성호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했다. 뭐, 그것도 부정하진 않겠다. 쓸 데 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그런데 아침부터 네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리 퍼질러져 있는 거냐? 뭐 너야 또 밤새고 학교 빨리 왔을지도 모르지만 곰은 왜 저래?”
나는 여전히 책상에 엎어진 채 골골거리고 있는 승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사실, 질문하면서조차 전날 클리어하지 못한 채 끝낸 게임이 있어서. 혹은 전날 클리어 한 게임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라는 대답을 예상했다. 승태 이 녀석, 은근히 게임 많이 하는 놈이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아아, 저놈. 내 여자 친구 한 번 보더니 자기도 여자 친구 만들고 싶다고 저렇게 징징대고 있는 거다.”
수험생이 이제 와서 무슨 놈의 여자 친구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19년 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어 본 적 없는 나로서도 공감할 만한 부분이었다. 저 녀석과는 달리 징징대지는 않았지만.
“그래, 잘 알았다. 그럼 나도 이만 슬슬 자야겠다. 담임 곧 올 시간 같으니 너도 슬슬 책상에서 자라.”
아주 잠시 생각했을 뿐인데 성호는 그새 서랍장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과연 이 학교의 명물, 잠신.
베트남은 몰라도 다른 선생들은 죄다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는 전설의 잠신. 그것이 바로 윤성호의 정체였다. 오죽하면 때려도, 때려도 자는 바람에 이 학교의 또 다른 전설인 열혈한자선생이 포기했을 정도다. 그런 녀석을 전설도 아니고 명물도 아닌 내가 깨우겠냐?
나는 서랍장에 기대어 잠든 녀석을 놔둔 채, 내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순백색의 세계.
그곳은 꽃이 피지 않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 난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아니, 미소를 짓는 것은 알겠지만 얼굴만큼은 마치 안개에 가리기라도 한 듯 알아볼 수가 없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가왔다. 소녀의 가녀린 양손이 내 볼을 붙잡았다.
내 볼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움직여보더니 까르르 하고 웃는 것 같다. 그것을 알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소녀는 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김시영.”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에게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
마치 그 부분만 억지로 지워진 듯,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그것으로 알아들었던 것인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러주자 소녀는 기뻐했다. 소녀가 기뻐하자 나 역시 덩달아 기뻐졌다. 나는 이 소녀를 알고 있다. 아니, 알지 못한다. 알고 있다.
스스로조차 뭐가 뭔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마치 안개라도 낀 듯, 희끄무레하다. 안경을 쓰진 않지만 안경에 비유하자면 안경알을 열심히 천으로 닦아도 맑게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 소녀와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대부분 소녀가 즐거워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다 해도.
* * *
나는 깨어났다.
뭔가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나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나와라.”
미소를 짓는 베트남이 내 옆에 서 있었다.
4교시가 끝났다.
평소의 두 배로 맞아, 부어오른 엉덩이를 열심히 매만지며 매점으로 달려갈 준비를 했다. 이런, 움직이려 할 때마다 엉덩이가 욱신거린다. 성호 녀석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나와 성호에게 한희가 다가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너희들은 정말…. 질리지도 않고 자는 구나.”
“학교에서 자는 것은 숙명이다. 피할 수 없지. 거기다 잠들지 않는다면 내가 학교에 오는 목적이 없다.”
성호가 얼굴을 찡그린 상태로 대답했다. 무슨 대단한 사명이라도 가진 것처럼 뽐내듯 말하는 것이 뭔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너나 나나 불량이지. 어쩌면 이러한 구도가 당연한 거다.
“후, 그럼 슬슬 달려봐야겠다.”
“그 상태로 잘도 달리겠다. 돈 내놔라. 내가 다녀오마.”
어느새 부활한 승태가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은연중에 고맙다고 느낀 내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주자 그 녀석은 말했다.
“수고비로 내 빵 값은 네 쪽에서 부담하는 걸로 하지.”
이 망할 놈….
“다녀오마.”
승태는 승리의 브이자를 표시하며 교실에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발에 부스터라도 단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되는 속도였다. 근데 성호 녀석한테는 돈을 받은 것 같지가 않은데.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성호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나한테 진 빚이 있거든. 그런고로 오늘은 내가 공짜로 얻어먹게 되는 거지.”
“돌려막기냐!”
어이없어진 상황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 구석에 박혀있는 스피커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평소 같았더라면 아, 그런가보다. 아, 누구 부르네. 하고 넘어갈 만한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3-1반의 김시영 군은 지금 바로 교장실로 와주세요.”
“뭐?”
“에?”
“응?”
나와 성호, 한희. 이 세 명이 동시에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덧붙여 그 방송 덕에 반에 남아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나로 몰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근데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사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는 옆의 두 사람에게 물었다.
“지금 뭐라 한 거냐?”
“너 부른 거 아니냐?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기에 교장실에서 널 다 부르냐? 교장 뒤통수를 한 대 후리고 튀기라도 한 거냐?”
사고를 친 기억은 없다만. 게다가 그런 사고 따위 칠까보냐! 아니, 적어도 네 녀석에게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윤성호 네 이놈.
현실을 냉정하게 깨닫게 해주게 하듯, 방송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3-1반의 김시영 학생은 지금 바로 교장실로 와주세요. 다시 한 번 말 합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방송 태우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나는 뒷골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대체 교장실이 어디야? 애초에 교장이 뭔 일을 하는 지조차 모르는데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한희가 일러주었다.
“교장실은 아마…, 5층에 있는 음악실 옆이었을 거야.”
그러고 보니 고1때인가 음악실에 갈 때 항상 지나쳤던 것 같기도 했다.
“고마워. 그럼 나 좀 다녀온다.”
“그려.”
“응.”
성호와 한희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교실에서 나왔다.
5층에 다다라 음악실 옆에 있는 교장실이라는 팻말이 매달린 방을 하나 발견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여닫이 문이다. 일단 예의상 노크를 한 번 해준 후 문을 열었다. 물론, 형식상의 예의일 뿐이다. 난 불량이니까 안쪽에서 반응이 오기도 전에 거침없이 열었다. 그리고 듣게 되었다. 한 소녀와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우와…. 정말 왔어.”
“오도록 했으니 당연한 결과란다. 시영이라는 이름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아니 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이전에 이건 뭔데?!
그곳엔 머리털이 대부분 빠지고 그나마 남은 것들도 죄다 허연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학교에서 몇 번째 교장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학교를 주름잡고 있는 현 교장일 것이다. 허허 하고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인상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옆에 놀란 표정을 한 보리가 있었다. 뒤쪽의 창문이 열려있던 탓인지 바람이 들어와 교장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과 보리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나는 일단 최우선적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너 왜 여기에 있냐.”
“시영이가 보고 싶어서 왔지.”
내 말에 보리는 놀란 표정에서 순식간에 싱글싱글 웃는 표정으로 바꾸며 대답했다.
“…난 진지하다. 그러니까 너도 진지하게 대답해 줘.”
“음, 정확히는 네가 다니는 ‘학교’라는 곳이 궁금해 졌다고 할까?”
“그런 거 일일이 궁금해 하지 마!”
“그치만 궁금한 걸~ 이게 학교 구나. 배우는 학생들이 있고,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는 곳이라고 언니가 알려줬어.”
“언니가 있었냐.”
“너도 알고 있잖아?”
“알까보냐! 누군데?!”
“강초연 여사님.”
비틀
어느새 언니라고 부르게 된 거냐. 아니, 외견이라면 몰라도 나이 차가 적어도 스물 이상 날 텐데 어떻게 자연스럽게 언니라는 호칭이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뭐, 적어도 외견이 그러니 남들이 보기엔 어색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좀 아니올시다. 라 말하고 싶다.
“근데 할아버지. 이 학교의 두목이라는 교장은 어디에 있어요?”
비틀
어이…, 이거 뭔가 좀 잘 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좀 들지 않나?
나는 무너질 것만 같았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렇게 되면 눈앞에 있는 인심 좋아 보이는 할배가 실제로도 인심이 좋기를 바랄 뿐이다.
“흐음. 여기 있단다.”
“여기? 어디요? 이런 데 숨어 있는 건가?”
보리는 교장이 사용하던 서랍을 뒤지며 말했다. 그 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였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한 보리를 교장은 툭툭 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보리는 그제야 에엑?! 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물러났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파란색의 눈동자에 당황함이 서려있다.
“나 지금 혹시 굉장히 무례했던 거야?”
“아니…. 날 보면서 그렇게 물어봐도 말이지.”
나는 교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여차하면 이 녀석이 저지른 잘못을 모조리 내가 뒤집어 쓸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허허허. 괜찮단다. 하던 대로 해도 좋으니까. 오랜만에 손녀딸을 보는 것 같구먼.”
…우리 교장 생각보다 머리가 트인 사람이었군.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교장이라는 존재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말이지. 이제부터 시영 군에게 볼 일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지. 고마웠어요. 할아버지.”
보리는 교장에게 손을 휘적거리며(인사한 거냐?) 밖으로 교장실을 나갔다.
나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나가는 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 위로 음표가 몇 개 날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상당히 좋은 모양이다. 나는 교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부터 말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실례했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실례했습니다.”
“괜찮다. 요즘 보기 드물게 솔직한 아이더구나.”
교장은 예의 그 인심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솔직한 것은 인정하겠는데 웃어른 공경할 줄 모른다는 말도 같이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웃어른 공경할 줄 모르니 뭐라 할 처지는 아닌가.
인심 좋은 교장에게 고개를 슬쩍 숙이고 죄송했다는 말을 한 후, 나는 교장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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