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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달/『겨울 나라에서 온 소녀』 by 레이창

<과학이 꾸는 꿈> 콜드 슬립이 인류 절멸의 위기 속에서 강행된 2020 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소녀가 마침내 눈을 떴다. 물론 생존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사연이다. 그 소녀가 콜드 슬립에 들어간 7 년간,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의 생일마다 꽃을 가져다준, 이제는 청년이 된 한 소년이 있었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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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나라에서 온 소녀 』 (2週) - 4 -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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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레이창[iskave]  
조회 1126    추천 1   덧글 2    / 2011.01.02 14:58:55


 시한이 보기에 희설은 제법 학교 생활에 적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선량하고 거짓이 서툰 아가씨였기에 누군가를 사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긍정적인 태도로 24 살이 된 자신을 인정하기로 한 것 같았다. 시한 앞에서 당당하게  「이제부턴 야한 거 볼때 19 세 인증 할 수 있는거지?」 말하곤 했으며 새로워진 세계와 제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야." 며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받아들였다.
 게다가 7 년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녀의 주변엔 늘 다양한 여자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충분히 기쁜 일이었지만 시한의 입장으로선 7 년전의 과거를 가지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떠드는 것은 퍽 곤란한 일이었다.
  「그, 그럼 언니야 남친, 그러니까 국어선생님은 메이드를 좋아하는거야?」
  「아마 그럴걸. 축제 때 메이드 복을 입으니까 <미안 희설,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어.> 라고 말했거든.」
  「우와 닭살 돋아. 국어선생님 그렇게 안봤는데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 그때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메이드 복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그 말을 메이드 복 때문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희설 역시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제는 제법 학교 생활에 적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의 친구들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물론 가끔씩 느껴지는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은 아직도 대화 도중 섬뜩섬뜩해, 말을 꺼낼때마다 늘 긴장하게 되는 느낌을 주었다. 기억의 중간중간이 콜드 슬립의 후유증 탓에 끊겨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연예인이나 유행하는 이야기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 기준으로 7 년전 이야기라면 자신있게 할 수 있었다. 7 년전 선풍적이었던 영화나 상품, 그리고 다들 알고 있는 그녀의 남자친구 시한에 대한 얘기 같은 것을 얘기하면 신기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말은 잘 못하지만 열심히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반장이 되었을 때, 시한이 부반장이 되주었어. 사실 대충 봐도 내가 딱 부러지게 반장할 타입은 안되잖아 하하.」
  「응! 언니야는 너무 맹해서 휘둘릴 것 같아. 애들끼리 산만해지면 어쩔 줄 몰라할 타입?」
  「기집애야. 이럴땐 <언니야는 너무 착해서> 라고 말해주는거야.」
  「... 저기 그 말이 더 상처입거든? 어쨌든 덕분에 반장 하는게 어렵지는 않았어. 내가 우유부단해도 시한이 탁탁 결정할 수 있게 도와줬거든. 나에게는 상냥한데 애들에게는 막무가내라 별명이 진시한제 였어.」
  「뭐?! 아하하! 진시한제라니 어울린다! 지금은 그래도 좀 부드러운데 당시엔 엄청 위압적이었나보네 국어샘?」
  「위압적일 정도는 아니라도... 위엄은 있었지. 그 위엄도 축제때 다 까먹었지만.」
 시한 역시 사정을 알고는  「부디, 적당한 선은 지켜주길 바래.」 라고 말했지만 희설은 그 적당한 선을 정하기 어려웠다.
  「축제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 축제때 시한이가 여장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었다는 얘기 안해주었던가?
  「에에에에!」
 덕분에 그 날부터 시한은 수업에 들어갈때마다 여자애들에게 <선생님 여장하는거 보여주세요> 재촉을 받아야했다고 한다.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말은 그렇게해도, 시한도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학교의 여자아이들도 시한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기에 시한을 좋아하는만큼 희설을 싫어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한이 인기절정의 교사였다면 조금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딱딱하고 유약해보이며 기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남자는 이 시대의 여자 아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학교에 있을때는 딱딱해보며 챙겨줄 것은 확실하게 챙겨준다는 인상이었기에 남녀를 통틀어 인기가 많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가장 많이 불어보는 질문은 이런 질문이었다.
 “언니야, 그래서 국어선생님이랑 했어? 안했어?”
 이 시대의 여자아이들은 예의라는 속박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무례로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을 솔직함으로 바꿀 수 있는 천진함이랄지 아닌 시대 자체의 분위기가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향해 쏠려있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에 희설은 조금 고민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 안해.”
 뭐야아~ 여자 애들의 아쉬운 비명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그런 희설에 주목한 것은 교실의 친구들보다, <구문명 연구회> 라는 정체불명의 동아리였다. 학생수도 적고 시대적으로 여유가 없어 동아리 활동이라 할만한게 극히 적은 상황이었지만 이 동아리만큼은 무척 활발했다. 사실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상냥한 학급 동생들, 급우들이나 시한이 아니라 동아리 활동이었다. 친구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교실문이 열리며 옆반의 루미가 찾아왔다. 그녀는 희설과 같은 구문명 연구회 회원이었다.
  「언니야! 오늘 수업 끝나면 부실로 와!」
  「응? 오늘 무슨 일 있어?」
  「하영이가 굉장한 보물을 발견했어!」
 입학하자마자 루미와 하영에게 이끌려 찾아간 특별활동 부서가 바로 <구문명 연구회> 였다. 뭔가 고고학적인 느낌이 강해 역사를 좋아하지만 거부감에 가까운 위엄 탓에 들어가기 어려워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위엄은 조금도 없었다.
  「열혈강호 1 권부터 68 권까지래!」
  「... 헤에.」
  「그럼 이만!」
 루미는 그 말만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미래로 오니 이건 좋구나. 예전에 보던 책들의 다음권들이 계속 나오다니. 한승희 씨의 춘앵전이나 김민희 씨의 강특고 아이들은 완결 났으려나. 아 웹툰이던 크레이지 커피캣과 열아홉스물하나도 보고 싶다. 그리고 7 년 사이에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하지만 인터넷도 거의 끊어진 상황이니 확인하기 어렵겠지.
 사실, 백사병탓에 세계 문명이 모조리 끝장날뻔한 상황 속에서도 창작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올랐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던걸까. 희설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과후를 기대할 수 있었다. 어차피 수업이 끝나도 시한이 퇴근하는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좀 더 즐거워질 것 같다.
 즐거워?
 스스로의 생각에, 희설은 멈칫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해도, 그치만, 즉 하지만 어쩐지 이상해.
 7 년전이랑 똑같은 학교, 똑같은 교복이지만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때의 클래스 메이트는 단 한 명, 남자친구인 시한만 남아있지만 그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다. 어쩐지 자기 자신이 어떤 가공의 세계의 등장인물이 되고 그것을 애드립으로 연기하고 있는 기분마저 느꼈다. 희설은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희설이 복학한 7 년에 입학했던 명월 고등학교는 구서울 외각 중에서도 극동이라 할만한 강동구 끝에 위치해있었다. 콜드 슬립되기 이전부터 다녔던 학교였지만, 7 년 사이에 학교도 약간 바뀌었다.
 일단 학생수가 1/4 로 줄어들었다. 800 명 정도 되던 전교생은 이제 고작해야 200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학년당 두 개 반 정도만 유지될 뿐으로, 교사 역시 많지 않았다. 24 살인 시한이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백사병이 없었다면 갓 군대에 다녀온 대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자신과 시한은 그럭저럭 괜찮은 연인으로 보일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긴, 이젠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지. 희설은 자신의 생각을 일축했다. 어차피 백사병이 아니었다면 이런 ‘격차’ 따위,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현재 멘델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희설을 찾아오곤 했다.
 희설의 선배라고나 할까. 콜드 슬립후 유일한 복귀 경험자였던 유재희는 그녀의 재활 도중 병실에 찾아와 희설의 상태를 점검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곤 했다.
  「나도 너처럼, 7 년뒤의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 시대에 뒤쳐져버린 느낌이 들어서 답답했어.」
 아무도 서태지를 모르더라고. 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무척 담담했지만 희설 역시 서태지를 몰랐기에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중요한 것은 어떠한 세계에 처하건,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아는거야. 나도 호적 나이는 서른한살에 실제 나이는 24 살인 풋내기 처녀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세상이 너를 두고 조금 앞에 서버리긴 했지만, 그 정도야 뭐 어때? 그리고, 이 세상도 제법 재미있거든. 너도 알게 될꺼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하얀 코트를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세상이, 너에게 상냥할 수 있길 바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다른 사람은 흉내도 할 수 없는 당당하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희설의 병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병실의 문을 닫기 직전, 살짝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될꺼야.」
  「앗. 언니야. 다시 만났네.」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희설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자홍색의 명월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녀가 뒤에 있었다. 모자를 쓰고 모자 뒷부분으로 뒷머리를 틀어올린 소녀는 볼에 반창고를 긁적거리며 웃고 있었다.
  「루미?」
  「욥. 점심시간인데 여기서 뭐해? 밥 먹으러 가는거야?」
  「밥은 먹었어. 생각난게 있어서 본관 쪽에 가볼까 해서.」
 그렇게 말하며 희설과 루미는 본관쪽을 바라보았다. 구관이라 불리는 본관은 너무 낙후되었고 폭파에 견디느라 붕괴 위험이 있다고 해서 출입이 금지되었고 어차피 학생수도 적기에 명월 고등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별관에서만 수업하고 있었다. 
  「본관에? 저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곳에 말야? 언니야 내 생각인데 생명은 무척 소중한거라 생각해.」
  「자살하려는거 아니거든? 그냥 1 년전에... 아니 7 년전에 내가 수업 받던 곳이니까. 내 물건이 좀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서.」
  「헤에? 그래서 저길 들어가려고. 우와- 언니야 이미지는 낡아빠진 도서실 같은 곳에서 시집이나 보며 티백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고 있으면 딱일 것 같은 이미지인데 의외로 용기있네.」
 티백 커피 하나 때문에 묘하게 싸보이는 이미지다. 희설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 년전, 아니 혹시 7 년전에 썼던 일기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야.」
  「아아. 언니 기억이 좀 불완전하다고 했지. 헤에. 고생한다.」
 그 말대로 였다. 사실 타임캡슐을 찾아볼까 싶었지만, 아직 어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은 당시의 기억이 남아있는 일기장을 찾아보고 싶었다. 사실 일기장을 쓰긴 썼다는 기억과 썼던 장면은 기억하는데 정말 일기의 내용은 기억이 안나서 궁금하기도 했지만.
  「백사병 이후 저 건물은 전혀 쓰지 않았다며?」
  「음. 나야 백사병 파동 당시 초등학생이었으니 잘 모르지만 아마 맞을걸. 선배의 선배들조차 본관 건물은 써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아 백사병 파동때 반정부 레지스탕스 건물로 쓰였고 그때 전투의 여파로 붕괴 위험이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 했다니 아마 내부는 그대로 아닐까?」
 조사한 대로였다. 희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히 무서운 경험만 하고 헛수고가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근데 왜 혼자가? 위험할지 모르니까 나중에 나나 희선이랑 같이 가지? 아니면 언니야 ‘남친’을 부르면 되잖아. 우와 남친 있는 사람은 좋겠다~」
  「으응. 됐어. 그냥 내 물건 찾아오는 일인걸. 시한... 아니 국어선생님이 들으면 분명 걱정할꺼야. 게다가 어제... 아 맞다! 루미 너! 어제 말한거 죄다 뻥이었지!」
  「에? 뭐? 언니에게 한 뻥이 너무 많아서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진짜! 어제 국어선생님에게 절구통이랑 생명창조에 대해 물어봤다가 대답을 안해주길래 여동생에게 물어봤단 말야! 나중에 얼마나 민망했는 줄 알아!」
 바로 이 일 때문에 당장 시한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부끄러워서 어제 베개를 물어뜯고 비명을 지르느라 잠을 못 잤다. 막상 잠들어도 자다가 하이킥을 날릴 정도였다. 루미 역시 기겁하며 그대로 놀라운 웃음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물었다.
  「지, 지, 진짜야?! 어제 국어선생님에게 언니야가 <내 안의 절구통에...>」
  「더, 더 이상 말하지마 이것아!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냐고! 너 때문에 당분간 국어선생님 얼굴 볼 자신이 없단 말야!」
  「뭐 당장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국어시간인데.」
  「싫어어어!」
 수업 시간에 자는 척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내가 희설을 편애한다는 느낌을 주면 안돼.> 라고 생각할게 뻔한 시한이 거침없이 깨우려고 할 것이다. 관심 좀 꺼주세요 라는 시위는 반대로 적극적인 관심 어필이 될 것이 눈에 뻔했기에  「백사병이 재발한 것 같아요. 조퇴할래요.」 라고 말하고 조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원체 거짓말을 못하는 희설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참을 낄낄 대던 루미는 눈물까지 닦더니 그제야 미안한 듯 - 그래봤자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 희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사과했다.
  「미안... 크크크. 미, 미안해. 까짓꺼 신경 쓰지마. 설령 언니가 <선생님, 오늘은 저 선생님에게 훈민정음보다는 성교육을 받고 싶어요.> 라고 달라붙어도 국어선생님은 언니에게 손대지 않을걸. 그 사람 은근히 쑥맥이니까.」
 대꾸할 말은 없었다. 그 사실에 대해선 이 학생들보다 여자친구인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7 년전 시한이 자신에게 고백했을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엄청 남자다워진 셈이다.
  「여튼 조심해. 아님 방과후에 나랑 같이 가던가.」
  「아냐. 괜찮아. 방과후엔 열혈강호 보러 가야지. 후후.」
  「흐음, 그럼.」
 그렇게 말하며 루미는 자신의 팔목에 있던 워치 폰을 건네주었다.
  「이건...」
  「혹시 위험해지거나 안좋은 상황에 처하면 그걸로 연락해. 단축 번호 2 번은 엄마, 3 번은 우리집, 4 번은 하영이고 6 번은 재준 선배야. 담임, 아 그러니까 언니 남친은 10 번일걸.」
  「헤에. 그렇구나. 1 번은 아버지야? 어 혹시 네 남친~?」
 장난스런 희설의 질문에 루미는 난처하게 웃었다.
  「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돈이 별로 없어서 천국으로 걸려면 수신자 부담으로 해야 할걸.」
 희설의 웃음이 지워져버렸다. 그 얼굴을 보며 루미는 희설의 볼을 쿡 찔렀다.
  「거봐.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반엔 편부, 편모, 혹은 부모 없는 애들도 제법 있으니까 그럴때마다 그런 표정 짓지마. 언니의 상냥한 마음탓에 나타나는 그런 표정이 <아 나 정말 불쌍한 애구나> 라고 생각하게 한다고.」
  「그, 그래? 미안해.」
  「미안해하지도 말라니까~ 하여간 언니야도 참 재미있다.」
  「에에. 그럼 5 번은 왜 비워뒀어?」
 일부러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물어봤지만 물어봐놓고 희설은 불안해졌다. 갑자기 루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 아이는 좋은 아이였어...」 라는 말을 할까봐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루미는 씁쓸함 따위는 0.1% 도 느껴지지 않는 상큼한 웃음으로 희설의 말에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언니야 자리지.」
  「... 뭐?」
  「언니 워치폰 사면 바로 등록할려고 비워놨어. 주민등록 완료 되면 바로 폰사고 번호 알려줘야해?」
 가슴이 뭉클했다. 콜드 슬립 이후 주민등록을 다시 해야했던 - 호적상 나이가 19 세가 지났으니까 - 희설은 아직 적당한 신분증명 방법이 없기에 처리가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정부만으로는 더 이상 신원증명이 안되는 시기였기에 이 고등학교 학생과 보증인으로 시한이 서서야 간신히 서류를 제출 할 수 있었지만 아직 워치폰은 도착하지 않았다.
  「... 나는 루미 이름을 1 번에 둘게.」
  「아 그건 좀 부담스럽네. 언니야 동생언니나 2 반의 순둥이로 해줘 거긴. 2 반 순둥이가 언니야 사촌동생 맞지?」
  「윤서? 응.」
  「사촌동생이랑 동급생이면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 아 0 번은 국어샘인거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루미는 키득 거리며 워치폰 사용방법 몇 가지를 가르쳐주곤 자기 일을 하러 갔다. 같이 가주진 못했지만, 시계를 받은것만으로 굉장히 힘이 났다.
 그래. 기억 따위 없으면 어때. 지금부터 더 좋은 기억으로 채워나가면 되지. 그냥 가지 말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마음을 헛되이 하고 싶진 않았다.
 시대는 변했어도, 사람의 따스함은 그대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희설은 본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대는 변했어도, 사람의 음흉함은 그대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한은 교무실에서 발길질을 날렸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파란 체육복을 입은 남자가 책상 위를 날라갔다. 무슨 만화책의 한 장면처럼 책상위를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고 책상에 부딪치며 책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져있던 화분이 체육복을 입은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당장 발길질보다 일류 스턴트맨도 기겁할만한 슬립스틱 묘기를 선보인 탓에 체육복을 남자는 입가로 걸죽한 침을 흘렸다. 어쩐지 코믹 해야할 모습인데 지나치게 다이나믹했던 움직임 탓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시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한은 그 교사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호선생님?」
 그 모습을 보며 뒤에 있던 여교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기요 진선생님. 누가 보면 다른 사람에 때려눞힌 줄 알겠어요.」
 의외로 가차없다. 부정할 맘도, 부정할 생각도 없던 시한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 호선생이라 불리던 남자 교사가 벌떡 일어났다. 목에서 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렬한 돌려차기를 맞고 2m 쯤 날아가 쓰러졌음에도 팔팔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체육 선생은 다르구나.
  「역시 내 라이벌 진선생... 좋은 펀치입니다.」
  「... 킥인데요.」
 과연 체육 선생은 다르구나. 다시 한번 그 생각을 한 시한은 마음 속으로 전세계 모든 체육 선생님들에게 사과했다.
  「오늘은 또 왜 달려든 겁니까?」
 어제의 파랑도 그렇고... 왜 나에겐 이렇게 덤벼드는 남자가 많은거지? 시한은 늘 그것이 고민이었다. 7 년전부터 그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왜?! 왜라니?! 지금 왜라는 말이 나오십니까?! 조선시대때 일본을 호칭하던 그 왜인가요?! 아니면 어째서, 어찌하여, 무슨 까닭으로를 의미하는 왜인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만.」
  「오 신이여. 이 남자는 왜 이리 잔인할 정도로 멍청한걸까요. 생각이라는게 정말 있는걸까요? 당신의 머리안에 두뇌피질이라는게 정말 있는건지, 아니 있다한들 주름이 있긴 한건지, 상식이나 지식이라는게 정말 존재하는건지, 머리에 노크를 해서 물어보고 싶네요. 계세요오?!」
  「...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하키채를 들고 달려든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습니다만.」
  「젠장! 이건 내 분노의 발현일 뿐입니다. 발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금 제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모르시겠죠? 시한 선생님은 다 안좋은데 그게 특히 안좋아요!」
 아침부터 하키채를 든 남자에게 습격당하고 그 남자에게 설교당하는 제 심정도 어떤지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시한의 심정엔 눈꼽만큼도 관심없던 호선생은 거의 웅변하듯 말했다.
 「예를 들어보죠. 당신이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성에 관심이 많은 외로운 여대생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길드원이 있었죠. 같이 공대도 돌아주고 아이템도 지원해주고 사냥도 다니고 이벤트도 챙겨주었는데 사실은 남자! 그것도 중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일까요?! 모르시겠죠?! 모르실꺼야! 진 선생님처럼 여고생 애인이 있는 사람은 모르겠죠!」
 시한은 예시를 들으니 오히려 더욱 알 수 없어질수도 있다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마지막 말만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 가능하면 평생 알고 싶지 않군요.」
  「우와 잔인해! 정말 너무하군요! 당신은 쓰레기야! 아 그래도 부럽다. 아아 부럽다! 너무너무 부럽다! 이제 진 선생님은 그 안경 소녀를 서서히 자신의 취향대로 육성해나가겠죠. 그 학생의 얼굴은 마법학교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안경탓에 가려져있지만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저만은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의안에 있는 칩은 여성을 보는 순간 그 여성의 쓰리사이즈와 체지방량을 분석해낼 수 있거든요!」
 거 참 혐오스런 능력이다. 과학의 발전이 미용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에는 동감하지만 그에 맞춰서 남자의 음흉함도 발전한다. 보안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해커들의 능력도 강해지는 것과 같은 딜레마랄까.
 그보다 슬슬 질리는데 이 사람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시헌은 만약 악마가 자신에게 나타나서 이 남자를 치워줄 수 있다면 영혼의 5% 정도는 거래해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외모에 대해선 아직 평가보류입니다만 그 중에서 희설양의 몸매는 정말 발군이란 말입니다! 콜드 슬립에는 몸매 개선 효과까지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럽더군요. 비율과 균형도 좋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게다가 아직도 성장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졸업할 무렵엔 대략 팔...」
  「호 선생님.」
 시한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눈빛으로 호 선생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에 호선생은 자신이 콜드 슬립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까 걷어찬 것 사과하기 싫어지기 전에.」
  「... 결론을 요약하자면 진 선생님만은 <애인 없음 동지.> 일 줄 알았는데 배신 당해서 억울하다는 겁니다.」
  「... 사과하겠습니다. 두 가지 모두.」
 그렇게 말하며 시한은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호선생은 옆에 있던 여선생에게 울먹이는 어조로  「제가 나쁜건가요?」 라고 물어봤고 여선생은 상냥하게 웃으며  「호선생님이 나쁜게 아니에요. 나쁜게 호선생님이에요.」 라며 약간 이상한 위로를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시한은 갑갑했다. 이번에 복학한 그 멋진 몸매를 가진 여학생, 희설이 고등학생 무렵의 연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학교에 말하기 싫었던 이유는 사실 희설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상한걸까. 나이만 24 살일 뿐, 생각이나 마음은 여전히 17 살 소녀인 여학생을 사랑하는 24 살의 청년 교사는, 역시 이상한걸까? 물론 호선생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불평불만 많고 생각 없는 말을 많이 하는 남자지만 누구에게나 진실할 수 있는 남자다. 생각 많고 사람의 말을 통해 사람의 역량을 재는 구석이 있는 시한으로선 부러울 뿐인 남자다. 그러한 남자의 말이기에, 어쩐지 힘든 구석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호선생 정도면 사실 힘들 뿐,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언젠가 지금의 두 사람을 아프게 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시한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의 마음조차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시한은 어느새 자신이 옥상에 서있음을 깨달았다. 답답하면 옥상부터 찾는 버릇은, 사실 이 학교에 입학했던 7 년전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성장하지 못한걸까. 나도 참...」


 

* * *

 

 죄송합니다;

 어쩐지 좀 짧다 싶더니 중간 부분을 뭉텅 잘랐네요.

 다시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iskave 님에 의해 2011.01.03 05:24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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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이창  lv 2 50.6666666667% / 452 글 17 | 댓글 59  
『 음악은, 약간 불행한 편이 아름답다. 』
- 다이애나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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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재하 01/03/11:51
와~ 진짜 정신없이 봤네요. 절제되면서도 잔잔한 느낌이 평화로워서 좋아보여요. 그러면서도 톡톡 터지는 웃음이 참 즐거운 글이네요. 다음편 기대할께요~ 추천꾹
2 레이창 01/03/05:25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정말 기쁘네요. 근데 중간에 약간 빼먹은 부분이 있었는데 어색하지 않게 읽혀진것 같아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답글과 추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도 읽어주세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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