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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SB.K[eva0083]
조회 1257    추천 1   덧글 7    / 2011.01.14 08:58:00

3월의 셋째 주. 야속할 정도로 화창한 일요일.

나는 지금 다소 복잡한 기분을 안은 채 정든 마을 아파트 단지에 와 있다. 신시가지 개발 당시 처음으로 지어졌다는 고급 아파트. 으리으리한 1층 현관에 서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미리 전해들은 호수의 번호를 입력하고 호출을 누른다. 잠시 후, 오늘의 날씨를 닮은 맑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민아! 지금 열어줄게, 어서 들어와.”

자동문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타고 27층의 버튼을 누른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중간과정 생략하고 애칭으로 불렸으니, 이제 다음은 중간과정 생략하고 바로 집으로 초대된다는 수순인가.

약속된 밥 한 끼. 어째서 그때 하필이면 집에서란 단서를 붙였던 걸까.

창고를 붙인 뺨이 간지럽다. 금요일 밤의 대결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 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한심하게도 불구경 중에 얻은 긁힌 상처에 불과하다. 지나가던 새우의 등이 터졌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답답함이 한동안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루나에게 항의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역시 생겨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나약한 감정을 가지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암세포처럼 온몸에 퍼져나가며…….

아니, 정신 차려야지.

양손으로 뺨을 친다. 나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진다.

내가 주저앉아 있다고 세상 역시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력한 패배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막상막하의 대결이었다. 그런 지금의 상황이기에 오히려 나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거울처럼 반들반들한 엘리베이터 벽을 보며 마지막으로 복장과 외모를 점검한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지만 문제없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글보다도 먼저 연기, 라기 보다 사람 속이는 것을 교육 받아왔다. 숨 쉬기보다도 연기가 쉬운 삐뚤어진 인간에게 매너 있는 동급생을 연기하는 것이 어려울 리가 없다.

슬슬 가보자. 나만의 초라한 전장으로.

안녕, 민아! 어서와.”

호화 주택이 부럽지 않은 실내에 들어서자 현관 앞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미리가 나를 반겨온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아이다.

찾아오느라 힘들지 않았어?”

아니, 그려준 약도대로 찾아오니까 금방이던데 뭘.”

거짓말이다. 그건 약도라기 보단, 피카소가 울고 갈만한 초현실적 낙서에 가까웠다. 이 초인 여자 사상 최초의 결점 발견.

다행이라며 안심하는 그녀를 따라 거실로 향한다. 연분홍 빛 에이프런이 활기찬 걸음걸이에 맞춰 흔들린다. 티셔츠와 청바지라는 수수한 차림새가 모델 같은 그녀의 몸매 덕분에 도리어 여성스러움을 부각시킨다. 내심 살짝 기대했던 스커트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데이트도 아니고 집에서 불편하게 짧은 스커트 같은걸 입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여자라고 부르기엔 뭣하지만, 어머님과 함께 생활했던 나도 그 생태는 잘 알고 있다.

배고프지? 지금 거의 다 끝나가거든? 그러니까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줘.”

으응, 천천히 해.”

고민 끝에 선물은 가지고 오지 않기로 했다. 흔히들 하는 케이크 같은 단 과자류를 생각해 보았지만 케이크 가게의 딸에게 전해 주기로는 당연히 실격이다. 다음 후보는 꽃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버라는 판단 하에 보류했다. 어차피 그녀가 방문 선물의 유무로 반응이 달라질 성격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으니까.

급히 주방으로 달려가 버린 미리를 바라보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나가 거의 침대용도로 점령하고 있는 비밀기지의 소파와는 차원이 다른 안락함이 온몸을 감싼다. 이미 부모님이 각자의 가게일로 집에 없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으니 별로 눈치 볼만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바야흐로 지금 이 집에는 나와 그녀, 단 둘밖에 없다는 얘기…….

꺄웅.”

?”

는 아니고, 아무래도 거기에다 한 마리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고개를 돌려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푹신한 소파위에서 수건 같은 것에 둘둘 말린 채 한창 낮잠을 즐기던 중, 나 때문에 깬 모양이다. 손바닥 두 뼘 남짓의 작은 강아지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눈망울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길고 부드러운 갈색 털이 파르르 떨린다. 서양 어딘가의 희귀종인가? 적어도 난 처음 보는 종류다.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던 강아지는 이윽고 자신의 침대를 침략해 온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향해 힘껏 적개심을 드러내 보였다.

왕왕!”

멍멍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애다. 나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애완동물 유경험자라서 말이지.

온몸으로 자신이 화나 있음을 주장하는 녀석을 향해 천천히 오른손을 내민다. 녀석은 털을 곤두세우며 냄새를 맡다가 이내 나의 손가락을 깨물어 버린다. 어지간히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별로 아프진 않다. 야생에서 자라본 적이 없으니 먹이를 무는 이빨에도 일격 필살의 독기가 빠져있다. 재빨리 왼손을 움직여 등부터 엉덩이까지를 쓰다듬어 준다. 뜻밖의 공격에 놀란 녀석이 물고 있던 손가락을 놓고 자신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사이,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목 뒷부분을 간질여주자.

!”

당황해서 발버둥 치는 갈색 강아지. 하지만 목 부위를 허락해버리고 만 이상 승부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의 민감한 감각 신경이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듯, 강아지 역시 목덜미 아래쪽이나 배 부근이 약점이다. 아니, 극락 행 특급열차라고 해야 할까. 목덜미에 이어서 발버둥 치느라 드러나 버리고 만 배 부분까지 리듬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세심하게 쓰다듬어 준다.

곧 미리네 집 강아지는 나의 치명적인 손놀림에 녹아들고 말았다. 아주 조금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심을 긁어모아 !’하고 애써 반항해 보지만 이미 꼬리는 살랑살랑이다.

그래, 그래. 착하지.”

유년기의 성격 파탄을 막기 위해 정서 함양 차원에서 들여온 강아지를 한참이나 내 손으로 키워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아마 어머님이 내게 해준 첫 선물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목을 쓰다듬고 있다 보니 강아지가 걸고 있는 개목걸이에 시선이 갔다. 마름모꼴의 붉은 색 보석 같은 것이 박힌 목걸이다. 어린 강아지가 걸고 있기엔 조금 긴 게 아닐까? 그야 주인이 알아서 할일이긴 하지만.

, 셀레스!”

그렇게, 한동안 강아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던 내게 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손이 잠시 멈춤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감각에 몸을 맞기고 있던 녀석이 이내 정신을 차린다. 셀레스라고 불린 강아지는 주인, 미리를 발견하고선 재빨리 그녀의 다리 뒤로 도망쳐 버렸다. 다리 뒤에 숨어 나를 노려보는 얼굴에는 왠지 인간 비스므리한 분노와 수치심이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재미있다.

미안, 민아. 얘를 방에다 들여놓는다는 걸 깜빡했어. 혹시 물거나 하지 않았어?”

전혀. 아주 착한 아이네.”

네 주인이 가진 인성의 발끝만큼이라도 닮기를 바란다, 멍멍아. 개가 인성을 닮아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간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강아지를 안아 방으로 데려다 놓으려 하는 미리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종이 뭐야?”

, 나도 잘 모르겠어. 엄마가 사오신거라서.”

흐음.

아니, 기분 탓이겠지.

미리가 강아지와 함께 퇴장하고 나자, 이제는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거실에 앉아 시간을 죽인다.

요즘 한동안 폐휴지함 같은 열 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지낸 탓인가, 이 집의 거실이 활주로처럼 보인다. 거기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기까지 한 게 아주 부럽다. 어쩌면 나의 최고 중요 임무일지 모를 비밀기지 청소를 떠올려 본다. 부하가 치우면 상사가 어지르고, 부하가 치우면 상사 어지르고. 여기서 추임새라도 넣어줘야 하나. 흥이 절로 난다. 청소하는 보람이 있다.

어두운 현실을 자각하던 중에 미리의 호출을 받고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밥 한 끼를 청하기 전에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새삼 학교 식당에서 미리가 해치웠던 양이 떠오른다. 그때도 아마 식당 아주머니에게 부탁한 특특 곱빼기였던가.

의기양양하게 에이프런을 벗어던진 미리가 주지육림 파티의 개막을 알려왔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산해진미가 산과같이. 어디 지방 식당의 현수막에 걸릴법한 글귀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퍼펙트한 여고생이 사실은 요리치.’ 같은 의외성 이벤트도 없었다. 조리사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온 듯, 성실하게 맛있는 요리가 적절하게 입을 즐겁게 한다. 다만 그 압도적인 물량에 시각적으로 지칠 따름이었다.

너무 빨리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완급조절에 신경 쓴다. 학교 식당에서 했던 것처럼 대화의 꽃을 피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음식들이 어딘가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블랙홀 큐티클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만,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처음 가보는 여자아이의 방에 대한 환상이 아닌 아파트인데 계단을 오르는 경험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복층 아파트다. 그러니까 아래층의 활주로 같은 거실이 위층에도 똑같이 펼쳐져 있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불법 개조이긴 하지만, 한때 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필수였다나 뭐라나 하는 전설을 들어본 적이 있다.

2층인지 28층인지 헷갈리는 미리의 방에 안내 받고 나자 그녀는 곧바로 나가버렸다. 차와 케이크를 내오겠다는 듯하다.

방석에 앉아 가볍게 둘러본 미리의 방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수수하다기 보다는 정갈하다고 해야 할까. 또래 여자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아이돌 가수의 포스터나 닭살 돋는 쿠션 혹은 인형 같은 것들. 그런 여고생용 아이템이 일절 없었다. 어찌 보면 결벽증이 있는 여성 회사원의 방 같기도 하다.

기억해 뒀다가 어딘가에 사는 진짜 여성 회사원에게 반성을 촉구할 때 써먹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작스레 문 밖에서 누군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가 벌써 돌아온 걸까? 아니, 애초에 차와 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뛰어 다닐 수는 없을 텐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나나 그녀 말고 이 집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든 나는 문 앞으로 다가서서 신중하게 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것은.

민아? 왜 일어나 있어? 화장실 가고 싶니?”

양손 가득, 다과 담긴 쟁반을 들고 서있는 미리였다.

아니. 왠지 밖에서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대답이 조금 궁색하다.

. 내 발소리가 조금 요란 했나봐.”

미리 역시 아하하 하고 궁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적.

궁색하고, 또 어색하다.

이것도 기분 탓인가?

마주보고 서서 볼을 긁으며 어색한 웃음을 교환해주려던 내게, 난데없이 미리가 소리를 질렀다.

민아! , 다쳤니?”

어어?”

아니, 안 다쳤는데. 라고 말해주려다 보니 문득 볼에 붙인 반창고가 생각났다. 상처가 간지러워서 그런지 무의식중에 자꾸 긁게 되나보다. 만져보니 반쯤 떨어져 나가있었다.

그런 나도 나지만, 밥 먹을 때부터 얼굴 마주한 채 한참이나 같이 있었으면서 이제야 그걸 보고선 수선떨고 있는 미리도 참. 눈썰미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괜찮아!?”

과도하게 놀란 미리가 상체를 기울여 온다. 평소라면 환영이지만. 아니, 평소라도 문제 있지만, 지금처럼 뜨거운 물 가득한 티포트를 들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이 위험한 행동이다.

뒷걸음질 치며 기울어지는 쟁반을 맞들려고 하는 나와, 상처를 보기위해 고개를 내미는 미리의 긴 다리가 얽혀 일촉즉발의 위기가 연출된다. 넘어지겠다.

나는 이런 육체적 반사 신경을 요하는 돌발 상황에 정말로 취약하다.

다음 순간.

.”

화상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바보 같은 신음소리 마저 흘리고 만 내게 쏟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등 뒤로 가냘프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건 왠지 여자 아이의 팔 같은데.

나는 잊고 있었다. 반사 신경, 운동 신경이라면 나대신 이 아이가 전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정신을 차려보니 예술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미리의 오른손은 공중회전 하려는 쟁반을, 그리고 왼손은 넘어지고 있던 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다. 고전 연극에서나 나올 법한 왕자의 멋진 움직임. 내가 여자였다면 조금 반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남자로선 그냥 자괴감만 느껴질 뿐이지만.

부끄러운 경험에 허우적대던 나를 부드럽게 땅에 내려주고 난 미리가 곧바로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어. 미리야?”

반창고가 여기 어디 있었을 텐데…….”

퍼뜩, 혹시 이 여자가 아주 눈에 띄는 핑크색 반창고 같은 것을 내미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예감이 밀려온다.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이 방의 주인은 화려한 여고생 아이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 아니던가.

, 여기 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반창고는, 역시나 화려한 여고생용 아이템이 아니었다.

다만,

초등학생용 아이템이었다.

저런 것을 캐릭터 반창고라고 부르던가. 지금 한창 어린이 여러분 및 극소수의 나 같은 한가한 덩치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만화영화, 메이크 업! 큐티하트의 관련 상품이었다.

제목이 말해주듯 깜찍한 하트문양이 동명의 히로인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아아, 큐티하트여. 이런 곳에서 조차 너를 다시 봐야 하다니.’

지금 나는 절망적인 극중 악당, 에스테틱 남작이 패배하기 직전과도 같은 감정을 온전히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멍청한 악당도 조금은 동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우그러져 있던 원래의 반창고를 내 손으로 떼어내며 필사적 항변을 해본다.

생각해보니 그건 필요 없을 것 같아. , 말끔해 졌잖아.”

보란 듯이 손으로 상처를 툭툭 건드려 보기도 한다. 실은 아직도 꽤 따끔따끔했다.

안 돼, 얼굴에 흉터라도 나면 어쩌려고!”

미리가 나를 강제로 침대에 걸터앉힌다. 힘에서 밀리고, 분위기 주도에서 밀려버렸다.

긴장 풀고 가만히 있어. 금방 끝날 거야.”

아까부터 점점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필름 종이를 벗겨낸 새 반창고를 든 미리의 손이 자꾸만 가까워져 온다.

이것으로서, 초현실적이고 게슈탈트 붕괴적인 그림 한 장이 완성되었다.

제목은 악당 소년 정의민에게 정의의 마법소녀 큐티하트 반창고를 붙여주려 하고 있는 정의의 마법소녀 스타 큐티클.’

그런 와중에도 나는 눈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진지한 얼굴에 시선이 가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먼저 내 안위를 살펴온 봄방학 때의 그 얼굴이었다. 올곧고 단정한 소녀의 그 모성애 어린 표정이 살며시 나의 가슴을 두드려온다.

, 다 됐어.”

어느새 패배감조차 지워져 갈 무렵, 미리의 치료 아닌 치료가 끝났다.

조금 삐뚤어 졌나?’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부끄러운 듯 혀를 살짝 내밀며 웃는다. 루나 느와르의 그 선정적일 정도로 빨갛던 그것과는 다른, 깨끗한 핑크빛.

혀 놀림이 중요해. 부드럽고, 질척하게. 때론 거칠게. 그럼 헤롱헤롱이야!’

…….

이제 와서 뭘 떠올리고 있는 걸까. 내 머릿속은.

, 민아. 너 열이라도 있니? 얼굴이 빨개.”

쓸데없는 강좌를 해준 루나 느와르 덕분에 뭐가 뭔지 모르게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내게, 미리가 다시금 걱정스런 얼굴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수행부족이다. 고작 이정도로 표정 연기를 무너뜨리다니. 어찌된 일인가.

정신 차려라. 저 여자는 나의 숙적이다.

이미 꼬셨잖아. 헤롱헤롱 맛이 갔잖아. 셋째가 어딨어! 고기 파티다아!’

민아…….”

한숨을 닮은 미리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린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악마가 속삭이고 있다.

가깝다. 너무 가깝다.

이대로라면 나는…….

그때, 방금 전에 들었던 것 같은 발소리가 복도를 요란하게 울린다. 그리고 벌컥,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고 말았다.

미리야! , 갈아입을래!”

하마터면 멈출 뻔 했다.

심장이 두 개였어도 전부 멈출 뻔 했다.

, 셀레스!”

당황스러운 투로 그렇게 외치는 미리의 시선을 따라 활짝 열려있는 문 앞을 보니, 그곳에는 흰색 원피스 차림의 웬 꼬마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부드럽고 긴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아래 까지 굽이친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에는 수치심과도 비슷한 홍조가, 동물을 닮은 듯 커다란 눈망울에는 엄마에게 야단맞기 직전 같은 불안함이 가득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봤던 꼬마 같다는 기시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옆집 사는 초등학생 꼬맹이랑 착각한 건가? 아니면 이것도 역시나 그냥 기분 탓인가?

방금까지 처했던 악당으로서의 정조의 위기도 잊어버린 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나의 눈에 문득, 꼬마 아이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들어온다.

붉은 색 보석 같은 것이 박힌, 마름모꼴의 목걸이.

, , . 소개할게! 얘는 내 동생 셀레스라고 해. 외국에서 양자로 들인 아이야. 귀엽지?”

흐음. 기분 탓이 아니군.

나는 오늘, 세 번의 기분 탓과 두 번의 거짓말을 경험했다.

그 동안 절대로 연기를 한 적이 없었던 미리가 오늘만 두 번이나 거짓말을 한 것이다.

첫 번째는 붉은 목걸이를 한 갈색털 강아지의 종을 물어 봤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묻지도 않았음에도 붉은 목걸이를 한 갈색머리의 꼬마 아이를 소개 했을 때.

분명, 일전에 그녀가 가족 관계를 얘기했을 때도, 양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래.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안녕, 셀레스.”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이미 익숙할 만큼 익숙해져 있을 오른손을 내밀어 본다.

꺄웅!”

질겁을 한 꼬마 아이가 곧 미리의 다리 뒤로 숨어버렸다. 적개심과 수치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민아. 혹시, 내말, 못 믿는 건, 그런 건 아니겠지? 그치?”

둘 다 똑같이 불안한 듯 벌벌 떨고 있는 모양새가 백보 양보해서 자매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정도로 상쾌하고도 멍청한 미소를 지으며, 이에 응답해 주었다.

물론 믿지. 귀여운 동생을 둬서 정말 좋겠다, 미리야. 부러울 정도야.”

나의 대답에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린 언니 쪽은 다시 표정이 환해졌다. 다만, 동생 쪽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리야. 근데 네 동생, 너한테 뭐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니었어?”

나의 지적에 정신을 차린 미리가 동생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셀레스. 갈아입고 싶다고 그랬었지? 근데, 그 옷은 오늘 막 입었잖아.”

꼬마가 고개를 열심히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말고.”

그러나 몇 번을 말 할까 말까 망설이던 동생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언니 앞에서는 결국 속내를 털어 놓고 말았다.

하얀색 원피스의 치마폭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던 꼬마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윽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 팬티…….”

 

 

 


eva0083 님이 2011.01.14 09:17 에 혀페치였다가
eva0083 님에 2011.01.14 09:18 에는 다시 강아지모에로 수정되었습니다.
eva0083 님에 의해 2011.01.14 09:19 에 수정되었습니다.
eva0083 님에 의해 2011.01.14 10:39 에 수정되었습니다.
eva0083 님에 의해 2011.01.14 10:40 에 수정되었습니다.
eva0083 님에 의해 2011.01.16 07:22 에 수정되었습니다.
eva0083 님에 의해 2011.01.29 10:54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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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1/14/10:05
잘보았습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울고 갈만한 그림이었다'는 잘 그렸다는 뜻 아닌가요..?
그나저나 제2의 미아쨔응 탄생이군요. 이 개 같은 주인공.
6 SB.K 01/14/10:41
서술이 부족했던 것 같아 수정했습니다.
21 B-Luv 01/14/11:57
으 아니... 능욕씬 어디있는고야! 개를 능욕했다니! 이럴 수는 업ㅂ어!
그나마 마지막 문장이 제 기분을 보상해주는 근여..
17 루라링 01/14/02:44
개를 능욕했는데 그 개가 암컷이고 사실은 여자아이였다는.. Aㅏ..
21 B-Luv 01/14/03:08
그렇지만... 결국은 개를 능욕했잖아요 Ak..
17 루라링 01/14/07:40
뭔가 수정목록에 이상한게.
31 폴모리 01/14/09:17
수정돋넼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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