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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한여름날 할머니가 해주던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한국적인 이야기. 라고 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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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Dr.L[ceaser]
조회 2908    추천 0   덧글 12    / 2007.06.03 17:07:59
########


적어도 영민이 맞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최악의 상황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릭시르는 빠르게 몸을 날려 파사죽시를 맨 손으로 잡아내었고. 유여는 한숨을 내 쉴 수 있었지만 지영은 경악에 차 크게 뜬 눈으로 엘릭시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쏜 살은 다시 회수할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엘릭시르가 뒤이어 나섰다.

\"이런 건 위험한 겁니다.\"

날아가는 화살을 맨 손으로 잡아챈 엘릭시르는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지영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신통력과 서양역귀들로 불리는 그들이 가지는 파장이 맞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승화작용으로 손바닥에 화상을 입은 것 같았지만, 엘릭시르는 여전히 웃으며 그 화살을 지영의 전통에 넣고 다시 영민의 뒤로 돌아왔다. 그 동작은 몇 초 밖에는 걸리지 않았고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당황한 듯 지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표정만큼은 평소의 굳은 얼굴로 주시하고 있었다.

\"자 그럼…\"
\"그리 급히 어딜 가시려고 하는 겐가?\"

영민은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광영이 있었다. 평소의 두루마리에 의관을 갖추어 입은 모습이었지만, 기세는 달랐다. 평소의 넉살좋은 조선중기의 선비의 모습이 아니라, 살기를 머금은 미소를 가만히 띤 표정이었다. 손에는 장죽이 들려있었는데 무언가 기운이 어려 있는 듯 어둠속에서 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눈에 보일정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진짜 최종보스가 등장하시는군요. 제게 볼일이라도?\"
\"그 방정맞은 입을 놀릴까 내 근심이 되어 뒤를 밟았던 것이 호기가 되었구나.\"
\"이런. 그럼 그때의 그분은 당신의 짓이었군요?\"
\"그 입 다물라!\"

그렇게 말하며 지체 없이 장죽을 날렸지만 엘릭시르는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 순간의 허점을 노려 발을 걸려고 들었지만 잽싸게 디딤 발인 왼발로 그 움직임을 봉쇄하고는 가볍게 발을 차 올렸다. 갑자기 치켜 올라가는 발에 놀라 엘릭시르가 몸을 놀려 피했지만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여느 발차기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매서운 일격이었다. 겨우 벗어나 숨을 고르며 영광을 향해 엘릭시르가 물었다.

\"택견?\"
\"아니, 이건 수박이라네.\"

채찍처럼 올려 차는 발을 가까스로 피하고 공간을 좁혀보려 했지만 이미 광영의 발차기는 사정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그 공격을 흘리거나 막아야했다. 막을 때마다 뼈가 부스러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요리조리 피하며, 빈틈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빈틈은 보이지가 않고 오히려 공격만 매섭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광영의 공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차기를 하면서도 장죽으로 빈틈을 노리는 데, 그것이 부딪힐 때마다 장죽과 엘릭시르의 몸 사이에서 작은 노란 전격이 일어났다. 그렇게 공격과 수비를 같이하고 있는데도 전혀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공격과 수비가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되는데다, 좀처럼 그 움직이는 속도를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얼이 빠져있던 영민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광영님이…….\"
\"여기에 있다간 휘말릴 테니 이쪽으로 와요.\"

유여의 손짓에 영민이 조심스럽게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빗나간 듯 보이는 광영의 발차기가 영민의 머리를 향했다. 그것을 손으로 막으며 엘릭시르가 기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른 사람을 멋대로 공격하면 안 되죠. 상대는 여기 있잖아요.\"
\"멈추시오!\"

이번에 나타난 것은 호선생이었다. 탐라에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민이 반가워 말했다.

\"호형님!\"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꾸나. 이게 뭔 짓이오? 광영어르신?\"

부랴부랴 달려온 듯 호선생은 가쁜 숨을 고르며 양쪽의 둘을 살폈다. 그 기세가 약화된 틈을 노려 엘릭시르는 공격권에서 벗어났고, 불만어린 표정으로 광영이 호선생을 향해 눈을 샐쭉하게 뜨고 말했다.

\"호선생은 빠지시게. 이것은 내 일이야.\"
\"그래서 송첨지도 방치하셨소이까?\"
\"어허. 이 사람이!\"

처음 듣는 이야기에 영민과 지영은 놀라고 있었다. 송첨지가 변고를 당한 것이 광영 어르신 때문이었다는 말은 이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 무엇 하나 말을 꺼낼 수 없는 심각한 공기가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리고 호선생의 대답이 뒤를 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소. 할망이 모두 다 이야기 했단 말이오. 그런 생각은 내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소이다. 설마하니 나를 할망이 변고를 당했다고 탐라에 비선까지 태워 보낸 목적이 이런 거였다고 말씀하시지는 못하겠지요?\"

일련의 대화 끝에 광영은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대신 호선생이 계속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시지요 광영어른, 저들이 비록 서양역귀이긴 하나 우리에게 해가 될 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소. 그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몇몇을 혼을 내어 주자고 이야기 했던 것을, 곡해하셨다면 내 할 수 있는 말도 없었을 거외다.\"
\"많아질게야. 우리들은 그저 당하고 있었네. 끝도 없이 몰려드는 서양역귀들 중에 그 하나 제대로 된 이가 있던가?\"
\"유여가 있지 않았소? 그리고 세유낭자는? 그 수많던 서양역귀들이 감화되었는데 그걸로 모자라다 하시면 대체 그 무엇이 조건을 맞추겠습니까?\"

애초에 서양역귀를 받아들인 돗까비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더 서양역귀에 대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끔 그저 만들어놓은 허깨비라는 걸 실토한 셈이었다. 호선생은 그걸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유여가 있고 세유가 있다. 그리고 수많은 감화된 서양역귀들은 지금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서양역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어른에 속하는 광영의 발언은 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결론은 맨 뒤에야 찾아온 호선생이 내고 있었다. 여전히 광영은 침묵하는 채로 호선생의 말을 들었다.

\"……,\"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광영어르신.\"
\"…좋네.\"

순순히 걸음을 돌려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온데간데없는 광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선생이 이번에는 엘릭시르를 바라보며 충고했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았네.\"
\"…역시. 당신이었군요.\"

이미 호선생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지만,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대꾸하고만 있었다.

\"우리 영민이 에겐 더 이상 간섭하지 말게나. 우리의 능력을 하찮게 보고 있는 건 아닐 테고, 그러자니 영민 이를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겐가?\"

호선생의 말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투였지만 영민은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오로지 둘만이 소통 가능한 그런 종류의 대화였고, 영민은 그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잠자코 있게. 밤길이 어두우니 조심해야 할게야.\"

엘릭시르는 호선생의 농담에 웃으며 대답했다.

\"밤에서 태어난 존재들인데 밤길이 무서울 까닭이 있겠습니까?\"
\"알았으니 그만 가보시게.\"

그러자 엘릭시르는 가만히 인사를 건네고는 암귀들을 몰아 먹물이 창호지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겨우 한숨을 쉴만한 여유를 가지게 된 호선생이 잠자코 영민을 불렀다.

\"영민아.\"
\"예, 호형님.\"

간만에 만난 호형의 부름에 영민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호선생은 손을 내밀며 뜬금없이 말했다.

\"그 사인검은 이리 내거라. 네가 지니기에는 위험한 물건이다.\"
\"네?\"

대뜸 검을 내놓으라 하니 어쩔 수 없이 영민이 머뭇거리다가 겨우 손을 내밀어 검을 건네었다. 그걸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는 손아귀에 힘을 넣어 검 집 째 부러뜨렸다. 여지없이 깨져버리는 사인검과 검 집을 보며 놀란 토끼눈으로 호선생을 바라보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필요 없는 물건이니라. 허허허! 그 헌사영신곤만 잘 잘 간직하거라.\"
\"아니 어째서 윤 판서어르신께서 주신 그 귀한 검을…….\"
\"자고로 검에 사기가 배어있으면, 사람을 죽이며 광기를 탐하니 보기 좋지 않은 법이다.\"

그렇게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는 영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실패했다는 것을 예전에 깨달았지. 하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계속 그대로 고수하기로 마음먹은 게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었지.\"
\"…….\"
\"이건 고 하르방이 보내온 물건이다. 예전의 답례 라더구나. 돗까비들이 가지고 있는 복주머니처럼 하나의 소원을 들어줄게다.\"

호선생의 손에서 영민에게 전해진 것은 작은 향낭이었다. 그걸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가만히 올려다보았지만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네 소원이야. 누굴 위해서 쓸 필요는 없어. 그러니 편히 마음을 먹고 마음속으로 빌려무나.\"
\"……정말 이루어질까요?\"

아무래도 조금은 믿기 힘들었는지 조심스럽게 영민이 되물었다. 그러자 호선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안심이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영민이 향낭을 풀어보았다. 그러자 사방이 환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갑자기 몰려왔다. 그 가운데서 정신만을 추스르려 애를 쓰고 있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여기는…….\"
\"소원을 아직 빌지 못해서 그걸 기다리고 있는 게다.\"

어느새 호선생이 모든 것이 하얀 공간 속에 의젓하게 뒷짐을 진 채로 영민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그러한 소원은 들어줄 수 없으니 알아두어라. 그래 네 소원은 무엇이더냐?\"
\"제 소원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무엇을 빌어야 할지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느닷없이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상황자체가 너무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영민은 그저 어찌할 줄을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호선생이 가만히 말했다.

\"그래. 조금 뜬금없는 일이겠지. 이 모든 것이 돗까비놀음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도 있으렷다. 허나 모든 것은 그저 순리에 의해 일어나는 법. 네 소원은 우리를 만나기 전으로 가는 거겠지?\"
\"…….\"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나름 소중한 시간들 이었다. 골동품가게의 조용하고 차분한 공간. 청사누각에서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호선생의 판소리. 혼자 살면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고. 신기한 일들을 겪으며 보았던 여러 풍경들을 차분하게 떠올린다. 괴로운 일도 즐거웠던 일도 모두 시간이 지나니 그리워졌다. 영민의 그러한 마음을 읽었는지 호선생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다. 기억할 수 있을게야. 아, 지영낭자가 네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구나.\"

그리고 갑자기 허공에 지영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고리 차림으로 단아하게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와 손에 쥔 무언가를 건네었다.

\"…이거.\"
\"파사죽시면 중요한 물건이잖아요. 이런 걸 왜 내게?\"
\"신통력이 있는 물건이니까. 받아두면 좋을 거예요.\"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안하고 화살을 쥐어주었기에 그걸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이번엔 호선생이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이건 끝이 아니야. 모든 것은 끝에서 또 다시 시작하는 법이지. 그저 한바탕 신나게 놀다가 갔으니 후회는 없을게다!\"

영민은 알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 사라지며 손을 흔들고 있는 호선생과, 그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지영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손에 든 파사죽시를 꾹 쥐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하얀 빛을 손으로 가렸다. 그 동안의 모든 것이 꿈처럼 천천히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영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Epilogue]





\"헉! 지각이다!\"

자명종을 누르지 않고 자는 바람에 학교 갈 시간에서 너무 늦어버린 탓일까? 영민은 허겁지겁 일어나 씻을 준비보다는 먼저 옷걸이에 걸려있는 교복을 입었다. 그러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귓전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이미 출근한 상태였겠지만 어머니는 영민이의 아침을 차려주고 나서 출근해도 될 만큼 여유로운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늘 일어나면 늦잠을 자고 허둥대는 영민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먹고 가야지 영민아.\"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서 허겁지겁 신발을 신는 사이에 지하실에서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작은 키의 여자아이가 나왔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영민에게는 보이지 않았는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문을 활짝 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그 뒤에서 걸어 나온 커다란 양궁가방을 든 지영이가 세유의 등 뒤에 서서 가만히 말했다.

\"이젠 우리가 보이지 않나보네요.\"
\"그러게.\"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며 바라보는 세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지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조금 아쉽네요. 더 친해져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너, 밥도 해주고 그랬다면서? 그렇게나 마음에 든 거냐?\"
\"…그, 그건.\"

의외로 당황하는 태도를 보이자 세유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지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녀석이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거냐? 라는 투이긴 했지만, 내심 다른 면모를 보게 된 사람으로써의 궁금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너무 놀리지 않았나 생각했던지 허심탄회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아니 됐어. 실은 나도 좀 흥미가 당겼거든. 그 온갖 일을 다 당하면서도 표정하나 잘 바뀌지 않는 무신경함인지 둔함인지 모를 성격은 내가 잘은 모르겠다만. 학교에 늦겠구나. 서둘러 가자.\"

결국 말을 끊은 둘은 달려나간 영민을 따라 잰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학교에 가는 길은 둘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전철을 한번 갈아타고 버스까지 환승해야 하는 제법 먼 거리. 돗까비들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주변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익숙하게 영민의 뒤를 따라 지하철에 올랐다. 5호선 강동역까지 올라온 상일동발 화곡행 열차는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한쪽 구석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책을 꺼내 읽고 있는 영민의 근처에 선 둘은 자리에 앉아있는 외국인 남자를 마주쳤다. 엘릭시르였다.

\"아가씨들 좋은 아침입니다.\"

제법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향해 세유는 핀잔을 던졌다.

\"뭐야, 너도 감시 중 인거냐? 피르?\"
\"이런, 피르라고 부르지 마세요. 엘릭시르라는 이름입니다.\"

지영은 모르는 세유와 엘릭시르라 불린 이 서양역귀와의 사이. 그건 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먼 옛날의 이야기 일거라 가늠해 보았다. 세유는 유여보다 훨씬 나중에 돗까비로 투신했지만, 그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만큼 오래 살았다. 그리고 엘릭시르는 그 앞에서 만큼은 고양의 앞의 쥐처럼 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던 것이다.

\"하긴 너의 조악한 센스로 보건데, 박말똥같은 이름을 안 쓰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설마하니 공석이라던 그 영어교사로 네가 발령 받은 건 아닐 테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유와 대화를 나누던 엘릭시르는 그 와중에 영어교사 발령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한 듯 물었지만 그 조차도 당연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하는 세유. 지영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평소의 표정으로 둘 사이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인간 세상에 어느 정도의 입지를 구축했는지까지 말하면 실례이려나?\"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옆의 지영아가씨도 안녕하신가요?\"

오해는 다소 풀렸지만 여전히 반감이 있는 지영은 무관심하게 고개를 돌려 영민을 바라보았다. 옆자리의 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드폰을 낀 채로 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그만 한숨이 절로 나와 그 모습을 보던 엘릭시르가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직 인간과 이 세계는 유별해야 하는 것인데, 아쉬움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군요.\"
\"…….\"
\"그 이야기는 그만해. 그나저나 서양역귀의 표본인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낮에 돌아다녀도 되는 거냐? 아무리 이것이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라고 해도 말이야.\"

돗까비들이 낮 시간 때에 인간의 형상을 하고 그 제약이 조금 덜하다면 서양역귀들은 낮 시간에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어서 나타나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엘릭시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원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부담은 덜한 편이라고 해도 태양 아래에서의 제약 없는 행동은 무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해 아래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돗까비가 되어 신통을 나누어받는 행운을 누려 낮에도 아무런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자신들과는 정 반대로. 그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독이 되는 햇살을 그대로 받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몹시도 궁금한 세유였지만 여전히 엘리시르는 능청을 떨며 모른 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지 마. 너도 영향을 받은 거구나?\"
\"그렇다면 그래야겠지요. 원래 그의 존재로 우리가 영향을 받는 거니까요.\"

그러고는 셋이 합의라도 한 듯 침묵했다. 그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소망했다면 적어도 여기에 있는 세 명 만큼은 원래의 영민을 모를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기억은 남았다. 단지 영민이 알아보고 있지 못할 뿐으로, 누군가를 구분할 필요성도 없이. 그들은 동떨어진 세계에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었다. 다만 일반인들 눈에는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 챌 수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였다. 엘릭시르는 꽤 가볍게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이걸로 충분한 걸까요?\"
\"아니. 아닐거야.\"

세유의 말은 어딘가 핵심을 찌르는 투였기에 지영과 엘릭시르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서양역귀든 돗까비들이던. 이 이야기는 영민을 끌어들인 이상은 좀처럼 판단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
\"말이 그렇게 되는 거군요.\"
\"시끄러워 피르. 이건 네가 일으킨 사고야. 그게 호선생으로 무마가 됐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구. 덕분에 오라버니는 고향으로 한동안 돌아가 있게 생겼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마음에 드는 분과 한 지붕에서 살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RS?\"

빈정거리자 세유는 여지없이 주먹을 휘둘러 엘릭시르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시끄러워, 이 나르시스트야.\"
\"아직 주먹은 맵군요. 우허허.\"
\"한대 더 맞을래?\"
\"사양하겠습니다. 그 보다도 돗까비들의 반응이 궁금한데…….\"

엘릭시르의 관심이 돗까비 쪽으로 흐르자 지영은 내심 긴장하며 말했다.

\"여전히 반응은 없어요.\"
\"뭔가 더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만, 이대로도 좋겠죠. 영민군도 만족하는 듯 보이고.\"

여전히 헤드폰을 쓴 채로 책을 쥐고 집중을 잃지 않고 있는 영민을 가리키자 지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 결과로 엘릭시르는 또 세유의 주먹세례를 받아야 했다.


########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학교생활.
영민은 그러한 세계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단지 공부뿐인 생활이지만 친구도 있고 평범하게 살 수 있고. 부모님도 계신 그러한 생활. 적어도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지영에게 느껴졌다.
과연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계속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러니 공부는 제대로 될 리가 없고, 계속 한눈을 팔면서 칠판을 쳐다보고 있을 뿐. 그 칠판조차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 지영 양. 나와서 교과서 읽어봐요.\"

그러고 보니 영어교과 시간이라, 엘릭시르가 안경을 끼고 책을 들여다보다가 지영을 지목했다. 딴청을 부리고 있다가 막상 지목을 받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수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정작 읽어야 할 책의 내용은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더듬거리며 책을 읽고 있는 지영의 머리를 회초리로 가볍게 두드리며 엘릭시르가 능청맞게 대꾸했다.

\"수업시간에 이성에 한눈을 팔면 안 되죠.\"
\"하하하\"

반의 아이들이 모두 웃음바다가 되어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지영이 매섭게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시선이 움직여 영민을 향했다. 그도 함께 웃고 있었다.
괜찮아. 이것으로 충분해. 지영은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다들 굳어진 몸을 펴며 생기가 가득차기 시작했다.
영민은 책상에 앉아 뒷자리의 시윤이와 낄낄 웃거나 하다가 주변의 아이들과 합세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급식을 하는 학교분위기상 일찍 가봐야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다들 기다리고 있다가 10분 후 쯤 급식실로 달려가기 때문에, 점심시간의 교실은 이렇게 시끌시끌한 시장바닥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그게 싫지 않았다. 서둘러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가던 채비를 하던 중, 갑자기 영민이 책상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영민아 어디가? 밥 먹으러 안가냐?\"
\"응? 잠깐. 너희들 먼저 가라. 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젠 유별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급식실을 향했다. 중간에 세유가 마중 나와 있었고 둘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서둘러 아래층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사이 영민이가 팔에 무언가를 안고 열심히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무심코 지영이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세유가 손을 내밀어 행동을 제지하며 가만히 말했다.

\"우린 간섭할 수 없어.\"
\"…….\"

냉정하고 매몰찬 태도와 표정으로 세유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우리 세계의 룰이었지. 하지만 한번쯤은 깨도 상관없을 테지만 그걸 인내하고 우리의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늘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돗까비들이야. 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존재들.\"
\"…그래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또 다시 시작 될 거야.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세유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지영은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세유도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 잠깐이나마 그런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가만히 자신에게 하는 대답마냥 세윤 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 때엔 또 다시 생각해 볼 거예요.\"
\"그게 좋아. 모든 일은 끝이 있으면 다시 시작이 있는 법이니까.\"

세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복도를 달리는 듯 둔탁한 운동화 소리를 물끄러미 듣던 지영도 세유의 뒤를 따랐다.
별 다른 일도 없이 점심시간이 끝나고 모두들 식곤증으로 지쳐버린 오후 수업은 별 트러블 없이 끝났다. 하지만 홈룸이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기 전 야자확정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다들 시무룩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학원에 가야해서 야자는 할 수 없는 영민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 준비 중이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책상을 밀어놓고 대걸레를 빨러 가거나 손에 하나씩 걸레를 쥐고 여기저기 닦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많은 운동부 소속의 반 학우들은 벌써 가방을 챙겨 서둘러 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축구부의 시윤이 있었고, 또 양궁부의 지영이도 함께 있었다.

\"영민아. 먼저 간다.\"
\"어, 오늘 연습경기 있다면서?\"

늘 있는 연습경기지만, 부원들을 갈라서 대항전을 벌이기 때문에 꽤 중요한 시합이었다. 시윤의 인사에 영민이 답하며 부 대항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축구부에 넣어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시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당연하게 시윤은 영민을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감독이 너 보고 축구부 들 생각 없냐고 물어보던데? 안 그래도 우리 축구부 후보 몇 명이 모자라잖아.\"
\"됐어. 난 공부가 더 중요하거든.\"

영민이 웃으며 대답했고 시윤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어련하겠냐. 그런데 성적이 그 모양이라서 어쩌니?\"
\"시끄럽다! 네 성적보다는 낫잖아.\"
\"그래그래. 내 성적이 바닥인건 사실이니까. 내가 이래봬도 운동 하나는 잘하잖아.\"

그렇게 둘이 티격 대는 사이 지영은 책상에 누군가가 무얼 넣어둔 것을 알았다. 가만히 꺼내보니 오후에 다 식어서 물기가 흐르는 초코우유였다. 언제 한번이라도 초코우유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설마 영민이 넣어두었나 궁금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티격태격하느라 이쪽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

남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우유를 든 채로 가방을 메었다. 저녁 부 활동에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감독은 엄격했기 때문에 미리 가 있는 편이 더 편했다. 그 가방을 든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민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지영은 알지 못했다. 다만 잠시 쳐다보는 것을 시윤이 발견하고는 놀림감이 생겼다고 반색을 하고는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물어본다.

\"너 누구 쳐다보고 있는 거냐? 설마 전학생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그 멋대로 예상은 그만 두지 않겠냐?\"

영민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과민반응을 하는 것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시윤이는 옆으로 메는 가방을 짊어지며 말했다. 실은 영민이 지영이라는 전학생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놀리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짐짓 딴청을 부리며 농담을 던지는 시윤이었다.

\"괜찮잖아. 사람을 보고 설레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까.\"
\"그런가?\"
\"그래. 너 학원 간다고 했지?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내일…. 그래. 잘 가.\"

어느새 지영이 사라져 있는 것을 보고는 대충 바닥을 쓸던 빗자루를 청소도구함에 넣어놓고는 책상을 살폈다. 점심때 넣어두었던 우유가 사라진 것을 보고는 빙긋이 웃으며 교실 문을 열었다. 청소와 하교로 번잡한 복도를 지나 계단을 걸어 내려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앞을 바라보았다. 선수를 모아놓고 무언가 설명중인 축구부와, 왼쪽 구석에서 시위를 당기는 훈련을 하고 있는 몇 명의 아이들. 그리고 과녁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지영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며 영민은 가만히 지영의 활 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조금의 떨림도 없이 화살을 먹인 시위를 잡아당겨 과녁을 노려보고 있는 날카로운 눈매. 영민은 그런 사람이 조금은 따듯한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을까? 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시위를 떠난 화살을 빠르게 날아가 정 중앙에 정확하게 틀어박힌다. 다시 화살을 집어들 마다 뒤로 땋은 머리가 가만히 흔들리며 조금 남긴 귀밑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양궁부의 코치는 놀랍게도 표헌이었다. 늘 하고 다니는 하얀 머리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스포츠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쌍안경을 쥔 손으로 과녁을 살펴보며 이리 저리 선수들을 독려하는 목소리와 모습에서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영민이 먼저 목 인사를 건네었고, 몇 초간 뚫어져라 바라보던 표헌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잘 쏘는 구나.\'

자기키만 한 활을 다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내색으로 과녁을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는 지영에게 말을 걸지도 못한 채로 영민이는 그저 화살을 다 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고 생각했던지,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화살을 쏜 지영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우유. 고마워.\"
\"그래. 부 활동 열심히 해, 지영아.\"

그리고 지영이는 웃어주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밝은 미소로. 그것을 보고 영민은 빙긋이 웃으며 교문을 나섰다. 나는 모두 다 잊고 있지 않고 있었어. 라고 말하며.


########


눈뜨면 등교시간.
어쩌다 보면 점심시간.
반쯤 알 수 없는 말들과 공식에 정신이 팔려 선잠에 들다보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다.
미처 정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가방을 맨 채로 세뇌를 당한 듯 학원으로 향한다. 수업이 끝나면 이미 시계는 저녁 11시. 터덜터덜 아파트 단지의 뒷골목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다들 겪고 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히 시계는 7시에 향해 있을 테고, 엄마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학교가라는 소리에 떠밀려 학교를 향해 가고 있을 거다.
이 땅위의 고교생들이라면 다들 거쳐가는 코스. 그래서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늘 그렇게 생각하곤 하는 영민이다.
그래서인지 평범한 일상이 싫지는 않았다.

기대하는 것도 없고,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은 있었다. 정확하게는 공부로 이룰 수 있을지 아니면 운동으로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막연한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주변의 친구들과도 제법 친해졌고, 예전처럼 우울해 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것도 하나의 방식일까?\'

시간을 되돌린다.
그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흐르는 시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개념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부모님들은 돌아왔고 더 이상 어둠이니 돗까비들이니 서양역귀들이니. 그러한 것들을 신경써야하는 세계에 살지 않게 되었다. 학교생활도 평범하게 할 수 있었고 아침에 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에는 늦게 돌아가도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생활.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여전히 서울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발전이 이루어져 밤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필사적으로 불을 켜고 어둠을 몰아내고 싶어 한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했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게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빛이 있으니 어둠이 있는 것처럼, 그 존재들도 인정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영민이는 스스로 그런 것을 마음속에 부정하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전혀 관련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범한 것이 어색해져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영민 오랜만이로구나.\"
\"호선생님.\"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영민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색을 했다. 그 자리에는 마고자차림에 곰방대를 문 호선생님이 빙긋이 웃으며 가만히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만족하느냐?\"
\"무얼 말입니까?\"

호선생의 질문에 다소 혼란스러워 하던 영민이 되묻자 그에 따른 대답이 빨리 전해져왔다.

\"네가 지금의 시간을 선택한 것 말이다.\"
\"글쎄요.\"

조금 대답하기 망설여지는 질문이었지만 영민은 가만히 말했다. 그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그런 종류의 고민들이었다.

\"결국 송 첨지님은 변고를 당하시나요?\"
\"글쎄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이쪽 세계의 시간을 돌린 것만으로도 인간세계의 시간까지 몽땅 돌아갈 정도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거든. 신통력은 그래서 위험한 걸지도 모르지.\"

신통력은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힘이었다.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는 호선생은 조심스럽게 타이르듯 말해주었다. 그러자 영민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넌 지켜보는 자야. 그 의무를 충실하게 해 주었지.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지켜보는 걸로 끝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것만은 내가 용서할 수가 없느니라.\"

그렇게 말하며 곰방대를 턴 호선생은 그것을 가만히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돗까비들은 자신의 세계를 닫았기 때문에, 더 이상 외부의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셈이니. 서양역귀들에 대한 태도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서양역귀들은 인간세계에 녹아들고 싶어 하니 그것 또한 돗까비들의 경계를 받을 게야. 적어도 무언가 완충점이 필요 할 테지.\"
\"그렇다면 지영이는…….\"
\"그건 다 운명이야. 하늘이 내린 운명을 거역할 자가 그 누가 있더냐.\"

영민은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모든 일은 운명으로 맡기면 되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그 보상을 받으려 했던 자신이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시대는 발전하지 않은 것이고 그저 과학수준이 발전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은 점차 시간 속에 묻혀 서서히 사라져 간다.
자연히 누군가 신경 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존재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누가 바라건 바라지 않던, 영민이 그러한 결과를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은 바꾸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을 무시해야 하고 겨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생색내기 수준 그런 것은 괴롭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끝냈다. 이제는 네가 해야 하는 이야기니라.\"

내가 하는 이야기라는 말에 영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은 못다 알게 된 돗까비들의 세계. 그리고 서양역귀들의 생각들. 실은 그것이 더 알고 싶으면서도 늘 귀찮다거나 아무 관계도 없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었다. 현실성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이야기들. 그런 것을 겪었던 사람으로 무언가 마음속에서 가만히 피어오른다.

\"자 그럼 잠시간은 이별이구나.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예.\"
\"삼수강산에 돗까비 있어 인간을 이롭게 하니 만물이 평화롭도다. 허허!\"

그렇게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호선생을 끝까지 바라보던 영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엔 벌써 하나 둘 불이 꺼져간다. 시간이 시간이니 다들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에 진 책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툭.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걷던 소년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발치에 굴러다니고 있는 전단지며, 휴지조각. 담배꽁초. 그리고 특이한 물건이 있다. 촘촘한 망사의 모자와도 비슷한 그것은 언뜻 보기엔 용도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것은 눈에 익숙한 물건이었다. 영민은 입가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

\"다시 시작이구나.\"

영민은 감투를 들어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이것은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이 시작하는 이야기였기에. 그리고는 느긋이 어둠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사위에 잠든 어둠은 가만히 어둑한 서울의 밤길을 감싸고 휘젓고 있었다.
송 첨지는 당했다. 그리고 여전히 남은 여럿의 암귀들이 꾸물거리며 영민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두렵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마음은 가벼워졌고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아. 어떻게 할까?\"

고민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이젠 이렇게 끌려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이든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은 영민은 가방에서 헌사영신곤을 꺼내들었다.

\"처절하게 밝혀주겠어. 왜 돗까비들이 모두 은둔하기 시작했는지, 서양역귀들이 인간의 틈으로 녹아들어가고 싶어 하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 주겠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일까? 영민은 눈을 치뜨고 다가오는 암귀를 곤을 휘둘러 한 마리 후려쳤다. 찌부러지던 암귀는 곤의 신통력으로 인해 서서히 녹아가며 땅으로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숨이 가빠왔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암귀를 노려보던 영민은 한 마리가 노도와도 같이 달려들자 왼쪽의 끝을 따로 떼듯이 쥐고 잽싸게 짧은 창을 쓰듯 찔러 들어갔다. 오른쪽 사각을 노리는 암귀를 봉의 한쪽 끝이 갈라지며 쳐내고, 마지막으로 찌른 부분을 빼 내어 총 3개의 곤으로 나누고는 남은 두 마리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삼절곤의 중심을 잡고 양쪽 끝을 휘둘러 두 번 정도 두들긴 영민은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을 보며 가만히 읊조렸다.

\"이젠 도망치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곤을 추스른 후 가방을 집어 들었다. 밤하늘은 여전히 불투명했고 별빛도 보이지 않는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감투를 뒤집어 쓴 후엔 날듯이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평범했던 소년의 이야기는 그 처음에서부터 천천히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 괴력난신 ~돗까비뎐 마침 -

====================================

이제 응모분량이 다 되어 응모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많이 마음고생도 했었고, 즐거웠기도 했습니다.
이제 괴력난신은 화무백일홍으로 넘어갑니다.

아울러 신작을 다음주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가 거의 끝나가서 좋은 퀄리티가 나오면 공개할 생각이고
그 전에는 화무백일홍을 연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호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더 좋은 작품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태그
9 Dr.L  lv 9 16.3% / 4663 글 157 | 댓글 895  
등급으로 따지면 F, 레벨로 따지면 0. 사상최약의 허접글쟁이랍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 19편
댄들라이언 1편
회색의 경계 - Border of Gray 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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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친한척 06/03/05:15
아아, 수고하셨습니다-(웃음).
3 니나 06/03/07:12
수고하셔습니다. (달려온 니나)
0 淸玄 06/03/08:34
수고하셨습니다아 \'ㅁ\'!
1 ginger 06/03/10:02
그동안 정말 수고 많이했어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요!
13 sarudi 06/04/12:44
수고 많으셨습니다.
6 이향 06/04/02:30
수고하셨습니다. ;ㅁ;
0 yul 06/10/02:58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그런데 문체가 앞부분에 비교 하면 많이 바뀌었군요...
9 Dr.L 06/10/11:12
yul // 문체를 중간에 바꾸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 너무 딱딱해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거든요.
1 나르샤 06/10/05:21
왠지 더 긴 이야기를 해도 될것 같은데, 혹시 이야기가 이어지나요?
9 Dr.L 06/10/07:01
나르샤 // 네 이어집니다 ^^ 화무백일홍, 만만파파식식적적까지는요
1 bighead2000 06/10/10:01
전 여기 소설은 아무것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선호작 수는 압도적으로 높은데 왜 추천수는 적을까요..? 그냥 궁금해 지네요..
1 ginger 06/18/03:23
추천수는 리셋되니까요
게다가 한 번 완결이 나서 다시 추천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기 때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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