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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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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3장. 전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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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72    추천 0   덧글 0    / 2008.04.21 13:34:18

제 3장. 전환

보리와는 주말마다 곧잘 놀러가게 되었다. 물론, 명목상 수험생이니 아무리 토요일이라 해도 그렇게 놀러갈 수 있었던 것은 중간고사가 끝난 날만 가능했다. 그렇기에 나와 보리는 일요일이 되어서나 그런 식으로 밖에 같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러한 보리와 함께 보냈던 일요일 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 날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보리가 우리 집에 찾아오고 나의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말한 뒤 한 달쯤 지나서의 이야기다.
5월 말의 일요일 오전.
밖에서 보리를 만나기로 한 나는 언제나처럼 같은 장소에서 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동네의 한 공원 앞. 항상 가는 곳은 비슷했지만 만나는 장소는 어느새 이곳으로 정해져 있었다. 설명해보자면 센트럴 시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동네에서는 가장 번화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필연적으로 오락실이 있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앞에 크레인 게임기(Ex : 인형 뽑기 기계 등)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게임기 안에 들어있는 상품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하지만, 보리가 오려면 십분 이상의 시간이 남았을 테고 왠지 모르게 낯선 모습에 나는 그 소녀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12,13세쯤 되었을까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검은색의 베레모를 쓴 외국인의 모습이었다.
검은색의 블라우스와 검은색과 노란색이 적절히 조화된 주름치마. 그리고 검 푸른색의 롱부츠. 왠지 모르게 이 거리와 언밸런스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귀여운 꼬마 아가씨를 떠올리는 데 무리 없는 모습. 나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컬쳐 쇼크라 할지라도 그 정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만한 이해력이 나에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40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1미터에 가까운 나무 작대기를 등에 매달고 있는 그 이상한 모습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었다. 어느새 난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접근한 것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인지 소녀는 여전히 기계 안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뽑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소녀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곳에는 은색의 팔찌가 상자에 들어 있었다. 상자에 팔찌가 담겨 고무줄이 감겨 있는 모습. 문득 이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게임기 안에 500원 짜리 동전을 하나 집어넣었다.
소녀는 그제야 날 본 것인지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도망가진 않았다. 그 정도로 그 안에 있는 것이 갖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저 내가 레버를 움직이는 모습과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소녀는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소녀가 줄곧 바라보던 것으로 집게를 움직였다. ‘아.’하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맞는 모양이다. 목표물 락 온. 그럼 간다.
-띠링
버튼을 누르자 집게가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것 같았다.
“어라.”
“…….”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만 같은 표정. 그 증거로 그 빈약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그나저나 이거 왜 이렇게 쥐는 힘이 약한 거지. 이렇게 되면 비장의 수를 써야겠는데.
건슈팅 게임의 랭킹 1위를 곧잘 하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러한 크레인 게임계도 신의 손이라 불리는 경지는 아닐지라도 탑 랭크에 들어있는 몸이다. 왜냐고? 담배를 피우는데 그냥 라이터보다는 터보 라이터가 좋거든. 비가 오거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한때 이러한 게임기 안에 들어 있는 터보 라이터를 얻기 위해 폐관수련조차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집게의 힘이나 떨어지는 길이, x,y축과 줄(J)을 조사해서 보다 완벽하게 한 방에 두 개를 낚을 수 있을 정도로 수련했던 나다. 그러한 내가 이런 팔찌 하나 조차 뽑지 못할 리가 없었다.
500원을 넣고 얻은 세 번의 기회. 2번째까지 삽질을 함으로써 나는 이 기계에 대해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버튼을 눌렀다.
-띠링
잡혔다. 고무줄이 집게 세 부위에 걸렸다. 이거라면 확실하지.
소녀와 나는 이 순간만큼은 같은 심정으로 끌려오는 팔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의도대로 완성되었다.
-턱
소녀와 내가 노렸던 물건이 뽑히자 소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모습이 썩 내키지는 않았겠지.
나는 소녀에게 예의 팔찌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소녀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얼굴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이 누군가가 떠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는 잽싸게 내 손안에 든 것을 빼앗듯이 낚아채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거 설마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가는 거냐.
보답이나 투자한 동전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런 것은 너무 섭섭했기에 어느새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어깨에 손을 걸쳐 소녀의 움직임을 제제하며 말을 걸었다.
“…잠깐 기다려. 뭐 잊은 거….”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녀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대자마자 나는 그대로 하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뭐야?!”
나 지금 메치기 당한 거냐? 땅바닥에 내쳐지자 얼마 되지도 않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된다. 어느새 주변은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몇 명 몰려 있었다. 나는 나를 보고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에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외쳤다.
“크윽!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누구 맘대로 감히 내 몸에 손을 함부로 대는 거냐!”
이게 진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따지듯이 말했다.
“뭐 한 마디 잊은 것 같지 않냐?”
“뭘?”
소녀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거 진심이냐. 그다지 큰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 달라고.”
“뭐, 그 정도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일단 해 달라면 해 주지. 고마워.”
이거 완전 엎드려 절 받기구만. 몰려 있던 사람들은 별 거 아니라는 생각들을 한 것인지 어느새 제 갈 길들을 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신경 쓰이는 예의 나무작대기가 보였다. 역시 호기심이 동하는데.
“근데 이건 웬 나무 작대기냐?”
나는 소녀의 등에 매달려 있던 나무 작대기를 뺏으려 했다.
“우왓!”
뺏기지 않으려고 순간적으로 반응한 것 같지만 그래봐야 꼬맹이다. 무언가에 제대로 고정되어 있진 않았던 것인지 궁금했던 물건은 단번에 나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대충 관찰하자 수많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처럼. 어라?
“이런 걸 왜 갖고 다니는 거야? 넌?”
그다지 첫인상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도 했지만 화가 난 꼬맹이의 얼굴을 보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메치기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 그나저나 한국말 잘하네. 생긴 것은 완전히 외국인인데.
“내놔!”
“싫은데?”
“이이….”
“이이제이?”
“뭐?”
순간적인 허무개그에 반응을 하지 못한 것인지 소녀는 잠시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빠샤!”
“앗!”
예의 나무작대기를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들어 가져다댔다. 시속 몇 십 킬로 정도의 속도로 가져다 대어 나는 그 나무작대기가 부러진다는 것에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으윽…. 안 부러지네….”
무릎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작대기를 놓쳐버릴 뻔한 것은 나였다.
“부러질 리가 없잖아. 너같이 허접해 보이는 녀석한테.”
소녀는 히죽 웃고 있었다. 이거 왠지 기분 나쁜데. 그나저나 금발에 붉은 색의 눈을 가진 외국인 소녀가 ‘허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다니 이상한 곳에서 컬쳐 쇼크가 일어나는 것만 같다.
“이제 슬슬 돌려줘!”
“아, 잠깐만. 앗!”
순간 그 때의 5초는 5분으로 변했다. 아니,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소녀가 나에게 달려들기까지 1초. 무릎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소녀를 보고 놀라기까지 1초. 막대기를 빼앗으려는 소녀와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나의 몸싸움이 1초. 몸싸움의 결과 내 손에서 그것이 떨어지기까지 1초. 마지막으로 오토바이를 탄 성호가 나타난 것이 1초였다. 성호는 무려 여자 친구와 함께 드라이브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 안녕! 걘 또 누구냐? 그럼 내일 보자.”
성호는 저 할 말만 하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저 녀석 면허 있었던가. 그나저나 이 동네 왜 이렇게 작은 거냐. 그런데.
-빠직
가히 절묘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막대기를 떨어트린 곳에 정확히 성호와 성호의 여자 친구가 타고 있던 오토바이가 밟고 지나갔던 것이다. 아무리 사람 무릎으로 부러지지 않는 나무일지라도 사람 둘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가 밟고 지나갔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우….”
그 모습을 바라본 소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외쳤다.
“우와아아!!! 신창 브리가닉이!!!!”
“신… 뭐?”
“이 멍청아! 이게 무슨 짓이야!!!”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소녀는 두 조각으로 부러진 막대기를 끌어안고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되게 무섭습니다. 그런 시선은 하지 말아 주세요. 이거 도망가야 하나 위로해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내가 줄곧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응? 시영아, 거기서 뭐해? 그리고….”
나는 예의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보리를 발견했다. 그나저나 저 옷 되게 맘에 든 모양이다. 아니면 여사님이 강제적으로 입게 했다던가. 그런데 내가 말을 걸려던 찰나에 나보다 먼저 보리를 발견하고 외친 소녀가 있었다.
“세…세인트! 시…신창….”
뭐부터 처리해야할지 헷갈려 하는 모습이 어린애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세인트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이 녀석은 대체….
“이 멍청아! 고개 숙여!”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다만 나는 옆에 있던 소녀에 의해 강제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게 지금 어디서…. 근데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이 비정상적인 근력은 뭐냐?
“보리, 이 녀석 좀 어떻게 해 봐라. 이 꼬맹이 너랑 아는 사이냐?”
나는 강제적으로 숙여진 머리를 간신히 들어 올리며 보리에게 물었다. 그러한 나를 보고 소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을 치웠다.
“아니, 그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아.”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 순간에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화염의 기사. 프리드리히! 충성을 맹세할 세인트께 첫 인사드립니다!”
하고 외치며 무슨 중세시대 기사들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나 해 보일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를 하는 소녀.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 * *
그리고 그 직후, 근처에 있는 카페에 보리와 수상하기 그지없는 꼬맹이를 데리고 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뭔가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는 것 같으니 이런 곳에 오는 것이 순서겠지. 보리는 푹신한 오렌지 빛의 쇼파에 편안히 앉아 키위 스무디가 가득 채워져 있는 유리잔을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쪼옥 하는 소리가 나도록 빨대를 열심히 사용하는 그 모습이 상황에 걸맞지 않게 꽤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
금발의 꼬맹이는 자신의 앞에 있는 보리와 같은 유리잔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보리를 바라보며 두 조각으로 변해버린 나무 막대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나온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유리잔 안의 스무디를 모두 해치워버린 보리는 일단 나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했다. 대강 상처를 입고 있는 자신을 도와줬다는 식으로. 사실 나는 다친 개를 한 마리 주워왔을 뿐이지만. 어쨌든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한 듯, 내 맞은편에서 눈을 감고 있던 프리드리히라는 소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 턱에 손을 괸 채 말했다.
“과연, 이런 바보가 세인트를 도와드렸단 말이지.”
누가 바보냐. 것보다 그 건방진 자세는 뭔데.
“그런데 화염의 기사가 이런 곳엔 무슨 일로?”
“아, 엘더 세인트로부터의 전언을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 세인트의 옆에 있는 바보 덕분에 개인적인 용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중요한 일이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는 보리의 옆에서 묵묵히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꼬맹이가 어떻게 기사라는 거야? 보리가 있는 사회는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프리드리히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더니 눈을 떴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엘더로부터의 전언이라는 것을. 프리드리히가 전해준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정식 엘더 세인트의 후보생이 된 것을 축하하며 그에 걸 맞는 가디언을 보낸다. 앞으로도 더 정진하도록.’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보리에게 있어 잘 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해주려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어두워진 보리의 얼굴이 보였다. 곧바로 밝아졌지만 그간 내가 봐온 보리라면 분명히 달갑지 않은 말임이 분명했다. 어째서? 그렇게 엘더 세인트가 되고 싶어 했는데.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말하지 않은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저를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프리드리히는 말했다. 어딘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것이 꼬맹이다웠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녀는 보리가 거절하면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꽤나 곤란하겠지.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보리와 프리드리히라는 소녀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 있는데 소녀와 마주보고 있던 보리는 어느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것이겠지. 일단 자신도 우리 집에서 하숙하고 있는 입장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프리드리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리는 이내 결심한 듯 눈을 뜨더니 입을 열었다.
“음, 일단 나 역시 신세지는 축이지만. 받아들이기로….”
…아. 그래 맘대로 해라 이젠. 우리 집이 어느새 갈 곳 없는 자들을 위한 하숙집이 되어가는구나.
프리드리히는 보리의 대답에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끄러웠던 것인지 프리드리히라는 꼬맹이 덕분에 시선이 몰렸지만 소녀의 얼굴을 한 번씩 본 사람들은 피식 웃으며 제 할 일로 돌아간다. 이럴 땐 정말 귀엽게 생긴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네.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쉬는 나에게 보리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시영아, 괜찮겠어? 일단 저 아이가 불쌍해서 그렇게 말은 했지만…, 너한테 먼저 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해서 말이야.”
아아, 역시 보리 넌 착하구나. 순서가 좀 어긋나긴 했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도록 하자. 그것보다 걱정인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괜찮아. 근데 방 남는 곳이 없는데 어디서 재운 다냐.”
“잠이라면 안자도 괜찮아. 어차피 난 인간이 아니니까.”
옆에서 들려온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음, 역시 그러려나.”
그러한 나에 비해 보리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것만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설명 좀 해줘.
“애초에 나는 정식 세인트를 수호하고자 이곳으로 온 몸. 잘 이유도 없고 세인트가 숙면을 취할 시간에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지.”
“…인간이 아니라고?”
“일단은 그런 셈이지. 걱정하진 마. 그래도 한 때 ‘인간이었던’ 몸이었으니.”
“인간이었던?”
“자세한 것은 나중에 들어. 아, 그리고 세인트. 혹시 이것을 잠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을 마치며 프리드리히는 품속에 끌어안고 있던 두 개로 나누어진 나무 막대기를 보리 앞으로 내밀었다. 보리는 그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창(神槍) 브리가닉(Briganic)…. 신목(神木) 시무르의 가지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화염의 창…. 화염의 기사를 증명하는 이 창이 어째서 부러진 거야?”
신창은 뭐고 신목 시무르는 또 뭐냐. 근데 저거 창이었던 건가. 아무리 봐도 지팡이 대용으로 쓸법한 예술품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근데 예술품을 지팡이로 쓰나?
엉성한 잡생각을 하고 있던 중 보리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인트의 옆에 앉아 있는 한 멍청이 때문입니다.”
“응?”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보리.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겠지.
“좀 그렇게 됐어. 오토바이가 밟고 지나가서 저게 부러져 버렸어.”
“에? 그런 정도로 신목으로 만들어진 신창이 부러질 리가 없는데.”
“…기운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았기에 만들어졌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부러진 것은 의외였지만 일단 부러졌으니 수리를 부탁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프리드리히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그것이 의문을 해결해주었던 것인지 보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뭐, 그럼 수리해주도록 할게. 여기서 당장은 무리일 것 같고 집에 가거든 해 줄게.”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는 프리드리히. 왠지 모르게 꼬맹이답지 않은 면이 있다고 나는 그 때가 돼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일단 세인트가 거주하고 계신 곳부터 보여줘.”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곤 프리드리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따라 보리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뭔가 그릇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정해진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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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2장. 변화 - 1 - 4 유지 08.04.12 1021 0
4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1장. 계기 - 3 - 4 유지 08.04.09 991 0
3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1장. 계기 - 2 - 4 유지 08.04.04 2327 0
2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1장. 계기 - 1 - [1] 4 유지 08.03.24 1219 0
1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Prologue [5] 4 유지 08.03.21 98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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