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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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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1799    추천 0   덧글 0    / 2008.04.21 13:35:11

학교가 끝나면 어느새 난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하여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은 커다란 벚나무가 있던 장소.
이미 벚꽃은 피지 않게 된 지 오래 되었지만. 아니, 애초에 핀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줄곧,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소녀와 놀게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것은 소녀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
집에서는 하교 후에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시는 부모님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러한 부모님이 없었던 것인지. 항상 그 장소에 있었다.
그렇기에 난 갔다.
혼자 있을 소녀를 만나기 위해.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
* * *
나는 깨어났다.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3시가 좀 넘은 시각. 자고 일어난 탓인지 갑자기 담배 생각이 나서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마당에는 새벽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갑다. 얇은 잠옷을 걸치고 있었기에 바람이 차다는 것이 더욱 느껴졌다. 하지만, 그 차가운 바람도 적막한 공기도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기에 나는 묵묵히 하려던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라이터에 손을 가져간다. 찰칵 하는 소리가 나며 라이터에서 불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거기까진 좋았다.
딱!
“쿠엑!”
불을 붙이기 직전, 나는 뒤에서 머리 쪽으로 가해진 충격에 의해 강제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덕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것은 두말할 이유가 없다. 무슨 둔기에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뒤통수를 슬슬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마치 먹던 샌드위치 사이로 바퀴벌레 반 토막을 발견한 것만 같은 표정을 한 프리드리히가 신창을 거꾸로 든 채 서 있었다. 구슬이 달린 창끝이 위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꾸로 맞은 게 맞는 것 같다. 제대로 맞았으면 죽고도 남았겠지. 신창의 화염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예의 표정 그대로 말했다.
“…무슨 몬스터냐? 그런 비명을 지르게?”
“…넌 무슨 자객이냐? 갑자기 뒤에서 사람을 암습하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 기사가 암습 따위를 할까 보냐!”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펴고 말하는 프리드리히였다. 가슴을 쭉 펴도 나타나지 않는 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암습한 것 맞는데요.
“뭐야! 그 시선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아무것도. 것보다 무슨 일이냐?”
“이쪽이 할 말이다. 이런 야심한 새벽에 밖에 나와서 뭐 하는 거지? 이 시간에 학생이라면 학생답게 들어가서 잠이나 퍼 자면 되는 거야. 왜 쓸 데 없이 밖에 나오는 거냐.”
“뭐, 좀 자고 일어나면 하고 싶어지는 게 있어서 말이지.”
말을 마치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 한 개비를 주워들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본 것인지 프리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아. 알고도 피는 거겠지?”
“물론.”
바로 대답이 나온 것이 불만이었는지 프리드리히는 눈을 감고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생김새는 꼬맹인데 하는 짓을 보면 할머니가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이건 대체 어떤 것을 근거로 두어 판단해야할 지 너무 고민되는데.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리드리히는 이내 눈을 뜨며 말했다.
“쯧쯔, 그것도 피하지 못하는 녀석이 담배까지 피우면 조금이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밖에 판단할 수가 없다.”
“…담배랑 그거랑 직접적인 관련이 있냐? 물론 담배가 몸에 해롭기는 하지만 말이지.”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또 다시 눈을 감았다. 반사 신경이 둔해진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만 같은 태도다. 왠지 모르게 신경에 거슬리는데.
“내가 왜 이곳에 온지 모르겠나? 어째서 지금 여기 있는 세인트의 아니, 주인님의 경호를 맡아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갑자기 프리드리히가 나타난 이유? 내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지.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왜 경호를 맡아야 하는지. 애초에 처음부터 물어봤어야 할 문제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단순히 보리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위험하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경호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어. 그러한 내 질문에 프리드리히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위험하다.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주인님은 정식 세인트가 된 이상 목숨이 노려지게 되어 있어.”
“왜?”
목숨이 노려진다고?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어줄 뿐인데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는 거지?
나는 프리드리히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녀는 손을 한번 허공에 휘젓더니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적어도 내가 주인님의 곁에 있을 동안엔 내가 대신 죽더라도 주인님은 지킨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다면 걱정하진 않겠다만.”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아까 말했다시피 학생은 학생답게 이 시간엔 자면 되는 거다.”
“아아, 뭐 그러도록 하지.”
내가 대답함으로써 프리드리히와의 대화는 끝났다.
* * *
프리드리히는 내가 새벽에 홀로 나올 때마다 암습을 가했고 그걸 항상 두들겨 맞는 날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침이 찾아왔다. 그것은 프리드리히가 찾아오고 몇 주가 흐른 뒤.
먹어도 별 반 차이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여사님이 용서하지 않으셨기에 프리드리히는 억지로라도 토스트를 먹게 되었다. 그 옆에서 보리도 같이 먹으면서,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여사님도 따스한 미소로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식사를 마친 후에 슬쩍 볼 수 있었다.
먹지 않으려는 자와 먹이려는 자랄까.
어느새 늘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나는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에 도착하여 평상시와 같이 가방을 의자에 걸어 두었다.
일상이라. 이런 것일 터였다. 일상과는 어느새 조금 멀어진 감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일상 속에 있었다. 평일엔 학교에 다니고 끝나면 학원에 가고, 주말이 되면 보리를 데리고 밖으로 돌아다닌다. 프리드리히야 보리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녔고 말이지. 물론, 그렇게 되기 전까지 승태 녀석의 고문을 견뎌내야만 했다. 성호가 프리드리히에 대해 얘기를 한 다음날이 나에게 있어선 가장 고역이었지. 나에게 헤드락을 거는 승태와 그것을 보고 킥킥거리고 웃는 한희, 그리고 언제나처럼 꾸벅꾸벅 졸면서 간혹 잔소리를 해주는 성호. 언제 그렇게 한 번 이 녀석들에게도 프리드리히를 소개해주었다. 보리의 가족이라고. 그래서 이 녀석 역시 한 동안 우리 집에 머무를 것이라고. 얼굴도 못 본 주제에 왜 그렇게 승태 녀석이 열을 내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갖고 있을 때는 모를 것이다. 이러한 소중한 일상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있어 원동력이라는 것을.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는 이미 9시가 넘어 어두컴컴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자 최근 몇 주간 맞아왔던 흉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정확히 내 뒤통수를 찌르기 위하여 날아오는 일격.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프리드리히가 항상 뒤통수만 노리고 오기 때문에 살기라는 것을 느끼면 피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피했다는 말이지만.
“엑?!”
흡연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따로 운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몸에 배었다는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나의 그러한 행동에 프리드리히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의외였나.
“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매일같이 같은 곳만 찔러 대서야 맞을 것 같아?”
“…처음으로 한 번 피한 주제에 기고만장했구나.”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창대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거기다 웃고 있다. 진심으로 할 생각인 거다. 이럴 때는.
“죄송합니다. 안 까불겠습니다.”
“…다음에 또 그러면 죽어 아주.”
성격까지 파악 완료했다. 이 소녀는 애초에 싸울 만한 건수가 없는 보리와는 달리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사과 한 번이면 용서해준다.
-딱
대신 한 대를 맞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아프다.”
“아프라고 때린 거야. 더 정진해.”
그러고 보니 어느새 프리드리히에게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러했을까.
그렇게 조금은 변한 나의 일상은 계속 흘러갔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베트남의 수업시간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가 슬슬 기어오고 있었지만 1학기 안에서는 마지막으로 운동장 수업을 하는 날이었을 것이다. 6월 까지는 며칠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찌는 듯이 더웠기에 운동장을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녀석들보다는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는 녀석들이 많았다. 나와 승태, 성호와 한희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왜 이런 날씨에 체육 수업을 밖에서 하는 거고 뛰어다니는 녀석들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채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체육복 차림으로 윗옷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승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크, 진짜 죽을 것 같다. 이번 시간 끝나면 닥치고 매점으로 달린다.”
“돈은 갖고 왔냐?”
“당연하지, 분명 주머니에… 어라?”
“교복 주머니로군. 안됐지만 지금은 체육시간에나 입는 체육복 차림이다.”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성호의 말에 단숨에 좌절한 포즈를 취하는 승태. 하지만, 그 녀석은 이 정도로 무너질 위인이 아니었다. 좌절 상태에서 3초 만에 원기를 되찾더니 나에게 일직선으로 다가온다. 갑자기 뭐냐.
“친구야. 돈 좀 빌려주라.”
그러니까 왜 이럴 때만 친구라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됐지만 나도 들고 나온 것이 없다.
“미안하지만 나도 빈털터리다.”
나는 주머니를 뒤집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희에게 다가간다.
“한희야. 500원만 빌려주라. 왜 500원인가 하면 매점에서 파는 바카폴이 500원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자식아.
“미안, 나도 안 갖고 나왔어.”
난감한 얼굴로 웃으며 애써 말하는 한희를 지나 이번에는 성호에게 간다.
“너야말로 나의 진정한 구세주라 믿는다.”
“수돗가 가서 물이나 마셔라.”
“너 같으면 수돗물 마시고 싶냐!”
그 이후로도 이곳저곳 다닌 것 같지만 아무도 기대해 부흥해주지 못한 것인지 승태는 나무 의자 하나를 전세내고 혼자 드러누웠다. 저러다 축구 심판 노릇하고 있는 베트남한테 걸리면 작살 날 텐데. 뭐 각오하고 누운 것이겠지. 그나저나 정말 괴로워 보이는군. 나는 퍼질러져 있는 그 녀석에게 최고의 해결책을 하나 말해 주었다.
“교실에 가서 돈 갖고 다시 오면 되잖아.”
“그런 귀찮은 짓 누가 할….”
승태 녀석은 반쯤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뭐냐, 갑자기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 뒤에 뭔가 있기라도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녀석 내 얼굴이 아닌 내 뒤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색과 노란색이 적절히 조화된 치마였다. 그 아래에 검푸른 색의 부츠도 보인다. 이런 날씨에 부츠라니 정신 나간 거 아니냐는 말이 하고 싶었지만, 일단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 뭔가 평평하다. 더 위를 본다. 그 위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너 여긴 뭔 일이냐.”
“네가 좀 필요해서 말이지.”
프리드리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러한 나보다 승태가 더 빨랐다. 녀석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돌격하며 말하고 있었다.
“이번엔 또 누구냐! 김시영!!!”
“응? 말 안했던가? 2번째 하숙생이라고, 이름은 프리드리히다.”
“조그마한데다가 외국인! 너 언제부터 그런 계열이…. 커헉!”
승태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넘어지지나 않을까 할 정도로 빨리 달려오던 것이 걱정이었지만 앞이 아닌 뒤로 넘어져버렸다. 쿠웅 하는 소리가 지면에 울린다. 아마 90kg이 넘었었지 이 녀석. 내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 녀석이 있던 자리를 보자 조그마한 주먹이 하나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네 짓인 거냐.
“애들 막 패지 마라…, 못난 놈이지만 내 친구다.”
“먼저 잘못한 건 저 녀석이야.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냐.”
프리드리히는 팔짱을 끼고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희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시영이네 집 하숙생이야?”
“하숙생이라기보다는 세인트, 아니 보리님을 경호하는 사람이다.”
“보리를 경호?”
한희의 의문이 담긴 표정에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구나. 나는 정한희라고 해.”
“시영이 친구?”
“뭐, 그렇지.”
“부족한 녀석이지만 잘 부탁한다.”
그렇게 말하고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프리드리히. 그 모습을 보고 한희는 당황스러워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당황스럽다. 왜 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성호 녀석은 과연 그렇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고 승태는 여전히 뒤로 넘어져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있다. 그새 정신 차린 건가. 아니면 애초에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던가.
승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을 눕혀버린 소녀를 향해 말했다.
“이승태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프리드리히.”
마찬가지로 손을 내민다. 어느새 둘은 악수하고 있었다. 뭐냐?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그도 그럴 것이 신장이 190에 근접하는 승태와 140이나 될까 할 정도로 조그마한 소녀가 악수하는 모습은 실로 묘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승태를 한참이나 올려봐야 할 정도로 조그만 소녀가 승태 같은 덩치를 눕힌 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 거냐. 그렇게 이 둘은 존재감이 없는 존재였던가. 뭐 사실,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이라면 그럴 만도 한 것 같았기에 자세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멋진 정권이었다.”
“너도 의외로 맷집이 좀 있는데?”
그러고 보니 태권도 3단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있으면 태권도 사범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녀석은 사범을 할 목적으로 태권도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밥 먹듯이 말을 하지만 말이지.
“맷집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
“좋은 거지. 앞으로 더 정진해라.”
마치 대련 후에나 할 것 같은 대화들을 하고 있습니다그려. 그런데 왜 초등학생으로 보일 법한 소녀가 반말하는 것에 아무도 반발을 하지 않는 건데. 내가 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프리드리히는 어느새 악수를 마치고 나를 돌아보며 말하고 있었다.
“슬슬 가자.”
“수업 중이다.”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땡땡이는 학생일 때밖에 못하는 일중 하나다. 어차피 너 듣자하니 모범생도 아닌 것 같던데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아.”
“어이…. 그렇게 막 말하지 말고. 그나저나 지금 베트남 수업 시간인데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지금은 못 나가겠다.”
베트남이라는 말에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갸웃했다. 못 알아듣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나는 간단히 베트남이라는 이 학교에 현존하는 전설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웃으며 말했다.
“베트남이라는 존재가 무서운 거냐?”
“무섭지. 그런 이유로 땡땡이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 내가 왜 땡땡이를 쳐야 하는 건데!”
“밖에 나가게 되면 알려주도록 하지. 일단 따라와라.”
“야! 잠깐!”
나는 프리드리히에게 소매를 붙잡힌 채, 그대로 질질 끌려 나갔다. 외견과 달리 무식한 괴력을 가진 소녀에게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희가 놀란 목소리로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볼 일 좀 보러. 시영이 잠시 빌리도록 하겠다.”
프리드리히가 한 마디 하자 그대로 수그러졌다. 왜 그 정도 한 마디에 수그러지는 거냐? 정 한희.
옷이 찢어진다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어느새 난 프리드리히에게 사정해서 자발적으로 걷겠다는 말을 했다. 프리드리히는 그런 나를 보고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더니.
“뭐, 어차피 도망갈 수도 없을 테니 알아서 잘 따라 와라. 혹시라도 도망가는 날에는 오늘 밤에 네 짧았던 인생은 끝난다고 생각해라.”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내 목숨이 소중했기에 지금은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운동장을 지나갈 무렵이었다. 교실 쪽이 아니라 교문 쪽으로 누군가 향하고 있는 것이 베트남 레이더에 포착된 것인지 질풍과도 같이 달려오는 베트남을 나와 프리드리히는 발견할 수 있었다. 심판 노릇이나 계속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후환이 두려운 것은 지금 걸리나 나중에 걸리나 마찬가지였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베트남은 오른손에 그를 상징하는 유명한 흉기인 하키 채를 들고 있었고 눈에서는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달려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프다 이 양반아.
프리드리히는 내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고 베트남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어느새 성큼성큼 나와 베트남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베트남은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힘줄이 하나 돋아 있는 것이 상당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는 프리드리히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냐. 이 외국인은 또 누구고.”
“아, 그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리자 베트남의 얼굴에 힘줄이 하나 더 돋아났다. 큰일이다. 화나게 한 것 같다. 이럴 때는….
“부탁한다. 네가 해결해 다오.”
나는 프리드리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성난 기색을 표하며 베트남에게 외쳤다.
“무슨 짓이야! 왜 이 녀석을 붙잡는 거냐!”
“뭐라고?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너는 무슨 용건으로 내 수업 시간에 수업을 받는 학생을 데리고 나가려는 거냐.”
베트남은 프리드리히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힘줄이 하나 더 돋았다. 웃을 거면 웃고 화낼 거라면 화를 내란 말이다. 왜 표정이랑 마음이 따로 노는 거야.
소란스러운 것을 애들이 눈치 챈 것인지 주변에는 어느새 우리 반 녀석들과 같이 수업 받는 다른 반 녀석들이 모여 있었다. 어차피 애들끼리 하는 골목축구에서 심판이 뭐 그리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축구를 하던 녀석들도 모여 있었다. 베트남의 뒤쪽에 주르륵 말이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골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뒤통수에 슬쩍 오른손을 갖다 대는데 어느새 몰린 인파에게 시선한번 주지 않고 프리드리히가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수업 받지도 않고 그늘에 퍼질러져 있는 놈을 끌고 나가는 데 뭐가 그리 나쁘다는 거냐. 아, 걱정 마라. 하루 종일도 아니고 몇 시간만 빌려가도록 할 테니.”
“안 되겠다면?”
베트남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등짝에 매고 있던 브리가닉(나무막대기ver)을 꺼내 그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힘으로 빼앗아갈 뿐이다.”
“…….”
베트남은 프리드리히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잠시 하늘을 보고 웃기 시작한다.
“크하하하하!”
한참이나 웃고 간신히 그치더니 자신의 앞에 있는 조그마한 소녀를 보며 말했다.
“간만에 웃긴 꼬맹이를 보는 구나.”
“뭐냐? 결국 해 보자는 거 아니냐?”
프리드리히 역시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았다. 꼬맹이란 말에 반응을 한 것이겠지. 이쪽이나 저쪽이나 혈압이 꽤나 올라간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정말 베트남이 프리드리히 같은 꼬맹이(외견만 이지만)와 한 판 할 생각인 것일까.
어느새 베트남의 손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승태와 성호, 한희가 다가왔다. 뒷걸음질치고 있는 나에게 승태가 말을 걸었다.
“쟤 지금 베트남이랑 한 판 해볼 생각인 거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너 베트남이 한때 검도 선수였다는 건 알고 있냐?”
“아니, 몰랐다만.”
의외로군. 체대 출신일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와 승태, 성호, 한희는 가만히 베트남과 프리드리히를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손에 땀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한 것은 우리들과 마찬가지인 것인지 베트남의 뒤에 서 있던 반 아이들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하키 채를 어깨에 걸치고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후, 오랜만에 한 번 뛰어봐야겠군.”
“잔 말 말고 덤벼라.”
프리드리히는 그러한 베트남에게 브리가닉을 겨누었다. 그래봐야 나무 막대기 하나 겨눈 모습이라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리드리히는 말했다.
“내가 이기면 김시영은 잠시 빌려가도록 하겠다. 이의는 없겠지?”
“픕…. 뭐 그건 마음대로 해라. 꼬맹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로구나. 가급적 살살하도록 할 테니 먼저 덤벼 봐라.”
깔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프리드리히도 어느새 웃고 있었다. 누구와 마찬가지로 이마에 힘줄이 하나 더 돋았다. 요즘은 무슨 웃으면서 화내는 게 유행이기라도 한 거냐?
프리드리히는 달려들었다. 그 순간 오오하는 환성이 베트남 뒤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섬광과도 같은 속도.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프리드리히는 양손으로 강하게 브리가닉을 휘둘렀다. 대각선으로 그어지는 사선. 무려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르기다. 그래, 까놓고 말해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프리드리히의 그 일격을 뒤로 물러남으로써 피해냈다. 베트남, 의외로 괴물이었구나. 전직 검도 선수라는 것들은 모두 이 정도의 동체 시력이 있단 말인가.
“오호라, 이것 보게.”
“아직이다.”
베트남이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프리드리히는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여전히 내 눈에는 섬광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신장과 그다지 차이도 나지 않는 브리가닉을 장난감 다루듯이 다루며 찌르고 휘두르고 베었다.
검과 창이 작열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만 같았다. 서로의 무기가 목재여서 그런 것인지 불똥이 튀기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박력이 있었다.
딱! 딱! 딱!
신체 급소만을 노리고 들어오는 그것을 모조리 차단하는 베트남도 여간 내기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의 공격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베트남의 표정이 거만함에서 놀람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모인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알아챘을 것이다.
“하. 하하하! 재미있구나!”
베트남은 하키 채로 반격을 하였지만 프리드리히의 브리가닉에 어느새 차단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외쳤다. 슬슬 흥분하기 시작한 것인지 베트남은 방어하는 자세를 그만두고 그 거대한 하키 채를 양손으로 쥐고 자세를 잡았다. 마치 검도를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은 베트남이 검도 선수 생활을 했었다는 승태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 모습을 본 프리드리히는 그제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베트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트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머리!”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속도도 결코 그에 뒤진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수 년 이상 단련되었을 베트남의 그 자세와 속도에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머리라고 외쳐주었기 때문에 간신히 막은 것이 아닐까 할 정도다.
“으윽.”
프리드리히는 베트남의 체중이 담긴 묵직한 일격을 받고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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