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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I;요정의 시각 by 커리

『――――사실 우리의 뇌내세계 속에 2000년, 2001년, 2002년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밀레니엄 쇼크, 9.11테러, 한일 월드컵이라는 사건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을 뿐이야. 고등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더 나아가면 취업, 결혼 같은 인생 대소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사망에서 매듭이 지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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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삼처럼 6년 묵은 커리  lv 4 10% / 1050 글 45 | 댓글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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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커리[kerius]  
조회 1222    추천 0   덧글 2    / 2007.07.26 05:05:04



「컥――――――――」
녀석이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가 다시금 뽑혀나갔다. 푸슉. 터지는 피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잠시 정지했던 뇌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시계노인과의 일전 이후로 잘 알고 있는 게임오버의 감각이었다. 그것은 죽음.
「너, 왜」
「……」
진영이는 원래 얼굴상이 좋고 잘 웃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옅어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목석을 세워놓은 것 같다. 이 상황이 한진용의 절대적인 위기이자 통상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그 갭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설마, 네놈도 시간능력자냐?」
「그럴지도. 혹은 아닐지도」
그것은 진영이의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고, 평소에 진영이는 이런 말투를 쓰지 않는다. 이건 진영이가 아닌 것 같다. 쏟아지는 뜨거운 피를 무시하면서 비호같이 몸을 날려서 뒤로 크게 빠졌다. 거기엔 내 침대가 있었다. 진영이가 나에게 덮쳐든다. 완전히 방어 자세를 취한 날 꿰뚫으려 하는 그 나이프는 이번엔 완연히 내 목덜미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팔을 들어서 막는다. 밀고 들어오려는 녀석과 받아내려는 내 힘이 교차하고, 곧 진영이는 나를 침대 위에 잡아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녀석의 몸무게는 내 2배에 가깝다. 그리고 다시금, 수차례 나이프가 위와 아래를 교차했다.
푸욱, 푹, 푸욱.
나는 발버둥치지도 않고 오직 나이프의 칼끝을 막는 일만을 전심을 다해 행했다. 어차피 녀석과의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쓸데없는 저항은 빨리 포기하고 오직 지키고 싶은 목숨만을 지켰다. 사방으로 선혈이 튀고, 예리한 칼날에 수차례 찔린 두 팔뚝이 시큼하게 저려온다. 아예 얼얼해져서 아픔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리는 오히려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찼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막기만 해서야 이길 수는 없다.
이겨낼 수 없으니까,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상황을 바꿔야 한다.
그야 간단한 일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 안에 들어있는 시계에 손끝을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된다. 이 시계도 째깍거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주인이 자기를 쓰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시계노인 같은 능력자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에게 시계의 권능을 써도 되는 것인가?
무미건조하게 나이프를 내려찍던 진영이가 멈칫. 동작을 멈추고 날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뭐?」
「왜, 시계를, 쓰지, 않는, 거지?」
말이 단어 단위로 뚝뚝 끊어져서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진영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 녀석, 동요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회중시계를 써. 시계를 쓰고 날 공격하면 되는 거야. 쓰라고. 자아, 어서」
오히려 진영이가 나에게 시계를 쓰라고 종용했다. 의식에 혼란이 찾아왔다. 이건 내가 요 몇 주 동안 몸에 익힌 상식을 벗어난 발언이었다. 도저히 상식적이질 못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에게 승기가 찾아왔으니까.
텅! 우지끈!
큰 소리를 내면서 진영이가 나가떨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걷어찼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아래에서의 저항을 하지 않은 것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진영이는 덩치에 안 맞는 민첩함으로 잽싸게 자세를 고쳐 잡았지만, 그래도 내가 더 빨랐다. 왼손에 시계를 꺼내서 쥐고, 오른손은 나가떨어진 나이프를 잽싸게 주워들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진영이는 나이프가 없어진 자기 손가락을 딸깍거리면서 허공을 쥐었다.
「얼마 전에 경험치를 쌓았으니까」
무덤덤하게, 그리 지껄였다.
「흐음――――그렇군요. 기습에서 곧장 승부를 보지 못한 것이 제 패인입니다. 인정하죠」
이번엔 말투가 여성스러워졌다. 역시 지금의 진영이는 진영이가 아닌 것 같다.
「자, 이제 끝을 냅시다」
진영이는 허공에 두 팔을 벌린다. 마치 자기가 예수님이나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
「단칼에 저를 죽이시죠. 제2시계에 날붙이까지 가지고 있으니, 저는 죽습니다」
그 태도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왼손에 들고 있던 시계를 침대에 내던졌다. 진영이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아까는 나이프를 뺏더니……뜻 모를 짓만 하는군요.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모르겠다」
입이 이상하게 놀아나고 있었다. 내 입이지만 좀 정신머리가 없다.
「네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시계에 엮여있는 놈이겠지」
「정확합니다」
「난 시계능력자가 된지 얼마 안돼서 많이는 모르지만……적어도 그들은 『너』처럼 남을 인형처럼 이용하진 않아」
이것은 확신이다.
세현이, 시계노인, 사장님. 그들은 모두 자긍심이 높으며 신사도에 가까운 기풍과 자기들만의 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자들의 축에 끼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사소한 거지만, 그 룰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렇지 못하다. 이 차이가 곧 나의 확신이다.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정이라도 있나 보군. 뭐……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피투성이가 된 팔뚝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지만, 나이프를 거꾸로 쥐고 자세를 낮췄다. 소년만화를 많이 봐서 이런 건 잘 할 자신이 있다. 슬쩍, 미소를 짓는다. 이것이 내 허세의 마무리이자 최고정점이다.
「인형 부수는 데엔 이거면 족하다. 아니면 직접 올 텐가? 직접 덤비지 못하는 시점에서 어차피 허접한 놈이겠지만」
「……」
무표정이 적의로 바뀌었다. 쌀쌀한 표정과 함께 긴장감과 적막이 피투성이가 된 방을 감쌌다.
「하!」
진영이가 갑자기 웃어젖혔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어느 쪽이 범일지는 대봐야 알겠지. 너도 시계를 가지고 싶겠지? 그렇다면 직접 와라. 싸우자」
내가 이러는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세현이에게 연락할 시간을 버는 것과, 진영이를 죽이지 않는 것. 두 번째 이유는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덤이다.
「좋아」
「콜」
인형이 실이 끊어지듯, 진영이가 힘을 잃고 픽 쓰러졌다. 그리고 나도 30초 정도는 이 수상한 파이팅 포즈를 유지하고 있었다.
「붕대, 붕대, 붕대애애애애! 아니지, 그보다 일단 세현이에게 연락하고……가 아니라! 바닥의 피를 닦……」
피잉.
「아」
현기증이 돌면서, 난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죽여주마.
――刺殺.
직접 내 손으로 죽여주마.
――默殺.
뭘. 그 집에서 살인을 하는 건 이미 경험한 바다.
――絞殺.
이미 발걸음은 한적한 길만을 찾아서 한진용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踏殺.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살해방법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坑殺.
이번에도 엽기살인사건을 위장할까? 13시를 잘 이용하면 자살도 연출할 수 있다. 목을 매고 죽었다거나 말이지.
――焚殺.
그 때, 옆에서 커다란 흰색 철 덩어리가 덤볐다.
「!」
끼이이이이익!
가볍게 몸을 옆으로 뛰어서 한참을 물러났다. 차였다. 이 차는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드라이버는 격하게 차를 꺾어서 좁은 길목에 차를 거의 꽉 채우면서도 솜씨도 좋게 턴 브레이크를 걸어서 차를 멈췄다. 시동을 끄고, 여자가 내린다.
「아, 미안해요. 들이박을 생각이었는데」
이 여자……미쳤군.
나도 그렇지만 저 여자도 그런 것 같다. 여자는 빙글 뒤로 돌아서 트렁크를 열더니 골프채 가방 같은 것을 꺼냈다.
「잠깐만 기다려요. 곧 준비할 테니까」
「무슨 준비? ……죽을 준비라도 하려고?」
「후후후」
여자는 골프채 가방에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가죽부츠를 꺼내더니 신발을 갈아 신었다. 하긴 그런 통굽구두로 전투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 이어서 그녀는 가방에서 기다랗고 칼날이 불꽃 모양인 긴 장검을 꺼내들었다.
「플람베르그?」
「Non. 플랑베르쥬」
흥.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 여자를 쓰러뜨릴 주(呪)를 머릿속에 새기자 드디어 저 쪽에서도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자, 그럼 죽어주실까요」
휘익. 쨍그랑.
말이 끝나기보다 빠르게 무언가가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작은 다트는 안경의 두 알에 박혀서 멈춰주었다.
「운이 좋으시네요. 안경을 안 썼다면 장님이 됐을 텐데」
「!?」
그 목소리는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몸을 뒤로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여자의 검이 허공에서 직선을 그렸다. 휙.
팔이 절단되었다.
다시금 검이 움직인다. 휙.
이번엔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었다. 휙. 휙. 쿵.
이상할 정도로 고통은 없었다. 내 몸뚱이와 사지는 분리되고 지지대를 잃은 몸이 땅에 떨어졌다. 여자의 검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는데 내 팔다리에선 피가 콸콸 쏟아졌다.
「너――――――――마술사냐? 아니면 악마 계약자?」
「Non. 그냥 요정의 필살기입니다.
발상은 심플해요. 팔을 휘두르는 동작을 극한으로 가속했을 뿐이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방금 걸로 한 30만 시간 정도는 썼을 겁니다. 아까 정도의 속도로 베는 건 1년에 1번 정도밖에 못하지만」
「이, 무슨」
여자는 내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절단이 난 내 옷을 수색해서 내 회중시계를 꺼내갔다.
「흠. 역시 가지고 계셨군. 덫을 놓고 다른 시간능력자를 끌어들이다니, 사람이 좋지 않군요」
큭…….
「게다가 남을 조종하는 방편도 갖추고 계시고. 유추하건데 최면술사이거나 마법사셨겠지만……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죠」
「어째서 내 존재를 알았지?」
「생각의 시발점은 회중시계가 버려져 있었던 점입니다. 보통 시간능력자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지요. 그리고 더 있다면 한진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 한진용이 아닌 나에게 미행이 붙었다는 것, 그리고 사장님이 대학로에 나타나자마자 한진용의 집에 연락도 없이 손님이 찾아온 것……」
「……」
「치명타는 며칠 전에 느꼈던 시계의 진동이었습니다」
핫, 그런 건가.
「그러나, 그건 내가 아니다」
「당신이 아니면 시계노인이었겠지요. 확률은 반반이었는데, 그렇다면 운이 좋게 타이밍이 맞은 겁니다」
「킥, 그렇다면 나는 그 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과도 같은가」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한여름에 빳빳한 정장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모자까지 쓰고 대학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기묘한 서양인. 그런 기묘한 자에게 죽는다면 나도 여한은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현실이 될 줄은.
「하지만 저도 곧 죽습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시계노인에게 쓸 작정이었던 시간을 당신에게 다 쏟아 부었으니까요. 이제 도망도 어렵고, 저는 한진용과의 연합전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실패하면 저도 같이 다이. 판 접어야죠」
「하……하하하하」
기가 막혀서 웃음이 다 나온다. 내 메마른 웃음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여자는 검을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사담이 길었습니다. 먼저 지옥에 가 계시지요」
「――――헛, 소리」
이제야 내 몸이 저 검의 시간을 따라잡은 모양이다. 고통과 함께 왈칵하고 입에서 피를 뿜었다.
「시간능력, 자가 갈 곳, 은 지옥, 이, 아니다. 엉, 망진창으, 로 뒤틀, 린 시간, 축에 붙, 박, 혀서 나선을, 따라 영, 원히 베베 꼬아질 뿐, 그 혼에 피안은 없고――――」
「……」
주(呪)는 곧 저주.
정신과 육체, 그리고 혼마저도 감싸고야 마는 가시덩굴의 사슬을, 스스로에게 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도 또한…….
「――――있, 는 것은 오직, 혼효(混淆)」
여자는 내 저주를 더 듣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이번엔, 목에 톱질이 들어왔다.





잠시 후, 나는 길을 완전히 막아놓은 차를 뺄 생각도 안하고 서둘러 한진용의 집으로 향했다. 초리를 먼저 보냈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방문을 열어젖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졸도해있는 한진용의 친구였다. 그 너머엔 피투성이의 방이, 그 더 너머에는 한진용의 두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초리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한진용의 친구의 맥을 확인해 보았다. 비록 미약하지만 그는 훌륭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이기지 못했지만 잘 막아냈군」
그리고 나는 한숨을 쉰다. 이깟 일반인의 목숨 같은 거.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챙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때로는 광대였다가, 다른 순간엔 전사가 되기도 한다. 다만 어디까지 이기적이고 어디까지 준법적인지의 경계가,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어줍잖다.
「그게 이 아이의 유의(流儀)인 거겠지. 그쪽은?」
「……이겼어」
그렇다. 나는 이겼다.
「죽였군」
싸늘한 비난이 담긴 목소리였다. 초리는 컴퓨터 쪽을 흘끔흘끔 보면서도 묵묵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뭘 보나 싶어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더니 지혈하는 법, 붕대 감는 법 등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나온 웹페이지였다.
「덤으로,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지게 생겼고」
초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신초리와 단 둘이 되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이다.

문득, 사소한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매번 한진용을 돕는군요」

「……」

「아아, 그렇지. 신초리님에 대해서 평소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붙이지 않는 존칭에 강한 악센트를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

「호수의 세례를 받은 자로써, 시간능력자는 모두 적 아닙니까?」

지혈을 하던 신초리의 손이 먿었다. 지금껏 시선을 돌리지 않던 그녀가, 완연한 적의를 담아서 나와 눈을 맞췄다. 그 눈은 아메시스트를 녹인 것처럼 선명한 보라빛을 띄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복장이 한국 전통의상이어서 다른 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 자의 눈은 처음부터 요정의 보라색이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밤의 일족인 도깨비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지만……은발에 자색 눈의 조합을 생각해보면 역시 요정의 지파로 분류하는 것이 보다 더 이론상 적확할 것이다.

「――――여우년. 평소보다 쓸데없는 말이 많구나」

「요정이 맞긴 맞는가 보군요」

쿡. 신초리가 쉬크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추측밖에 세울 수 없는 나에 대한 비웃음일까.

「그 질문에 대해서라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 내 대답이련만?」

「그렇게 나오실 것 같아서 지금껏 함구하고 있었지요. 진용씨에겐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까?」

「……」

「설마하니 이대로 덮어두고 지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진 않는데요. 진용씨도 생각보다 그런 쪽에 자질이 있는 것 같고. 회중시계의 마력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능력이 각성한 것인지, 아니면 자각이 있는 상태에서 성인이 된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전자겠지. 하지만 이 말은 입에 담지 않는다.

「본토 녀석들은 아직도 옛날의 복수에 불타고 있다. 그들은 다른 어떠한 밤의 종족들보다도 순수하지만, 동시에 집착도 강하다. 그 장난감도 고작 한 인간이 어쩌다가 좋게 만들었을 뿐인, 인간의 업에 지나지 않거늘……이 놈은 그런 것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뛰어들려 하지. 미련한 것, 이 미련한 것이」

쓰러져 있는 한진용을 바라보는 신초리의 눈은 복잡했다. 미운 정, 고운 정, 온갖 정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다 어르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괜한 입참견 말거라. 그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

「알겠습니다, Mon……ami?」

「흥. 누가 너 같은 거랑」

사장님과 대면할 때부터 언뜻 느끼는 사실이 있다. 신초리는 프랑스말을 알아듣는다.

어쨌든 몸을 움직이자. 일단 바닥을 말끔히 청소하고, 119에 전화를 걸어서 이 두 남자를 어떻게든 치워야 한다.





정신이 들었을 때엔 난 어딘가의 병실에 놓여있었다. 커튼 사이로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팔뚝에는 정맥주사가, 그 튜브의 끝에는 포도당 주사 팩이 매달려서 투명한 무색을 어필하고 있다. 상체를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병실엔 나 말곤 아무도 없었다. 흐리멍텅한 시계를 회전시켜서 주변을 한참 둘러보다가 머리맡 책상에 뭔가 메모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일어나면 읽을 것 ‐세현』
메모지의 뒷면엔 뭔가 빼곡한 글씨가 가득 적혀있었다. 그 글은 이번 습격사건의 전말이 간결하게 적혀있었다. 시계의 전 주인, 내 방에서 죽어있던 전 세입자, 세현이가 편 나름대로의 조사,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것, 진영이는 어떠한 수단으로 조종당하고 있었던 것, 그 진짜 범인은 세현이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것. 진영이도 무사하다는 것. 그 외에 이것저것.
한참을 읽다가 갑자기 엄청나게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번 일은 정작 당사자인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고, 또 끝났다.
「윽……!」
담배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역시 싸움한 뒤론 한동안 근육경련이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담배는 그만두고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달은 하얗지만, 약간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도 같았다. 참을 수 없이 조용했다.
「……」
몇 분을 멍하니 있어 봤지만 역시 심심했다. 천천히 옆으로 돌아누워서 세현이의 메모를 다시 읽으며 내용을 음미하고 있자니 메모를 남긴 본인이 병실에 들어왔다.
「정신이 든 모양이네」
또각, 또각. 못 들어본 소리다 싶어서 근원지를 찾았더니 그녀의 신발이 멋들어진 디자인의 가죽 워커로 바뀌어 있었다. 저녁때까지만 해도 메르헨틱한 구두였는데 그새 갈아 신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캔 음료를 하나 던져주고 자기 것도 따서 한 모금 털어 넣었다.
「후――――」
「후――――」
어째서인가 우리는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보단 다른 말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이런 식의 정적은 참을 수 없어서 먼저 아무 말이나 입이 나가는 대로 질렀다.
「진영이는 무사해?」
「아아. 장진영은 방금 전에 퇴원했어」
「어떻게……둘러댄 거야?」
꿀꺽. 또 한 모금 들이켰다.
「교내에서 쓰러져 있는 걸 내가 발견해서 이리로 옮겼다. 라고 했지. 나는 『교내』라고 했을 뿐인데 마침 찍기가 성공했는지 납득하더라고. 자기가 정말로 기절했다고 생각하고, 나한테 굽신거리면서 작업을 걸던데?」
다행이다. 그것은 그 남자가 평소에 취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나중에 그 사람 알아서 챙겨놔요. 우리들 능력자에 대한 걸 기억해내면 곤란하고, 진용씨 친구지 내 친구 아니니깐」
그것도 그렇다.
「음……날 죽이려고 했던 녀석, 결국 뭐였을까」
「글쎄, 잘 모르겠어」
너무나도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자기가 처리해놓고 이유를 모른다니.
「이유를 말할 새도 없이 죽였으니까」
오오, 그러니까 그 적은 손을 쓸 틈도 없이 죽――――――――
「뭐?」
「내일 신문은 기대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도심 한복판, 저녁시간대의 뒷길에서 토막 살인이니까」
「잠깐, 잠깐」
호흡을 좀 고르고.
「아니, 그래도 죽일 것까지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역시, 나는 조용함은 참을 수 없다. 한참을 콜라만 마시다가 다시 그녀가 입을 땠다.
「처음엔 이름을 기억했어」
「?」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이름을 기억했지. 두 번째로 죽인 사람은 얼굴을, 세 번째로 죽인 사람은 말버릇을」
「……」
「지금은, 기억나지 않아」
하하……아하하하하하하.
병원에서 하기엔 너무나도 김이 빠진 웃음이었다. 슬슬 한계다. 나도 이제 인간으로의 모럴을 벗어던질 때가 온 것 같았다.
「행색이나 차림새, 마지막에 남긴 말로 봐선 그는 아마도 마법사야. 그리고 시계도 가지고 있었지」
「마법사? 그런 게 정말 있어?」
「보통 시간능력자는 괴물이거나 뒤쪽 세계의 주민이란 말을 했었던가?
항상 위험한 물건은 위험한 녀석들의 관심을 끌지. 그런 녀석들은 특이한 능력을 보유한 경우가 많아. 너도 시계노인의 검술은 겪어봤으니 알겠고. 그 자의 언동으로 유추해보면 아마도 주술(呪術)에 관계된 능력자인 것 같았어. 서구나 아랍 문화권에서는 주로 이블 아이라고 부르곤 하는 건데」
아아. 약간은 알고 있다.
「너……괜찮나?」
「마지막에 이상한 저주의 말을 내뱉긴 했지만, 뭐……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러면서도 세현이의 얼굴은 저녁때보다 조금 창백한 것 같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데미지가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건 지나간 일이고……음?」
갑자기 세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져서 병실 전체에 큰 소리를 울렸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
뒤를 돌아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비행선이 병원 앞에 떠 있는데, 그 안에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꿀꺽. 목에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이리도 크게 들릴 수가 없다.
「세현아. 지금 몇 시야?」
「XIII……」
하하하, 이거, 누워있을 시간도 없군.
팔뚝에 꽂혀 있던 링거를 억지로 뽑았다. 세현이가 깜짝 놀라서 그것을 도로 내 팔뚝에 꽂았다.
「얘가 죽으려고! 혈관에 공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크으……하지만 비행선을 끌고 납신 것은 바로 시계노인이란 말이다. 젠장. 지금 공격당하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 세현이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설마, 이 녀석!?
「진용씨는 여기에서 얌전히 있어. 내일 아침엔 그쪽으로 갈께」
그 목소리엔 떨리는 공포가, 그리고 모종의 각오가 들어있었다. 세현이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다.
「――――날 믿어. 우리들, 팀이잖아?」
「어? 이……이봐!」
말뜻을 이해했을 무렵엔 그녀는 이미 병실을 박차고 없었다. 그녀를 따라 나서려고 했지만, 복도에 나가자 마자 초리가 날 막아섰다.

「어디에 가느냐」

「예? 그야, 얼른 세현이를 도와야――――윽」

욱신.

전신에 격통이 흘렀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데, 이 감각은 대체 무엇일까.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고, 나는 벽에 몸을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냐?」

「그야, 뭐」

「……그렇다면. 가서 쉬어라. 네가 싸울 곳은 여우년의 옆이 아니라, 여기다」

초리는 단 한번도, 나와 세현이의 싸움을 직접적으로 돕지 않았다. 지금 그 이유를 아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초리의 말투는 마치 아이들을 어르는 어머니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렇지. 여우년에게서 맡아둔 물건이 있었다」

「이건……무전기?」

하지만, 마의 13시에선 통신장비는 모두 먹통이 될 텐데

「잘……잘은 모르겠다만, 뭐시기 토끼란 물건이다. 능력자끼리 이걸 사용해서 소통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 같다.」

이런 고집쟁이.

점점 더, 이 은발의 요정이 우리 할머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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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유노시안 07/26/03:43
이제 남은 것은 한화!
0 thenen 07/26/04:33
2주 동안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이제야 올라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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