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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 Dreamland Online
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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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1119    추천 0   덧글 0    / 2008.04.21 13:37:50

생일을 맞아 아버지와 같이 낚시하러 갈 예정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집 앞에서 아버지가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의아해하면서도 다녀오라는 말로 배웅해주었다.
나는 소녀가 홀로 있을 그 장소로 향했다.
커다란, 꽃피지 않는 벚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나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들과 달리 길쭉한 귀를 갖고 있는 소녀는 나무에 기대어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무슨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히 깨우기가 미안해져서 나는 그대로 소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는 눈을 떴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놀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귀여웠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깨닫자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나로부터 뒤돌았다. 나는 뒤돌아 앉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ㅡㅡ.”
화가 난 모양인지, 소녀는 좀처럼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왠지 모를 악이 생겨서 계속 그 이름을 불렀다. 다섯 번쯤 불렀을까, 그제야 소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마의 한 가운데에 있는 파란색의 보석이 보였다. 나는 나를 향해 돌아선 소녀를 보고 물었다.
“여기에 있는 건 쓸쓸하지 않아?”
내 질문에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혼자 있는 건 쓸쓸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함께 가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녀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하나 떠올라 있다. 생략되어 있는 말이 너무 많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소녀에게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
자그마한 고개를 끄덕인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지은 소녀는 이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한 번 말한 뒤, 이어서 설명했다.
“그래서 아빠랑 오늘 낚시를 가려 해.”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설명을 매듭지었다. 소녀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함께 가자. 세인트.”
그 말에 소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한참이나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론이 나온 것인지 소녀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자신은 이 장소를 벗어나면 누군가에게 혼날 거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만약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대신 혼나겠다고 소녀에게 말했다. 그 말이 기뻤던 것일까 소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역시 나는 이 소녀의 미소에 넋이 나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손을 여전히 내민 채,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다.
소녀는 그러한 나의 모습에 조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뻤다.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것 같다. 소녀가 내 말에 동의를 표해주고 따라오겠다는 의사를 표한 그 때가 말이다.

나는 소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이끌며 벚나무로부터, 그 산으로부터 내려왔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이 전혀 모르는 아이를 데려오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따듯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나에게 알밤을 쥐어 먹여주며 어린 녀석이 제법인데, 라고 말했던 것 같다. 덧붙여 잘 해보라고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고가 났다.
갑자기 차선을 넘어온 음주차량에 의해 아버지가 몰던 차는 가드레일을 부수고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내렸다.
쿵 하는 소리가 난 뒤, 얼마지 않아 무언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어렸던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울고 있는 나와 소녀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간신히…, 차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한 것 같다. 아니, 아버지는 무조건 나부터 먼저 소녀를 데리고 나가라고 말했다. 나와 소녀는 덩치가 작았기에 뒤집어진 차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무언가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있었을 뿐이다. 마치 다리에 뿌리라도 생겨 차에 박혀버린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나가기 직전에 그것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이 정도야 별거 아니라고, 나와 소녀가 빠져나가면 잽싸게 빼고 따라 나갈 거라고 말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아버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나와 이 소녀가 먼저 빠져 나가면 당신도 즉시 빠져 나올 것이라고.
전복된 차 안에서 나올 때도 쉬익 거리며 무언가 새어나오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의 미미했던 것과는 달리 더욱 거세진 소리였다.
아버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했던 약속은, 결과부터 말하자면 지켜지지 않았다.
나와 소녀가 차로부터 벗어난 뒤, 조금 떨어져서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도 얼른 나오라고 외쳤다. 아버지는 거꾸로 뒤집혀진 차 안에서 웃어 보이고 있었다.
“시영아.”
“왜 안 나와. 아빠도 빨리 나와!”
“시영아.”
“얼른 나와! 아빠!”
“엄마를 부탁한다.”
“아빠!!!!”
나는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날 끌어안는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소녀가 울고 있었다.
넌…,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타고 왔던 것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던 거야?
소녀는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계속 도리질만 칠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가면 죽는다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며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겠지. 나는 소녀에게 화를 내고 그녀를 뿌리치려 하며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좀처럼 소녀는 내 소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기에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 때였다.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돌아본 그 순간, 우리들이 타고 왔던 승용차는 불길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가며 타오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빠!!!!!!!”
“가면…안 돼….”
타오르는 자동차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천천히 소녀도 나를 끌어안았던 그 손을 풀었다. 왜 막은 거야. 왜 가지 못하게 막은 거야. 라고 나는 주저앉은 자세로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계속 울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덩달아 눈물이 흘러 나왔다. 계속, 계속 울었던 것 같았다. 소녀를 부여잡고 나는 울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사람을 난 볼 수 있었다.
화가 난 얼굴을 한 채 다가오는 황금색의 갑옷을 입은 한 사람의 얼굴을.
그녀는 거대한, 정말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죽이러 오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가진 나를 향한 살기를 느끼자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다. 반쯤 쓰러져 있던 자세로 나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다. 그 때, 소녀가 내 앞으로 나와 양팔을 쭉 벌리더니 내 앞을 가로막는 자세를 취했다. 소녀는 나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말했다. 이 아이는 아무런 관계없다고. 자기가 멋대로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말이다.
거대한 검을 들고 다가오던 그 사람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치 물에 녹아버리듯 검은 사라져버렸다.
소녀는 어느새 황금색의 갑옷을 입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멍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반쯤 쓰러져 있는 나에게 계속 고개를 돌리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사라지던 그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졌던, 미소가 눈부셨던 소녀와의 만남은 끝났다. 그리고 나에게서 잊혀졌다.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멍하니 눈물만을 계속 흘린 채 있었다.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이 자동차에 난 불을 끄고 있었고, 피를 흘리고 있는 내 이마를 닦아 주었으며, 따듯한 모포를 뒤집어 씌어 주었다. 하지만, 아무도. 어떠한 사람들도.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 * *
새벽.
현실로 돌아왔다고 느꼈을 때, 내 눈시울은 뜨거워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러자 승태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기억에 관한 말이었다.
‘인간의 뇌는 정신적으로 극도로 피폐해지는 상황에 쳐하게 되면 일정 기억을 봉인하거나 변형해서 갖게 하기도 하지.’
‘왜?’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 미쳐버릴 테니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억하지 못 하게 되는 것이 쉬운 예라고 볼 수 있지.’
줄곧 죽었다고 믿어온 그 소녀는 죽지 않았었다. 그 날로부터 7년이 지나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후로 그 벚나무가 있던 곳에 아무리 가도 소녀는 만나볼 수 없었으니까.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 소녀에 대해 잊을 수 없었을 테니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보리 너는… 그 날 이후로부터 줄곧 나를 지켜봐주었구나…. 자신의 잘못도 아닌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서, 내가 웃으며 건넸던 그 한마디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함께 가자는 그 말에 그 말을 듣고 따라왔던 너는 또 다시 날 구했구나.

어느새 나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목표로 한 곳은 누군가가 입원해 있을 대학 병원.
그녀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소등시간이 지난 것인지 복도의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병실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면 왠지 그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1011호….”
내 눈앞에 있는 병실이 바로 그녀가 입원해 있어야 할 병실이었을 터였다. 독실이었으면 아무런 부담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좋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독실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고막에서 터져버릴 듯이 울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을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한 거다. 나는 가만히 병실 안에 있는 커튼으로 가려진 6개의 침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강보리’
있다.
나는 조용히 그 이름표가 달려 있는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커튼을 슬쩍 걷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한 보리가 있어야 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당황하지 마라. 김시영.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워 보인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병실이 아니라면 보리가 있을 장소. 그곳은….
나는 병실에서 나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보리를 만났던 날에 갔던 보리의 마법으로 다녀왔던 그 장소로. 보리에게 이 반지를 받았던 장소로. 그리고… 보리를 처음 만났던 그 장소로.
“허억…. 허억….”
일반인의 걸음으로 30분 정도는 걸리는 등산로를 10분 정도 만에 달린 탓인지 호흡은 극도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숨을 고를 여유 같은 것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보리를 찾아내야만 했다.
만개한 벚나무가 보인다. 보리를 만났던 날에 보리에 의해 만개하게 되었던 벚나무.
벚나무 주변의 공터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벚나무를 기준으로 한 바퀴 돌아보아도 보리는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에게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섬광과도 같이 내 오른쪽 가슴을 꿰뚫었다.
“커헉….”
나는 가슴을 끌어안고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프리드리히 덕에 단련된 것 때문인지 왼쪽 가슴을 꿰뚫리는 것만은 면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출혈사할 것이 뻔했다. 순간적으로 살기가 느껴졌던 뒤를 바라보자 누군가 있었다. 거대한…. 정말 거대한 검을 든 기사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
“하다못해 고통은 느끼지 못하게 해드리려 했건만…. 의외로 그것조차 쉽지 않군요.”
“누…구냐.”
2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매혹될 것만 같은 화려한,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 금색의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거대한 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능력이 완전히 발휘된 것이 아닌 것인지 프리드리히의 그것처럼 화염이 넘실거린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검 날부터 그립까지 전체적으로 1미터 쯤 되어 보이는 검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흰 색에 가까운 그 검은 굉장히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저것 알 수 없는 문자들뿐이었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평범한 무기는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 무기의 소유자는 입을 열었다.
“저는 대자연의 기사, 엘리제. 이 세계의 균형을 깨는 자들을 처벌하는 존재입니다.”
“그래…, 그 대자연의 기사가 나에게는 무슨 볼 일이지?”
나는 왼손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가슴을 가린 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나에게 있어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신은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한 세인트에 의하여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바람도 아니었고 단순히 그 세인트의 바람이었을 뿐입니다. 세인트가 바람을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당신을 또 다시 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자신의 목숨과 뒤바꿀 각오까지 한 채 말이죠.”
“나를 살리는 게…, 보리의 바람이었다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죠.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 세계의 균형에 맞춰, 당신의 목숨을 여기서 앗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기합을 내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피하려고 해봤자 도저히 피할 수 없겠지.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신의 낫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어도 피할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결과부터 말하자면 검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대자연의 기사가 나에게 검을 내지르고 몇 초가 지나도 몸에 별다른 이상이 추가되지 않자 의아한 심정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앞에 있는 하나의 검과 빛을 머금은 화살을 볼 수 있었다.
내 심장을 꿰뚫었어야할 거대한 검은 내 앞에 있는 그 화살에 의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검과 화살이 닿은 곳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파앗 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엘리제가 순식간에 검을 거두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외쳤다. 아니, 내 뒤에 있는 존재에게 외쳤다.
“세인트!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 외침에 나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벚나무의 뒤편에는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빛나고 있는 거대한 활을 들고 서 있는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곳에서 저를 세인트라 부르는 사람은 엘리제, 당신뿐입니다.”
보리의 말에 엘리제는 표정을 구겼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엘리제에게 보리는 말했다.
“다쳐 있던 저를 치료하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름을 주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보리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나와 엘리제의 사이까지 왔을 무렵이 되어서야 그 발걸음을 멈추었다. 슬픈 어조로 말하는 보리의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세인트에게 바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만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보리는 거대한 활을 들고 있던 양손을 좌우로 뻗어 나를 엘리제로부터 가로막았다. 그 뒷모습이, 그 좁은 등이…, 작았던 그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작은 몸으로 쓰러져 있는 나를 보호하고자 했던 소녀. 이 소녀는 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를 보호하고자 했다.
“…세인트.”
대자연의 기사는 그러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어느새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을 눈치 챘다. 구멍이 났던 오른쪽 가슴을 만져보니 상처가 나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란 눈으로 가슴을 내려다보니 찢어진 옷 사이로 반들반들한 살이 보였다. 피는 묻어있으나 상처는 모두 아물어 있었다.
“보리…, 너….”
나는 채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보리는 내 말에 슬쩍 뒤돌아보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등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동공이 확대된다.
“쿨럭…, 저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입니다. 부디 해치지 말아주세요….”
보리는 피를 토하며 말했다. 내 상처를 가져가 버렸다…. 말하는 것조차 부담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안 돼…, 말하지 마 보리야….
말은 마친 보리는 쥐고 있던 거대한 활을 놓치며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보리야!!!”
나는 보리를 향해 달려갔다. 워낙 근접해 있었기에 순식간에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따듯한 체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혈은 더욱 그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라도 하는 듯, 가슴이 뚫려버린 상처에서는 점점 더 많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곁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타난 프리드리히가 엘리제의 곁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붉은색의 갑주가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화염의 기사, 프리드리히의 진정한 모습인 것일까.
프리드리히는 마음을 굳게 먹은 표정으로 화염이 넘실거리는 브리가닉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그녀는 엘리제에게 말했다.
“엘리제. 당신에게 거역할 마음은 없습니다만 이번만큼은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프리드리히의 말에 엘리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시선이 엘리제가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프리드리히는 신창을 내뻗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크윽!”
그 찰나의 순간이 흐르고 순식간에 이쪽과의 거리를 단숨에 벌린 엘리제는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분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를 보며 외쳤다.
“화염의 기사…,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세인트라 부르던 사람에게는…, 보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지금의 주인은 저 분이시니 저는 그분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이름 하나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이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자들이 이렇게나 타락해버리는 겁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엘리제의 외침에 프리드리히는 슬픈 표정으로 읊조렸다.
“당신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부름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현재 위치한 곳을 파악하게 될 때의 그 처참함을. 알 리가 없지요. 애초에 당신은 인조생명체니까요.”
프리드리히의 슬픔이 담긴 말에,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운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그 시선에 엘리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 말, 후회하도록 해주겠습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 화염의 기사로 머무를 거라 생각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럼 갑니다!”
창과 검이 작열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후의 움직임이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서 창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주황색의 불똥이 튀기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어느새 엘리제도 자신의 무기에 기운을 흘려보내기라도 한 것인지, 흰 색의 빛과 붉은색의 화염이 서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내가 안고 있는 소녀를 생각해내고 소녀를 흔들며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보리! 강보리! 일어나!”
“…….”
반응은 없다. 조금 더 거세게 흔들며 이름을 외쳐본다. 하지만, 역시나 반응은 없다.
나는 바랐다. 이 소녀가 죽지 않기를. 이 소녀가 나의 곁에 있어 주기를. 조금씩 따스함을 잃어가는 보리의 몸을 끌어안고서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설령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했지?”
“눈을 떠…, 일어나….”
“세인트, 보리잖아?”
“바람을 이루어주는 존재잖아?”
“눈을 뜨란 말이야!!!”
어느새 나는 오열하고 있었다.
“흐흑… 제발. 죽지 말아줘.”
“내 곁에… 있어줘.”
“나를 또 다시 혼자로 만들지 말아줘.”
순간 빛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끼고 있는 반지로부터 흘러나온 빛이 보리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어 갔다. 그 때, 왠지 모르게 내 바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바람은 하나 뿐.
너와 함께 있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 새하얀 빛이 주위를 모두 감쌌다.
얼마나 그러한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어느새 흐르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소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날 보더니 굳게 닫혀 있던 그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아…. 시영이?”
“…….”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보리를 끌어안았다. 따듯했다.
“왓! 왜, 왜 그래?! 왜 갑자기 껴안고 난리야!”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보리는 주먹을 쥐어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맞아왔던 어떠한 공격보다도 아프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보리를 안고 있던 그 자세로 조용히 말했다.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줘.”
보리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껴안긴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을 뿐. 그리고 내 등에 따스한 것이 닿았다고 느꼈을 무렵, 보리가 입을 열었다.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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