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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지는 장소 by 유지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뭘?!" "네 바람을."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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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지[yuzi]  
조회 1064    추천 0   덧글 0    / 2008.04.21 13:38:10
싸움은 결판이 나 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승부였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잠시 정지한 싸움으로 인해 나와 보리는 그녀들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거의 넝마가 되어버린 갑주를 걸치고, 수많은 상처로 인해 출혈이 계속 되고 있는 프리드리히와는 달리 엘리제는 처음에 입은 생채기를 제외하고는 상처다운 상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제는 현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어느 정도 사정 봐주면서 싸웠다지만 어떻게 화염의 기사가 몇 랭크나 위인 저를 상대로 이렇게 버틸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것은 제가 화염의 기사일 뿐만이 아니라 프리드리히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제는 프리드리히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이제부터 본심으로 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요?”
“그 정도야 당신에게 창을 겨눌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소멸입니다! 그 정도의 각오가 정말 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화염의 기사!”
어딘지 모를 울분을 눌러 담은 것만 같은 엘리제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프리드리히는 그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결심한 듯 눈을 뜨며 말했다.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입니다.”
프리드리히의 말에 엘리제는 다시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해받지 못한다. 이해할 수도 없다. 결국 그렇다면 서로의 정의를 가진 채 맞붙을 뿐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엘리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함께 전장을 누볐던 당신이 이렇게 저의 가슴에 상처를 준 단 말입니까! 애초에 당신이 맡은 세인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닌 한 명은 어쩌다 같이 지내게 되었을 뿐인 존재가 아닙니까!”
“당신은 모르겠지요.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인조 생명체인 당신에게는!!!”
“감히 그런 말을 아직도!!!”
분노한 엘리제의 대검이 프리드리히의 왼쪽 어깨에 쑤셔 박혔다. 갑주는 뜯어져 나갔고 그 안의 새하얀 살이 찢어져 피를 뿜기 시작했지만 프리드리히는 결코 창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신창은 점점 더 밝은 빛을 뿜어내며 웅웅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프리드리히는 입가에 묻은 피를 슬쩍 닦아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각오하세요. 엘리제. 이번 한 수로 저의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
엘리제는 프리드리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분노에 찬 표정으로 프리드리히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드리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옥의 업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면이 폭발했다. 엘리제를 기준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일어났다. 지름이 몇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기둥이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일어난 폭발에 말려들기라도 한 것인지 주변의 잔 나무들이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나무였던 것들은 거멓게 변한 재만을 흩날리고 있었다.
* * *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보리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으윽…. 아직 무리인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조용히 프리드리히와 엘리제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지면이 폭발하여 솟아난 불기둥이 계속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강하다. 적어도 본심을 다한 프리드리히가 질 거라는 생각은 난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반드시 이길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보리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했다.
“저 정도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저 불기둥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나의 물음에 보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자연의 기사는 저 정도로는 죽지 않아…. 아니, 적어도 다른 기사들에 의해서는 죽을 수 없는 존재야.”
“그러면 프리드리히는….”
“걱정 마.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방법이… 있어?”
“내 활을…, 쓰는 거야.”
“활?”
보리의 말에 나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보리가 이곳에 나타났을 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활을 들고 있었던 것 같다. 보리는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자신의 활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활이 보리의 손아귀로 정확히 날아와 잡혔다.
순백색의 거대한 활은 만곡궁(彎曲弓)의 모양새로 활 전체의 중앙을 기준으로 굴곡이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활을 손에 잡은 보리가 말했다.
“비록 기사가 아니더라도…, 세인트라면 가질 수 있는 세인트로서의 무기야. 이 무기의 이름은 바람의 활(Bow of wish). 화살 대신 바람을 빌어 쏘는 무기야.”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활이면 엘리제를 죽일 수 있는 거야?”
“죽인다는 바람은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아.”
내 말에 보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대자연의 기사나 되는 존재를 세인트와 인간 하나가 이 세계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어. 하지만….”
보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하기라도 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이 기사가 있어야 할 곳, 엘더 세인트가 있는 곳으로 강제 송환시킬 수는 있을지도 몰라.”
보리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맑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가 눈부셨다.
“바람을 담으면 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달라는 바람을 빌어 줘.”
보리는 불기둥을 향해 활을 겨냥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준비됐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활시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보리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갰다.
“그럼 간다.”
“응.”
나와 보리는 천천히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 * *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불기둥은 그 위력이 차츰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언제 불기둥이 솟아올랐냐는 듯 불기둥은 온 데 간 데 없고 잔디가 있던 자리에는 까맣게 변한 재만이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예의 빛의 기사가 있었다.
어느 정도의 타격은 입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건재했다. 승부는 났다. 프리드리히의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고 이것으로 프리드리히는 모든 힘을 소진했다.
프리드리히의 패배였다.
건재한 엘리제의 모습을 보고 프리드리히는 역시 안 되나…. 하고 중얼 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엘리제는 흘끗 프리드리히를 노려보는 것 같더니, 이내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을 들고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불기둥으로 의해 생겨났던 연기가 모두 바람결에 사라졌을 무렵, 엘리제는 그제야 활시위를 당길 대로 당긴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엘리제는 말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입니까. 세인트.”
“…….”
엘리제의 말에 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리는 나에게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녀의 그러한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엘리제가 달려오고 있었다. 오십 미터 남짓한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바람의 화살(Arrow Of Wish)”
보리가 그렇게 조그맣게 말한 순간.
나와 보리는 동시에 활시위를 놓았다.
무슨 대포라도 발사한 것처럼 나와 보리는 활시위를 놓자마자 뒤로 밀려났다. 그나마 앉아서 쏘았기에 망정이지 서서 쐈다면 그대로 뒤로 자빠져도 할 말이 없었을 정도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나와 보리가 함께 바람을 모아 쏘아낸 화살의 궤도를 지켜보았다.
직선. 바람의 화살은 순식간에 엘리제에게 접근해갔다. 순간 의문이 하나 생겼기에 보리에게 말했다.
“어째서…, 피하려 하지 않는 거지? 저 녀석의 움직임이라면 피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내 말에 보리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 번 목표물을 정하고 쏘아진 바람의 화살은 절대 빗나가지 않아. 피한다고 해도 맞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유도 기능이 달려 있거든.”
프리드리히의 신창이나 엘리제의 대검만한 사기적인 무기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람의 활이야말로 진정 사기인 무기였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엘리제는 바람의 화살이라는 것이 마치 유도 미사일과 같이 목표로 한 존재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인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자신의 대검을 앞으로 치켜세웠다. 그녀는 거대한 대검을 양손으로 쥐더니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엘리제의 신검에 바람의 화살이 닿았다.
-콰아아앙!
굉음을 내며 엘리제의 검과 화살이 닿은 곳으로부터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크윽!”
빛을 머금은 화살이 엘리제의 검에 닿는 순간, 그녀가 신고 있던 황금빛의 그리브가 3분지 1이 지면으로 푹 가라앉았다. 가히 에너지의 결합체라고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람의 화살을 상대로 엘리제는 버텨내려 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만 같은 기세였다.
여전히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기에 옆을 바라보자, 하얀 깃털들과 은색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는 보리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라도 한 것인지 보리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적어도 이번에 너와 나의 바람을 모아 쏜 바람의 화살은….”
이윽고 눈을 뜨며 강하게 외쳤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전까진, 한 번 닿은 상대는 결코 놓치지 않아!”
보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엘리제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아?!!!”
고개를 돌려보자 어느새 엘리제는 하얗게 빛나는 구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더 이상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제를 둘러싼 반투명한 구체는 조금씩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오르던 중 엘리제가 구체를 향해 대검을 계속 휘둘렀지만 바람의 화살이 가진 진정한 모습이 나타난 이상, 더는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엘리제의 의도대로 부서지지는 않았다. 빛의 구체에 갇힌 엘리제는 어느새 만개한 벚나무의 꼭대기 부근까지 올라가 있었다. 나와 보리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체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방으로 그 빛이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사라져버리자 그곳에는 아직 어두운 하늘만이 남아있었다. 엘리제는 사라졌다. 완전한 끝이 아닐지라도 돌려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후…. 끝났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내 어깨에 푹 기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에, 보리야?”
고개를 돌려보니 보리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잠이 부족했던 것인지, 긴장이 풀려서 그러했던 것인지 새근새근 잘도 자는 보리를 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보리를 보고 미소 지으며 잠든 가볍게 그녀를 들어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녀를 안은 채로 프리드리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지면에 푹 엎드린 채, 넝마가 된 갑주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베레모가 흐트러졌다. 뒤로 누워있는 프리드리히의 베레모를 정리해주다가 문득 그녀의 눈썹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 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어나 봐라.”
“…으윽.”
나는 보리를 안은 모습 그대로 프리드리히 앞에 앉아 말을 걸었다. 눈썹이 흔들리던 소녀는 간신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끝난 건가. 용케 살아 있군. 나란 녀석.”
“그래, 다 끝났다.”
“아아, 그럼 슬슬 일어나볼까.”
프리드리히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쭉 피기 시작했다. 뚜둑 거리는 소리가 마구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꽤나 뻐근했던 모양이다.
“으, 온 몸이 아프다.”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프리드리히에게 나는 물었다.
“…하나 좀 물어봐도 되겠냐?”
“뭘?”
내 말에 프리드리히는 기지개를 펴다 만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넝마조각이 된 갑주를 걸친 사이로 새하얀 살이 보였다. 상처가 그새 나았어? 뭐 일단 우선순위는 이게 아니니.
“대자연의 기사와 왜 싸운 거냐? 보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굳이 싸울 필요도 없었고 상처 입을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니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랬을까.”
말을 마치고 프리드리히는 내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잦아들었고 어느새 조용해진 프리드리히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네 녀석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
나는 조용히 있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가 기지개를 펴다 만 자세로 비틀거린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도로 쓰러진다. 그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프리드리히는 역시 좀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 아무래도 역시 안 되겠다.”
나는 프리드리히의 머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래, 일단은…, 좀 자고 싶어….”
언제는 뭐 잠잘 필요도 없다고 했으면서. 뭐 그래도 이 정도로 수고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아무런 태클도 없이 봐줘도 괜찮겠지.
“푹 자라.”
“그래. 푹… 잠들어 보고… 싶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프리드리히는 눈을 감더니 조용해졌다. 수면의 늪에 빠져버린 프리드리히를 역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는 두 명의 소녀를 향해 나는 말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을 곳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하며.
그 날 밤은 끝없는 밤하늘이 지속될 것만 같았던, 꿈과 같은 밤이었다는 생각을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난 할 수 있었다. 덧붙여 잊으려 해봐야 잊을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었다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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