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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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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1128    추천 0   덧글 1    / 2008.04.15 14:11:16

5교시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외친 순간 정적에 휩싸인 교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담임과 아이들. 그리고 보리.
종례가 끝난 후, 나는 담임에게 십 분짜리 설교를 들었다.
승태는 자신의 피앙세가 되어주길 바라는 보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대로 학교를 이 잡듯이 뒤지러 떠났고, 성호와 한희가 나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는 말을 넌지시 건넨 것 같다. 물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먼저 돌아가. 난 들릴 데가 있으니.”
“…….”
버스에서 내려 보리에게 말하고 나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외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보리는 그 길쭉한 귀도 축 늘어뜨린 채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줘. 지금만큼은 그러한 너를 돌아볼 자신이 없으니까.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학원도 땡땡이 치고 어느새 나는 공원에 있었다. 구석에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몇 모금이나 빨았을까, 지금 이 순간에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 떠올랐다.
‘내 바람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은 세인트로서의 바람이기도 하고 나의 바람이기도 해.’
내가 지어준 보리라는 이름을 쓰는 한 소녀를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보리는, 애초에 도와줬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바람을 이루어주겠다는 소녀가 있는 경우도 처음이고 남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 말하는 소녀를 상대하는 것도 처음이라 대체 어떻게 반응을 더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
“처음…이라.”
그래, 보리에게 있어 이건 처음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처음일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사람’에 대하여 얘기를 했을 때 그러한 표정을 지을 리가 없기에. 그리고 그것을 바라는 나에게 무언가 다른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헤아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어 있다. 고장 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고장 난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 자신의 바람도 갖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고장 나 있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방에 들어와 혼자가 되었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보리의 행동과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느새 난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행동하는 것을 보아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기에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 행복부터 찾으라고 했었지?”
소녀는 계속 말했다.
“알고 있어. 그게 정상이라는 것도. 하지만 말이야…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어.”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이 행복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했겠지.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보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소녀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나란 녀석은 그것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때 결심했다.
“행복해지면 되잖아?”
어느새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리는 그러한 말을 한 나를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보리를 향해 나는 이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줄 모른다면 이쪽에서 먼저 노력해보도록 하지. 즐겁다…라는 것이 행복한 것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대한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애초에 내가 되도 않는 바람을 말한 탓도 있으니 그 정도는 내가 노력하게 해줘.”
“…응.”
보리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분명히 내가 지금 짓고 있는 미소는 그녀에 비해 상당히 어설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번 주말. 뭐 어차피 시험 따위 신경도 안 쓰기는 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놀러 나가자. 어디든 간에.”
“…그거 혹시 데이트 신청이야?”
“…여기서 꼭 그런 말이 나와야 하냐. 뭐, 일단은 그렇다고 치지.”
“쿡쿡. 뭐, 좋아.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토요일 11시면 시험은 다 끝나고 나올 수 있을 테니까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려 줘.”
“알았어.”
침울해졌던 소녀는 다시금 활기찬 모습을 보이며 내 방에서 나갔다. 그래, 그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보리의 진정한 모습이다.
* * *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나와 성호에게 있어 중간고사 기간은 일시적인 단축수업일 뿐이다. 하지만,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 결론적으로 집에 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이 저녁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도 성적에 관한 것은 포기한지 오래되었으니 다른 녀석들에 대해 부담감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지.
집에 들어와서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보리와 여사님과 함께 식사를 마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중간고사 기간인 5일 중 마지막 날인 토요일이 찾아왔다.
마지막 시험 과목의 주관식 답안을 대충 아는 대로 휘갈기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한희를 바라보니 열심히 마킹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호는… 주관식 답안지에 무언가 쓰고 있다!
이럴 수가 있나. 만약 무엇을 쓰는지 보려는 것이 선생에게 걸리면 그대로 작살날 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0점 받아도 상관없으니까 나는 먼저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로 했다. 나는 단순히 성호 녀석이 답안지에 무언가를 그렇게 열심히 쓴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져 내 특수 스킬인 줌 인을 사용하여 확대해 보았다. 그러자…
주관식 1번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주관식 2번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주관식 3번 - ‘무궁화 삼천리…’
…못 본 걸로 하자.
어차피 성호나 나나 맨 뒷자리니 답안지를 걷는 것도 자연히 우리들의 역할이다. 뭐, 답안지를 걷는 것이 정작 본인이니 다른 애들에게는 보여줄 일 없겠지만 선생에게 그런 답안을 보여주고 싶다면 할 말이 없지.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시험관 역을 맡은 선생이 답안지를 걷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의 첫 번째 중간고사가 끝났다.
시험관 역의 선생이 나가고 담임이 들어오기 전, 나는 시험이 끝나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책상에 엎어져 있는 성호를 보았다. 그래…, 임시적인 단축 수업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니 아쉽겠지. 나는 퍼질러져 있는 녀석에게 한 가지를 묻고 있었다.
“야, 여자애들은 보통 어떨 때 행복해 한다고 생각 하냐?”
“음? 언제 행복해 하냐고? 그건 남자에 의해 행복해질 때를 말하는 건가?”
성호가 고개를 들면서 되물었다. 의외라는 표정인데.
“뭐냐? 내가 이런 것 묻는 게 그렇게 신기하냐?”
“뭐, 그럴지도. 그나저나 행복해할 때라. 결국은 다 돈에 관련된 것들이지. 비싼 반지라던가 목걸이를 받았을 때라던가. 아니면 마음이 담긴 선물이나 이벤트 정도랄까.”
“마음이 담긴? 예를 들어서?”
“손수 짠 목도리나 천 마리 학을 접어서 담은 병을 전해준다고 생각해봐라. 감동 받지 않겠냐? 아, 그런데 이건 좀 아니다. 학 같은 것은 유치하기도 하고 목도리를 짜는 남자라니 상상만 해도 좀 느끼한데. 특히 네가 그런다면 더더욱.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 아니기도 하고.”
생각하기만 해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는 성호에게 주먹을 한 방 선사해줄까 하다가 간신히 참고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여자에 관한 것이라면 나보다는 이 녀석이 훨씬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진심으로 말해 봐라. 결론을 말해.”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금 네가 보리에게 호감을 얻고 싶다면 마음이 담긴 선물이 최고라는 거다. 아니면 이벤트 성이 있는 물건을 선물할 것. 이해 못하겠다면 알아서 머리를 굴려봐라.”
“아니, 보리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마디도 한 적 없습니다만, 나 그렇게 티가 나게 행동하는 녀석이었나.”
“적어도 지금 네 얼굴 보면 안다. 거기다 지금 내가 한 말에 부정도 안 했잖아.”
“…….”
이 녀석한테도 못 당하겠다. 최근 들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못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순간 두려워졌다.
나는 성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성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돌았냐? 담임 아직 안 들어왔잖아. 종례 하고 가야지.”
“오늘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거기다가 애들 대부분이 시험관 나가자마자 교실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간걸 보고 못 느꼈냐?”
내 말에 그제야 교실을 둘러보는 성호는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색으로 변하더니 말했다.
“헉…, 설마.”
“오늘 종례는 없다. 그럼 이만.”
말을 끝마치고 잽싸게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깨에 가해진 힘 덕에 나는 제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새 성호는 잽싸게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뭐냐 갑자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뒤를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승태의 얼굴이 보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안 좋은데.
“그 분이냐?”
승태 녀석이 어느새 다가와 가방을 내려놓은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 분이라니? 누구?”
“몰라서 묻는 거냐. 네 배다른 남매 말이다.”
“그걸 아직까지 믿은 거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하지만, 승태는 그 말에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헉…. 그럼 배다른 남매가 아니었던 거냐? 남남이라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게다가 앞으로 여기 올 일 없을 거고.”
“그렇다면 역시 집에 쳐들어갈 수밖에 없는 건가…가 아니라 설마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건….”
위험하다.
“나 먼저 간다! 월요일에 보자!”
“이 자식! 거기 서라!”
달리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기록으로 100미터를 14초대로 주파하는 나다. 곰에게는 지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이 녀석 엄청 빠르다!!! 그러고 보니 곰은 원래 빠른 동물이었다.
4층에 위치한 3학년의 교실에서 1층까지 내려오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계단을 한 번에 최소 세 개씩, 두 번 정도 그렇게 한 다음에는 한 큐에 다섯 개씩을 뛰었는데도 끈질기게 쫓아온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지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승태 녀석을 붙인 채, 나는 교문을 향하여 달렸다.
청색의 페인트가 칠해진 교문이 보였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교복을 입지 않은 한 소녀의 모습도 같이 보였다. 검은색과 흰색이 조화된 상의와 흰색의 치마를 입은 그녀의 사제를 연상시키는 모습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나를 발견하고 ‘아’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 짓는 보리의 모습을 락 온. 목표물은 확인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가히 폭풍처럼 달려오는 나와 뒤의 녀석을 발견한 것인지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손짓하다 말고 멍하니 있는 그녀의 손을 잽싸게 낚아챘다. 부드럽고 따듯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하는 보리가 말했다. 그에 따라 흰 깃털 장식이 따라 흔들린다.
“에? 에? 시, 시영아? 가…갑자기 왜?”
“일단 달려!”
나는 보리의 손을 잡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크악! 아직까지 쫓아온다!”
“누…누구? 아, 네 친구였잖아. 분명 이름이 이승태…였나?”
“우오오오!”
숨이 차서 죽을 것만 같았지만 나와 보리는 몸 안에 쌓여있는 게이지를 한껏 모으는 곰을 피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 * *
나와 보리는 어느새 학교를 한참 벗어나 고속터미널이 있는 센트럴시티까지 달려왔다.
높게 솟은 건물, 교차하는 차도, 수많은 자동차들,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도시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적어도 내 평소 행동 범위 안에서는 말이지.
지하도 안에 들어가서야 간신히 곰의 추격을 따돌렸다는 것을 눈치 챈 나는 그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보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토요일인 탓인지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도 안 역시 밖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다니고 있었다. 센트럴 시티에는 끼니를 때울만한 장소나 시간을 죽일만한 거리가 많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러한 곳과 연결되는 지하도이니 자연스럽게 이런 지하도조차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가는 행인 중 몇은 이쪽으로 시선을 흘끗 주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담배 덕에 기초 체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다 이거. 오히려 보리가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금연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넌 정말 잘도 달리네. 지치지도 않고.”
“이 정도야 뭐 기본이지.”
보리는 별 것 아니라 말하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말한다.
“그런데 시영아….”
“응?”
보리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선을 나로부터 조금 다른 곳을 겨냥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어라? 이거.
“그런데 손….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여기 사람도 많은데….”
“아.”
그러고 보니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붙잡고 있던 손을 아직까지 놓지 않았다. 땀까지 좀 채여서 꼼지락거린 것 같다. 거기다 이쪽을 바라보던 몇몇 행인들이 미소를 걸치고 지나가는 것이….
“미…미안!”
나는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보리의 손을 놓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일단 여자애다. 어찌 보면 내가 굉장히 창피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기에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보리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치며 혀를 살짝 내밀며 대답했다.
“아니, 손잡는 건 상관없는 데 땀이 좀 채여서 말이야. 그것보다 이제부터 어디에 데려가 줄 거야?”
“아, 그럼, 일단 배부터 채울까.”
…손잡는 건 괜찮아? 순간 머릿속에서 묘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만두도록 했다.
“응.”
“좋아, 그럼 일단 푸드 코트다.”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지으며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 보리에게 나는 힘차게 대답하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보리도 옆에서 미소 지으며 나란히 따라왔다.
푸드 코트.
세계 몇 개국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나라 음식들을 한 데 모아 파는 장소. 학생으로서 가격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 곳이었지만 보리가 좋아하는 음식 취향을 모르니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푸드 코트에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수많은 의자와 2인용부터 시작하여 4인용까지 있는 테이블들이 있었다. 뭐, 4명 이상이 올 경우엔 4인용 테이블 몇 개를 붙이면 되기에 이런 형식일 뿐이다. 중앙에는 거대한 메뉴판과 식권을 구입할 수 있는 카운터가 있었고 음식을 직접 받을 수 있는 곳은 중앙 카운터를 기준으로 둘러싸듯이 둥그렇게 위치하고 있었다. 아직 11시 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테이블의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 나는 그다지 와본 적이 없는 장소다. 간혹 들린다 하더라도 먹는 것은 철판볶음밥이나 기타 볶음밥들 정도. 나야 먹을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니 전체적인 메뉴가 정리되어 있는 안내판을 보고 고심하고 있는 보리에게 물었다.
“뭐가 좋겠어?”
“으음….”
몇 가지 먹고 싶은 메뉴를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하더니 이내 결정한 듯, 나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시영이랑 같은 걸로 할래.”
“…어이, 같은 거라니. 뭔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추천이라도 해 줄까?”
내 말에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보리.
“그렇지만~ 뭔가 뭔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그거대로 먹었다가 맛없으면 곤란하잖아? 그럴 바엔 처음부터 같은 것을 먹는 거야. 그러면 그게 설령 폭탄이었다 해도 똑같이 폭탄인거고, 맛있는 거면 둘 다 맛있어서 좋은 거고. 음. 내가 생각해도 똑똑해.”
그리고 고개를 높이 쳐들며 가슴을 쭉 피는 보리. 아니, 그렇게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셔도 곤란하지 말입니다. 뭐, 그래도 이게 보리다운 걸까.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못 말리겠다. 이 아가씨는.
“휴, 맘대로 해라. 어차피 오늘은 내가 다 쏠 테니까. 부담 없이 따라와 줘.”
“응. 고마워.”
보리는 밝게 웃고 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주문을 했다.
주문한 것은 똑같은 철판볶음밥. 대기표를 받은 후 유리로 장식이 된 출입구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잡다한 얘기들로 수다를 떠는 동안 순번이 돌아왔다. 음식을 가져오고 자리에 놓자 보리는 냄새를 킁킁 한 번 맡더니.
“우와, 맛있는 냄새야.”
하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이제 아무도 안 쫓아온다. 천천히 먹어.”
“근데…. 좀 매워.”
“자, 여기 물.”
“고마워.”
냉수 한 잔을 그대로 원샷하더니 또 다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잔소리 주는 것은 그만하고 나도 슬슬 밥이나 먹자.
볶음밥은 지금까지 먹어왔던 것보다 맛이 괜찮았다. 보리도 만족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고 배를 통통 두들기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배를 두들기는 것이 뭔가 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넘어가자. 나는 그러한 보리에게 말했다.
“자, 그럼 다음은 신작 영화라도 한 편 때릴까.”
푸드 코트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위치하는 센트럴 시네마. 신작 영화들을 상영하는 곳으로 적어도 우리가 지금 들어와 있는 센트럴 시티 내에서는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카운터 위로 네 개의 모니터에 네 개의 영화들의 홍보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 영상들을 보며 서 있는 사람들하며 표를 예매하는 사람들하며 오전중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상당히 북적이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12시까지 10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기에 망정이지 점심 때 지나서 왔으면 큰 일 났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영화 한 편 보려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이런 데서 영화를 볼 수 있어? TV로만 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비틀
“응?”
나는 놀라기보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보리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냐 그 말. 아, 그러고 보니 사원이라는 곳에 오래 있었다고 말한 것 같은데 정말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농담이야. 한 번 놀려보고 싶었어.”
옆머리를 비비꼬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혀를 삐죽 내미는 보리를 보고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귀…귀엽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장난은 하지 말자. 그럼 뭐 볼래?”
“응. 아…, 옛날 생각나네. 자주는 아니어도 사원에 있던 애들이랑 같이 영화도 보러 오기도 했는데….”
영화의 광고지를 보고 회상하듯이 보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분명 즐거운 기억이겠지. 나는 그에 모자라지 않는 즐거운 기억을 선사해주는 것이 목표일뿐이다.
“예전에는 뭘 봤었어?”
“음, 멜로물이었어.”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보리에게 물었다. 역시 여자라면 멜로물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래? 제목은?”
“기억이 잘 안나. 하도 오래 전 일이라서. …근데 처음부터 졸았던 것 같아.”
“…….”
“뭐야, 그 표정은. 불만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만.”
말 그대로다. 뭔가 좀 아니라고 또 강렬히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 나는 애써 태연한 듯 말했다.
“뭐…넘어가도록 하지. 그럼 오늘은 뭐가 좋겠어?”
“이거 어때?”
보리는 네 개의 모니터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리가 가리킨 모니터에서는 한 가족드라마에 관한 홍보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리가 가리키자마자 내가 보았을 때는 마침 영상의 끝자락이었는지 어두운 바탕에 흰색 글씨로 4월 28일, 거대한 감동이 찾아옵니다. 라는 문구가 떠 있을 뿐이었다.
“제목이 뭔데?”
“나의 바람은…. 이야.”
“여기 와서까지 바람 타령이냐.”
내 말에 보리는 기분이 조금 상하기라도 한 듯,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치, 그저 감동을 주는 게 좋을 뿐이야.”
“멜로 영화 보면서 잤다며.”
“…그건 잊어줘.”
“그래. 그럼 이걸로 예매한다. 잠깐 기다려 줘.”
나는 보리에게 휘휘 손짓하곤 네 개의 카운터 중 하나의 줄에 섰다. 그리고 곧 두 장의 표를 예매했다. 12시 40분에 시작하는 영화라. 대충 40분은 시간을 딴 데서 죽여야 할 것 같았다. 표를 예매하고 돌아온 나에게 보리가 웃으며 맞아주었다. 나는 보리에게 말했다.
“40분쯤 딴 데서 놀아야 할 것 같다. 딱히 가고 싶은 데 있어?”
내 말에 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가려는 곳이 있는데 따라와 볼래?”
끄덕.
단 둘이지만 만장일치. 나는 그대로 옆에 있는 오락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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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라가야 04/18/03:19
화이팅 입니다? 아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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