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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호 by 계수

=전 세계의 명예로운 인류 여러분. 대통령…. 아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히 고하겠습니다. 도망치십쇼. 살아남아 주십시오. 결코 이 지구에 인간이 살았다는 것을 잊게 하지 말아 주십 시오… 그리고… 어… 그리고….= 대통령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tv가 꺼지고 평범한 광고가 흘러나왔다. 싸늘한 교실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광고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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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계수[rla916]
조회 1049    추천 0   덧글 0    / 2009.08.15 20:44:37

여름날이었다.

시끄럽게 매미가 울어대고 파랗게 질린 하늘에 한 조각구름도 없던 맑은. 곧 장마가 올 것임에도 밝은 하늘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그런 날.

더운 공기. 끈적거리는 피부가 기분 나빴지만 가끔 다가오는 상쾌한 바람에 잠깐씩 기분 좋아지기도 했다.

“듣고 있는 거냐? 황재원!!”

날카로운. 하지만 낭랑하면서도 귀여운 목소리에 창밖을 향해있던 내 시선이 돌아왔다.

긴 머리카락에 앞머리를 올린다는 본래의 목적 따윈 사라진 하얀색의 커다란 머리띠. 예쁘장한 하얀 얼굴과 짧은 치마 아래로 내려오는 새하얀 다리. 마무리로 엷은 염색까지 한 잘 나가는 여자아이의 표본이 그 곳에 있었다.

“아니, 미안. 뭐라고 했어?”

의욕 없는 녀석. 여름방학 때. 바캉스 같이 갈 거냐고 물었잖아?”

쿵. 하고 책상 위에 손을 내리치며 묻는 녀석. 교실에서 별로 대화 해 본 적도 없는 여자아이였지만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곤 뭔가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 쪽. 유능해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 주위에 몰려있는 아이들을 보고나서야 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잠시 내가 바캉스에 참가하길 바라는 것처럼 말 하는 것 같아 기분 좋았었는데… 하긴, 선생님들 사이에서의 별명이 의욕 없는 녀석인 음침한 나 따위와 가고 싶어 할 리가 없지.

“하람이 일행이랑 가는 거야? 그럼 뭐, 상관없겠지. 언젠지 나중에 알려줘.”

피식 거짓웃음을 날리며 그렇게 말 한 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바캉스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반 안에서의 인기인. IQ160의 천재 서하람. 그의 계획안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반 안에서 먹이 감을 찾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날라리들의 눈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자칫 반에서 것 도는 잉여인간처럼 보였다간 교사 뒤편으로 불려가 빵을 사 오라는 등의 시시한 잡일이나 하며 남은 2년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의 세력은 세 개였다.

하나는 부 반장이자 굉장히 딱딱한 느낌의 준권의 세력. 가장 건전하다면 건전하지만 숨 막히는 공기가 거북했다. 다른 하나는 세 명의 날라리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대 놓고 담배냄새를 풍기는 짜증나는 녀석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천재 서하람의 세력. 가장 대하기도 편하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까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립 세력. 그 중심의 서하람의 존재는 반에서도 큰 존재였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그 것에 억눌리던가 아니면 빌붙는 아이들. 스스로 깨닫지도 못 하는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 위선이 우정이라는 숭고한 말로 칠해져 있는 현실을.

나에게 바캉스를 권하던 은채희는 어느새 서하람에게 돌아가 있었다. 들 뜬 얼굴로 모난 소리를 하람에게 해 대는 녀석. 그 옆에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받아 쳐 주는 준태. 키득거리며 한 마디씩 말을 있게 해 주는 연화.

이른바 서하람 파가 바로 그들이었다.

뭐, 이쪽은 적당히 저들 옆에 붙어만 있으면 불이익은 없다는 얘기다.

“…오늘도 결석.”

무심코 그렇게 말 한 나는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오늘 날짜를 적었다. 창가인 내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창가의 햇빛도 복도 쪽 창의 햇빛도 피하기 위해 마련된 그 특별석에 앉는 것은 한시화라고 하는 여자아이의 자리였다.

난 그 여자아이가 좋았다.

하얀 얼굴과 이색적인 은백색 머리카락에 소름끼치는 붉은 눈동자. 혈관이 비쳐 보여 조금 징그러운 손과 가녀려 잘못 잡았다간 부러질 것 같은 팔목. 언제나 멍 한 표정. 그런 허무한 느낌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단지 그녀만이 이 반에서 어떤 세력에도 포함되지 않으며 깨끗한 백색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녀는 깨끗했다. 사회적 지위로는 이 반에서 가장 강할 부반장 준권이도 날라리들의 리더 격인 강영호도 그녀만은 대하기 껄끄러워했다. 애초에 말이 많지 않은 그녀와 먼저 얘기하려고 하는 녀석들은 별로 없었고 결국 그렇게 붕 뜬 존재가 될 시화였다. 거기까진 그저 불행한 알비노 소녀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서하람이 그녀를 껄끄러워 한다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 반에서 가장 중립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하람마저 그녀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신비감. 완전무결한 백. 아니면 궁극의 흑. 둘 중 하나인 시화. 그런 점들이 단순이 좋았는지도 모르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종이에 그녀가 결석한 날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알비노라….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 이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지조차 못 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녀의 옆에 앉은 내가 말 해 주고 싶었다. 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 조각구름들이 떠 있는 하늘은 더욱 풍류가 있다. 그렇게 말 하면 그 공허한 얼굴에 조금 미소가 떠오른다. 난 그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녀는 나에게 몸을 맡겨 온다. 사랑하는 연인. 그런 둘을 망상 속에 밀어 넣으면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일상.

한 소년이 한 특이한 소녀를 남몰래 좋아한다는 그런 일상.

그런 일상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아니 계속되어야 했다.

 

바캉스 권유 1주일 후. 미국 대통령은 세계 멸망을 권고했고 우리들은 방공호로 내려가게 되었다.


rla916 님에 의해 2010.08.12 10:26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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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수  lv 3 99.25% / 997 글 97 | 댓글 2  
현실을 직시하지마 피하고 싶은 현실이라면 받아들이지 말고 부숴버리면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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