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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 자살의 메커니즘 by 수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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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수류아[suryua]  
조회 1300    추천 0   덧글 3    / 2010.04.11 21:54:38

■ 커튼콜이 배우를 사람으로 되돌린다. 4번째 천사의 나팔 소리처럼 이제까지의 세계를 파괴한다.

 

“거짓말이야…. 네 녀석의 말은 전부 거짓부렁이야!!”

메스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메스에 부딪히는 빗방울도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새파랗게 뜬 진래 선생님의 눈이 무섭게 나를 꿰뚫었다.

“넌 지금 베르테르 케이스 환자의 전형적인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어! 자신의 행동에 납득할만한 이유를 붙이려 하고 있는 거야!”

“전 베르테르 케이스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그러어어엄!!!”

그녀의 목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순은, 내 유일한 친구였던 순은, 환자도 뭣도 아닌 녀석 때문에, 그것도, 대학생이나 되는 인간의 한심한 착각 때문에, 그런 것 때문에 죽었다는 거냐아아아?! 그런, 그러어어언!!”

매스의 날카로운 선단이 나를 향했다. 빗줄기 속에서 스산하게 빛나는 새하얀 날은 손쉽게 사람을 째기 위해 만들어진 그 유용성을 자랑하는 듯했다. 나에게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였다는 의미다. 거기에 담긴 증오의 무게에 짓눌려 우그려질 것만 같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던 거겠지. 결자해지.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진래 선생님에게 고했고 이걸로 그녀는 나에게 살의의 칼끝을 돌렸다. 결자해지. 이걸로 된 거다. 이제 여기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나는 진래 선생님은 적의와 악의를 감당하여 억울한 죽음에 책임을 지며 동기를 잃어버린 나의 충동마저 충족시킬 수 있다. 칼날의 연장선은, 그 방향은 내 가슴의 그 무엇보다 깊이 있는 기관을 찌르고 있었다. 순이 말한, 조금 일그러졌을 뿐인, 그곳을.

“대체 뭣 때문에, 순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한 거냐아아아?!”

노호와 함께 진래 선생님이 달려왔다. 비명과 함께 메스가 휘둘러졌다. 빗물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몸서리칠 만큼 싸늘했던 빗줄기가 순간 따뜻해진 느낌이 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에?”

고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메스는 나의 심장에 닿지 않았다. 누구의 심장에도 닿지 않았다. 그 주인인 진래 선생님과 함께 볼품없이 옥상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상한 각도로 흐늘거리는 오른팔을 잡고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나의 가슴 앞에는, 고풍스런 느낌의 연분홍빛 한복이 어둠 속에서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었다. 저고리의 소매 끝에는 커다란 금속 절단기가 투박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붉은 물감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왜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한 거냐고 물으시었습니까?”

풍성한 한복의 곡선은 과연 고급품답게 비에 젖어도 늘어지지 않았다. 이 바람 속에도 변함이 없었다. 나에게 등을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거야, 세탁을 할 때 세재를 좀 더 넣으면 빨래가 더 잘 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으로 한 것이지요. 강박행동에 대한 보상행위의 역치 값 같은 건, 과연 이 소첩도 알 수 없었으니 말이옵니다.”

서소 누나는 평소와 똑같이, 사극의 대사를 읊는 듯한 어조로 푸근하게 진래 선생님의 질문에 답했다.

 

한 번 더 절단기의 꾹 다문 입이 휘둘러졌다. 골프채처럼 완만한, 지면을 살짝 스치는 궤적을 그린 금속덩어리의 다문 입은 사과도 사양의 말을 내뱉는 일 없이 진래 선생님의 훤히 드러난 복부에 키스했다. 옥상을 침대삼아 누워있던 그녀에게는 지나치게 과격한 애무였다. 순간의 접촉으로 수 분간의 키스와 동일한 효과가 나타날 만큼의.

“우읏…쿠, 쿠핫, 커, 커억…”

“감히 수아에게 날붙이를 들이대다니, 그 비린내 나는 목숨이라도 네 년에게는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벌레만도 못한 오늘을 살기 위해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 각오가 있었다면 좀 더 그 삶을 소중히 해야 하거늘, 어찌 하야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옵니까? 내일(來日)을 보기가 싫증이 났다면 그 썩은 몸뚱아리를 옥상에서 던지기라도 하면 되었을 것을.”

서소 누나는 절단기로 진래 선생님을 쿡쿡 찔렸다. 절단기는 뭉툭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피부와 옥상 바닥을 연달아 때렸다. 이대로 그냥 두면 진래 선생님은 멍투성이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만, 그만둬, 누나.”

나는 누나의 소매를 붙잡았다.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아까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두들기던 사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얼굴에는 그 누군가의 피가 점점이 맺혀 있었다. 새하얀 이가 스산하게 드러났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속처럼, 입 속은 새빨갛고 시커멨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수아. 조금만 더 하면, 저번처럼 수차례 던질 것 없이 한 번의 추락으로 끝낼 수 있으니까요.”

저녁 식사 요리가 금방 끝난다는 투로 말하며 서소 누나는 내 손을 꾹 쥐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이 그녀는 소매를 풀었다. 어잇샤, 하는 귀여운 기합소리에 맞추어 그녀는 절단기를 높다랗게 들어올렸다. 나는 누나를 말리기 위해 그녀를 끌어 앉았다.

“그만하라니까!! 이런 짓을 해도 내가 낫거나 하지 않아!! 난-”

“수아.”

“…으응?”

“자신을 언제나 객관적으로 살피라고 했던 말, 기억해요?”

“으응. 그래서 나온 결론이야. 난 베르테르 케이스가-”

서소 누나는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수아, 자기 자신을 진단하는 환자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겁니까? 의사의 판단을 믿어야죠.”

“베르테르 케이스는 아직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분류조차 명확하지 않은 병이잖아! 의사라도 알 수 없다고, 그런 거!”

“수아, 수아는 지금 모르는 게 너무 많을 뿐이에요.”

아냐, 모르는 건 누나다. 내 속을 꿰뚫어 본 것은 연히 씨의 눈이었다. 서소 수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전부 종합했을 뿐이다.

누나는 처음부터, 내 속은 모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등을 따라갔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추락을 반복했는지,

겉과 속은 같을 리가 없다.

앞뒤가 똑같은 그림으로 새겨진 동전은 도박에나 쓰이는 사기화폐일 뿐이다.

누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누나는 나를 돌아보고 싱긋 웃고는 다시 절단기를 들어올렸다. 고개를 떨어뜨렸던 내 눈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누나를 겨냥했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날붙이에 지나지 않는 메스를 든 양손이, 제기랄 그다지 무거운 걸 든 것도 아닌데, 부들부들 떨렸다.

“그만해, 누나. 이젠 정말, 그만하라고.”

“…이건 또 무슨 장단인가요, 수아? 그런 변주곡에는 춤사위를 맞춰주기 어렵답니다.”

“지금 누나가 하려는 짓이, 해버린 짓이 뭔지 모르겠어?! 더 이상 죄를 짓지 마. 더 이상, 그 쪽으로 가버리면-”

가버리면?

어떻게 된다는 건가.

무언가 있었을 터인데, 뇌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 하나만으로는, 덮어줄 수 없게 돼.”

스스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는데도 나는 완전히 납득하고 있었다. 그 내 말에 누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말투는 급변했다.

“설마, 그 때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목을 억지로 가다듬어 내는 사극조의 목소리가 아닌, 그녀 본연의 목소리.

“서수야, 날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2월의 그 일로, 전부 잊어버린 거-”

“몰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지금 누나가 하는 게 잘못된 거란 건 알아! 그러니 그만 두라고!”

“…‘누나’…라, 역시 기억하고 있던 건 아닌 것 같군요, 수아. 그렇다면 역시 수아는 베르테르 케이스인 것입니다.”

서소 누나는 고개를 숙였다. 축 쳐진 어깨가 흐늘흐늘 거렸다.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기대는, 희망은 배신과 실망으로 이어져 좌절을 부를 뿐이지요. 이 누이가 어리석었습니다. 잠깐이라도 그런, 꿈만 같은 헛된 상상을 했다니.”

혼을 토해내는 듯한 말이었다. 빗물을 털어내는 듯이 진저리를 치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런 누나에게 메스를 계속 겨누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잡설이 길었군요, 수아. 금방 끝나니까 기다려 주시지요.”

그래, 잡설이 너무 길었어.

퍽!

실이 끊긴 인형처럼 서소 누나의 몸이 차가운 옥상 바닥에 쓰러졌다. 한 손에 신고 있던 힐을 든 진래 선생님이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기습한 건 이걸로 봐주지. 제기랄, 아프잖아. 외과의사의 오른팔을 날려먹다니. 내가 손해, 그것도 파산 급의 손해야. 정말, 내가 양손잡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

진래 선생님은 서소 누나를 맨발로 툭툭 건드렸다. 나는 다시 바뀌어버린 상황에 냉정히 머리를 굴릴 수가 없었다.

“뭐, 오른손잡이든, 왼손잡이든, 양손잡이든 상관없었겠지만. 너 날 죽이려 했잖아? 앙? 이 빌어먹을 년이.”

퉷, 하고 뱉는 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나는 새하얗게 질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진래 선생님?”

“응? 아아 서수 군. 뭐야, 서수 군은 내 메스를 들고 있잖아? 돌려주지 않을래? 아끼는 거라고, 그거. 네 누나가 꺾어 버린 오른팔보다도 더. 순이 사준 거란 말이야.”

진래 선생님은 왼손에 힐을 들고 있어서 무심코 오른팔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손바닥은 위를 향하지 못하고 손가락 끝은 힘없이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진래 선생님은 진자 운동을 반복하는 팔꿈치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힐을 던져버리고 의사 가운을 벗어 팔을 묶었다. 삼각 천으로 깁스를 한 것처럼 능숙하게 팔을 고정시킨 그녀는, 힐을 한쪽 벗어버린 탓에 균형이 맞지 않는 다리로 절뚝거리며 누나를 넘어와 나에게 다가와 왼손을 내밀었다.

“돌려줘, 메스.”

“돌려주면, 그걸로 뭘 할 거죠?”

“당연히, 복수지. 순이 사준 메스로 순을 죽인 네 망할 누나를 째서 그 더러운 속을 이물로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혐오스럽게, 그로테스크 적인 미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괴악하게 찢어버릴 거야. 조각조각 난 고기더미에서 제일 추잡한 부분을 골라 입에 넣고 으깨어 삼킨 다음 토해내서 구정물 투성이로 만들고 다시 짓이겨 줄 거야.”

순의 선물이라기에 돌려줄까도 했던 생각은 태풍과도 같은 폭언에 휩쓸려 사라졌다. 나는 메스의 손잡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민 왼손에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메스의 날을 가만히 보던 진래 선생님은 날보다도 날카로운 서슬 퍼런 눈길을 내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수 군, 환자 주제에 의사의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의사가 환자를 만들려 하나요? 메스는 치료를 위한 도구지, 살해를 위한 도구가 아니에요.”

“모든 사물이 합목적성에 맞게 쓰여 진다는 것은 종교적 관점이지. 철학전쟁 이후 죄다 사이비가 되어버린 사기꾼들의 소리는 집어 치워. 게다가 의사는 환자를 만든다고. 의사가 아니면 대체 누가 만드는데?”

진래 선생님은 내밀었던 왼팔을 거두었다. 아니, 거둔 게 아니다. 내지르기 위해 뒤로 뺀 것뿐이다. 탄환을 장전하기 위해 리볼버의 실린더를 옆으로 빼두는 것처럼. 틀림없이, 유예 없이, 괴물 같은 괴력으로 용서 없이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남은 한쪽의 힐을 벗어 들었다.

탄환이 장전되었다.

실린더가 빙그르 돌아 공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힐의 굽은 이미 데저트이글의 납 탄두나 마찬가지다.

“난 환자를 죽이고 싶지 않아.”

처벅. 물웅덩이를 밟는 진래 선생님의 발소리.

“난 환자를 시체로 만들고 싶지 않아. 서수 군, 말했었지?”

처벅. 그녀와의 거리가 한 걸음 더 좁혀지는 소리.

“메스를 돌려줘, 서수 군. 뭐얼, 네가 죽을 일은 없어. 내 치료에 순순히 따라온다면 말이지.”

처벅. 파국이 다가오는 소리. 결단을 재촉하는, 소리.

“내 치료에 응하지 않는다면 시체가 될 수밖에 없어. 그걸 원한다면, 네 누나와 비슷하게 만들어 줄게. 살을 섞어주지.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섞어 주겠어. 멋진 근친상간의 예가 되겠는 걸? 보건체육 교과서에 실릴 거야.”

처벅.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두들기는 소리.

“…난, 누나를 버릴 수 없어요.”

“그래? 그럼 너도 시체가 되어라. 시체도 의사가 만들지. 사망확인을 하는 것은 언제나 의사라고.”

진래 선생님의 눈동자에서 내 모습이 보일정도의 거리. 힐을 휘두르기에 충분한 거리다.

마찬가지로, 내가 메스를 내지르기에도 충분한 거리다.

떨림을 억지로 멈춘다. 어금니가 바스러질 정도로 턱을 당긴다. 허리를 낮추고 무릎을 느슨하게. 그리고 손목, 팔꿈치, 어깨 전부를 하나의 둔기처럼 고정시켜, 손의 메스를, 그녀에게 내지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푸욱-

메스의 날을 타고 손잡이를 건너 매섭게 약동하는 맥박이 느껴졌다. 차디찬 빗물 사이로 뜨거운 물줄기가 손을 타고 흘렀다. 그 핏물이 혈관처럼 진래 선생님과 나를 엮어 전신을 두 개의 심장이 공명하는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약동하는 심장 소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소리를 지워갔다. 병원 외벽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 옥상 바닥을 때리는 빗줄기의 소리, 구름끼리 부딪히는 천둥의 소리. 모든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오로지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이, 내 몸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히 알았다.

메스는 틀림없이 그녀의 심장에-

“유우우우우가아아아암이이이이야야야야~, 서수 군. 빗, 나, 갔, 어.

여기까지 와서, 이런 형편없는 실수를.

온갖 폼을 잡은 독백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잖아.

메스는 진래 선생님이 의사 가운으로 감았던 오른손바닥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단단하게 고정해 두었을 팔을 억지로 움직여 메스를 막아낸 것이다. 메스의 짧은 날은 그녀의 가슴에는 주사 바늘 정도의 상처도 남기지 못했다. 그 깨끗한 피부로 감겨진 둥근 덩어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상하리만큼 잔상이, 잔향이 남는 그 움직임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을 때 눈앞에 뾰족한 무언가가 시야를 가르며 다가왔다.

휘익- 푸칵!

둔탁한 충격에 세상에 잡음이 낀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대고 있었다. 의식은, 언제 끊겼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눈 밑으로는 밝은 빛이, 위로는 어둠이 각각의 영역을 주장하고 있었다. 흐릿하게 구별이 가지 않는 그 중간의 나누어진 듯 나누어지지 않은 회색지대에, 아니 회색허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매달려 있었다. 발바닥에 무언가가 닿는 감촉이 없었다. 뻐근하게 느껴지는, 팔과 몸통을 묶은 날카로운 압박감에 의지한 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눈의 초점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왱왱 울리는 둔통에 세상만 핑핑 돌고 있었다. 기울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수 번 반복한 후에야 나는 내 눈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히익?”

헛숨이 나왔다. 사타구니가 저려왔다. 심장도 지금껏 살아왔던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병에 걸리건 아니다. 난 베르테르 케이스도 아닐 테고, 그 외에는 몇 번에 투신에도 죽을 만큼 다치지 않는, 되려 터프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라도 허공 20m 정도에 묶여 있다면, 하물며 자신을 묶고 있는 것이 뭔지도 모른다면, 거기다 비바람이 자신의 몸을 용서 없이 때리고 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테지. 딱히 내가 겁이 많은 게 아니다.

“서수 군, 깨어났어? 정말, 잠꾸러기네.”

빗속에서도 그 스산한 목소리는 잘 들렸다. 나는 뻣뻣해진 고개가 떨어질라 조심조심 돌렸다. 순간이 영원이란 말을 실감하면서 돌린 시선의 끝에, 진래 선생님이 있었다. 검붉게 물든 의사가운으로 어깨와 오른팔을 묶고 왼손으로는 볼펜을 돌리듯 메스를 돌리고 있었다.

“정말, 기다리다 지쳤다고?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내가 체온 저하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어. 한데 정말로 베르테르 케이스가 아니었구나, 서수 군. 거기서 발작을 하지 않다니.”

“…진래 선생님, 지금 이건…”

“아아, 그랬지. 너무 오래 기다리다보니 잊어버릴 뻔 했군. 서수 군? 앞을 봐 줄래? 천천히, 거기서 허둥대다 떨어지면 재미가 반감되니까.”

“앞?”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발밑을 향했다. 병원 창문에서 나온 빛으로 어슴푸레하게 삼각 정원의 윤곽이 내려다 보였다. 옥상의 정원 쪽 난간에 무언가 밧줄 같은 걸로 묶여져 있는 모양이었다. 높이가 가져다준 아찔함에 고인 침을 입에 담고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삼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때, 괜찮은 센스지? 나름 자신작이라고? 이래 뵈도 사람을 매다는 경력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내 정면, 매달린 위치의 반대편, 삼각정원의 한 변의 꼭짓점에서 다른 꼭짓점의 난간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고풍스런 비녀로 틀어 올렸던 긴 생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다. 빗물 속에서도 풍성했던 한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볼품없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와 달리,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거센 비바람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 서소 누나?!”

“어이어이, 너무 흥분하지 않는 게 좋아, 서수 군. 그렇게 좋아할 정도로 현실의 공기는 맛있지 않다고? 거기다 널 묶고 있는 줄과 저 망할 년을 묶고 있는 붕대는 이어져 있으니까 말이야. 너무 움직이다 보면-”

찌익-

“…끊겨버린다고?”

오싹한 효과음이었다. 아까 발밑을 확인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기가 혈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나들이라도 가는 듯이 발끝으로 통통 튕기면서 진래 선생님은 서소 누나 쪽으로 다가갔다.

“둘도 셋도 넷도 아닌, 하나 밖에 없었던 순을 제로로 만들어버린 이 망할 년을 죽이는 건 너무 간단해.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어처구니없게 죽어간 내 친구를 생각하면 용납 못할 일이지 물론 살려둘 생각은 없어. 생명에 대응하는 추는 다른 것을 허락하지 않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이지. 하지만 말야, 서수 군?”

진래 선생님은 메스를 빙그르 돌려 멋들어지게 잡고는, 칼날 면으로 서소 누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메스 날이 비비고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그렇다면 복수를 대행하는, 나의 고통은 어디서 그 값을 받아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서소 누나의 팔을 그었다. 팟, 하고 터지는 핏줄기와 함께 누나는 짧게 경련했다. 신음 소리와 함께 누나는 의식을 차렸다. 목을 살짝 움츠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자기를 내려다보며 하얀 이를 드러낸 진래 선생님과 어두컴컴한 허공을 두고 건너편의 나를 발견하고는 사태를 파악한 듯 했다.

“…수아…”

“야-야-야-야, 잘 잤어? 일어나자마자 동생을 챙기다니, 훌륭한 누나네. 좋은 귀감이야. 동생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걸? 아니, 실제로 죽였지만. 그렇다면 동생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는 거겠지?”

빈정거리는 말투. 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래 선생님을 노려보았다. 진래 선생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눈이네. 내게 목을 졸리던 가짜 환자 녀석들과는 다른 눈이야. 정말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거겠지. 그런 녀석에게 죽음 따위, 별 대단한 페널티도 되지 않겠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진래 선생님은 이쪽에서 보이지 않는 난간 안쪽에서 붕대 뭉텅이를 꺼내 나와 누나에게 보이도록 늘어뜨렸다. 엉망으로 엉켜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매듭이 네 개, 묶여 있었다.

“서수 군, 그리고 서소 양? 여기에 매듭이 보이지? 이 매듭들은 붕대를 묶어 길게 줄을 만들기 위해 엮었던 거야. 왜 그랬냐 하면, 서소 군과 서수 양을 같이 매달아 놓기 위해서지.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서소 군과 서수 양은 이 매듭들로 묶인 줄에 엘리베이터 추처럼 매달려 있는 거야. 그리고 이 매듭들은 지금도, 너희 둘을 지탱하는 붕대의 일부지.”

진래 선생님은 매듭 하나를 메스로 톡톡 건드렸다. 언제라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붕대가 끊어지면, 물론 둘 다 동시에 추락하겠지. 하지만 버라이어티를 위해 난 좀 더 신경을 썼지. 이 네 개의 매듭은, 각각 지탱하고 있는 게 달라.

하나는, 서수 군만을 지탱하는 매듭.

하나는, 서소 양만을 지탱하는 매듭.

하나는, 둘 모두를 지탱하는 매듭.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끊어져도 아무 상관없는 매듭. 물론, 어느 매듭이 무얼 지탱하고 있는지는 비밀이야. 여기까지 들었으면 슬슬 감이 오지?”

핏, 하고 핏물이 섞인 침을 뱉은 서소 누나는 진래 선생님을 신랄하게 매도했다.

“쓸데없는 수고를. 뭣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해가며 준비를 한 것입니까? 그렇게나 자신의 시간을 싸구려로 팔고 싶다면 이 정원 바닥에 던져버리면 되었을 것을.”

“어라? 그 썩을 입을 다물지 못할까? 난 기회를 주는 거라고?”

기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확실히 진래 선생님이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나와 누나가 의식을 잃은 사이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을 터다. 굳이 이런 고생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인간은 오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 호모 루덴스라고도 하잖아? 스트레스를 풀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희가 필요해. 복수를 대행하는 내 고통,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런 귀신놀음이라도 하지 않으면.”

진래 선생님은 서소 누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뱀이 지나간 것처럼 서소 누나는 몸을 움찔움찔했다.

“죽을 각오, 죽일 각오, 어떤 가치를 판단하는데 최소조건이 되는 자신의 생명보다도 다른 무언가를 우선한다는 것은 저울접시에 저울을 올리겠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아. 용납되지 않는 모순이지. 그런 사람에게는 공리, 논리, 합리를 적용할 수 없어. 그렇기에-”

진래 선생님은 서소 누나의 턱을 잡고 억지로 눈을 맞추었다. 망막을 통해 뇌에 직접 새겨 박을 기세로 그녀는 말했다.

“재미있어. 재미있다고, 하하핫!!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공포와 경외를 불러일으키기에,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에 애착을 가져다주지! 빌어먹을 천재 4명 때문에 인간이 끝나버렸다고 해도 미지는 언제나 남아있어 주잖아?!”

턱을 비틀어 서소 누나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주렁주렁 흐트러진, 4개의 매듭.

“저 네 개의 매듭 중, 단 하나만을 자를 거야. 그 이후엔 너희들에게선 손을 떼겠어. 약속하지. 이 게임이 끝난 후에는 너희 남매와 어떤 관계도 갖지 않을 거야. 너희들과 나를 엮은 매듭은 저기 있는 매듭 중 하나가 끊어지면 모조리 끝나는 거야. 누가 살더라도 누가 죽더라도, 결과에는 승복하도록 하지. 자, 그러니 그 대가로 너의 광기를, 여기서 보여줘. 서소 양?”

내던지듯 서소 누나에게서 손을 떼고 진래 선생님은 매듭 앞으로 메스를 내밀었다. 구름을 울리는 천둥을 배경으로 연극조의 고성이 밤을 찢는 듯이 나와 서소 누나를 내리쳤다.

“선택해라!! 어느 매듭을 자를 지를!!”

“…으읏!”

서소 누나는 이를 악 문채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선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둘 모두가 살아날 수 있는 매듭은 단 하나다. 25%의 확률. 복권이라면 당장에라도 묶음 채 살만큼 높은 확률이지만 목숨을 내건 도박에서는 터무니없이 낮은 확률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녀가 선택을 주저하게 하는 것은,

“아앙? 뭘 망설이지, 대학생!! 그저 단순한 객관식 문제일 뿐이잖아?! 걸리는 거라도 있어?! 설마하니, 동생의 목숨을 자기가 끝장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야? 푸하하핫!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팽개치는 대학생이?!”

진래 선생님의 말 대로, 나 때문이다. 서소 누나는 확률에 의존해야만 하는 문제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택지의 확률이 똑같을 때 그녀는 선택을 망설이지 않는다. 모든 대학생이 그렇듯이, 그녀는 고민하지 않는다. 답을 모를 지라도 진리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도 이 사지선다에서 그녀는, 멈췄다.

“하면 동생에게라도 조언을 구하던가? 하! 그것도 못 하겠지! 기본적으로 넌 상냥한 누나이니까 말이야!! 자기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동생이지만 누나의 목숨까지 담보로 한 선택을 너는 강요할 수 없겠지! 귀여운 동생에게는 너무 잔혹하니까!!”

끼야하하, 하는, 소음과도 같은 웃음을 흘리며 진래 선생님은 이 이상 즐거울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뼈와 뼈가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서소 누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마저도 진래 선생님에게는 즐길 요소로밖에 적용되지 않았다. 누나의 힐시詰視하는 눈을 직시하며 그 틈으로 뇌 속을 핥는 것처럼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아, 괜찮은 맛이야.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것 같아. 간이 덜 됐나? 역시 넣어주는 것이 좋겠지? 시간이란 양념을 말이야!”

왼손에 들린 메스가 괘종시계의 추처럼 진자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날은 심장고동보다도 정확하게 초단위로 움직였다.

“앞으로 1분, 정확하게 58초를 기다리겠어. 말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만약 이 안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매듭 네 개를 모조리 잘라 줄게. 아, 그렇게 되면 맨 먼저 서수 군만 떨어뜨려주지. 그 정도 페널티는 있는 편이 좋지 않겠어? 어때, 서소 양? 이제 그만 장고를 끝내지? 43초 남았네?”

서소 누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발밑으로 펼쳐진 20m의 허공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벽을 스쳐지나가는 스산한 바람 소리와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는 유의미한 자극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메스는 선택을 재촉했다.

“…수아…”

누나의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무너질 일이 없었던 누나의 얼굴은 무기질보다도 더욱 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처참한 얼굴을 보고, 전신을 때리는 빗물을 맞으며 나는 연히 씨의 말을 떠올렸다.

‘결자해지를 부탁해.’

어째서 누나가 그런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지? 매듭을 꼬아 버린 건 나다. 다른 사람들은 끈의 한 쪽 끝을 잡고 있었다고 해도, 묶은 건 나란 말이다. 내가 없었다면, 진래 선생님이나 순, 연히 씨나 미누 씨, 유애나 경파 씨랑 서소 누나가 엮일 일은 그야말로 없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주제에, 과거를 죽여 버린 주제에 추락을 반복했기 때문에 모두가 얽히고 섞여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휩쓸려 왔다. 태풍 속을 떠돌다 바람이 내리치는 대로 흩날리다 벽에 보잘 것 없이 부딪혀 땅에 흩어지는 빗방울 마냥, 추락을 제외한 모든 것에 나는 주변에 흔들리기만 했다. 태어난 이래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주변에 맞섰던 적이 있던가? 수명에 부모를 빼앗기고 누나를 의지해 떠돌다 기껏 만난 조그만 행복조차 나는 내 스스로 나서서 지킬 수 없었다. 결과는 그런 자신을 두고 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반항, 자학에 대한 자해, 추락밖에 없었다.

‘결자해지를 부탁해.’

이런 마지막까지, 나는 누군가의 말에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분명, 이것이 내 의지일 테지. 추락만큼은, 내 스스로 정한 수단이니까.

“20초 정도 남았다. 슬슬 선택하지 않으련? 적어도 서수 군이 살 확률은 5할은 된다고? 아무거나 찍어도 말이지, 하하핫!”

재촉하는 진래 선생님의 목소리. 고뇌하는 서소 누나의 잇소리.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멀어지기 전에, 나는 그 안으로 뛰어 들었다.

“더 고민할 필요 없어, 누나.”

아스라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결자해지를 부탁해’

“여기까지의 매듭을 묶은 건 나야. 그러니까-”

그 매듭은, 내가 풀어야 한다. 서소 누나가 선택할 것도 없다. 진래 선생님이 자를 것도 없다. 나로 인해 엮여버린 것만, 내가 묶여 있는 것만 끊어버리면 된다. 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누구의 역할도 아닌, 누구의 의도로도 아닌, 오로지 내가 해야 할 것이며 내 의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결자해지다.

“결자해지라고.”

나는 몸을 흔들어 내 뒤쪽 벽에 발을 갖다 대었다. 한 순간이지만 젖은 벽과 붕대가 감긴 내 발은 충분한 마찰력으로 내가 튕겨 오를 수 있는 버팀대가 되어 주었다. 노리는 것은 처음, 눈을 떴을 때 발버둥 치다 살짝 찢어진 부분. 그 갈라진 틈을, 현재 내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원시적인 날붙이, 신체의 모든 부분 중에서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로,

“그이이이익-!!”

물에 젖은 붕대가 질겨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이빨에 가해진 몸무게 분의 충격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부유한 순간 지면과의 충돌로 몸에 새겨질 공포에 대해서도 편린의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 매듭을 자른 것만으로 모든 것이 풀려나갔다.

진래 선생님은 약속을 지킬 테지. 그녀가 준비한 매듭은 아니지만 이쪽이 정답이니까. 서소 누나는 슬퍼할 테고 선생님은 만족하고. 죽은 사람의 기분은 알지 못하겠지만 이제 나도 곧 그쪽으로 갈 테니까, 원 없이 그들의 원을 들어줄 수 있고.

거기다 마지막으로,

겨우 나는 그 녀석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흘깃 본 창문에는 일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다. 내 왼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상대는 오른쪽을 올렸다. 기분 나쁜 녀석이다. 그렇다. 저 녀석은 나다. 기분 나쁠 만도 하지. 하지만 이내 곧 거꾸로 흐르는 빗물에 씻겨 사라졌다. 내 몸도 거꾸로 떨어지고 시간은 거꾸로 되감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은 하나가 아니니까.

두 번째 창문, 그러니까 3층의 창문에는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막현, 서소 누나, 그리고 가름이. 그와 그녀들은 나에게 있어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니었던 시기의 거짓말 같은 사건으로, 그 장본인인 나 때문에 지금은 썩어지고 찢겨지고 일그러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한다. 지금은 그 모두가 사라져 감정만이 뭉클하게 남아있다. 그렇기에 나는 추락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섬뜩하게 피부를 감싸는 젖은 옷에도 그때처럼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이라도 이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이 느낌을 간직한 채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초침마저 느리게 움직이는 세계에서 나는 마지막을 향해 눈을 뜨고 말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찰나였다.

저 창에 비친 풍경이 뇌에 새겨지는 마지막 풍경이 되어버렸다. 마지막 창문, 1층의 창에는 4층에 있던 녀석이 약간 어려져 있었다. 봄방학 때처럼 탈색되지 않았던 새카만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기억에도 없는 웃는 얼굴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은 가면같이 굳어져 있어 녀석에 대한 호감도는 내 육체처럼 급격한 하강세를 그리고 있었다.

죽을 것 같다. 지금도 얼핏 말해버릴 것 같이 흔하게 입에 담던 말이다. 나의 뇌는 받아들이는 모든 자극에 대해 동일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금만큼 확고한 답을 내놓은 것은 없었다. 어서 죽고 싶다. 언제나 생각했던 일이다. 나의 심장은 뛰기에 적합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 절실하게 그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욕망이다. 하지만 나의 몸은 언제나 정직하게 나의 바람을 말하고 있었다.

난 역시, 저 녀석을, 과거의 나를, 과거의 내가 만든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내가 만들 미래의 나를 전부 죽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 이제 저 지면에 부딪히면 영혼은 관성에 의해 육체를 떠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까.

이제까지, 나는 언제나 죽지 못했고 죽일 수도 없었지만 다시 태어나지도 못했다.

이번만큼은,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쓸 수 있겠지. 정말 죽어버릴 만큼 노력했으니.

정말, 이곳의 모두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은 없었다. 오로지 동족혐오만이 있었지.

애초에, 어느 색을 시작으로 류빅스 큐브가 어긋났는지 따위 그 누가 알까.

죽여야 할 내가 내 안에 있는 한, 우리들의 죽음은 다른 이의 손을 빌려서 한 것이더라도 살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의심암귀는 본능보다 깊은 곳에서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진다.

또한, 호기심은 고양이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수수께끼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푸는 사람 쪽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의 가치는 하락 일변도를 달린다. 익숙해질수록 끝을 쉽게 맞이한다.

누구나 다 알 듯이, 지구 반대편의 나비가 태풍일 일으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가능성의 안이라면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

아아 지금, 수억 수조의 물방울과 함께 추락한다. 나의 바람은, 틀림없이 역류한다.

물론, 삶은 의무다. 언제까지? 죽기 전까지.

고로, 나는 자살한다. 죽일 수 있는 내가 있기에 존재한다.

이래서, 세상만사는 대체로 불합리하다. 불합리할수록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내 안의 빌어먹을 너, 너만큼은 자살하지 못한다. 내가 죽일 테니까.

왜냐하면, 모든 게 너 때문이다.

당연히도, 현실의 개가 떨어뜨린 뼈를 얻은 물에 비친 개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어느 쪽인가 하는 문제는 너무나도 뻔하다.

억울하지만, 감동과 축복의 저주로 인간은 객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미래를 환상하는 꿈은 언젠가 깨어지기에, 과거를 재생하는 꿈은 아문 상처를 벌리기에, 망상으로 가득한 꿈은 허무하기에 꿈은 자해를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된다.

거기에, 환부를 적출, 제거한다고 해서 환자는 낫지 않는다. 모자란 인간이 될 뿐이다.

그래도, 주사위와 말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한들 말을 움직이는 건 주사위다.

아무리 부정해도, 여러 사람의 믿음은 진실이 되고 만다. 그것이 민주주의.

허나 이제,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가 현재의 철퇴를 날린다. 부서지는 것은 미래다.

언제나, 막이 내리기 직전에 웃는 녀석이 범인이다.

쓸데없이, 불안은 생각을 먹고 증식한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불안이 생각을 대신하고 있다.

마지막에 와서, 반전을 일으키는 것은 탐정인가, 진범인가. 그도 아니면 무죄인 용의자인가.

재미없게도, 진실은 잔혹하지 않다. 다만 냉담할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곧, 커튼콜이 배우를 사람으로 되돌린다. 4번째 천사의 나팔 소리처럼 이제까지의 세계를 파괴한다.

 

나에게 있어서 현실이라는 무대를 내려가는 커튼콜은 이 한 마디로 충분하다.

 

“즐거웠어?”

 

콰직.

 




태그
24 수류아  lv 24 85.64% / 32141 글 1295 | 댓글 2419  
인류최약人類最弱의
망량망상魍魎妄想 수류아라고 합니다.

[完] 자살의 메커니즘 32편
/여름/촉수군은 청춘을 구가한다 7편
외인교실의 궤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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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4/12/09:15
여기끝이잘렸어요
24 수류아 04/12/10:22
노트 님// 헛?! 이, 이런 수정하겠습니다 ㅠ
24 수류아 04/12/10:26
이 이후 게시글에 덧붙이는 형식으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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