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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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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23    추천 0   덧글 0    / 2008.04.21 13:35:34

“으랴아아!”
머리라 외친 것이 시작이었는지 베트남은 기합을 내지르며 순식간에 프리드리히를 공격해 들어갔다. 머리와 손목, 목, 허리를 외치며 공격해 들어가는 베트남을 보노라니 지금도 프로 선수에 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부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물이 흐르듯 끊임없는 공격. 프리드리히는 베트남의 체중이 실린 공격들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검과 창. 그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검에 비해 창은 대체적으로 길다. 약 70cm라 알고 있는 베트남의 연습용 나무 하키 채와 1미터에 달하는 프리드리히의 브리가닉(나무막대기ver).
완력이 그다지 꿀리지 않았기에 혹은 능가했기에 프리드리히는 창을 길게 뻗어 여러 방면에서 들어오는 베트남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혹시 막는 프리드리히의 나무 막대기가 부러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신창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브리가닉이다. 좀처럼 쉽게 그 생각대로 되진 않았다.
수차례의 공격이 끝나고 그제야 베트남이 하키 채를 위로 들어 올렸다. 공격의 종료를 끝내는 표식이었던 것인지 베트남은 한 걸음 물러났다. 프리드리히 역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 강하다 베트남!!!”
“베트남 최고다! 전직 선수답다!”
“꼬맹이 지지마! 이 언니들이 응원하고 있어!!!”
“꺄악! 너무 귀엽게 생긴데다가 강하기까지 해!!!”
아무리 대련 중이라지만 베트남이라고 직접 말하다니 그 용기는 가상히 여겨주고 싶다. 뭐 어차피 인파에 묻혀 누가 그랬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외쳤을 테지만. 그런데 의외로 프리드리히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사실 그쪽이지만. …대체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간단한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프리드리히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브리가닉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할 생각인 것일까. 그렇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만 같은데. 하지만, 그러한 내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다른 수를 사용했다.
베트남을 노려보던 프리드리히는 조용히 눈을 감더니 양손으로 쥔 브리가닉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속, 시작.”
순간적으로 브리가닉으로부터 약간의 빛이 났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라 믿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은 프리드리히였지만 눈을 뜨자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강인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다시 공격 자세를 잡고 있었다.
“뭐…, 뭐냐. 지금 쟤 뭐 한 거냐?”
그 압박을 느낀 것인지 태권도 3단의 승태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미안하게도 나 역시 모르니 정확한 답변을 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베트남은 프리드리히가 눈을 뜨자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말했다.
“뭘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제부터 진심으로 하도록 할 테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다.”
그게 진심이 아니었던 거냐. 아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내 그러한 생각을 알지 못하는 베트남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즐거워보였다. 즐기는 것일까, 이 상황을.
프리드리히는 웃고 있는 베트남에게 말했다.
“이 5연격을 막아낸다면 내 패배로 인정하겠다.”
“좋다.”
프리드리히의 말에 베트남은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서로 일정 수의 공격을 주고받는 룰이 생긴 모양이다. 대련이라면 정말 대련다웠다.
“그럼 간다.”
“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리드리히의 발이 지면을 박찼다. 모래바람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인 것은 내 눈의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쏜살같은 빠르기. 마치 발에서 무언가 추진 장치라도 달려있지 않을까 의심될 정도로 엄청난 빠르기였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베트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나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베트남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빨리 표정을 굳히고 프리드리히로부터 오는 공격의 궤도를 파악하려 한다. 이 사람은 프로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리!”
-딱!
공격이 오는 장소를 파악한 베트남이 외쳤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베트남의 왼쪽 다리를 노린 1차적인 찌르기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브리가닉은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린 하키 채에 의해 닿자마자 마치 튕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 즉시 다른 부위로 공격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머리!”
-탁!
하키 채를 쥔 베트남의 양손이 그대로 올려져 2차적인 공격도 막혔다. 하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는다.
“손목!”
-딱!
베트남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방어했다. 상당한 힘이 실려 있던 것인지 베트남이 들고 있던 하키 채가 떨리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허리!”
-타악!
순식간에 연계되어 들어온 허리를 노린 공격에 베트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느리게 보였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음으로 올 부위가 어딘지 알고 있던 것일까.
베트남은 공격을 막은 즉시 하키 채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다음으로 공격이 들어올 곳은 목이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프리드리히가 내뻗은 브리가닉의 움직임을 쫓았다. 하지만, 눈으로 그 움직임을 쫓기엔 무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허리를 공격했던 프리드리히의 브리가닉은 사라져 있었으니까.
순간 내 눈이 잘 못 되진 않은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사라졌다. 없다. 그 찰나의 순간에 창이 사라졌다. 그리고….
“목!”
베트남이 외친 그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오지 않게 된지 오래다. 아니, 이 순간만큼은 조그맣게 들려오는 목소리들도 모두 멎어버렸다.
그저 우리는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성대가 있는 곳에 정확히 나무막대기를 겨냥한 채 공격을 멈추고 있는 한 소녀를. 그리고 그 마지막 공격을 하키 채를 들어 올리던 자세 그대로 막아내지 못한 베트남을.
공격이 오는 곳은 알아냈지만 그 움직임이 따라가질 못한 그를.
대련은 끝났다. 그와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엄청나다!!!!”
“꺄아악!!!!! 이겼어!!!!”
“베트남이 져버렸다!!!!!!”
할 말이 없다.
이거 기뻐하기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나무막대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베트남의 목을 겨냥한 채 정지한 프리드리히의 브리가닉이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나를 기습할 때는 몇 수나 봐준 것이라고 그때 완전히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대련 종료! 프리드리히 승!”
대련이 끝났다는 것을 어느새 생긴 심판이 알렸다. 이름을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봐야 셋 중 하나겠지.
프리드리히는 한 학생이 외친 말에 조용히 창을 거두어 등에 맸다. 그러한 그녀에게 베트남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은 승부였다. 더 이상 꼬맹이라 부를 수 없겠군.”
“나야말로. 이렇게 솜씨 좋은 민간인이 아직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이, 민간인이라니. 정작 베트남이 화내지 않고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으니 난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하하하! 정말 간만에 즐거웠다. 시영이 놈을 빌려가겠다고 했나? 그거라면 내 권한으로 허락하도록 하지. 하지만, 내 수업 시간밖에 권한이 없으니 나머지는 땡땡이로 처리해도 할 말 없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프리드리히의 말에 베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심히 구경하던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뒤돌더니.
“우선 베트남이라 말한 녀석부터 나와라.”
만면에 미소를 띠운 채 준비운동이라도 하듯 목에서 뚜둑 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우와아아! 하고 외치며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거기 서라!!!”
추격을 시작하는 베트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프리드리히를 한 번 바라보았다. 아니, 어느새 내 소매는 다시금 붙잡혀 있었다.
“그럼 가자.”
“아…. 그래.”
나는 간단히 승태 들에게 다녀오겠다 말한 뒤 프리드리히와 함께 교문 밖으로 향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 날 있었던 이 충격적인 사건(베트남이 한 소녀에게 패배한)은 세화고 대대로 베트남이 전설로 존재하는 동안 부가적인 옵션으로 길이 남았다고 한다.
* * *
나와 프리드리히는 학교를 빠져나와 상점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오늘 베트남의 체육시간은 3교시 째였다. 그러한 고로 지금의 시간대로 보자면 11시가 좀 넘어간 시각이다. 그 시간대에 학생이 길가를 걸어 다니는 것은 여러 모로 보기 좋은 편은 아닐 터였다. 이렇게 시선을 모으고 있는 것이 꼭 프리드리히 때문만은 아니겠지.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프리드리히의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경호한다면서 이렇게 혼자 빠져나와도 되냐?”
“여사님이 있으니까 괜찮아.”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너도 여사님이라 부르게 된 거냐.
“그런데 날 강제로 땡땡이치게 만든 이유가 뭐냐? 이래봬도 땡땡이 친 지 꽤 오래된 몸 이다만.”
“주인님에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어.”
갑자기 웬 선물? 그런데 선물 사는 데 내가 왜 따라와야 하는 거냐.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프리드리히에게 말했다.
“아무거나 대충 사면되잖아.”
“…죽을래?”
그 대충 내뱉은 한마디가 신경에 거슬린 것인지 프리드리히가 눈을 부라렸다. 무섭습니다. 당장 용서를 빌도록 하자.
“잘못했습니다.”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없이 걷기를 한참. 프리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항상 시영이 너에 대해서만 얘기하니까.”
…어린애는 어린애다. 설마 그것에 대해 질투라도 한 것일까. 그나저나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애초에 나에 대해서 할 얘기가 뭐가 있다는 거냐.
프리드리히는 나의 이런 질문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비밀이야.”
“…너무 단번에 거절하는 것 아니냐.”
내가 한 말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예의 그 휘휘 거리는 손짓을 해보이더니 팔짱을 끼곤 프리드리히가 말했다. 아주 자신만만해 보인다.
“어쨌든! 오늘은 주인님을 위한 선물을 살 테니까 너도 거들어.”
“내가 왜? 선물이란 건,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기면 그만 아니냐?”
“그래도! 너는 대충이라도 주인님이 좋아할 만한 것을 알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미안, 나도 모르겠다.”
“머리 좀 굴려봐 이 멍청아!”
왜 그런 것 정도로 멍청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왜 보리가 좋아할 만한 것을 모르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보리는 장난을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여자아이. 거기다가 세인트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마법사. 그 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세인트 때문에 마음고생 좀 심하게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뭐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쉼터로 있어주면 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즐겁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어. 그러한 내가 보리에게 선물을 준다면….
“마음을 선물하겠어.”
“…무슨 소리냐 바보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 이 사람을 위하는 마음. 내가 선물하고 싶은 것은 그런 거야. 물질적인 것은 필요 없어. 단지, 그 사람이 기뻐할 만한 마음을 선물하면 돼.”
“…….”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굳게 앙 다문 입으로 조용히 앞을 바라보며 걷고만 있을 뿐. 나는 그러한 소녀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부끄러울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이라도 부딪쳐 보는 게 어때? 내가 이렇게나 당신을 위하여 준비한 마음입니다 라고.”
“그러니까! 뭘 선물해야 좋을지를 정하란 말이야!”
프리드리히는 눈을 질끈 감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외쳤다. 그러다가 모자 벗겨질라. 나는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슬슬 정리해주며 모자도 제대로 씌워줬다. 이제 머리 만졌다고 죽이려 하는 표정을 짓는 수준은 지난 것 같다. 대충 정리됐다 싶었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못 알아듣는 거야? 마음을 선물하래도?”
“말만으로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아?! 선물이랑 같이 줘야지!”
“그런 것은 진작 말을 하라고.”
“너야말로 귀에 먼지라도 엄청 쌓인 거 아냐? 말만으로 그렇게 하기 창피하니까 선물이랑 같이 주는 거잖아!”
“뭐, 그럼 이거 어때?”
나는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물건을 적당히 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오르골. 뚜껑을 열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슨 음악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석 같은 것도 몇 개 박혀 있어서 솔직히 말해 더럽게 비싸 보인다. 그것을 보더니 프리드리히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냐, 왠지 이런 것은 집안 구석에 박아놓고 열어보지도 않을 것 같아.”
“네 주인을 그렇게 못 믿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가끔씩 열어보는 것이 아니라 몸에 지니고 다닐 만한 것이었으면 좋겠어.”
“좋아, 그럼 열심히 찾아다녀 보자고.”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귀엽구나, 사랑받고 싶어서 먼저 사랑을 주려 하는 프리드리히라는 소녀는. 하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는 그러한 노력은 사실 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 좋겠지.
프리드리히는 내 말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홱 돌리면서 말했다.
“그, 그러려고 널 부른 거라구!”
“네~. 네~. 알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마치 내시처럼 일부러 목소리 톤을 올려가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또 다시 눈을 부라리는 프리드리히.
“…왠지 거슬려 그 말투.”
“네~ 알겠습니다. 프리드리히 여왕님.”
“뭐야! 그건!!!”
성을 낸다. 이번에는 솔직히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을 말해보도록 하기로 했다.
“아니 프리드리히 하면 대제가 떠오르잖아? 근데 넌 여자고 그래서… 쿠엑!”
“더 이상 말하지 마!”
뭐냐 이름에 콤플렉스라도 있던 거냐.
나는 나보다 머리 하나 작은 소녀에게 헤드락을 걸린 상태로 한동안 고생해야했다.

이리저리 상점가를 떠돌아다녔다. 정말 수많은 선물 상점을 둘러본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추천하면 프리드리히는 계속 반대를 해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시간이 걸려버렸다. 결국 산 것은 하나의 반지. 내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것 정도는 아니더라도 훌륭한 장식이 되어 있는 은반지였다.
“당연하지. 약속의 반지는 이런 싸구려 반지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고.”
“어이 어이, 그렇다고 해서 주인에게 선물할 생각인 반지를 싸구려로 비하하지는 마. 반지가 슬퍼할라.”
“우….”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소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이만 돌아가자.”
반지를 사게 된 것은 이미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었기에 학교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왠지 내일 학교 가면 꽤나 반겨줄 얼굴이 많을 것 같았다.
* * *
컴컴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하니 평소 내가 들어왔을 때 없던 사람들이 보였다.
어머니와 보리. 이 두 명이 따스하게 맞아주었던 거다.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 집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때 절실히 느껴졌다. 혼자 돌아왔을 때는 바닥도 차고 사람이 없어 휑한 집은 너무나도 쓸쓸하니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언제나와 같이 지붕에 올라왔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면 프리드리히가 온 날부터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지붕에 올라오는 것은 우리들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고 셋만 있을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 프리드리히는 보리에게 조그마한 상자에 담겨진 반지를 건네고 있었다.
“바…, 받아주세요. 제 마음의 선물입니다!”
“응?”
지붕 위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달구경을 하며 과자를 아작아작 맛있게 잘도 먹고 있던 보리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상자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째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보리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상자를 내밀은 프리드리히를 보고 키득거리고 웃더니 상자를 받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히 간직하도록 할게.”
그리고 그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프리드리히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 상자를 열어봐 주세요.”
“응? 지금 열어봐도 돼.”
“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잖아. 프리드가 주는 건데.”
프리드리히의 부탁에 보리는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으며 조그마한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내용물을 본 보리의 얼굴은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용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프리드리히에게 다가가더니 살며시 그녀를 껴안았다.
“엣?!”
“에헷.”
갑자기 보리가 껴안자 프리드리히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보리가 꺼낸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고마워.”
“…에. 마음에 드셨나요.”
“물론이야.”
“다행입니다.”
보리의 대답에 프리드리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열심히 골랐는데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없다고 줄곧 내가 말했는데 정작 선물을 받은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 것만 같았다. 바보구나 프리드리히 넌.
포옹을 끝낸 보리는 어느새 프리드리히가 선물한 반지를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끼우고 있었다. 그리고 반지를 끼운 자신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더니 이내 나와 프리드리히를 향해 오른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새하얀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어때? 잘 어울려?”
“잘 어울리네.”
…그런데 왜 하필 오른손 새끼손가락이냐. 나는 애써 내 오른손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헤헷, 고마워.”
프리드리히는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기쁘냐.
“물론이지.”
“그래. 잘 됐다.”
* * *
새로운 귀걸이를 사오기라도 한 것인지 보리는 여사님의 호출에 먼저 지붕 위에서 내려갔다. 보리가 내려간 후, 지붕 위에는 나와 프리드리히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붕 위에 곧게 서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염의 기사. 프리드리히.
오늘 보았던 그 비정상적으로 빠른 몸놀림을 가진 것이 프리드리히의 본모습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프리드리히가 달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보리의 앞에서 쑥스러워하던 표정과는 달리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러워 보인다는 느낌도 들었다.
“매직 아티펙트(Magic Artifact), 바람의 팔찌(Bracelet of wish)라고 하는 물건이다. 시전자가 한 번이라도 갔던 장소에 갈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다.”
프리드리히는 청록색으로 빛나는 하나의 팔찌를 품속에서 꺼내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왜 이걸 나에게?”
적어도 이런 귀해 보이는 물건을 받을 만한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프리드리히의 말에 의문을 표하며 물었다.
“오늘 나를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아티펙트로서의 효과는 한 번 밖에 발휘할 수 없긴 하지만, 나로서는 쓸 일이 없어 보이니 앞으로는 네가 갖고 있도록 해라.”
나는 그녀가 건네는 팔찌를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게 받도록 하지. 그런데 사용법은?”
“짐작 가는 바가 있지 않나?”
“팔찌를 끼고 강하게 바라면 된다. 인가.”
“완전히 돌 머리는 아니라서 다행이군.”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떠나갔다. 마지막 말을 마치고 뒤돌면서 살며시 미소 지었던 것 같았다. 나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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