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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I;요정의 시각 by 커리

『――――사실 우리의 뇌내세계 속에 2000년, 2001년, 2002년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밀레니엄 쇼크, 9.11테러, 한일 월드컵이라는 사건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을 뿐이야. 고등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더 나아가면 취업, 결혼 같은 인생 대소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사망에서 매듭이 지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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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삼처럼 6년 묵은 커리  lv 4 10% / 1050 글 45 | 댓글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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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커리[kerius]  
조회 1389    추천 0   덧글 7    / 2007.07.12 21:41:25




먼저 와서 고기를 굽고, 그것을 초리가 발라먹기를 수 십 분. 지갑 사정이 바닥나려 하고 있을 때가 되서야 세현이 나타났다.
「오. 불여우가 서역귀신을 데려오는구나」
그러면서도 초리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기척만으로도 누가 왔는지를 느끼는 것처럼.
「Bon soir~. 어어, 왜 울상이야?」
「통장이……내 통장이……」
한숨. 세현의 미지근한 시선이 갈비 삼겹살 생등심 두루치기 등등 이 가게에 있는 모든 고기요리를 1인분씩 먹어치워서 요리점 재패에 도전하고 있는 내 가디언 언젤에게 작렬했다. 그리고 그녀는 뒤에 있는 사람에게 프랑스 말을 건넸다.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꼭 인형을 8등신으로 만들어놓고 수수한 옷을 입혀놓은 그런 미인. 사실 더 표현할 말이 없다.
「안녕……하세요」
꾸벅. 이유도 없이 그녀에게 머리를 숙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금발 여성의 몸 주변에 손윗사람 오러 같은 것이 나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세현은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어서 신발장에 두고 마루로 올라왔지만, 금발 여성은 쭈뼛거리면서 신발장과 자기의 발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금발 여성은 세현이의 리드를 받아 우리들이 맡아놓은 자리에 동석할 수 있었다. 외국인을 좌식 식당에서 만나자고 하다니, 세현이도 의외로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과연 앞자리에 마주 앉고 나자, 천하의 초리도 먹는 것을 멈추고 (드디어) 젓가락을 놓았다.
「허허어, 이거 또 특이한 걸 뒤에 붙인 양인이구먼」
「역시 초리양에겐 다 보이는 모양이네」
「……??」
외국인 여성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초리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방금 전까지 비아냥거리던 초리의 눈에 순간적으로 노기가 서렸다. 늘 그렇지만, 초리가 진노의 눈초리를 향하는 곳은 미소 짓고 있는 금발 여성의 얼굴에서 머리 하나쯤 위의 공간이다.
「흥. 적어도 네가 달고 다니는 것보단 질이 좋군」
흥미를 잃은 것일까. 초리는 다시금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어들었다.
「아하하하……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
그러면서도 세현이는 초리 대해서 별다른 액션을 취하진 않았다. 대신 옆에 앉은(사실 앉은 자리도 되게 불편해 보였다) 여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Enchante. Je m\'appelle Erin‐Rochefil, et Breguet」
……프, 프랑스 말! 그것도 뭔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
「세현아. 통역 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에린 로쉐필이라 합니다. 브레게의」
세현이의 목소리는 평소의 유창한 한국어가 아닌, 매우 삐걱대는 교과서 억양이었다. 어째 영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들린 리얼 프랑스어에 근처에서 밥을 먹던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저들의 시선은 신기한 프랑스 여성이나 특이한 동양인 여성이나 아까부터 폭식을 계속하는 소녀가 아니라, 바로 그 기묘한 그룹에 앉아있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세현아, 나 좀 보자」
「응? 어어, 잠깐만……!」


다짜고짜 세현이를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찰칵. 일단 담배를 한대 물고, 연기를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하늘에 대고 뿌렸다. 후으으……일단 니코틴의 힘으로 심박수를 낮췄다.
「저 사람, 한국말 못해?」
그러자 세현이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말이 톡톡 쏘는 것으로 보아서, 아무래도 오늘 세현이는 기분이 좀 안 좋은 것 같다.
「당연하지. 사장님은 한국에 온 게 이게 처음이니까」
「그럼 영어는?」
「……저기, 모든 지구 사람들이 네가 아는 말을 할 거라는 착각은 그만둬주지 않겠어?」
끄응……. 하긴, 가만 생각해보면 프랑스 사람은 영국을 싫어한다고 하니까, 영어를 못하는 프랑스인이 그렇게 신기한 것은 또 아닐 것 같다. 듣기로 베트남의 제1외국어도 프랑스 말이라고 하고……이, 이것이 세계의 벽인가!!
「어쨌든, 저 분에게 너무 무례한 태도를 굴지 않았으면 해. 우리들 시간능력자에게 있어선 정말 귀한 분이시거든」
「브레게의 후계자라며. 그렇다는 건……」
「물론, 현 브레게사(社)의 오너라는 의미도 되지」
「사……사모님?」
「그녀는 미혼이야. 그 자신이 Owner니까 여사장 정도는 되겠지.」
「헉!」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남는 시간에 틈틈이 미국 쪽 사이트를 다니면서 브레게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그 브랜드가 얼마나 대단하고 긍지 높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을 참이다.
「왜, 왜 그런 사람이 이런 데에?」
「확실히 오너이긴 하지만, 소유주가 꼭 최고경영자일 필요는 없잖아? 본인이 경영에 대해선 영 꽝인 것 같아서, 실 경영은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맞기고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이 오피셜한 사장이고, 그녀가 뒤에 숨은 사장이랄까」
으음……반 정도는 알아먹겠다.
「여간해서는 스위스에 있는 공방에 틀어박혀서 바깥 세상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긴 한데, 그녀가 바깥 세상에 나올 때가 있다면 그것은 곧――――」
「브레게의 회중시계에 관계된 일?」
「그렇지. 이번 일은 가능한 한 그녀 몰래치르고 싶었는데……네 시계의 수리 부품을 구하려고 본사에 연락을 한 것 때문에, 그녀가 이번 서울에서의 싸움을 감지한 것 같아. 그래서 이쪽으로 왔고」
「그런 귀한 사람과의 미팅을 이런 공공장소에서 해도 되는 거야?」
그렇다. 저 서양인이 그런 사람이라면 내 집이나, 세현이가 투숙하는 호텔이거나, 어쨌든 더 보안이 확실한 곳에서 만나야 할 것이다. 여긴 인사동도 이태원도 아닌 대학로 한복판이고 서양인은 이 마을에선 너무 눈에 띈다.
「그야 시계노인 때문이지.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 낮보다 밤, 다수보단 소수를 상대하는 걸 즐기고, 성격적으로도 은둔 수도사에 가깝달까……그런 사람이야. 그는. 그러니까 동시에 많은 사람의 눈에 뜨이는 장소가 시계노인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볼 수 있지요」
꽤 명랑하고 사회생활 잘할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서양인들의 사회에선 또 기준점이 다른가……어쨌든, 시계노인에 대해서는 나보다 이 녀석이 더 잘 안다. 그녀의 판단을 따르자.
「알았어. 그거 말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저 사람도, 시간능력자인가?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세현이는 나의 3배 정도는 눈치가 빠르다.
「시계? 물론 가지고 있어. 그것도 두 개나」
「2개라……그 사람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그러면 2:3이 4:3이 된다. 시계노인도 평상시엔 되게 좋은 사람인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 사람은 뭐랄까……날개가 없는 천사가 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묘하게 신성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게다가 세현이랑 친한 것도 같고, 어떻게 잘 부탁을 하면 연합을 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로쉐필씨는 중립자……혹은, 이 싸움의 중재자 역이라고 보면 돼. 솔직히 난 기대 안하지만, 만약 네가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렇게도 되겠지. 그보다도, 좀 있다가 그녀가 진용씨에게 제안을 하나 할 건데……일단 시간을 좀 달라고 해. 그러면 그녀는 1주일이고 1년이고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아직 많이 남았지만 담배를 서둘러 밟았다. 세현이의 배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더 서 있기도 그렇고 세현이도 살짝 얼굴을 붉혔다.
「시계를 가진 자는 그 누구라도 잠정적인 적이야. 그녀는 평화주의자이지만, 그녀의 중립은 무장중립이니까」
바람소리에 섞여서, 세현이는 그런 말을 흘렸다.

「늦도다. 너무 늦어서 또 1인분을 해치우고 말았지 않았느냐」

「저기……초리님. 여기 다 먹고 나면 입가심으로 냉면이나 칼국수 중에서 하나 나오는 집입니다. 좀 배를 남겨두시는 게」
「오호라 냉면! 이곳의 주인장은 인심이 두둑한 것 같군. 좋고나, 좋아」

초리는 젓가락을 놓고 살짝 물러앉았다. 냉면이 먹고 싶은 거겠지. 그러고 보니 사실 난 고기 집에 왔으면서 지금껏 고기를 굽고 뒤집느라 정작 먹지를 못했다. 세현이가 자기 몫을 주문했고, 거기에 끼어서 나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시켰다. 문제는 미스 로쉐필이다. 한국 음식이 입에 맞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잠자코 있던 입을 열어서 또 세현과 말을 나눴다.
「진용씨. 자기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달라는데」
내 본능이 가장 묻고 싶은 것을 말했다.
「저기……실례가 안 된다면 연세가?」

 쏼라쏼라가 오간다. 세현이의 말이 넘어가자마자 로쉐필씨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세현이는 어떠한 여과나 첨부를 하지 않고 내 말을 100%직역해서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노코멘트. 그리고 진용씨,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건 에티켓이 아니지」
「미안합니다」

 이후로도 세현이를 거쳐서 하는 문답이 오갔다. 그녀는 정말 여과 없이 내 말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눈앞에서 한국어‐프랑스어 동시통역을 보고 있다.
「브레게 사의 사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제2시계를 두개나 가지고 계시다고」
「그렇습니다. 보여드릴까요?」

끄덕끄덕. 로쉐필씨는 자신의 포켓 속에서, 두개의 시계를 꺼냈다. 하나는 갈색, 하나는 은색인데, 은색으로 된 것은 세현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확인삼아 내 시계를 열어서, 로쉐필의 시계의 가는 소리와 맞춰보았다. 그것은 정확하게 딱 맞았다.
「그렇군……그럼 다음. 시계노인도 저한테 \'브레게\'란 성을 댔는데, 혹시 같은 가문 사람인가요?」
「다른 시간능력자들에게서도 자주 그 질문을 받습니다. 신에게 맹세코, 그는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가 파악하고 있는 브레게의 가계도에 한정된 판단이므로, 시계노인이 정말로 브레게의 관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뭐야, 요는 가문 사람인 자기 자신도 그의 정체에 대해선 잘 모른다는 건가.
「과거에도 몇 차례, 브레게의 이름을 사용하는 시간능력자는 있어 왔습니다. 특히 그러한 자들은 강한 능력자이거나 특이한 힘을 지닌 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사칭자들 중 누군가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도 있겠지요」
「어디까지나 참고가 될까 해서 묻는데, 그 과거라는 게 어느 정도 과거죠?」
「음. 집안 기록에 남아있는 것들 중에 가장 가까운 과거는 2차 대전 직전입니다」

우왓.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날 무렵이란 말이냐. 그럼 시계노인이 정말 2차대전때부터 살고 있는 노인이란 말이야? 얼굴이 그렇게 젊은데?
「특히 여기 세현양이 \'클록 마에스트로\'라 부르고 있는 시간능력자가 런던에서 협정 파기를 저지른 건 고작 1년 전 일이고, 그 전까지는 영국에 시간능력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호기심 발동.
「현재 제2시계는 어디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파악하고 있는 제2시계는 총 10개. 시계노인이 가진 3개, 제가 다른 시간능력자에게서 양도받은 이 2개, 프랑스의 루앙에 하나, 호주에 한 분 계시고, 일본에도 하나. 그리고……이 자리에 있는 둘. 나머지 두 개는 모르겠습니다.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수도 있고, 제 정보력이 닫지 않는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지요」

손가락을 꼽으며 숫자를 새고, 딱 열 손가락으로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2개의 시계가 부서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200년의 세월동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수리되고 개조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점점 튼튼한 시계가 되어가는 셈이지요. 바로 당신이 한 것처럼」

아……. 하긴. 나도 시계를 억지로 뜯어서 부품을 교환했지. 그리고 하는 김에 부서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머리를 썼었다.
「당신의 개조 테크닉에는 흥미가 있습니다. 그 속을 한 번 볼 수 없을까요?」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마치 습작 악보를 세계적인 명지휘자에게 보이는 수치심 같은 것일까.
「그, 그건 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 말을 전해 듣고, 로쉐필은 빙긋 웃었다. 이 여성의 웃음에서는 쌀 한 톨 만큼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쑥스러웠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초등학교의 젊은 여선생님 이래다.
타이밍도 좋게, 그 때 즈음에서 새로 시킨 고기가 나왔다. 점원이 외국인인 로쉐필씨를 보고 포크를 가져오려 했으나, 그녀는 가지고 온 핸드백 속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들어서 모두를 경악케 했다.
「오. 젓가락질 할 줄 아세요?」
「조금은요. 한국의 쇠 젓가락은 무겁고 가늘어서 아직 어렵지만요」

그러나 역시 손끝이 달달달 떨리는 것이, 물건을 잘 집지 못하고 자꾸 음식이 미끄러졌다.
「음……좋아. 한국에서 고기 먹는 법을 가르쳐드리지」
「응? 뭐라구?」
「됐으니까, 통역」

세현이는 불만으로 볼을 부풀리면서도, 곧 프랑스어로 바꿔서 로쉐필씨에게 전했다. 그녀는 곧장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엇험, 짐짓 헛기침을 하고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스텝 1, 상추를 하나 집어서 손바닥 위에 올린다.

2, 상추 위에 야채, 고기, 밥, 쌈장 조금을 골고루 올린다.

3. 상추를 잘 모아서 싼다.

4. 통째로 입에 넣는다!
「!!」
그녀가 작게 박수를 쳤다. 이 사람의 환한 미소는 너무 눈부시다.
「This is 상추쌈. OK?」
처억.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로쉐필 씨는 나처럼 상추 잎을 가져다가 그 위에 여러 가지 음식들을 조금씩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아아, 왠지 국위선양을 한 기분이 들어.
「하아……참 좋은 거 가르친다」
「뭘. 그게 바로 한국이지」

불만을 입에 담으면서도 상추 위에 가지런히 고기를 옮기는 세현이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밖에 나왔다. 담배를 하나 물고 좀 기다리고 있으려니, 세현이가 차를 끌고 왔다.
「차 끌고 나왔었어?」
「그야 뭐……사장님 모셔드려야지. 집까지 갈 거면 타고 갈래요?」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물자마자, 백미러 너머로 세현이 날 강하게 째렸다.
「차내 금연」
「……칫」

필터를 톡톡 쳐서 도로 갑 안에 담배를 밀어 넣었다. 이어서 초리와 사장님이 탔지만 한참이 지나도 차가 출발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때엔, 조수석에 자리를 잡은 사장님이 세현이를 통해서 \'아까 한다는 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시계를 저에게 양도해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
「만약 거래를 원하신다면 합당한 값을 치룰 용의도 있습니다. 시계노인이 걱정이시라면, 그가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제가 책임을 지고 신변을 보장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계속 이 시계에 관여하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요」

시계를 포기하고 거액을 손에 얻는다.

실로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 브레게 사의 사장이나 되시는 분이니까 잘만 하면 평생 동안 써도 다 못쓸 돈이 생길지도 모른다. 쓰임새라고는 좀도둑질 밖에 없는 시계를 가지고 있을 바엔 챙길 것을 챙기고 이쯤에서 리타이어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발상이지.
백미러 너머의 세현이는 애써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만약 내가 여기서 시계를 포기하면 세현이는 대 시계노인과의 일전에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야 또 도망치면 되긴 하지만……그렇다면 또 어딘가에서 시계노인과 싸우겠고 그녀는 또 다른 시간능력자를 찾아서 세계를 떠돌겠지. 자신에게 불리한 교섭이라도 분명하게 진행시키고 있는 세현이가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멋있게, 또 가녀리게 보였다.

보다 더 정확하게는 그녀가 어깨에 지고 있는 부담을 저버릴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살고 싶다. 죽기 싫다. 시계노인 같은 괴물과 또 싸워야 하는 건 무서운 일이다. 마법의 시계를 손에 넣었어도 내가 그 그릇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난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용감한 시민도 아니다. 잘 되어봤자 나는 이 서울이라는 콘크리트 들판에 구르는 돌멩이들 중 하나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을 참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저야 얼마든지 기다려도 좋습니다. 편할 때 답변을 주십시오」
그런 세현이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옙」
「하지만, 이 도시는 이미 전장입니다. 진용님에게 그다지 고민할 여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
노코멘트. 정확하게는 받아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번 서울에서의 싸움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으로 좋겠지요? 세현양」

세현이는 대답 대신 차를 출발시켰다. 차에 탄 사람들 모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구조선을 떠나보낸 셈이었다.




차의 느릿한 진동은 쉽게 잠기운을 부른다. 집 앞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초리가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잠에 빠져있었다. 정작 나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느라 집까지 오는 약 5분 수준의 시간이 50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먹고 자고……가디언 엔젤은 참 편하네」
「업어서 들어가야지 뭐……어?」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나는 내 집 앞에 서있는 인물과 눈이 맞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집 앞 난관에 기대서 담배나 피우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 인물은 날 보자마자 큰 소리로 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어어~이」
진영이다. 눈이 맞아버렸으니 발뺌을 할 수도 없다. 초리를 안아들고 내리려던 계획을 긴급 수정했다. 정상인도 아니고 진영이에게 초리 같은 여자애를 보였다간 뒷수습이 감당이 되질 않는다.
「세현아. 미안한데 한두 시간 정도 초리를 맡아주지 않겠어? 집에 손님이 온 것 같은데」
「저 사람……누구? 아는 사람이야?」
「어. 학교 친구」
「……」
「제발 좀! 죽은 사람 염불 외워준다고 생각하고!」
순간, 세현이의 표정이 오늘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싸늘한 것이 되어있었다. 지금까지도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지금 이 얼굴은 마치 귀신이 사람을 보는 얼굴이다.
「알았어――――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해야 해」
이상한 말을 했지만, 그녀는 초리를 태운 채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도 내 사정을 이해해 준 모양이었다. 차가 충분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진영이를 어떻게 속일까를 생각하면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올라갔다.
「Yo~. 웬일로 차를 다 타고 다니냐?」
「아아, 대구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거든」
「흐~음? 옆에 타던 건 누구고?」
큭. 그 거리에서 보였단 말인가! 이 녀석은 하루 종일 컴퓨터를 하는데 왜 이리 눈이 좋은 거지!
「사……사촌 동생이다. 대구 사는 사촌 동생」
「흐으으으으으으……」
「그, 그런 것보다 들어가지. 덥다 더워」
찰칵 찰칵.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진영이를 안내했다. 묘하게 눈치만 발달한 녀석 같으니……. 녀석은 자꾸 고개를 까딱까딱 거리면서도, 순순히 나를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선풍기 선풍기……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
푸욱.
뭔가 차고 날카로운 것이 내 배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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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커리 07/12/09:41
그리고 이야기는 클라이막스에.
0 sadik 07/13/05:27
난대없는!
0 thenen 07/13/07:14
설마 벌써 완결인가요;
4 커리 07/14/03:36
벌써는 무슨(.....) 벌써 170k를 넘겼는데요[버어]
0 thenen 07/14/02:36
설마 여기까지가 요정의 시간 내용의 \'결\'부분이었습니까. ;ㅅ;
170k라고 하시니 블로그 창작문답에 올라와있는 예상치 164k보단 많군요.
....음. \'전 16k - 진용/등 뒤의 그림자\'라고 되어있으니 이제 결에 들어가는 건가요?
3 큐리티우스 07/14/11:13
아, 이런... 예상한대로... 죄송합니다.
4 커리 07/14/11:58
데넨/세상 일이 어디 예상한대로 되겠습니까만은(.....)
큐리/와하하하핫- (모른척)
0 로케 08/01/10:44
아 놀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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