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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달/『겨울 나라에서 온 소녀』 by 레이창

<과학이 꾸는 꿈> 콜드 슬립이 인류 절멸의 위기 속에서 강행된 2020 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소녀가 마침내 눈을 떴다. 물론 생존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사연이다. 그 소녀가 콜드 슬립에 들어간 7 년간,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의 생일마다 꽃을 가져다준, 이제는 청년이 된 한 소년이 있었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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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이창  lv 2 50.6666666667% / 452 글 17 | 댓글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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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레이창[iskave]  
조회 1245    추천 1   덧글 3    / 2010.12.31 20:10:01

 

내 손 위에는, 은은한 향기가 맴도는 붉은 매화꽃이 있었다. 사군자 중 하나로 수많은 사랑을 받던 이 꽃은 보통 서울의 경우 3 월에 피고 7 월에 만개한다.

하지만 지금은 11 월이다. 그리고 이 꽃은 분명히 생화의 싱그러움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가 내려간 승강장 쪽을 보았다. 당연히 그의 모습을 사라져있었고, 방화행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

* *

「환상학파(幻想學派)로군.」

소년의 얼굴을 한 노인, 정승은 그렇게 말했다.

「환상학파라고요?」

「그래. 자네 여자친구가 봤다는 가면을 쓴채 하얀 한복을 입고 있다는 말 없는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그 사람은 환상학파임에 틀림없어.」

단언하는 말에 시한(翅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고자는 고자를 알아보는 법이군요.」

「고수는 이겠지. 그리고 고수도 아니야. 나랑 환상학파를 동류로 치는건 참을 수 없어.」

시한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정승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정승은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 정일품 으뜸 벼슬로 알려진 대신을 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소년의 탈을 쓴 노인은 자신을 그 칭명으로 불러주길 소망했고 딱히 그런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생각한 시한을 포함한 모든 지인들은 그를 정승이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사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정승이라는 조선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이름을 쓰고 있으면서, 한복을 입고 상모를 쓴 소년이 영국 왕실에서나 쓸듯한 고급 다기 세트에 P&M 의 홍차를 즐기는 것은 턱시도에 고무신 신은 것만큼이나 어색했다.

마치 한복 위에 가면을 쓴 누군가처럼. 그런 시한의 시선을 눈치챈듯 정승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뭐냐 그 눈은?」

「아뇨. 그냥 한복을 입고 가면을 쓴채 지하철을 타는 말없고 수상한 사람과, 한옥에 살며 한복을 입고 곰방대로 담배를 피고 있으면서 영국식 홍차와...」

그때 문이 열렸다. 창호지로 덮힌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젊은 메이드였다. 고아한 얼굴에 상냥하고 잔잔한 미소를 띈 얼굴로 다가온 메이드는 시한을 향해 살짝 목례한뒤 과자를 담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시한은 말을 이었다.

「... 메이드를 부리며 정승이라 불리는 노인을 동류(同類)라 취급하는건 너무 무례한 생각일까요.」

사실 시한이 여자친구에게 한복에 가면 쓴 남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노인, 정확히는 노인의 탈을 쓴 소년을 찾아오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였다.

겉으로 보기엔 갓 중학교에 입학했을 것 같은 꼬마애가 한복을 입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시한은 제 2 과학혁명 이후 온 몸을 인공피부로 대체하던가 뇌이식을 받은 사람들도 만나봤기에 겉모습 따위는 그릇일뿐 그 안에 담긴 것에 대해선 쉽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물며 한복과 하대가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을 시한은 만나보지 못했다. 정승이라 불리는 소년은 지극히 노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겠군. 하지만 나는 그냥 고집쟁이 쇄국주의자 노인일 뿐이야. 백사병으로 세계가 멸망하건 조선왕조가 몰락했건, 내 직책은 바뀌지 않아. 그런 나였지만...」

정승 역시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메이드는 두 남자의 시선에 차분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를 황홀하다는 듯이 - 시한은 그 심정을 십분, 아니 반분이상 이해할 수 있었다. 눈 앞 있는 영국 왕실의 다기와 홍차 세트보다도 반짝이는 미소였으니까 - 바라보던 정승은 차분하게 말했다.

「... 내 쇄국정책은 메이드 앞에서 무너졌지.」

... 거참 한심한 쇄국정책이다. 시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지 벌써 130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정승이라 불리는 - 그러하길 바라는 - 이 노인의 나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집에서 봉사하는 두 명의 메이드와 한 명의 머슴과 한 명의 무사도 이 노인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한다.

「어쨌든 그 환상학파란 뭡니까?」

「글세. 굳이 얘기하자면... 그쪽 세계의 사람들을 우리는 <밤의 나라> 의 사람들이라 하는데... 으음. 적당한 예시가...」

정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 <마법사> 라는 것을 아는가?」

「마법사요? 멀린이나 해리포터 같은거 말입니까?」

「개인적으로 해리포터는 재미없었어. 하긴 그 작품도 20 년전인가? 굳이 예시를 들자면 마법사의 아들 코리를 들고 싶군.」

「... 반세기전의 만화책이잖아요.」

어떤 점에선 조선시대보다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모르나?」

「아뇨. 구영탄이 나오는 고행석 만화는 다 좋아합니다만...」

「환상학파란 바로 그런 사람들이야. 제 2 과학 혁명으로도 과학이 닿지 못한 신비에 서있는 사람들,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정령이라 부르기도 하고 월인이나 사기꾼, 요술쟁이와 꿈의 상인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지만 사실 정체는 알 수 없지. <상식의 극점> 에 달한 과학술사와는 달리 <상식의 초월> 에 이른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될까나?」

사실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이 시대를 거의 지배하다 시피하는, 과학술사보다도 굉장한 사람들이라는 것. 과학술사에서만큼은 시헌도 남부럽지 않게 알고 있었다.

시한의 아버지 역시 과학술사였으니까. 전자기계나 생화학기술 등으로 갖가지 <아이템>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건물을 폭파시키거나 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지만 개 중에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생체병기를 막아내고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짖는 과학술사들도 있다. 그래도 역시 과학술사도 친해져서 좋을게 없는 인물임을 생각해보면...

「별로 어울려서 좋은 인종은 아니군요.」

「그래. 인간을 실험체 취급하고, 재료로 사용하며, 지식욕만으로 해체하고 처리하는 과학술사에 비하면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수상 쩍다는건 그 이상이지.」

「정승께선 어떻게 그 놈들에 대해 아십니까?」

「누님이 환상학파였거든. 아니 정확히는 환상학파를 연구하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환상학파는 누구나 주위에 한 명쯤은 있어. 자네도 그럴걸.」

「제 주위에 그렇게 신기한 사람은 없는데요. 있다면 도망가고 싶습니다만 정체를 숨긴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군요.」

정승은 그 말에 웃으며 곰방대를 깊이 빨더니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었다. 송연 특유의 맑은 냄새가 방안에 퍼져나갔다.

「일단 그건 걱정할거 없어. 대여점에서 판타지 소설을 고를 때 제목만으로 <아 이건 읽는 순간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건 절대로 지뢰다.> 라는 적색신호랄까. 그런 느낌이 드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지? 그런걸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정승은 자신의 예시가 무척 만족스러운 듯 했지만 백사병 이후 대여점은 커녕 도서관, 서점조차 모조리 멸망한 이 시대에 그런 예시는 시한에게 잘 와닿지 않았다. 하긴 7 년전엔 만화책을 빌리러 대여점에 갔던 적은 있던 것 같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정승은 말을 이었다.

「외모 역시 구분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일세.」

「예? 설마 진짜 중절모 같은 장식 모자를 쓰고 로브를 걸친뒤 큼직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게 마법사들인가요? 가면 쓰고 한복 입고 다니면 환상학파인거고?」

「요즘 세상에 코스츔 플레이나 상품 홍보가 아닌 이상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겠나. 하지만 환상학파든 마법사든 어딘가 밤의 세계에 소속된 이라면 반드시 외모적 특성이 나타난다네. 매우 사소한 것에서라도 말야. 자네만해도 홀로그램 워치가 보편화된 이 시대에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지 않는가. 고풍스럽다기보다는 고루한 취미지.」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긴 하지만 시간을 확인할때마다 꺼내는 것도,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시한은 즉각 반론하지 않았다. 대신 약간의 예의라는 오블라트로 감싼 반론을 던져보았다.

「예를 들면 한복을 입고 곰방대로 담배를 피며 자신을 정승이라 불러달라는 소년이 아름다운 메이드와 함께 홍차를 즐기고 있다면 도망쳐야겠군요. 뭐, 그 정도면 고풍스럽다기보단 저풍스러운 거지만.」

「말솜씨는 이미 경지에 달했군. 다른 솜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승 역시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닌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외모적 특성이 나타난단 말이지. 내가 아는 환상학파만 해도 어디보자... 아 지금 시대적으로 가장 유명한 환상학파는 멘델 이로군. 자네도 뉴스나 신문으로 그의 핑크색 머리를 보았겠지? 염색이 아니라 진짜인 모양이야. 그리고 우리 누님만 해도 아예 메이드 복을 입고 다니고... 그 친구였던 환상의 물리학자 페트릭 양의 경우엔 아예 외모가 ‘없다’ 는군.」

「예?」

「투명인간이란 말일세.」

... 그것도 굉장하긴 하다. 하지만 그보다 정승의 누님이라는 사람이 더 신경 쓰인다. 정승의 누님이라면 상당한 고령일텐데 메이드복이라니, 아 외견은 이 눈앞의 소년과 마찬가지로 상식을 벗어나 있으려나. 그보다 이 늙은 남매가 나란히 메이드 매니아라니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람을,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한다는건 좀 나쁜거 아닌가요?」

「틀려. 외모란 표출화된 내면이네. 위장이나 속임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있지. 정서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물론 사람의 외모보단 내면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나?」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자네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냐. 그저 외모만으로 사람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며 독선, 잘못이지. 그렇지만 외모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는 스스로가 지는 것, 분홍머리로 태어난 멘델이 한 말이 있잖아. <내 머리는 분홍색이지만, 내 마음까지는 그리하지 않겠다.> 라고.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은 신경쓰지 않은 외모에 근사한 내면을 가지면 되는거야. 하지만 그 신경 써지지 않은 외모란 곧 <스스로의 외모에 무책임함><외적인 것에 대한 수고에 불성실함><외부의 시선에 몰지각한><타인의 평가에 가치를 두지 않는> 이라는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게 되는 셈이기도 해. 이해되나?」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납득은 얻을 수 있는 설명이었기에 시헌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참을 말하던 정승은 곰방대를 입에 물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뭐, 과학술사나 환상학파나... 둘 다 백사병으로 상처 받은 세계의 피해자일 뿐이지.」

시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승 역시 대답을 구했던 말은 아니었던 듯, 곰방대를 입에 문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노을이 번져가는 저녁 하늘이 창을 가득 채웠다. 그때 메이드는 마치 깃털이 움직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다가와 생긋 웃으다.

「두 분 다 잔이 비었네요. 홍차 더 드릴까요?」

「오오. 세라. 네가 주는 것이라면 양잿물도 마실수 있어.」

「주인님, 양잿물은 준비하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있었다면 따라줄 분위기다. 정승의 잔을 채워준 메이드, 언니쪽인 세라는 시한의 잔을 바라보았지만 시한은 손을 내저었다.

「저는 됐습니다. 그보다 동생분은 오늘 안보이던데 어디 나갔나요?」

「세이 말인가요? 예. 세이는 시한 씨 얼굴을 보면 입덧 할 것 같다고 장보러 갔답니다.」

... 어느 정도 미움을 사면 얼굴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구토감을 느낄 수 있는걸까. 시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드는 아쉬워하지 않으며 물러섰다. 이미 그녀의 ‘목적’ 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약간 어두워졌던 분위기는 그녀의 행동 하나로 말끔해졌다.

「그래서 자네 여자친구는 언제 오는건가? 정냉기에서 나온뒤 재활치료도 잘 마쳤다 들었는데.」

대화의 색이 바뀌었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저 세라라는 상냥한 메이드였다. 우수한 메이드란 다르구나 생각하며 시한은 대답했다.

「이미 학교에는 복학했습니다. 그럭저럭 친구도 사귀고 잘 지내는 것 같아요. 호적상 나이 때문에 친구들에게 <언니야> 라고 불리는 것 같지만 자신이나 아이들이나 별로 신경쓰진 않는 것 같습니다.」

「누가 학교 물었나. 내 집에 말일세.」

시한은 대답을 망설였다. 나이를 측정할 수 없는 쇄국주의자 겸 메이드매니아라는 이상한 노인네와 두 명의 미인 쌍둥이 메이드와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는 머슴과 취미란에 살인이라고 기입하는 무사가 있는 이 한옥에 그녀를 데려오기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뭐, 하지만 7 년만에 돌아온 세계에도 유려하게 적응해나가는 그녀라면 이런 기괴한 저택이라도 괜찮겠지. 오히려 재미있어 할지도 모른다.

「다음 주말즈음에 같이 차라도 한 잔 하도록 하지요.」

「좋군. 기대가 크네.」

시한은 살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말입니다. 정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확실히 제 주변에서 굉장한 ‘외모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있긴 있군요.」

「호오? 그게 누군가?」

어떻게 말해야할까. 어떻게 설명해도 굉장한, 경이로운, 대단한, 멋진, 엄청난, 놀라운, 황홀한 그녀만이 가지는 그 ‘기적’ 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시한은 적당한 은유나 비유를 생각하다 포기했다.

「제 여자친구입니다.」

* * *

정승댁에서 나온 시한은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 이 집의 정승은 물론 메이드들도, 머슴도 배웅은 해주지 않는다. 시한 자신도 필요가 없다 생각하기도 하고 밤은 정승댁이 바쁠 시간이다. 굳이 그 와중에 전송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명은 그런 시한을 전송해주었다.

「가는가.」

제법 높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한은 고개를 들어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벽 위에서 소매가 큰 적삼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흰색의 허리띠 옆에 찬 칼의 손잡이가 석양에 희미한 빛을 번득였다. 그러한 옷을 입은 한 명의 봉두난발의 남자가 시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가 너무 길어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시한은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슬슬 가지 않으면 어두워질 것 같아서요.」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어둠이 두렵나?」

「정확히는 여자친구가 슬슬 돌아올 시간이라서요. 그녀는 어둠을 무서워합니다.」

「나는 네가 두려워.」

「파랑씨,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 말과 함께 파랑이라는 남자는 허리춤에 있는 칼을 들어보였다. 뽑지는 않았지만 약간만 자극하면 바로 시한을 향해 칼부림이라도 할 것 같다. 팽팽해진 공기에, 시한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파랑이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보다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진심으로 죽었으면 좋겠어>.」

「... 뭐라고 대답해드리면 될지 모르겠네요.」

「대답할 필요는 없다. 세이 가 전해달라는 말이니까.」

약간 힘이 빠졌다. 하지만 약간일 뿐이다. 파랑의 왼손은 여전히 칼집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알고 있지?」

「예. 가능한 빠른 시일내로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질수 있도록 노력하죠.」

「그녀의 소망은 너다. 시한.」

바람이 불었다. 파랑의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지만 그 눈이 보이지 않아 표정을 알기 어려웠다.

「세이는 너를 좋아해.」

시한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그 침묵을 깨듯, 파랑이 빠르게 말했다.

「6 년, 6 년전 네가 이 저택에 출입하기 시작한때부터, 그 아이는 너를 좋아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예전에 잠깐 사귀었을 뿐, 7 년동안 헤어져있다가 다시 만난 그 여인... 아니 아직도 그녀는 ‘소녀’ 로군. 그 소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겠지만. 6 년간 너에게 호의를 주고 있던 한 여자의 심정을 너는 모르는건가.」

시한은 안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파랑을 향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별로 당신과 할만한 얘기는 아닌 듯 싶군요.」

「내 말에 대답해.」

「싫습니다.」

「도망치는가?」

시한은 고개를 돌렸다. 뻔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아니 억의 하나 세이가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해도, 내가 사랑할 사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6 년간 꾸준히 자네만을 생각한 여자의 마음을 쓰레기로 만든채, 8 년전에 몇 개월 사랑한 소녀를 선택하겠다고?」

「말이 심하군요 파랑씨. 비약도 싫지만 확실하지도 않은걸 확실하다는 듯이 말하는 화법도 싫어합니다. 억의 하나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해도 세이는 당신이 이런 말을 하길 바라지 않을겁니다.」

스릉- 섬뜩한 울림과 함께 검이 뽑혔다. 노을 속에서도 서슬 푸르게 빛나는 검이 시한을 향해졌다. 국어책을 읽는 것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로 파랑이 말했다.

「할까?」

「... 당신이라는 사람은...!」

「아니, ‘할까’ 가 아니지. 네 검은 최소 <3 분> 뒤에야 뽑힌다지? 컵라면 하나 삶을 시간 정도면 ‘벨까’ 라는 말이 어울리겠군. 너랑 싸우는건 2 년만인가.」

이 말은 진심이다. 시한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파랑은 2m 는 될듯한 벽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제법 높은 담벽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는 무릎을 굽히지도 않을 정도로 사뿐히 내려왔다.

하지만 검으로 시한을 겨눌뿐. 그 이상 다가서지 않았다. 시한은 최대한 긴장한채 안주머니에 있던 시계를 천천히 꺼내었다. 그렇지만 파랑은 여전히 공격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대치 속에서, 긴장감만큼이나 답답함이 일어난다. 그때 검을 겨누고 있던 파랑이 다시 검을 허리의 검집에 꽂았다. 약간 맥이 빠졌다.

「... 뭐하자는 겁니까.」

「고민하고 있다.」

「예?」 「이대로 너를 베어버리면 세이가 슬퍼할지. 아님 거절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기뻐할지. 고민하고 있다.」

모르겠어. 그렇게 말한 뒤 이번엔 파랑이 시한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도 고민이 없진 않겠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달라. 세이가 우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나에겐 그것이 옳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울 수 밖에 없는 일 뿐이야.」

파랑은 벽 앞으로 걸어간뒤 벽을 한 번 걷어차는 것만으로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여전히 시한을 바라보지 않은채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지만 너는, 그 아이가 울지 않을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겠지. 그런 선택을 바란다.」

내려왔을때와 마찬가지로 파랑은 벽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시한은 짧게 말했다.

「나에게도, 그런 것 정도는 있어요.」

들렸을지 안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시한은 아쉬워하지 않은채 정승댁에서 등을 돌리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인상 깊은 전송이었을 뿐이다 생각할 뿐이었다.

시한은 자신의 마음 속에 멋대로 담겨버린 파랑의 말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파랑의 살기와 세이의 마음이었지만. 항상 시한을 보면 짜증을 내고 구두를 걷어차곤 깔깔 웃으며 돌아가는 활기찬 메이드 아가씨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시한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어떻게 웃어도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주택가는 황혼속에서 고즈넉하게 약동하고 있었다. 길목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선로, 아무도 없는 거리는 백사병 이후 세계의 가장 흔한 모습이지만 어쩐지 묘한 생동감이 있었다. 시한은 그러한 주황빛이 가득찬 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금빛으로 일렁이는 햇살에 닿은 작을 돌, 유리 조각, 선로의 쇠부분이 은은한 빛을 내며 길을 빛나게 했다. 이런 시간에 이렇게 주택가를 걷고 있다보면 어쩐지 멸망한 세계를 혼자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한번 세상은 멸망할뻔 했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과거만큼 전력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밤이 되면 거리의 모든 불이 꺼진다. 가로등을 마지막으로 본건 교사시험을 볼 때 새 수도, 신서울에 갔을 때다. 구서울 외각의 이 작은 도시에 가로등은 돈을 어둠에 갖다버리는 사치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이 정도 시간이 되면 집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드물었고 - 기껏해야 주정뱅이와 도박꾼, 불량을 이탈로 착각하는 비행청소년, 그리고 밤이 되면 사람을 노리는 인간 사냥꾼 정도? - 때문에 시한은 마음에 드는 침묵, 마음에 드는 노을 속에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선생님?」

침묵은 급작스럽게 깨어졌다. 시한의 몸이 획 돌아가며 ‘시계’를 소리가 난 쪽으로 겨누었다. 긴장된 마음은 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바로 풀려버렸다. 그곳엔 갑자기 살의에 찬 뒤쫓아온 파랑도, 과학혁명 당시 실험체가 되었던 변종의 괴물도, 인간을 팔아치우는 인간사냥꾼도 아닌, 한 소녀가 서있었다.

그 소녀는 안경 안쪽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시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에 댕기머리를 한 그 소녀는 시계, 정확히는 워치폰이라 불리는 이 시대의 통신기기 겸 호신용 무기이기도 한 도구가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음에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달리 뛰어난 담력과 용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단지, 무지를 능가하고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순수였다.

 

 

(+)

 

 히로인이 등장하자마자 시전되는 적절한 끊기...

 

 부족한 작가의 1 주차 분량입니다.

 지금까지는 가능한 어렵지 않은 설명에 급급해 여엉- 분위기가 가라앉았는데 다음주부터는 히로인의 바보 지수가 좀 더 즐겁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주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iskave 님에 의해 2010.12.31 08:49 에 수정되었습니다.

태그
2 레이창  lv 2 50.6666666667% / 452 글 17 | 댓글 59  
『 음악은, 약간 불행한 편이 아름답다. 』
- 다이애나 로즈

2010 공모전 Season 1 [ 고속도로의 오아시스 ]
2010 공모전 Season 2 [ O.T.S ]


/겨달/『겨울 나라에서 온 소녀』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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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SB.K 12/31/09:44
잘 읽었습니다.
행여 작가분께 실례가 될지도 모를 말이지만, 여기까지 읽은 이로서의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단히 요상한 세계'라는 인상이 드네요.
어찌보면 전통적인데 또 다음 순간엔 무국적한 정취가 풍기기도 하는 것이 참 독특합니다.
작가분이 여러가지 코드를 한데 버무리는데 능숙하신 것 같네요.
다만, 이런 독특한 본작만의 분위기를 느끼기 까지는 진입장벽이 다소 높은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네요.
관심작 추가 해놓고 시간 날때마다 종종 찾아 오겠습니다.
라고만 남겨놓으면 너무 딱딱하니 본심을 조금 더 털어놓자며는,



저 천연안경소녀 완전 좋아합니다! 헠헠헠헠
2 레이창 01/03/10:17
실례라뇨. 고맙고 고맙고 고마우며 고마운 말씀인걸요.
대단히 요상한 세계라는 말은 퍽 낭만적인 말 같습니다만 제 세계관 설명이 독자의 납득 위에 서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해주신 것 같네요. 이런건 답글보다 글로 설명하는게 좋겠지만 간단한 첨언을 붙이자만...

백사병 이후 과학이 발전하긴 했지만 그것은 일변적인 부분이고, 전체적으로 인류의 반이 사멸한 뒤의 세계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마트나 편의점이 사라지고 오일장과 보부상이 등장하는등 시대의 쇠퇴가 주로 이루어지지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마법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한 과학이 있다는 점이 이 글의 주된 세계관입니다.

여튼 진입장벽 보다는 제가 너무 서툴게 시작을 잡은 것 같아요. 다음 화부터는 백사병 이후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시작하니 즐겁게 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0 12/31/10:37
오오 히로인 등장에 좋아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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