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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호 by 계수

=전 세계의 명예로운 인류 여러분. 대통령…. 아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히 고하겠습니다. 도망치십쇼. 살아남아 주십시오. 결코 이 지구에 인간이 살았다는 것을 잊게 하지 말아 주십 시오… 그리고… 어… 그리고….= 대통령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tv가 꺼지고 평범한 광고가 흘러나왔다. 싸늘한 교실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광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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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64    추천 0   덧글 0    / 2009.05.02 20:13:08

이젠 진부하다고 생각할 만큼 똑같은 꿈이 하람의 눈에 비춰졌다. 하람의 얼굴. 마치 그 봉오리 안에 인체표본으로 갇혀있던 녀석의 얼굴처럼 안면만이 커다랗게 보이는 오싹한 모습. 그 얼굴은 마치 무언가를 호소하듯이 계속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고 하람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눈을 꼭 감고 끝없는 비명을….

“괜찮아….”

그리고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하람의 손을 따스하고 부드러운 채희의 손이 맞잡고 있었다.

“괜찮아.”

하람의 옆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어 내린 채희는 언젠가 꿈속에서 본 적이 있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은 흡사 여신. 즉 비너스 같았다.

“앞을 보는 거야. 눈을 감아서 보이는 것 따위 어두운 미래뿐인걸.”

채희의 부드러운 미성이 울려 퍼졌다. 두려움에 눈물범벅이 된 하람은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 곳엔 여전히 오싹한 모습의 하람의 얼굴이 보였다.

다급하게 절규하듯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하람.

눈을 감을 뻔 했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져오는 따스한 온기 덕분에 똑바로 그 것을 쳐다볼 수 있었다. 식은땀 같은 것을 흘리며 다급하게 어두운 표정으로.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말 하고 있는 것.

“나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그 입술만은 꾸준히 움직였기에 하람은 그 얼굴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있다?”

하람이 중얼거리자 얼굴은 딱 하고 입을 멈췄다. 그리고 안심하듯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은 듯이 편안하게.

 

“나는 여기에 있다….”

하람의 목소리에 채희는 잠에서 깼다. 자신의 무릎에서 자고 있던 하람은 어느새 오히려 자신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있었다. 딱딱한 어깨, 게다가 목이 조금 돌아가 있어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었기에 채희는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채희야 깼어?”

윽, 들켰나?

확하고 일어나서 놀라게 해 버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깨었는데도 계속 하람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역시 계속 자는 척하자.

“미안.”

그런데 하람은 갑자기 사과했다.

“정말, 미안.”

?

하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한 채희는 본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뒤로 계속 침묵하는 하람 덕분에 그만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뭐, 괜찮겠지. 아직 종말까지는 10일도 더 남았고…. 그 동안에 물어보면 되겠지. 꿈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이냐고. 그럼 하람은 씨익 웃으며 자는 줄 알고 해 본 말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럼 자는 사이에 가슴이라도 만진 거 아니냐며 화를 내야지.

그래, 그런 가벼운 일상이 분명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막은 올랐다.

 

그 것은 리빙룸에 모든 학생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식사를 끝낸 아이들에게 밝은 표정은 없었다. 며칠 전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활기차게 잡담을 늘어놓던 학생들은 생기 없는 얼굴로 앉아있거나 불안하게 서성거릴 뿐이었다. 가끔 보이는 흐느끼는 여학생마저 있었다. 다가오는 종말. 그리고 위와의 연락은 끊겨버렸다. 형제도 부모님도 친척도, 교실 외의 친구들과도 인사조차 나누지 못 한 아이들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절정에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채희도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욱 하람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하람은 준권과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다가오지도 다가가지도 못 했다.

“쳇.”

결국 그렇게 혀나 차며 중앙 벤치에 털썩 앉았다.

“얘들아”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타이밍에 준권이 입을 열었고 학생들의 시선이 준권에게 쏠렸다.

“자판기를 보고 생각한 건데. 한 가지. 지켜줘야 할 것 같아.”

말 하는 순간 규칙을 뛰어넘어 거의 법이 되어버리는 준권의 언어. 이 장소에서 거의 신과도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준권은 그렇게 말 하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보다시피 자판기에 커터 칼이 있지. 하지만 우리에게 칼은 필요 없어. 그러니까 절대 칼은 뽑지 말도록 하자.” 불안과 분노의 상징. 동시에 침략과 약탈의 상징도 되는 칼. 그 것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무기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플하면서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지금에야 총이나 미사일 같이 비교도 안 되는 병기가 개발되고 있지만 이 공간에선 커터 칼만 해도 최강의 병기. 핵과도 같은 것이다.

즉, 준권의 말은 무기의 보유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았다. 이 공간.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모두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밀지 말자. 아예 이빨을 만들지 말자. 그리고 그 발언에 채희의 심장고동은 빨라졌다. 비록 자신이 뽑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칼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유일하게 이 장소에서 핵무기를 보유한 한 사람. 그리고 그 사실이 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어떠한 변명을 늘어놔야 할까. 하람의 얘기는 할 수 없다. 뭘 보고 왔는지는 하람은 채희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 뜻은 분명 알면 안 되거나 모르는 게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빨을 만들지 말자고 하는 신. 하지만 이미 이빨을 가지고 있는 채희. 그렇다면 이 자비롭지 못한 신은 어떻게 할까.

“그럼, 혹시 이미 커터 칼을 뽑은 사람. 있어? 손을 들어줬으면 하는데.”

준권의 말에 채희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숨겼다가 나중에 들켜 곤란해지느니 미리 말해 두는 게 낳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시화와 함께 그런 짓을 당할 뻔 했으니 불안해서 그랬다고 변명하면 괜찮을 것이다.

“그래, 채희야. 커터. 이리 줄래?”

손을 내밀며 다가온 것은 준권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하람. 마치 커터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다가온 그는 채희가 주머니에서 꺼낸 커터 칼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카드도 내줘.”

“?!”

그 것은 준권의 목소리. 단호하면서도 강력한 말. 그 말은 아이들의 머리에 확실하게 각인 될 것이다.

“무, 무슨 뜻이야? 카드를 달라니?”

“말 그대로야. 카드를 줘. 또, 커터를 뽑지 않도록.”

놀랍게도 그렇게 말 한 것은 하람이었다. 자신이 건네준 주제에 그렇게 말 하며 안경을 고쳐 쓰듯이 콧등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가면을 쓴 것이다.

채희는 그 모습을 보며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누구보다도 하람을 좋아했고 관찰했던 여자다. 아니 꼭 좋아하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친한 사이가 되면 이 버릇의 의미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채희는 묵묵히 카드를 꺼내 하람의 손에 올려놓았다.

“돈은?”

재촉하는 하람. 채희는 주머니에서 지폐 세 장을 꺼냈다.

“잠깐, 카드는 너무한 거 아니야?”

조금 동요하고 있는 무리들. 그 사이에서 연화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혹시 라는 게 있으니까. 유대를 강하게 하기 위함이야. 이해해줘. 카드는 하람이가 관리하게 될 거야. 식사를 할 때나 자판기에서 뭔가 먹고 싶을 땐 채희는 하람과 동행하도록 해. 그리고 이 커터는 내가 처분하도록 하지. 이상이야.”

준권은 마치 선고를 내리듯이 그렇게 말하곤 하람이 건네준 커터를 가지고 리빙룸을 나가버렸다. 하람은 잠시 남아서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다 준권을 따라 나갔다.

“뭐야, 저게. 독재자야?”

연화가 중얼거렸다. 고요한 리빙룸에 울린 그 목소리는 모든 아이들의 귀를 울렸고 동시에 공감대가 번개같이 형성되었다.

“무슨 왕도 아니고. 자기들 마음대로잖아?”

마치 메아리처럼 연화의 말이 누군가에 의해 돌아온다.

“저 녀석들 짜증나. 우릴 동물취급 하는 것 같잖아. 재수 없게.”

“잘난 척 하기는”

“학교에서도 생각했지만 준권이 녀석은 진짜 재수 없었어.”

“맞아, 자기가 국회의원 아들쯤 되는 줄 안다니까?”

“외동아들이라더니 제멋대로 컸나보지.”

갑자기 메마른 리빙룸에 활기가 넘쳐났다. 모두가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준권의 독재가 드디어 아이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솔직히 관리를 잘 하긴 해. 의지도 되고”

“하긴, 저 녀석들이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린 어떻게 될지….”

확실히 준권은 그리고 하람은 기둥이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버팀목과도 같은 존재. 그 것을 몰아내기엔 이미 그들의 존재는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딱히 틀린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확실히 커터를 가지고 있는 학생에 대한 완벽한 처리다.

준권 하나였다면 또 몰랐다. 이들에게 확실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또 몰랐다. 하지만 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하람은 준권의 옆에 있다. 하나였다면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준권의 옆에 하람이 있는 것이다. 그 둘의 존재는 너무나도 커 보였기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록 비윤리적인 독재라도 부정 못하고 받아들여 이 사회의 존속을 바라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다. 하람과 준권이 만든 아니 하람이 만든 완전에 가까운 효율적인 독재는 그런 것 이었다.

이미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것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채희는 그렇게 깨닫고 나자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준권과 하람에 대한 비방이 난무했지만 딱히 누가 나서서 그들에게 가서 따지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모두들 ‘어쩔 수 없지’라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

조금 현기증을 느낀 채희는 하람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은 리빙룸에 없었다. 채희는 조용히 구석으로 가 초등학생들처럼 신나게 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스트레스를 둘에게 쏟아 부으려는 듯 계속해서 떠드는 그들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지.

채희는 이마에 손을 얹고 하람의 행동을 곱씹었다. 자신에게 커터와 카드를 빼앗은 하람. 그 의미와 이 상황. 그 것을 연결시킨다면? 하람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어째서? 자신과 준권이 악의 대표가 되었는데? 아니, 준권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혹시 이 장소가 자신의 마음대로 된다는 것에 자만을 품고 뿌듯해 하고 있는 것에 바쁜 게 아닐까. 그렇게 하람이 의도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하람이 원하는 건 준권의 파멸이란 말인가. 하지만 하람은 굳이 자신까지 악이 되면서까지 준권을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준권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트집을 잡으면 금방이라도 뒤집어 정점에 설 수 있는 존재가 하람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서하람은.

“걱정 마.”

차가운 목소리가 채희의 귓가에 울렸다. 한 단어. 그 말을 남긴 여자아이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하얀 머리와 피부를 가지고서도 새빨간 눈을 깜빡이고 있는 시화였다.

“뭐?”

채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시화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리빙룸을 나갔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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