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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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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4장. 바람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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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952    추천 0   덧글 0    / 2008.04.21 13:36:10

제 4장. 바람

이것은 낡은 기억.
내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었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잔인하게도 그러한 나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나에게 하나의 영상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새하얀, 그리고 붉은 세계였다.
흰색의 눈이 주변에 한가득 쌓여있었지만 내가 조금 전까지 있던 그곳은 그렇지 않았다.
그곳엔 단지 넘실거리며 불타오르는,
그 위를 적시기라도 한 듯 무언가 붉은 색이 보였다.
흰색은 눈. 그리고 붉은 것은 …피였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꿈속의 나는 누군가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 만은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더 이상 숨 쉬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무언가 길쭉한 것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무언가를 본 것인지 나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꿈속에서의 나는 슬퍼하고,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
그 사람의 생명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울고만 있을 뿐.
나라는 존재의 힘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 * *
눈을 뜨자 창문을 통해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리가 뒤숭숭했던 것 같다. 잊고 있었던 일들을 오랜만에 꿈속에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침부터 기분만 잡쳤을 뿐이다. 꿈의 내용에 대해 의문이 하나 있었던 것 같지만 어느새 뭐가 의문이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었기에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아침은 왠지 모르게 어머니가 평소보다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았다. 최근 들어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저녁에 늦게 들어오시기도 하고 아침에는 오히려 보리가 여사님을 깨운 적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홀몸으로 하는 비즈니스 우먼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자그마한 회사를 운영 중이시다. 그 일하시고 계시는 사무실에 보리와 프리드리히를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은데.
쉬는 시간, 학교에서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내가 그러한 소식을 듣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굳게 닫혀있던 교실 문이 두 명의 소녀에 의해 격하게 열렸다.
시선이 한 번에 몰린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두 소녀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더니 외쳤다.
“시영아! 언니가…! 언니가…!”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이마에 있는 파란색의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는 소녀,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외쳤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그렇게 당황한 채 교실에 난입하는 것만으로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보리와 프리드리히가 갑자기 교실로 돌입한 보리와 프리드리히에 의해 나는 순간적으로 넋이 나가버렸다. 지금 뭐라고?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언니가 뭐 어쨌다는 거야. 그런데 그 언니는 내 어머니인 강초연 여사일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혼자서 무리하시는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해왔던 것일까.
“…뭐?”
“김시영. 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현실은 냉정했다. 조용히 따라 들어온 프리드리히에 의해 나는 어떠한 사건인지 파악했다. 그리고 뇌가 그것을 받아들였을 무렵,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일단 진정해라!”
“시영아…, 흐흑.”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부르는 소녀와 나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지금까지 곧잘 학교에서 바보 같은 농담을 주고받던 녀석들도 있었다. 그 녀석들은 모두들 한 결 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어째서 그렇게까지 동요했을까. 친척도 없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라고 그제야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교실 문을 지난다. 뒤에서 누군가가 무어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지금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계단을 뛰어내린다. 평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더 많은 계단을 뛰어내린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교문이 보인다. 목표로 하는 곳은 어머니의 직장. 뛰어서 가기엔 너무나도 멀다.
교문을 지난다. 길을 건너 택시라도 타야한다.
달린다. 신호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옆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것 같다. 뭔지 모를 위압감에 나는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트럭이다.
빠앙 하는 크락션을 울리면서 트럭은 접근하고 있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모양인지 아스팔트를 긁어대는 타이어의 소리가 들려온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순간 나는 하나만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죽는다.
쓰러지신 어머니를 보지도 못하고 차에 치여 죽는다. 횡단보도 가운데에 서서 나는 멍하니 그 트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무렵.
한 소녀가 트럭에 치여 날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을 향해 비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붉은 피를 흩뿌리며 소녀는 그렇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길쭉한 귀를 가진 그 소녀는 눈을 감은 채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내 옆에 있던 금발의 소녀도 입을 벌린 채 놀란 표정을 짓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못했다. 소녀가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려감에 ‘그 날’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백색의 세계. 그리고 붉은 세계였다.
흰 색의 무언가가 바닥에 깔려 있었고, 그 위를 적시기라도 한 듯 무언가 붉은 색이 보였다. 흰색은 눈. 그리고 붉은 것은 …피였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나는 그녀가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으로 본 그 모습이 뇌에 전달되는 그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그리고 사고는 정지했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버렸다.
* * *
형광등으로 인하여 실내는 밝았지만 새벽녘이었다.
나는 지금 한 대학 병원의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면에 위치한 ‘수술 중’이라는 팻말에는 불이 꺼진 지 오래되었다. 보리는 더 이상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사제복과 같아 보이는 옷이 아니라,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보리가 지나간 것도 한참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소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바보 같다. 이 한 몸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한 마디에 흥분해서 결과적으로 보리가 대신 트럭에 치이게 만들고 말았다.
멍하니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나에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어머니가 다가오셨다.
“괜찮을 거야. 이제 슬슬 보리가 있는 곳으로 가자.”
보리가 수술을 끝마치기 얼마 전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계시던 분이다. 그 생각을 하자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동자 역시 붉게 충혈 되어 있었기에 나는 도저히 그곳에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근심이 가득한 어조로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신 거예요?”
“나는 이제 괜찮아. 지금은 나보다 보리 걱정을 해야지.”
스스로 한 말에 보리에 대한 생각이 나신 것인지 어머니는 다시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나는 가만히 주머니 속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그 눈물을 닦아드렸다.
“프리드가 곁에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어머니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쉬도록 하세요.”
“보리가 저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니…. 흐흑.”
“…….”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이 분께서는 더 슬퍼 하셨겠지. 나로서는 지금 당장 어떠한 말을 해야 할 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끝도 없이 어머니가 흘리시는 눈물을 닦아드리는 것 밖에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제기랄….”
애꿎은 벽을 상대로 주먹을 갖다 박았다. 통증이 느껴진다. 보리는 분명 이러한 통증보다 수백 배는 더 아팠겠지. 그렇게 생각이 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다. 어째서냐. 어째서 나대신 보리 네가 치이지 않으면 안됐던 거야? 내 앞에 있지도 않은 소녀를 향해 나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에게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에 보호 마법을 사용하신 것인지 생명에 지장은 없대. 의사 말로는 기적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대는데 일단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경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
“이봐,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
“너 진짜!”
나는 어느새 소녀에게 강제적으로 멱살이 붙잡혀 들어 올려 진 상태로 있었다. 내가 어떠한 눈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 눈앞에 있는 소녀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나를 욕하고 싶겠지.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보리가 갑자기 있게 되었으니까. 보리가 그러한 마법을 사용하였으니까. 그 바람에 나 대신 보리가 트럭에 치여 버렸으니까. 그런데 왜 넌 그러한 나를 두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야?
생각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이 또 다른 상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앞섰기에. 하지만, 차라리 욕이라도 실컷 먹고 싶었다. 차라리 욕을 해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끝까지…, 프리드리히는 나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주인님이 저렇게 되었다고…. 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관두자….”
프리드리히는 강하게 붙들었던 내 멱살을 놓아버렸다. 붙들렸던 힘이 사라져 나는 그대로 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 자동적으로 고개가 다시 숙여진다. 프리드리히는 그러한 내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 이 건에 대해서 엘더 세인트에게 보고하고 올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 주인님을 잘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어. 그 동안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그럼 간다.”
말을 마치고 프리드리히는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 *
다음날 나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쓸쓸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연하던 일상. 하지만, 어느새 마음 한 칸에 소중하게 자리 잡았던 것인지 두 명의 소녀가 없는 아침 식사는 이상할 정도로 괴로웠다. 어머니는 멍하니 있는 나에게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시며 토스트와 우유를 가져다 주셨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굉장한 슬픔을 억누르고 나에게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계시다는 것을. 전날 쓰러지셨던 몸으로도 아침에 힘겹게 일어나셔서 나의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왠지 지금은 어느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토스트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를 마치고 형식상의 인사를 어머니께 건네고 집을 나왔다.
교실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새 소식이 들어간 것인지 한희가 말했다.
“네 어머니에게 들었어. 보리가 차에 치였다는데 괜찮아?”
“야, 뭐라 말 좀 해봐라. 한희가 묻잖아.”
옆에서 성호 녀석이 거든다. 웬만해서는 남의 말을 받아서 말하는 녀석이 아니건만. 그래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김시영.”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승태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말해라.”
“…미안하다.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
내 그러한 반응에 녀석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한숨을 내쉬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시간 동안 모두 멍하니 보냈다.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저 나대신 차에 치인 보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끝도 없이 복잡해졌을 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수업시간 내내 계속 내 목에 걸린, 보리가 선물해주었던 목걸이를 약속의 반지와 바람의 팔찌가 끼워진 오른손으로 쥐고 있었다.
* * *
보리가 트럭에 치이고 난 후 1주일이 흘렀다.
나는 누군가가 본다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에 빠져들고 있었다.
학교 선생에게, 학원 선생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고 오죽하면 수업 시간이 끝나도 교무실로 찾아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해결하려고 까지 했다. 선생들은 그러지 않았던 녀석이 왜 갑자기 이렇게 열성적으로 변했는지 의아해했지만 내가 질문하는 것들의 의문은 모두 해결해 주었다. 이래봬도 고1까진 우등생 축에 속했다. 1년 반 정도는 놀았지만 그나마 노력하니 할 만 했다. 이상할 정도로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그러한 생활이 시작되고 얼마지 않은 방과 후, 녀석들은 다시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세 명 중에 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병문안이라도 같이 가자. 너 ‘그 날’이후로 한 번도 병문안 안 갔다면서.”
“…….”
나는 한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책상 위에 난잡하게 벌어져 있는 교재들을 챙겼다. 시계를 보니 5시 20분. 학원에 가야할 시간이다. 수업 시작까지 40분 정도 남았다. 그 동안에 편의점에라도 들렸다가 담배를 한 대 피고….
“병문안…. 왜 안 갔던 거냐?”
“갈 필요 없으니까.”
아니, 갈 수 없다.
교재를 모두 챙긴 후 가방의 지퍼를 열고 넣는다. 기계적인 동작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그렇게 보리랑 사이가 좋았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마.
그러다 갑자기 나의 의도가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의자에서 강제로 몸이 일으켜졌다.
내 멱살을 부여잡고 있는 승태는 화난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갈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거 놔라.”
갈 용기가 없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말을 마치고 승태는 나를 그대로 교실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우당탕하는 소리를 내며 교실에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한희와 성호가 입이 벌어진 채 그러한 나와 승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따갑다. 거기다 벽에 옆구리라도 부딪친 것인지 꽤나 아팠다. 그나저나 집어 던져진 덕에 가방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를 더 패려고 한 것을 말리려 했던 것인지 성호와 한희가 승태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승태는 그러한 내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너…, 그런 놈이었냐?”
생각은 어느새 목소리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뭘 안다는 거야….”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승태에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네가 나와 보리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는 거야!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잘난 척 지껄이지 마! 그렇게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교실 밖으로 달렸다.
“이 개자식! 도망치지 마라!”
등 뒤로 거침없는 승태의 욕설이 쏟아졌다.
* * *
학원의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늘 같은 시간. 어머니는 아직 퇴근하실 시간이 아니었다. 아니, 퇴근하셨다 하더라도 일단 보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실 테니 더 늦게 왔다 하더라도 안 계실 게 뻔했지만 말이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는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엘더인지 뭐에게 보고하러 간다더니 그새 돌아온 건가. 나는 마치 없는 사람을 대하듯 가만히 그녀를 지나친다. 아니, 지나치려 했는데 어느새 나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얼굴을 흘끗 보자 표정이 꽤나 어두워 보였다.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공부해야 돼. 저리가.”
“도망치지 마.”
“뭐?”
“도망치지 말라고!”
프리드리히는 내 얼굴을 보고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 작은 손바닥으로 나의 뺨을 후려 갈겼다. 짜악 하는 소리가 어두운 마당에 울려 퍼졌다. 뺨이 얼얼하다. 왜 때리는 거냐.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한다.
“너…,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수험생이 공부하는 게 도망치는 거란 말이야?!”
억울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프리드리히에게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의 너는 도망치려고 공부하고 있는 거야!!! 이 등신아!!! 너를 구해준 사람조차 나 몰라라 한단 말이냐! 이 인간 쓰레기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프리드리히는 내 외침에 그러한 외침으로 대답해주었다. 대단한 욕설난무로구나.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나는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대로 내려칠까 하다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프리드리히를 보고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만두자. 내 자신이 바보 같다.”
손을 내리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이 머저리야!!!”
그 이후로도 인간 막장이니 뭐니 하고 거침없는 욕설이 계속 내뱉어졌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내 방으로 들어와 불을 킬 생각은 하지도 않고 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뒤,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내가 그 녀석을 돕지 않았더라면. 한 마리의 개를 주워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었을 것이다. 나는 대체 어떠한 생각으로 그 개를 주워왔던 것일까. 대체 왜? 그러한 의문이 끝도 없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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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2장. 변화 - 1 - 4 유지 08.04.12 1022 0
4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1장. 계기 - 3 - 4 유지 08.04.09 991 0
3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1장. 계기 - 2 - 4 유지 08.04.04 2327 0
2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 1장. 계기 - 1 - [1] 4 유지 08.03.24 1219 0
1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Prologue [5] 4 유지 08.03.21 98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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