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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교실의 궤네 by 수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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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수류아[suryua]  
조회 2469    추천 5   덧글 17    / 2011.10.07 14:07:27

늦은 오후, 여름의 긴 노을빛이 가득한 교실에 두 명의 어린아이가 책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모두가 떠난 빈 교실에서 노을빛만큼이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풋풋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를 정말 좋아해.”

“응, 실은 나도…”

둘은 서로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책상 위에서 어설프게 교차했다. 두 아이의 손은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향해 움직였다. 떨리는 손가락이, 조금씩 조금씩 뻗어나가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살색이 만연한 사진들에 떨어졌다.

서로 다른 사진을 짚은 손가락에 이제까지의 핑크빛 공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속옷은 보여주기 위한 옷이야. 그것도 아주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실수인 마냥 드러내는 것! 순진하고 무방비하게, 살짝 들춰진 치마 아래나 슬쩍 내려간 바짓단 너머로, 셔츠의 목 너머로 스리슬쩍 보여주는 게 묘미지. 그러니까 네가 고른 곰돌이 팬티는 최악. 팬티는 귀여울지 몰라도 보여줄 수 없는 속옷이잖아.”

그런 건 엄마가 옷을 갈아입혀줄 때까지가 유통기한이라고 아이는 덧붙였다. 거기에 발끈해 다른 아이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그치만, 이 나이 때에는 그게 왕도인 걸. 그리고 속옷은 네가 늘 얘기한 것처럼 그 사람의 분신 같은 거잖아? 그런 곰돌이 팬티를 입은 어른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또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속옷으로 나타내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 점이, 더 귀여운 거 아닐까?”

‘갭(gap)'이라는 단어를 미처 알지 못하는 어린애의 어휘로는 그 표리괴리가 가져다주는 이질적 매력과 성적 추동을 단순히 귀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큐베이터 시절부터 옆자리를 같이한 소꿉친구는 그런 친구의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그 반대야. 어린애가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게 더 귀엽지. 우연히 들춰진 동급생 친구의 치마 밑에 가터벨트나 T백이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두근 세근이라고!”

“그, 그건, 그저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데…”

“뭐야? 너 지금 내 속옷 센스를 부정하는 거야?”

“아, 아니, 그, 그건, 아닌데……”

아이는 책상 너머를 흘깃 훔쳐보았다. 보육소와 유치원에 이어 현재 초등학교 3학년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함께한 소꿉친구는 그 시선을 간단히 간파했다.

“보고 싶어? 벗어줄까?”

“아니, 전혀.”

딱!

“왜, 왜 때려? 히잉~”

“넌 소녀마음을 너무 몰라!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교실에 남은 두 아이가 속삭이던 것은 풋풋한 사랑이 아니라 풋풋한 욕망이었다. 책상 위에는 인터넷에서 대량으로 구한 여성의 속옷을 찍은 사진들. 건전한 인터넷 쇼핑몰의 속옷모델 사진이 아닌 정진정명 불법 도촬 사진뿐이다. 둘의 대화는 이상한 열기를 띄고 점점 매니악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내용은 도저히 소년 소녀의 대화로는, 더욱이 초등학생들의 대화라고는 볼 수 없었다.

“네가 고른 사진을 보라고. 이건 몰카도 아냐. 그냥 대놓고 찍은 사진. 아마 아빠나 엄마가 귀엽다고 찍은 사진이 블로그든 뭐든 타고 유출된 거겠지. 너랑 비슷한 꼬꼬마 몸매 애들한테나 어울리는 펑퍼짐한 팬티를 보라고. 색기도 섹시도 없어. 모름지기 속옷은 한 사람의 분신! 자기 스스로 고른 게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그, 그치만 그 속옷은 귀여운 걸. 남에게 보여주기보다는 그걸 입은 모습이 귀여운 거야. 그리고 보여주기 위한 속옷을 남이 봤다고 하면 부끄럽지도 않잖아? 곰돌이 팬티는 남이 봤을 때 최고로 부끄러운 팬티라고.”

“이 무슨 수치플레이. 이 무슨 진성 M 변태 로리콤."

"너,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아이들의 교류는 무척이나 활발했다. 정보의 바다에서 그릇된 선지자들이 쌓아올린 자료들을 토대로 속옷과 도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는 계속되었다.

“몰카는 팬티 노출까지가 ok야. 그 이상 가버리면, 꿈도 희망도 없는 저속한 현실뿐이지. 몰카로 찍은 성행위는 각도나 시야가 엉망이고, 그나마 좀 괜찮다 싶은 건 작정하고 찍은 가짜니까. 모두 엉터리야.”

“으, 응. 역시 몰카는 몰래 찍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감추고 있는 진짜 모습을 찍는 거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본성은 대체로 에로스! 속옷은 그 사람의 내면 그 자체! 몰카는 그것을 가장 순도 높게 드러낼 수 있는 예술이라고!”

“미, 미성년인 게 좀 아쉽네…행동 범위가 너무 좁으니까…”

“무슨 소리! 미성년이기에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는 법이야. 그곳은 한층 더 순수하고 무구한 이상향이니까! 그러니까,”

교과서보다 더 뚫어져라 보던 사진들에서 눈을 떼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꼭 같은 학교에 들어가자.”

“응, 같은 학교에.”

“좋아해.”

“응, 나도.”

풋풋한 사랑을 속사이며 두 사람은 손가락을 걸었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

 

평범하게 살고 싶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내 의무교육기간 동안 나는 뼈저리게 평범함을 소망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소박한 소원이 아니라 절박한 소원이었다. 평균 이하, 아니 미만인 내게 평범하게 산다는 건 남들이 이야기하는 허황된, 대통령이 되겠다든가 노벨상을 받겠다든가 세계정복을 하겠다든가 같은, 어린애의 무계획적인 꿈과 동일선상에 있었다. 의무교육기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평범하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누구도 내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궤네에게 물어 봤다.

“평범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범하다는 것은 잔혹한 일이야, 고군.”

하품 섞인 목소리로 사과를 깎으며 궤네는 답했다. 지난 10년의 학교생활에 걸쳐 가장 깊이 알게 된, 그러니까 만난 지 열흘도 안 된 그녀는 내가 상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의식되지 않는 것,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을 말해. 사람들은 변화에 민감하고 디폴트(default) 상태에 대해서는 둔감하지. 그 누구에게도 특별히 의식될 일 없이 금방 잊혀져가는 것. 그것이 평범하게 사는 거야. 무척이나 잔혹한 일이지.”

“하지만 그럼 다들 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데?”

“세상이 더 잔혹하니까. 다들 특별해지길 원하고 노력하지. 그 소망은 대체로 좌절되어 모두 평범하게 잊혀져버리는 거야.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하기 그지없거든. 잊혀져버리기 쉬운 체질로 태어난 인간들이 그 본성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럼, 그럼 나는 왜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건데?”

“다들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있어. 자기는 평범하지 않다,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나님 최강 등등…참으로 비참한 망상이야. 대부분의 인간은 범부, 필부에 지나지 않아. 스스로 그것을 납득하지 못할 뿐이지. 기뻐해, 고군. 그대의 그 시시한 소원은 금방 이루어질 거야.”

“어, 어떻게?”

“이곳 할로 고등학교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믿고 입학한 사람들뿐이야. 그리고 진짜 특별한 사람을 보고나서야 깨닫게 되지. 아, 나는 극히 평범하고 우둔한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을.”

마치 자기는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말투로 궤네는 답했다.

물어볼 사람을 잘못 짚었다. 눈앞의 그녀는, 이 세상에서 평범함과 가장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저 호모 사이코패스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새삼스럽게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 교실은 그녀만을 위한 교실로 그녀 외에 다른 학생은 없다. 학급 기재도 싸구려 보급형이 아닌 중세 유럽 귀족들이 쓸법한 고풍스런 가구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교실이 합판 책걸상 대신 원목탁자와 응접용 소파를 설치해 놓을까. 더 황당한 것은 칠판도 교단도 없다. 심지어는 교사조차 이 교실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국에서 재능 있는 학생들이 기라성처럼 모여든 할로 고등학교에서도 궤네는 특별대우를 받는 단 6명의 천재 학생 중 한 명이다. 이곳은 외인교실, 일반적이지 않은 ‘예외’를 위한 특별한 교실이다. 거기다 그녀의 취향에 맞춰 붉은 색 벽지에 레드카펫을 깔아놓고 붉은 커튼으로 창을 가린, 보고 있는 사람을 미쳐버리게 할 만큼 시뻘건 인테리어.

그 화룡정점을 찍는 붉은 색 특주 교복을 입은 이 교실의 유일한 학생.

그런 소녀에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 물어봐도 제대로 답해줄 리 없지.

발가락이 카펫에 닿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체구의 궤네는 손에 은장도를 쥐고 사과를 깎고 있었다. 탁자 위 쟁반-이것도 어딘가의 고급 브랜드라지-에는 깔끔하게 벌거숭이가 된 사과가 이미 세 개나 놓여있었다. 궤네는 네 개째의 사과를 바구니에서 꺼냈다.

“그 사과, 누가 다 먹어?”

“벼, 별로 그대를 위해 사과를 깎은 건 아니야!”

“…….”

나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망설였다. ‘벼, 별로’ 부분은 당황과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듬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쓰인 대사를 읽는 것처럼 깔끔한 발음이었다. 한 치의 떨림도 수줍음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를 위해 사과를 깎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 반응이 없다니. 분명 이렇게 새치미스러운 대사에 남성은 동하기 마련이라는데. 역시 헛소리였을까.”

“누가 그런 소릴 해?”

“이사장. 역시 그 노인네는 믿을 게 못되는군. 아, 사실 이 사과들은 그대를 위해 깎은 거야.”

뭐? 정말?

“오래 두어 흐물흐물해진 사과를 벌레처럼 씹고 있는 그대의 모습은 꽤 재미있으니까. 걱정 마. 그대가 세 개를 억지로 입속에 쑤셔 넣고 있는 동안 네 개째도 충분히 흐물흐물해질 테니.”

“먹지 않을 사과는 깎지 마!”

“전에도 말했잖아? 사과를 깎는 건 내 취미야.”

그럼 하다못해 먹기 좋게 잘라놓기라도 하지. 사과는 껍질만 벗겨진 상태였다. 처음부터 껍질이 없었던 것처럼 매끄럽게 깎인 사과는 정말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표면에 새로 껍질이 생길 기세로 변색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주저주저하며 사과를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거려야할 사과속살이 질퍽하게 이빨에 들러붙었다.

“색이 누렇게 뜬 것이 며칠 갈아입지 않은 팬티 같군.”

“푸흡-?!”

“사과 대신 팬티를 입에 물고 싶은 모양인데? 벗어줄까?”

“필요 없어!”

“사실 입고 있지 않으니까 네게 줄 팬티는 없지만.”

“…………뭐라고?”

“따, 딱히 그대를 위해 팬티를 입지 않은 건 아니야!”

깔끔하지만 파렴치하기까지 한 발음에 나는 입을 떠억 벌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새치미 컨셉은 실패로군. 전혀 동하는 기색이 없잖아? 망할 이사장 같으니. 아, 그대를 위해 팬티를 안 입은 건 정말로 아니야.”

입지 않은 건 사실입니까. 차마 확인할 수 없었다.

“2학기가 되어 속옷도둑이 다시 나타난 것 같아. 그래서 나도 지금 속옷을 입지 않았지.”

속옷도둑. 그 말을 나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 정보는 지금 궤네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나는 그 속옷도둑으로 누명을 썼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대기업인 할로 재단에서 그 막대한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이유로 만든 거대한 교육단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되어 독자적인 커리큘럼을 진행하고 일반 학교와는 교육과정을 공유하지 않는 기숙사제 학교다. 초․중․고․대학 모두가 거대한 분지 안에 설치된 부지는 생활에 필요한 다른 시설들과 함께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재능 넘치는 학생들이 모인다.

일반적인 교육과정으로는 묻혀 으스러질 재능을 개화시키는 파라디아스 스쿨.

할로 특수교육기관.

나는 그곳의 할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내게 특별한 재능 같은 건 없다. 평화, 평온, 평범의 3평 인생을 원하는 나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학교다. 전국에서 모인 수재, 영재들의 학교라니. 하지만 평범함을 목표로 삼아야 할 정도로 열등생인 내게 이곳은 마지막 희망이다.

잘 설명할 수 없는 개인사정으로 나는 일반교육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전학을 반복하며 고등학교를 전전했지만 어느 곳 하나 무난히 보내지 못했다. 빠르면 사흘, 길어야 2주를 넘기지 못하고 나는 다른 학교를 알아보아야 했다. 할로 고등학교는 그 끝에 전학 온 곳이다. 이곳은 일반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천재들을 위한 학교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런 천재는 아니지만 이곳의 이사장님은 나를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대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받는 장학금은 나오지 않는 터라, 일반 사립대 수준의 등록금을 내야하는 신세다. 부모님은 신경 쓰지 마라 하시나 자식 된 도리로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없는 살림에 고작 고등학교 졸업을 위해 거금을 투자해야 했던 부모님께 죄송해서라도, 나는 이번만큼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 전학 직후 2시간 만에 나는 사건에 휘말렸다. 그 사건이, 궤네가 말한 ‘속옷도둑’사건이었다.

 

“그대의 심의회의에서도 진범은 밝혀내지 않았어. 단지 그대의 무죄를 증명했을 뿐.”

궤네는 네 개째의 사과를 다 깎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하나를 다 먹은 나는 그 매끄럽게 깎인 새하얀 사과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응? 근데 속옷도둑이 네 속옷을 전부 훔쳐가기라도 한 거야?”

“아니. 그건 아냐. 속옷도둑은 누군가 입었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는 쪽을 선호하지. 그대가 이 깨끗한 사과보다 누렇게 변색된 사과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속옷도둑도 누렇게 자국이 뜬 속옷을 더 좋아할 걸?”

“그게, 속옷을 안 입는 거랑 무슨 관계가?”

궤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으로 무참한 추리력이네, 고군. 입었던 속옷을 원하니 입지 않은 속옷은 훔쳐가지 않을 터.”

“그런 이유로 속옷을 안 입은 거냐?! 그리고 나도 기왕 먹을 거면 갓 깎은 사과가 좋다고!”

그 사건 탓에 나는 매일 같이 이곳에 원치 않는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전후좌우도 모르는 채 엉뚱하게 휘말려버린 무고한 학생이었다. 만약 궤네와 가란 선배가 없었다면 전학 후 체류 최소기간을 갈아치울 뻔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건은 궤네가 변호를 맡아준 덕에 무사히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무사(無事)히는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궤네는 네 번째 사과를 빙글빙글 돌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빨간 사과 껍질이 종이처럼 하늘하늘 흘러내렸다.

“학내 인트라넷에 야한 동영상이 돌아다닌다는데. 고군, 공유해줄래?”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그런 영상 갖고 있지 않다고!”

랄까, 그 정보는 지금 처음 들었다. 오늘 밤은 검색 삼매경이다.

“내 33/24/34의 퍼펙트 보디가 잘 찍혔는지 확인해봐야 하거든.”

“단위는 cm겠군. …잠깐, 네 몸매? 설마 그거…”

“학교 기숙사 도촬 영상이라더군. 당연히 학교 최고의 미소녀인 나를 주요 타겟으로 찍지 않았을까?”

“그거 큰일이잖아! 너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의 프라이버시의 위기야!”

“…호오, 그건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지.”

남자목욕탕에 들어온 어린 여자애를 보고 흥분하는 남성은 없을 거다. 양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남녀 구분이 안 되는 초등학생과 비슷한 몸매의 궤네를 타겟으로 했다면 정말로 위험한 변태임이 틀림없다. 아니, 몰카를 찍은 시점에서 충분히 위험한 변태지만.

“수요는 있으나 공급이 없으니 스스로 창출해 나가는군. 실로 할로고등학교스러운 일이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레벨이 아니라고.”

야동이 없으면 찍으면 되잖아.

안 되면 되게 하라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버린다는 건 무슨 발상일까.

똑똑.

“저기, 실례합니다. 여기가 궤네 선배님 교실 맞나요?”

상념을 깨고 현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문을 열고 한 소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귀엽고 발랄한 인상의 단발머리 소녀였다. 그녀는 방안의 끔찍한 인테리어를 보고 흠칫거리며 들어오기를 주저했다.

“단화를 벗고 들어오도록, 후배.”

“아, 네, 네넵!”

신발을 벗는 동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살짝 들어 올린 무릎에 짧게 개조한 교복치마가 들려지지 않도록 내리누르는 철벽의 가드. 그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했고 적확했다. 언제 어디 붙어있을지 모를 몰래카메라를 조심하는 듯 가슴께를 누르고 치마를 가리는 손놀림은 자의식이 강한 사춘기의 소녀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 소녀를 알고 있다! 아니, 이 조신함과 기민한 손놀림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열등한 내가 이 소녀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때, 이 소녀는 나를 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앗, 그 때 그 속옷도둑!”

“누명이었어! 심의회의 때 입증됐잖아!”

그녀는 내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기색이 없었다. 적의와 악의가 서린 눈발이 매섭게 몰아쳤다. 열흘 전 심의회의 때처럼, 그녀는 날 표독스런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도망치지 못할 거야. 구소에게 씌운 누명은 궤네 선배가 반드시 벗겨줄 테니까!”

저번에 내 누명을 벗겨준 것도 궤네였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진정해, 후배. 자세한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 후배는 내게, ‘의뢰’를 하러 온 거야?”

궤네는 깎던 사과를 내 입에 쑤셔놓고 소녀에게 물었다.

“그 구소라는 호모사피는 무슨 누명을 썼지?”

궤네의 물음에 소녀는 나를 매섭게 쏘아보곤 이렇게 말했다.

“속옷도둑, 이요.”

 

§

 

할로교육단지는 다른 학교보다 조금 더 특별한 치외법권이다. 거기다 외부와는 전화 및 전파, 인터넷 등의 통신수단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설립지도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의 분지. 이곳은 이미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국가다. 따라서 이곳의 교칙은 간단히 학생수첩에 적혀있는 몇 줄의 문장이 아닌 ‘교법’으로서 확립되어 있다. 징계심의회의는 그 교법의 위반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엄연한 재판이다.

명목상이 아니라 엄연히 사법적 효력을 갖는 심의회의.

궤네는 거기서 학생회원 자격으로 변호인을 맡고 있다. 내가 열흘 전 이 회의에 회부되었을 때도 궤네가 변호를 맡아주었다. 궤네는 할로고등학교의 간판인 외인교실 학생이라는 점과 더불어 변호인으로서도 유명했다.

모든 피고인을 무죄로 만드는 변호사. 대체 무슨 악의 지원세력이냐.

궤네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그런 쪽이 아니지만.

“바로 두 시간 전에 구소는 여자 기숙사에서 붙잡혔어요.”

궤네의 교실을 나와 징계심의회의실로 가는 복도에서 미소는 사건 정황을 설명했다.

피고인은 미소의 소꿉친구 구소.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가 여기서 재회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변모에 그녀 또한 놀랐다고 했다.

“옛날부터 조금 그런 끼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변해버렸을 줄을 몰랐어.”

왜소한 체구에 어눌한 말투, 빙글빙글 안경에 음침한 태도로 인해 구소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 중 얼마 전 수업 중에 탈의실 도촬 영상을 보던 걸 들켜 완전히 접근기피대상으로 찍혀있었다. 그런 그가 오늘 마지막 수업을 땡땡이 치고 여자 기숙사에 침입한 것이다. 목적은 속옷을 훔치기 위해.

“침입한 게 아니에요! 구소는 고장 난 내 컴퓨터를 봐주려고 왔었어요.”

미소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구소는 기숙사에 들어온 후 이곳저곳을 배회했기 때문이다. 공용세탁소, 공중목욕탕, 스포츠 시설의 탈의실까지. 남자로서 오해받기 십상인 곳은 모조리 들어갔다. 거기다 여학생들에게 발견되었을 때는 속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상황이네, 고군.”

“…….”

철지난 영화의 TV방영도 아니고. 재방송에도 정도가 있지. 그야말로 열흘 전의 나를 재현한 행보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너무나도 의심스럽구나.

이래서야 유죄 확정이다.

구소는 독방에 구금되어 있다고 했다. 지금 그의 심정은 사무치도록 알 수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매서운 경멸과 감시의 눈길을 받으며 억울함을 삭히고 있겠지.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외로이 속으로 울고 있을 것이다.

“일사부재리라고 알아, 고군? 한 번 무죄를 받은 판결은 다시 다룰 수 없어. 설령 그대의 범죄가 이번 심의로 유죄입증 되더라도 이미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그대는 무죄야. 거기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

궤네는 아무래도 내 표정을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한 듯 했다.

“아니,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고 있지 않아. 난 속옷도둑이 아니니까.”

“……그래?”

궤네는 날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마 그녀는 정말로 내가 왜 걱정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타인을 위해 타인에 의해 움직이는 감정을, 그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 이상 추궁해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징계심의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자, 즐거운 재판 시간이야.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묻지, 후배.”

“네? 아, 네…”

“어째서 후배는 그 소꿉친구를 위해 내게 의뢰했지? 후배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어?”

미소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궤네가 징계심의회의에서 변호인을 서준다지만 그것은 결코 자원봉사가 아니다. 한 번 변호를 설 때마다 그녀는 막대한 ‘포인트’를 뜯어낸다. 그것도 상당히 비합리적인 금액으로, 일전의 내 변호를 맡겼을 때 나는 환율도 모른 채 터무니없는 금액을 청구 받았다. 그 이후 나는 이렇게 궤네를 따라다니며 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야…구소는, 제 친구니까요.”

“그것뿐?”

“……네.”

궤네는 히죽 웃었다.

“좋아. 후배의 친구가 쓴 누명은 내 반드시 벗겨주지. 지금 입은 속옷에 걸고, 후배의 친구는 무죄로 만들어줄게.”

하마터면 넌 지금 속옷을 입고 있지 않잖아-하고 딴죽을 걸 뻔했다. 하지만 그 소녀의 정조를 건 맹세가 결연해 보였는지 미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왼쪽 눈의 붉은 외안 렌즈를 번뜩이며 궤네는 심의회의실의 문을 후려 찼다.

쾅!

운명이 문을 차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럼 지금부터 제 2213회 징계심의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교탁에 선 학생회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단정한 일자단발 머리에 새하얗게 백열하는 안경을 쓴 그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개회를 선언했다. 징계를 결정하는 최고 책임자가 나와 같은 학생이라는 사실이 나는 전부터 불안했었다.

“학생이 심의회장을 해도 되는 거야?”

“물론, 일반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산단은 각별해. 그녀는 나와 같은 외인교실의 학생이자 내가 인정하는 진짜 천재 중 한 사람이니까.”

나는 변호인 석에 궤네와 같이 있었다. 이전 심의회의 때 교탁에서 저 산단이라는 소녀가 회의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 내심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회의 진행은 완벽했다. 들을 말만 듣고 해야 할 질문만을 했다. 속옷도둑 사건을 처리하는데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으로 표현해야할 수치나 당황은 눈곱만큼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로봇과도 같았다.

“피고 학생을 피고석에.”

건장한 학경(School Police) 두 명이 왜소한 남학생 한 명을 데리고 심의회 중앙의 자리에 세웠다. 저 학생이 구소로군. 골뱅이처럼 돌아가는 커다란 안경알이 얼굴 반을 가리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음울한 분위기는 조그만 얼굴의 반만큼도 가려지지 않았다.

어머, 제법 귀여운 아이인 걸.

“사담은 그쯤 해 두지.”

구소가 선 피고석을 중심으로 나와 궤네가 있는 변호인석 반대편에는 삐까번쩍한 금테안경을 쓴 이마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또, 저 인간인가. 나를 징계심의회의에 회부했던 학생주임 유승 선생님이다. 그는 이쪽을 쳐다보며 기분 나쁜 조소를 흘렸다.

“이 건은 명백한 사건이야. 아무리 궤네 너라도 이번만큼은 방해할 수 없을 게다.”

“호오, 열흘 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 대사로군. 이번에는 준비를 잘 해 오셨어, 선생?”

지난 징계심의회의 때 유승 선생님은 궤네에게 말로 난타 당했다. 그 탓인지 그 때보다 머리카락 방위라인이 1cm쯤 후퇴한 듯 했다. 보다 넓어진 이마를 반짝이며 그는 안경을 고쳐 썼다.

“흥, 언제까지 그 오만한 태도가 이어질 지 두고 보겠네. 의장님, 이쪽은 준비됐습니다요.” “그래, 사담은 이쯤 해 두지. 변호인 측은 언제 시작해도 좋아.”

학생회장은 무표정하게 의사봉을 한 번 두드리고 회의를 진행했다.

“유승 학생주임, 사건 개요를.”

“예입.”

앞머리가 벗겨진 40대의 남자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고 일어섰다. 변함없이 가늘고 음흉한, 옛날 사극에 등장하는 이방의 목소리 같았다. 학주 유승 선생님은 이쪽을 향해 거칠게 콧웃음을 치고는, 자료를 사건개요를 읽어나갔다.

“에헴, 피고 학생의 이름은 구소. 할로 고등학교 전자학부 1학년 A반입니다. 금일 오후 5시 경, 피고 구소 학생은 고등부 여자기숙사에 몰래 침입했습니다. 친구인 미소의 체육복을 입은 모습으로 3층의 공용세탁소, 같은 층의 공중목욕탕, 그리고 2층 스포츠센터의 탈의실에서 목격되었습니다. 탈의실에서 정체가 발각된 그는 공용세탁소의 건조대에 널려 있던 속옷을 탈취하고 도주 중 여학생들에 의해 구속되었습니다. 에, 그럼 일단 상면도를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프로젝터가 스크린에 기숙사의 상면도를 비추었다. 기숙사는 커다란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고 한 쪽 변에는 학생들의 방이, 반대편에는 공용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 상면도는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어…남자 기숙사랑 똑같은 구조인데, 뭔가가…”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는 학교 본관을 중심으로 양쪽 반대편에 위치하지. 기본 구조는 똑같지만 거울처럼 좌우가 반대로 설계되어 있어. 그대가 사는 남자 기숙사와는 공용시설과 학생 방의 위치가 반대일 거야.”

아, 그렇군.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건물이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구소 학생은 여자기숙사 내에서 체육복을 입은 채 돌아다녔습니다. 작은 체구에 여학생용 체육복을 입었던 터라 달리 의심받지 않고 숙소를 돌아다녔으나 스포츠센터의 탈의실에서 정체가 발각, 그대로 도주하다 3층 공용세탁소 부근에서 여학생들에 의해 붙잡혔습니다. 3층 복도 끝에 설치된 완강기를 이용해 도주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크린이 바뀌며 화살표로 구소의 이동 경로가 표시되었다. 탈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질주하고 계단을 올라 3층의 공용세탁소까지.

“에헴, 이 이동경로는 당시 구소 학생을 쫓아갔던 여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건입죠. 감히 발언하자면, 굳이 변호인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럴 수야 없어. 그 설명에서 알 수 있는 건 구소가 여학생 기숙사에 몰래 들어왔다는 것뿐인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합니다.”

학생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유승 학생주임, 설명하세요.”

“예입- 에헴…그러니까, 으흠…”

“?”

유승 학생주임의 이마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학생회장과 궤네를 돌아보고는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에, 유, 유감스럽지만 현재 조사부족으로, 으흠, 침입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에헴, 잡혔을 때엔 여학생용 체육복 차림에, 손에는 그, 네글리제와 파운데이션, 가터벨트, 브래지어 등등을 들고 있었고 머리에는 브리프, 지 스트링, 힙스터 등등을…”

술렁술렁!

뭐야, 그 요술주문 같은 단어들은! 못 알아듣겠어. 시각자료를 줘, 시각자료를!

아니 사진 같은 걸로는 부족하다! 실제 증거물로 제출을 요구하는 바요!

옳소, 옳소!

학생회장은 의사봉을 두드리며 “정숙, 정숙히!”라는 재판관 멘트를 날렸고 이상한 열기로 증거제출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사그라졌다. 근데 누가 말한 거지? 이 심의회의에는 일반참관인 따위 한 명도 없는데.

“그냥 들고 있었다면 사고일 수 있다는 판례가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궤네는 나를 가리키며 반박했다. 가리키는 건 좋은데, 꼭 그 은장도로 날 찌를 듯이 칼날을 향하지 말아줬음 좋겠다. 분명 궤네는 내가 누명을 쓴 그 때 버라이어티하고도 러브코미디스러운 슬랩스틱에 의해 얼마든지 손에 속옷이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었다. 대체 어떻게 입증했는지 나는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학생회장은 판례를 끄집어 낼 것도 없이 정확하게 그 때 상황을 설명하고 그 이의를 인정했다.

“분명 세탁소에서 도주 중 건조대가 쓰러질 경우 속옷을 부득이하게 습득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2207회 심의회의에서 입증된 바 있습니다. 학생주임, 여기에 대해 보충 설명이 있습니까?”

“물론 있고말고요. 에헴, 여기 결정적인 증거를 제출합니다.”

유승 선생님은 투명한 봉투에 담긴 작은 천 조각을 제출했다. 학생회장은 그 천 조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구속 당시 구소 학생이 직접 착용하고 있던 엑사브라입니다, 네. 세탁소의 속옷이 단지 도주 중 부득이하게 습득하고 말았다는 바보 같은 가설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증거입죠.”

뭐라고?!

단순히 도망가다 건조대를 넘어뜨려 속옷과 함께 누명을 뒤집어 쓴 게 아니었다. 그런 속옷을 완벽하게 착용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고의적으로 훔쳐 입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여자기숙사에 침입한 남학생이 여자속옷을 입은 걸 달리 뭐라 해야 하지? 거기다 저 작은 사이즈는 미소의 체형에 전혀 맞지 않아 여장의 일환으로 보기에도 어려웠다.

“이,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어느 쪽이?”

어느 쪽이냐니. 그야 당연히 우리가 밀리고 있는 거 아닌가?

“분명 재미있는 전개야. 저 대머리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있었던 건 이런 연유였군. 그럴 만도 하네. 고군,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뭔지 알겠어? 경험치가 쌓여 레벨 업이 이루지는 것은 게임 속 이야기일 뿐이란 거야.”

“뭐?”

지금 이야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경험은 때때로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거든.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촉이라 하지. 하지만 그건 때로 잘못된 말이야.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멍청하거든. 장님 코끼리 만지는 정도로밖에 보고 만지지 못하니까. 얄팍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물을 판단하려 드는 격이지. 말하자면 그 정도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 기숙사에 들어온 남학생이 여자속옷을 입는 이유를 변태적인 것으로밖에 해석 못하는 거야. 머릿속에 변태적인 생각밖에 없기 때문이지.”

“…아니, 극히 논리적인 전개 같은데…”

“참으로 비참한 머리로군, 고군. 그래서야 저 대머리와 그다지 다를 바 없잖아. 그러니까 저런 증거를 제출하고 마는 거야.

뭐?

나는 궤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엣헴!”하는 유승 선생님의 헛기침 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우리가 속삭이는 걸 보고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듯,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그럼 이어서 확실한 범행 입증으로 넘어갑죠. 당시 구소 학생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의 범행을 직접 목격한 가란 학생의 소환을 요청합니다!”

가, 가란 선배라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당황했다. 가란 선배는 내가 이 학교에 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자, 내가 이 학교에 남고 싶게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부여해준 사람이다.

“학생주임의 요청을 인정합니다. 3학년 A반 가란 학생을 불러주세요.”

징계심의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검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포니테일로 묶어 내린 여학생이 들어왔다. 늘씬하게 키가 크고 당당하며 곧은 걸음걸이로 가란 선배는 증인석에 섰다.

“증인. 이름과 소속을.”

“3학년 A반 체육계, 검도부 주장을 맡고 있는 가란이다.”

청량한 목소리가 징계심의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내가 그 목소리의 여운에 잠겨있는 것과는 달리 학생회장은 짤막하게 증언을 요구했다.

“그럼 피고 학생을 구속했던 경위를 증언해주세요.”

가란 선배는 이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나랑 눈이 마주친 선배는 약간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 심의회의에서 가란선배는 변호측이 아니었다. 미안함이 섞인 한숨을 짧게 내쉬고 가란선배는 증언을 시작했다.

“내가 구소와 처음 조우한 곳은 여자 기숙사 스포츠센터 탈의실이었다. 전국대회가 가까워져 나는 정규 수업 대신 개인적인 연습을 하고 있어. 스포츠센터에서 가볍게 웨이트를 하고 나왔더니 탈의실에서 구소 군과 만났다.”

가란 선배는 침착한 어조로 증언을 시작했다. 가벼운 웨이트라고 하며 언급한 운동량은 스포츠 역학을 무시한 자학적인 양이었지만, 전국대회 최고수준의 검도선수인 선배에겐 정말로 가벼운 양일지도 모르지. 선배는 훈련 종류와 장소를 바꾸기 위해 그 일환으로 복장을 먼저 바꾸려 탈의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구소와 조우. 구소는 당시, 가란의 개인 로커를 뒤지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신입생이 로커를 잘못 알고 열어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그는 로커에서 내 옷가지들을 꺼냈다.”

“뭐, 뭐라고?! 감히 가란 선배의 옷을!”

유죄다. 이 녀석은, 틀림없이 유죄닷!

나는 입장을 망각하고 괴성을 지를 뻔했다. 감히 가란 선배의 옷을! 로커에 개어놓은 선배의 도복, 선배의 체취가 밴 타월, 선배의 가슴을 모아주던 스포츠 브라, 선배의 엉덩이를 감싸던 스패츠…

“아니, 난 스포츠 브라는 입지 않는다. 스포츠 브라로는 압박이 느슨해서 언제나 붕대로 가슴을 말아 감고 있다. 웨이트를 할 때엔 근육의 움직임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풀어 둔다. 구소는 그것을 꺼내든 거다.”

술렁술렁!

붕대! 아니 그 무슨 범죄적인!! 그것은 가슴에 대한 모독! 그런 천 대신 내 손을 써주시게, 선배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바보! 섬세한 가슴에 네 손을 대는 것이 모독이야! 그 가슴을 받쳐주는 건 내 역할이라곳!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왼쪽 가슴을 맡지. 네가 오른쪽 가슴을 맡아라.

가란 선배를 앞에 두고 이 불경한 말을 내뱉는 입은 어느 입이냐! 꽤나 가까이서 들린 것 같은데. 그 목소리를 쿨하게 흘려 넘기고 선배는 증언을 계속했다.

“처음엔 남자인줄 몰랐다. 저 작은 몸집에 여학생용 체육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그 브래지어는…아, 아니다. 심의에서 불확실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응? 가란 선배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랑 눈이 마주친 선배는…어라? 내가 아니었다. 가란 선배는 궤네를 보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선배는 궤네의 있는지 없는지 모를 가슴에 시선을 두고 있는 듯 했다. 마치 겉옷 너머 그 속을 보는 듯한, 그래, 궤네의 속옷을 투시하는 듯한-

잠깐, 잠깐, 잠깐.

궤네는 지금, 속옷을 입고 있던가?

설마, 증거로 제출된 그 자그만 속옷은-

「그러니까 저런 증거를 제출하고 마는 거야.」

궤네 너 설마, 구소가 훔쳐 입고 있던 속옷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훔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해서, 그를 무죄로 만들 생각이야? 그가 정말로 네 속옷을 훔쳤다고 해도?

궤네는 여기 오기 전 자신은 속옷을 도둑맞은 적이 없다고 했지만 거짓말일 수도 있다. 뭐랄까, 궤네는 입버릇처럼 거짓말을 하니까. 그래도 터무니없다. 심의회의마다 실제 사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네 평소 지론이었지만, 궤네, 이번엔 네가 피해자잖아.

“에헴, 그럼 피고 학생과 조우한 이후 상황에 대해서 계속 증언해주게.”

가란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궤네에게서 눈을 떼고, 선배는 심호흡을 했다.

“처음에는 로커를 잘못 열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스포츠 센터에 들어오려던 학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당황했는지, 내 옷가지를 집어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직후 탈의실바깥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야!’하는 소리가 들렸기에 바로 뒤를 쫓았다. 한 번 놓칠 뻔했지만, 다른 여학생들이 위치를 알려줘 잡을 수 있었다.”

구소는 3층 공용세탁소에서 반쯤 벗겨진 여학생 동복 체육복에 속옷을 뒤집어쓴 채로 붙잡혔다. 가란 선배는 전통무예 계승자이기도 하니 공학부의 유약한 남학생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

“이와 같이 명확한 사건입니다, 네이. 현행범으로 붙잡힌 셈입죠. 더 이상의 심의가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는 유승 선생님이 얄밉기 짝이 없었지만, 정말로 이번만큼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건이다. 구소는 속옷을 훔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건 궤네다.

“물론 더 필요하지. 유승 선생이 자신만만하게 말한 결론은 사실과 전혀 다르니까.”

궤네는 자신의 속옷을 팔아서라도 심의에 이길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녀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계산일 테지. 궤네는 유승 선생님을 비웃으며 은장도로 배부 받은 법정 자료를 톡톡 찔렀다.

“증인! 묻겠어. 당시 피고학생의 복장은 구체적으로 어땠지?”

“여학생용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지금 같은 골뱅이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지. 그 체육복은 개조상태를 보아 미소의 동복으로 추정되는군.”

할로 고등학교는 교복에 대해 매우 자유로운 방침을 가지고 있다. 교복의 요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어떻게 개조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교복을 개성적으로 개조했고 궤네의 경우는 아예 감색 옷감을 적색으로 바꾼데다 프릴까지 마구 달아놓았다. 오히려 개조를 하지 않은 내 교복이 개성적으로 보일 정도다.

“지금은 늦여름이지. 아직 가을이 도래하지 않은 시기. 그가 이런 날씨에 왜 동복을 입었다고 생각해?”

“체형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본다. 미소의 동체육복은 피트감을 살리기 위한 개조는 하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그렇다면 모순이 발생하는 걸.”

“모순이라고?”

가란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궤네는 외안 렌즈를 반짝였다.

“선배는 그가 브래지어를 입은 모습을 봤지. 그건 방금 증언에 따르면 스포츠센터의 탈의실에서 본 거야. 그걸 어떻게 볼 수 있지? 체형을 감추기 위해 동복을 입었다면 브래지어가 보일 정도로 앞쪽 지퍼를 열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가란 선배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어, 어, 그러니까…그게 어떻게 된 거지?

“또 한 가지. 선배는 전통무예인 조선도가朝鮮刀家 산산심원류散山芯湲流의 면허 전승자야. 공식적으로는 전국대회 톱클래스의 검도선수지. 이 할로 고등학교에서 검도부 주장을 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런 선배가, 공학부의 음침하고 나약한 폐인 한 명을 쫓다가 한 번 놓쳤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그건…그가 의외의 방향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호오, 그 부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

가란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소는 1층 정문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탈의실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당연히 출구 쪽으로 도망칠 거라 생각했던 나는 계단을 한 층 내려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가란 선배는 구소가 도망갈 루트가 출구 외에 달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옳다. 비상시 대피용으로 건물 양 끝에는 문과 계단이 있지만 1층의 문은 평소에 잠겨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앙 현관에 학생증을 인식하여 열리는 개폐장치를 설치한 의미가 없다. 지하철 카드 인식기와 비슷한 높이라 넘어가지 못할 정도도 아니고, 상식이 있는 도망자라면 60대 할머니 경비가 서있는 그곳이 강행돌파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소는 그것을 무시하고 3층 공용세탁소까지 올라가 거기서 붙잡혔다. 그 명백한 도주로 대신 막다른 길로 달렸다. 그것은 납득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속옷을 훔치러 온 사람이 속옷을 입은 걸 드러내고 다니며 들킨 다음엔 막다른 길을 선택해 도망갔다는 이야기로군. 완강기는 넌센스지. 완강기를 타고 내릴 바에는 2층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쪽을 택할 거야.”

궤네는 은장도로 배부 받은 자료를 콕 찍어 들었다. 날짜가 지난 달력을 찢어 넘기듯 그녀는 한 장 한 장 자료를 잡아 뜯었다.

“이번 사건에는 문제가 많아. 구소는 어떻게 기숙사에 침입했을까? 왜 기숙사 내부를 돌아다녔을까? 어째서 위층으로 도망쳤을까? 지금 알 수 있는 건, 속옷을 훔치러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거지.”

“이, 이의 있습니다! 벼, 변호인은 쟁점과 어긋난 쓸데없는 사항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의에 이의를 제기하지. 피고 학생의 행동에는 명백한 의문점들이 남아있어. 그 의문들은 학생 주임이 내놓은 최초의 전제, ‘구소는 속옷을 훔치기 위해 몰래 잠입했다’를 부정하지. 여기서 변호측은 그 전제를 부정해줄 증인 소환을 요청할게.”

증인? 그런 사람이 우리 쪽에 있었던가?

“1학년 C반 미소 학생을 증인으로.”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미소는 의뢰를 할 때부터 구소가 왜 기숙사에 들어왔는지를 이야기했었다. 궤네가 내놓은 이름을 들은 학생회장은 의사봉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그 학생은 피고 학생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학내에서 피고 학생과 관계가 있는 유일한 학생이라고도 보이는군요.”

“그런 쓸데없는 것을 잘도 기억하고 있네. 맞아, 그 후배는 피고 학생의 유일한 친구라고 하더군. 그렇기 때문에 접점이 있는 유일한 학생이기도 하지. 게다가 사건 당일 구소를 기숙사로 부른 건 자신이라고도 주장하더군. 그녀의 증언은 들어봐야 할 거라 생각하는데?”

학생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봉을 탁 내리쳤다.

“변호인의 요청을 인정합니다. 미소 학생을 불러주세요.”

미소는 금방 증인석으로 올라왔다. 심의회의실에 출입할 권한은 없어서 참관은 하지 못했지만 그 결과를 빨리 알고 싶은 마음에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증인, 이름과 소속을.”

“전 1학년 C반 생물계, 미소입니다. 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되나요?”

미소는 긴장한 탓에 어깨를 살짝 떨고 있었다. 흘깃흘깃 구소를 곁눈질하는 모습이 약간 애처로웠다. 그 와중에도 스커트 뒤를 누르는 그 조신한 손놀림이 그대로라는 건 꽤나 인상적이었다.

“변호인 석에선 그녀의 치마 밑은 보이지 않아.”

“안 훔쳐봤어!”

궤네는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변호인 석에서 나와 증인석 앞에 섰다.

“그럼 미소 후배? 후배는 내게 의뢰할 때 구소 후배가 어떤 목적을 갖고 기숙사에 들어왔는지를 이야기했었지? 그 사유에 대해 설명해줘.”

“아,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거 말이죠?”

미소는 가슴께를 누르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실은 며칠 전부터 데스크톱이 말썽이었어요. 어디서 바이러스에 걸렸는지 먹통인지라, 눈물을 머금고 포맷을 하기로 했죠. 컴퓨터에 대해선 구소가 잘 알고 있어서, 굳이 포인트 써가며 센터에 맡기기 보다는 친구의 손을 빌리기로 했어요.”

할로 교육단지 내에서 ‘원’화폐는 쓰지 않는다. 쓸 수 있는 건 ‘포인트’다. 등록금은 나 같은 예외적인 편입이 아닌 이상 전액 면제되지만 그건 등록금이 처음부터 없는 게 아니라 학생이 내지 않을 뿐이다.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장학금의 형태로 등록금을 돌려받는데 이것이 ‘포인트’로 다달이 학생카드에 적립된다. 이 포인트가 할로 교육단지 내에서 통용되는 화폐단위이고 학생들은 이것으로 학교생활을 해 나간다.

“얼마 전에 있었던 누구 씨(으드득) 덕분에 구소는 기숙사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 하지만 무거운 데스크톱을 들고 나가기보다 구소를 몰래 들여보내는 쪽이 편했으니까, 걔한테 몰래 들어오게 했죠.”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법을 썼지?”

“제가 교복이랑 학생증을 빌려줬어요. 구소는 저보다도 약간 작으니까, 제 교복을 입히고 고개 좀 숙여서 들여보내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들어왔다, 고 미소는 덧붙였다. 기숙사에 사람이 거의 없을 마지막 수업시간을 택해 여장을 한 구소를 들여보냈다. 학생회장은 그 증언을 듣고 기숙사 입구의 CCTV영상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프로젝터를 통해 그 당시 여자기숙사 출입구가 비춰졌다. 다른 몇몇 학생이 출입하는 사이로 왜소한 체구에 귀여운 얼굴의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출입문을 통과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유승 선생의 안구는 장식품이었군.”

아니,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영상 속 ‘소녀’와 피고인석의 ‘소년’을 번갈아보며 나는 눈을 비볐다. 감시화면 특유의 왜곡된 원근감 탓에 체구도 달라보였다. 거기다 저 괜시리 귀여운 얼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새삼스레 구소를 돌아보았다. 저 빙글빙글 안경 아래엔 미소년이 살고 있는 건가. 굉장한 주인공 속성인데.

이제까지 한 마디 대사도 없지만.

유승 선생님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도 당연했다. 아무리 알아보기 힘들어도 상대는 뻔히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조사 부족을 탓해도 할 말이 없다.

“서, 으흠, 설마, 저 학생이…으으음!”

“학생 주임은 좀 더 면밀하게 조사에 임해주길 바랍니다.”

영상을 보며 미소는 증언을 계속했다.

“컴퓨터를 재설치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기왕 온 김에 구소에게는 청소나 빨래도 부탁했었죠. 그 사이 계속 교복을 입혀두기도 뭣해서 체육복을 빌려줬어요.”

여장을 감수하고 여자기숙사에 잠입할 것을 강요할 만큼 미소와 구소 사이의 파워밸런스는 명확했다. 동변상련의 기분이 들어 괜히 씁쓸해졌다.

“근데 세탁소로 갔던 구소가 돌아오질 않는 거예요. 밖이 소란스러워져서 잠깐 고개를 내밀어 봤더니 구소가 소란에 말려들었더군요. 어쩌다 빨래가지를 뒤집어쓰고는, 가란 선배에게 팔을 이렇게? 요렇게? 꺾어서 찍어 눌렀는데…”

미소는 팔을 기묘하게 교차시키는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진술했다. 여기까지의 미소의 증언을 듣고 궤네는 은장도를 뽑아들었다. 그녀의 붉은 외안렌즈와 푸른 눈동자가 이상하리만큼 빛을 발했다.

“거기까지! 참으로 귀중한 증언이었어, 미소 후배. 이 증언은 결정적인 걸? 이것으로 충분히 구소 후배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길 수 있겠어.”

궤네는 자신만만하게 구소의 무죄를 주장했다. 확정적인 궤네의 말에 유승 선생님은 기겁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잊고 급하게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저, 저런 거짓부렁이 증언은 참조할 수가…!”

“호오, 선생은 지금 이 증언을 거짓이라 주장하는 거야? 그렇다면 증거를 제시하도록. 증인으로 인정된 사람의 발언을 부정하려면 이의를 먼저 제기하고 모순을 지적해. 그게 순서지.”

“에, 엣헴, 에, 그러니까…” 유승 선생님의 이마가 점점 더 반질반질해졌다. 이마 방위라인은 마지노선을 넘어 어디까지 후퇴할 지 알 수 없었다. 모순을 찾아 유승 선생님의 뇌세포가 필사적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궤네는 조소했다.

“미리 알고 있지 않은 정답 외에는 대답도 못하나? 고군, 잘 봐둬. 선행학습으로 성적이 좋아봐야 그것이 머리가 좋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좋은 사례야. 그리고 정답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무너지면 아무 대답도 못하는 시험 위주의 교육이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해. 세상은 한 없이 넓은데 시험 범위 바깥의 문제가 나왔다고 항의하는 학생들은 전부 저렇게, 잔혹할 정도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야.”

“아니, 시험범위 바깥에서 문제가 출제되었다면 그건 항의하는 게 당연하잖아.”

“평범한 사람은 그렇지. 하지만 천재는 달라. 거기에 답을 하거든. 그것이 설령 배운 것이든, 배우지 않은 것이든 간에.”

딱!

“변호인, 잡담은 삼가주길 바랍니다. 학생 주임, 지금 증언에 거짓이 있습니까?”

학생회장은 의사봉을 휘둘러 궤네의 말을 끊고 유승 선생님에게 이의를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유승 선생님의 표정을 보면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익숙한 표정은 거울 속에서 꽤 자주 봤었다.

“그, 그것이…”

“짓궂어, 산단. 그대는 이미 알고 있잖아? 그대의 무의식은 남들보다 훨씬 친절하니까. 저 증언 어디가 거짓인지 쯤은 벌써 눈치 챘을 터.”

뭐, 뭐라고-?!

나는 놀라서 미소를 돌아보았다. 미소의 얼굴도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구조선에 유승 선생님은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었다.

“변호인, 지금 증언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건가요?”

“아니! 지금 증언이야말로 결정적이고 가장 중요하지. 이 사건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으니까. 사실은 물론 거짓까지 포함해 전부가 섞여있어. 그렇기 때문에 저 증언은 잘못되지 않은 거야. 이 사건을 해결해줄 최고의 증언이라고.”

나는 궤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짓이 섞여있는데도 잘못되지 않은, 아니 섞여있기에 최고의 증언이라니.

궤네는 은장도를 치켜들었다.

“모든 의문을 설명해줄 새로운 가설을 들려주지. 그것은 골목길을 돌았더니 미소녀와 부딪혀 속옷을 보고 만 것 같은, 통속적인 우연과 악의의 연속이야.”

궤네는 이동식 화이트보드에 단서들을 적어가며 강의를 시작했다.

“우리는 몇 가지 확정된 사실을 알고 있지. 첫 번째, 구소는 여장을 하고 기숙사에 들어왔다. 그 목적이나 동기에 대해선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썼을까? 여장만이 아니지. 출입하기 위해선 여학생의 학생증도 필요해. 즉 그는 출입할 일체의 모든 준비물을 미소로부터 구했다는 거야. 당연히, 학생증도 미소의 것이겠지. 그럼 교복 일체와 할로 단지 내에선 지갑이나 다름없는 학생증 IC카드도 빌려준 채 기숙사 바깥을 헤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군.”

“그리고 두 번째, 구소는 수업시간에 기숙사에 들어왔다. 즉 기숙사에 사람이 없을 시간대를 노려 들어왔다고 밖에 볼 수 없지. 꽤나 용의주도해. 그 이전 수업시간이라면 무단결석을 인지한 교사가 학생을 찾으려 들겠지만 마지막 교시라면 이야기가 달라. 대체로 내일 알아보려 하겠지. 그리고 마지막 교시라면 기숙사에 들어갈 때에도 경비는 그리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야. 실제 구소 말고도 들어온 학생이 몇몇은 있었으니까. 사람이 적으면서도 출입이 납득되는 시간대를 노린 거지.”

“세 번째, 구소는 3층으로 도망쳤다. 구소가 구속된 곳은 3층이지. 하지만 그곳은 막다른 곳이며 잘못 도망친 곳이기도 하지.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사실은, 3층에는 미소의 방이 있다는 점이지.”

누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궤네는 속사포처럼 사실을 뿌려댔다. 내 귀에 들어온 정보가 조합되기도 전에 궤네는 그 결과를 내놓았다.

“구소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기숙사에 들어왔어. 컴퓨터를 고치거나 여학생들의 속옷 청결상태를 확인하는 하찮은 일보다 더 중요한 과업이 후배에겐 있었지.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후배는 기숙사에서 활동하기 편한 옷을 미소의 방에서 조달했고, 기숙사 내부를 돌아다녔지. 가란 선배의 로커에서 옷을 꺼내는 장면을 목격당하고 당황한 구소는 도망쳤어. 하지만 그는 과업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했지. 그에겐 시간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숙사 바깥으로 도망칠 순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숙사 내부에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피하려 했지. 3층에 있는, 미소의 방으로.”

“하지만 구소는 반대편의 세탁소에서 잡혔잖아?”

“인간의 공간인지는 방향에 따라 그 속도와 정확도가 달라. 제일 먼저 상하, 그 다음 전후, 마지막으로 좌우. 좌우를 판단하는 것은 가장 느리고 잘못 인지하기 쉽지. 하물며 구소는 여자기숙사와 좌우가 반대인 곳에서 생활해 왔어. 얼마든지 잘못 꺾을 수 있지. 위층으로 도망치는 것은 실수하지 않았지만, 좌우구분에서 실수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막다른 길인 3층 공용세탁소에서 붙잡힌 거지.”

경험은 때때로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궤네의 말 대로였다.

“허, 허나! 그렇다면 그 과업이란 게 뭔가? 속옷을 훔치는 것 말고, 이성의 기숙사를 몰래 돌아다녀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

핏대를 세워가며 유승 선생님이 외쳤다. 궤네는 조소를 지었다.

“적어도 구소 후배에겐 속옷을 훔칠 동기가 없어.”

“무, 무슨?! 그 학생은 수업시간에도 도촬 영상을 몰래 봤었어! 충분히 그럴만한 동기가-”

“증거가 있지. 구소에겐 동기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증거는 이미 선생이 제출 했는걸?”

“뭣이?”

유승 선생님은 얼빠진 얼굴로 의장석을 돌아보았다. 교탁 위에는 제출된 증거가 딱 하나, 투명한 비닐에 담겨 놓여있었다. 가슴을 가리고 받쳐주는 모종의 조그마한 천 조각.

“저 속옷은 구소 후배가 입고 있던 속옷이지. 선생은 그것을 기숙사에서 훔친 것이라 단정했지만, 정말로 그럴까?”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궤네를 보았다. 설마, 정말로 저 속옷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훔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셈이야? 궤네는 커다란 파일을 하나 꺼내었다. 꽤나 무거웠는지 변호인 석 앞 책상에 놓자 쿵하는 소리가 심의회의실을 울렸다.

“여기 학생기록부가 있지. 할로 고등학교 모든 재학생들의 신체 사이즈가 기록되어 있어. 저 속옷의 사이즈에 맞는, AAA컵의 가슴 사이즈를 가진 학생은 딱 한 명이야. 마치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이 가슴 가리개가 맞는 학생은 단 한 명이지. 그 학생은 속옷을 도둑맞은 적이 없고, 처음부터 그 옷을 입고 있었어.”

“그, 그걸 리가! 그렇다면 그 학생을 증인으로 불렀어야지!”

“부를 필요도 없어. 처음부터 그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잖아? 그는, 아니 그녀는 이미 여기 있으니까.”

궤네는 변호인 석에 나와 피고인석 앞에 섰다. 은장도의 날을 만지작거리며 궤네는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런 궤네를 잔뜩 경계하며 구소는 몸을 움츠렸다. 미소의 체육복을 입은 그를 앞에 두고 궤네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을 빛냈다. 그리고 문답무용으로 그의 체육복 앞 지퍼를 잡아챘다!

“히-익?!”

“여러분, 다시 소개하죠. 1학년 A반 AAA컵의 가슴을 가진, 구소 입니다!”

궤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서커스의 사회자처럼 구소에게 팔을 벌렸다. 거기에는 상의를 빼앗겨 반라가 되어 안경알 아래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필사적으로 가슴께를 가리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난생 처음 보는 동년배 소녀의 반라를 머릿속에 새겨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 구소가 여자애…라고?”

“그래. 여자인 구소가 여학생의 속옷을 훔칠 이유는 없지. 이상, QED."

“자, 잠깐! 이, 이의 있습니다! 이건, 이건, 너무나도…”

유승 선생님은 혓바닥이 굳어버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궤네는 구소에게서 빼앗은 상의를 돌려주지도 않은 채 설명을 부연했다.

“선생이 제출한 브래지어, 그건 엑사브라라고 하지. 착용하는 것만으로 가슴을 크게 만들어준다는 기능성 속옷이야. AAA컵의 기능성 속옷을 입어야 할 만한 체형의 소유자는 이 학교에 달리 없어. 속옷이 본인의 것일진대, 그 속옷을 훔친 도둑으로 몰린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지.”

자신의 체형을 33/24/34의 퍼펙트 보디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는 한 사람은 진심으로 자기가 그러한 체형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고로 그 속옷은 구소 후배, 본인의 것이며 여학생 기숙사에 생활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지. 그리고 구소 후배가 여학생이기에, 후배는 동복 체육복의 지퍼를 열고 다닐 수 있었던 거야. 뭐, 그 유감스러운 볼륨 탓에 남자로 오인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본인의 탓이지. 이제까지 학교에 남학생으로서 다녀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불어넣었으니까.”

이제까지 남학생으로 다녔기 때문에 여자기숙사에 들어올 수 없었던 구소는 여장을 해야만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더구나 저 엑사브라가 구소 본인의 것이라면, 강제로 속옷을 벗어야 했을 텐데 그러고도 남자로 오해받은 채로 심의회의에 서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그 학생이 여자였다고? 그, 그럴 리가…어, 어떻게 성별을 속인 채 입학하는 게 가능하지…? 초등학교, 중학교 기록까지 전부 속여오지 않으면 그런 건 불가능한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성별을 숨기고 지낼 필요는 없어, 선생. 더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뭣…?!”

“그리고 그것이 이 사건의, 이제까지 있어왔던 속옷 도둑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테지.”

“자, 잠깐! 나, 난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이, 이미 구소의 무죄는 증명된 거잖아?”

미소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궤네는 피식 웃었다.

“무죄? 무슨 소리지? 나는 딱히 무죄를 증명하지 않았는데?”

“……지금 뭐라고…?”

“착각하지 마, 후배. 나는 별로, 구소 후배를 위해서 변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

부끄러움도 수줍음도 새침도 없는 차가운 진실로 무장한 말이었다. 그랬다. 이 녀석이 유명한 진짜 이유. 모든 피고인을 무죄로 만든다는 캐치프레이즈 뒤에는 터무니없는 행간이 숨겨져 있다.

단, 절대 피고인을 구해주지 않는.

의뢰받은 내용은 반드시 승소하여 무죄로 만들지만 그 결과 피고인은 구원받지 못한다. 무죄가 된 피로인은 어느 법정처럼 환호성과 꽃종이를 받으며 억울함을 벗고 안도의 미소를 지어야 하건만, 궤네가 변호를 맡은 심의회의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누명을 벗었다.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네.

“맞아, 고군. 그대에겐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무엇보다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피고인석에 웅크리고 있는 구소 후배의 알몸이잖아?”

“…아니, 그건 신경 쓰면 안 될 것 같아. 그보다 구소에게 어서 옷을 돌려줘.”

“착각하지 마. 난 그대를 위해 옷을 벗겼는데, 그대가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처음부터 그랬지만, 그건 새치미도 뭣도 아니게 되어버렸구나….”

그냥 변태다. 동하고 뭐고 없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 다른 여자애의 옷을 벗기지 마.

궤네는 끝까지 체육복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별 수 없이 내 교복 상의를 벗어 구소에게 덮어주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구소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근!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동한다는 게 이런 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구소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내 마음도 흔들흔들-

“냉큼 자리로 돌아오도록. 아직 회의가 끝난 게 아니야.”

나는 허둥지둥 변호인석으로 돌아왔다. 런닝 바람으로 돌아온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며 궤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를 보면 노력이란 단어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여실히 깨닫게 돼. 그간 새치미로 그대를 동하게 하려 했던 노고가 참으로 무참하기 그지없군. 거기다 애써 벗겨놨더니 다시 입혀주질 않나. 하지만 여기에도 진리가 보이는 걸. 한 명에게 옷을 입히기 위해서 다른 한 명이 옷을 벗어야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네가 옷을 돌려줬으면 다른 한 명이 벗을 것도 없이 입혀줄 수 있었어.”

“맞아. 그 또한 진리지. 구소 후배가 옷을 벗건 누명을 벗건, 속옷도둑은 컬렉션을 탐미하고 있다는 것에 차이는 없어. 하지만 속옷을 잃어버린 누군가는 반드시 존재해. 지금도 누군가 자기의 속옷을 벗어 입혀주길 기다리는 소녀가 있을지도 모르지.”

넌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거냐. 멋진 말투로 형편없는 대사를 읊지 말라고.

“이, 이의 있습니다! 서, 설령, 설령 여성이라 해도, 동성애자라면, 레즈비언이라면 충분히 상대의 속옷을 훔칠 동기가-”

“이의 있음. 유승 선생도 남자는 남자군. 잘 모르니 가르쳐주지. 여자는 다른 여자의 속옷을 훔치지 않아.”

“……뭣?”

“애초에 속옷을 훔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고 있지? 왜 속옷이 성적인 대상이 되지? 사회 규범과 윤리 의식이 속옷에 지나친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본질은 간단해. 냄새야. 속옷은 착용자의 가장 농밀한 체취를 담게 되지. 이 체향은 유전적인 마술을 부려. 사람의 후각은 자기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읽어내. 예를 들면, 냄새를 통해 상대의 메이저 히스토콤페티빌리티 콤플렉스(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가 자신의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하는 거야.”

딸국, 메이저…뭐?

그게 야구 리그 이름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와 유성 선생님은 같이 딸꾹질을 해댔다.

“한글, 아니 한자로는 주조직적합성 복합체라고 해. 자세히 이야기 해봐야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테니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유전자가 밀집된 덩어리야. 면역체계와 관련이 깊지. 사람을 포함한 포유동물들은 체향에서 상대와 나의 MHC 차이를 읽어내고 그 차이가 클수록 매력적인 향기로 인식하지. 왜 이성의 향기는 더 감미로울까? 별 거 아니야. 거기엔 환상도 뭣도 없어. 상대가 보유한 항체가 자신과 다르면 다를수록 후손이 가지게 될 항체의 범위가 늘어나게 되니까.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적인 반응이 이끌어낸 환상이지. 유전자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상대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는 거야.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보다 많은 까닭이 바로 그거지. 이성의 유전자가 동성의 유전자보다 훨씬 더 차이가 크다. 그뿐이라고.”

“이성의 체향이 더 좋은 것은 그 때문이야. 반대로 말하면, 동성의 체향은 그리 대단치 않게 느껴지고 되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되지.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가 섞여봐야 열성인자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질 뿐이니까. 고로 생물학적인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아. 문화적인 동성애자가 존재할 뿐이지. 그리고 문화적인 동성애자는 자기가 특별히 생각하는 대상 외의 동성이 입은 속옷에는 별 성적인 흥분을 느끼지 못할 걸? 상징성이 떨어지니까.”

“하물며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는 더 해. 여성 동성애는 관계 의존적이야. 성적인 건 그 다음이고. 그래도 굳이 속옷을 훔친다면 누구의 속옷을 훔치느냐가 중요한데, 이제껏 있어왔던 속옷도둑사건은 지나치게 광범위해. 따라서 여성동성애자의 소행으로는 볼 수 없어.”

궤네의 장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솔직히 하나도 이해 못했다. 유승 선생님은 악덕 보험설계사에게 사기를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열등한 나나 평범한 유성 선생님의 몰이해와는 관계없이 학생회장은 다른 점을 지적했다.

“유승 학생주임의 이의를 기각합니다. 적어도 피고학생의 동성애자임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허, 허나 그런 게…!”

“맞아. 가능할 리 없지. 이 학교에 있는 동안 구소는 남자로 지내왔으니까.”

궤네는 조소했다. 그 동안 연애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런 증언은 없었다. 오히려 여학생들의 기피대상이었던 구소였다.

“그, 그렇지! 저, 저기, 저 증인! 미소 학생이 구소 학생과 연인관계였던 것이 아닙니까? 증인에게 확인해 보면…! …보면…”

하지만 이내 유승 선생님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그 이유는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미소는 애초에 구소의 변호를 의뢰한 의뢰인이며 우리가 요청한 증인이다. 구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이 타이밍에서 할 리가 없다.

“호오, 꽤 아픈 곳을 찌르는 걸?”

“?!”

“그, 그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먼! 암암, 심의회의에서는 사실만을 다뤄야 하지!”

생각지도 못한 궤네의 지원에 유승 선생님은 반색했다. 궤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미소를 돌아보았다.

“미소 후배, 사실대로 말해줘. 그대와 구소 후배의 관계를. 한 점 가감 없이, 의심의 여지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미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서리를 치며 스스로를 껴안은 손에 잡힌 교복에 거친 주름이 새겨졌다. 미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변호를 의뢰했을 뿐인데 어째서 원치도 않는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꽤나 혼란스러울 테지. 하지만 궤네에게 먼저 의뢰를 했었던 내가 말하자면, 궤네에게 의뢰한 순간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 탓한다면 궤네에게 의뢰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하고만 자신의 불행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구소와 저는…그러니까…”

“무엇을 망설이나, 후배? 망설일 거 없어. 자네의 그 증언으로 구소는 무죄가 될 수 있어. 반드시.”

“그, 그치만!”

“괜찮아, ‘사실’을 말해도. 구소 후배를 ‘구하고’ 싶지 않아?”

궤네는 사근사근하게 미소를 재촉했다. 은근한 그 말에서 나는 묘한 악센트를 캐치했다. 내 귀에는 그 말이 꼭 거짓말을 하라는 말로 들렸다. 미소도 표정을 바꾸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증언했다.

“구소와 저는 소꿉친구일 뿐이에요. 별로 사귀거나 하고 있지 않아요.”

“거짓말하지 마, 후배. 둘이 사귀고 있잖아.”

콰광, 하는 효과음이 미소 등 뒤로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딱 잘라 말해버리는 궤네를 보고 미소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미소는 미소 나름대로 궤네를 파악할 셈이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궤네는 언제나, 이쪽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서로 좋아하잖아? 단순한 우정만으로는 이제 막 시작한 학기 생활비의 절반을 내게 헌납해가면서 변호를 의뢰할 리가 없지. 친구를 위해 돈을 쓴다는 전설을 나는 믿지 않아. 거기엔 우정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야.”

“우, 우읏…”

“구소 후배의 누명을 벗기고 싶다면 사실을 말해줘.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미소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유승 선생님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이걸로 구소의 동기가 입증되었어! 제출해버린 속옷은 이쪽의 착오였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구소가 속옷을 훔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으하핫!”

유승 선생님은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어퍼컷을 날렸다. 몇 번이고 팔을 붕붕 휘두르는 선생님을 보며 궤네는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 한 가지 알려줄 일이 있는데.”

“하! 하! 뭔가, 궤네 학생? 항복 선언이라면 기쁘게 듣도록 하지요.”

“별로 항복 선언 같은 건 아니야. 아직 심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한 가지 선생이 잊고 있는 듯해서 그 점을 알려줄게.”

유승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었다. 궤네의 말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것일까.

“유승 선생. 아까 이렇게 말했었지? 어떻게 성별을 속이고 입학할 수 있는지, 말이야. 간단해. 입학이 확정된 두 사람이 서로의 성별을 바꾸어 생활하면 돼. 입학 전형 때의 그 수많은 서류와 초등학교, 중학교의 학생기록부를 위조할 필요도 없지. 자신과 성별을 바꿀 한 사람만 있으면 돼. 그 사람과 친밀한 사이일수록 더 쉽게 할 수 있겠지.”

“두 사람이 성별을 바꾸어…?”

궤네는 이번엔 증인석으로 향했다. 은장도를 만지작거리며 다가오는 궤네를 보며 미소는 식은땀을 흘렸다. 궤네는 난폭한 미소를 지으며 미소의 멱살을 재빠르게 움켜쥐었다. 가느다란 팔은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민첩하고 날카롭게 미소를 증인석 책상위에 내리 눌렀다. 멀리서 가란 선배의 순수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이, 이게 뭐하는-?!”

“잠깐이면 돼. 버둥대지 마. 움직이면 재미없어.”

궤네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미소의 팔을 뒤로 꺾어 누른 채 다른 손으로 은장도를 고쳐 쥐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학경이 달려오다 흠칫하고 멈춰 섰다. 궤네는 씨익 웃으며 미소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아하아, 고군도 궁금해 하더군. 등짝을 좀 볼까?”

난 궁금해 한 적 없어! 은화 3냥도 받지 않았고! 그나저나 그 숨소리는 역시 국어책 읽기로구나.

미소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에 궤네는 은장도를 휘둘렀다. 찌익-소녀의 순결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궤네는 어느 제빵사처럼 기분 나쁘게 손가락을 꼼지락 대고는, 새하얗게 드러난 미소의 등에서 브래지어를 낚아챘다.

“끼야야아아앗!!”

“이, 이게 무슨 짓인가, 궤네 학생! 심의회의에서 이런 짓을 하고도-”

“유승 선생도 한 번은 했잖아?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고.”

“무, 무슨?”

“어머, 구소 후배에게서 저 엑사브라를 어떻게 빼앗았는지 그 경위를 물어봐도 될까?”

유승 선생님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남자라고 착각하고 한 짓이라지만, 벗겨놓고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서 브래지어를 강탈한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방금 전 구소에게서 상의를 박탈했을 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남녀차별에도 정도가 있지.

“…가 아니라! 이번엔 정말 무슨 짓이야?”

“기운 넘치네, 고군.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야 안구에 복이 넘치는 광경이 들어오고는 있…이 아니라! 여자애의 옷을 찢다니! 이런 공공장소에서! 이 책이 여성가족부의 손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라이트노벨 전체가 대중에게 백안시되고 말 거야!”

“후, 이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정을 준수하고 있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네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이 그 심의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잘 보라고.”

“무, 무엇을?”

“이것을.”

궤네는 손에 들린 브래지어의 컵을 뒤집었다. 퐁 하는 귀여운 효과음과 함께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여진 타원형의 보형물이 떨어졌다. 크기는 미소의 가슴크기와 매우 비슷했다.

“당연하지. 이건 의 가슴이었으니까. 안 그래? 미소 군?”

궤네는 은장도로 PAD를 찍어 들었다. 미소 앞에는 짖어진 교복 밑으로 미소의 속살이 보였다. 가늘지만 선이 강한 허리라인은 남자아이의 그것이었다. 얼굴을 구기고 일어선 미소는 특유의 조신한 손놀림도 잊고 짖어진 옷섶을 여미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이제까지의 미소의 거동을 떠올랐다. 가슴께와 치마를 누르는 조신한 손놀림은 꽃다운 소녀 마음이 아닌 정체를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것이었다. 오해도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뭐가 그녀의 조신한 손놀림을 기억하고 있다냐.

“이상의 이유로 구소 양은 이성애자임이 증명됐어. 그녀는 신룡에게 여자아이의 팬티를 달라는 소원도 빌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 더 할 말 있나, 선생?”

“어, 어버, 어버버버버…”

유승 선생님은 혀가 굳어 버릴 충격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제야 궤네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입학한 두 남녀가 성별을 바꾸어 생활한다. 그 터무니없는 발상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다.

“피고인 구소 후배와 미소 후배는 보는 바와 같이 성별을 바꾸어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건 매우 귀찮은 일이지. 하지만 이익이 없는 건 아니야. 여자들만 사는 기숙사에 남자 혼자 들어가는 전개는 고전적인 로망인 걸.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득이 있어. 그러네, 예를 들면-”

이성의 속옷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던가.

낮게 읊조린 궤네의 말에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등 뒤로 오싹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깨닫고 보니 심의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미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미소는 이미 엉망진창이었지만 궤네는 인정사정없었다.

“신출귀몰한 속옷도둑은 올해 1학기 중간고사 이후부터 나타났어. 4월 29일 첫 번째 사건 이후 총 37회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지. 한 곳에서 일어난 범죄라고 생각하면 잡히지 않는 게 이상한 사건이야. 그 이전에 이런 사건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신입생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성별을 바꾸어서라도 이성 기숙사에 들어올 열정이 있는 누군가가 매우 유력한 용의자가 될 테지.”

미소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내심 귀엽다고 생각했던 면상은 허연 삼백안을 드러내며 궤네를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그런 얼토당토않은 추론 따위 인정 못해. 증거, 증거가 있고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후배는 내게 변호를 의뢰했어. 우정 때문이 아니면 사랑 때문일까? 아닐 걸? 연인을 위해 돈을 쓴다는 전설을 나는 믿지 않아. 사랑, 우정 같은 애매모호한 개념보다 더 확실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후배는 내게 변호를 의뢰했을 거야. 막대한 포인트가 아깝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그게 뭘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후배의 증언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궤네는 검지를 까닥거리며 씨익 웃었다.

“미소 후배, 후배는 직접 목격한 것을 증언했어.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하나 있군. 후배는 도대체 어떻게 구소가 구속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지?”

미소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서리쳤다.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야 방에서 몰래…”

“구소가 잡힌 장소는 공용세탁소. ‘ㄱ’자로 꺾인 복도 반대편에 있는 그대의 방에서는 볼 수 없어. 빛이 휘어질만한 중력장이 중앙계단 쪽에서 발생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물론 중력장의 존재를 입증할 필요는 없어. 당시 중력장은 없었고, 후배 또한 기숙사에 없었으니까.”

“!!”

“무엇을 근거로? 방금 전 마지막 수업시간 때 기숙사 출입구의 CCTV 영상을 확인했잖아? 거기에 미소 후배의 모습은 찍혀있지 않더군. 아마 그 전, 그 이전 시간을 확인해 봐도 찍혀있지 않을 테니 변명해봤자 소용없어.”

나는 입을 딱 벌렸다. CCTV의 영상이 빠르게 되감겨져 다시 재생되었다. 그 어디에도 미소의 모습은 찍혀 있지 않았다. 그 때 가란 선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잠깐, 기다려. 미소는 내가 구소를 역일자 꺾기로 체포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런 자세한 묘사는 불가능하다.”

“맞아, 그것이 이 사건의 중요한 포인트며 미소 후배의 증언이 중요한 이유지. 미소는 그 자리에 없었어. 그곳에 있었다면, 또한 구소 후배를 들여보낸 것이 미소 후배 본인이라면, 왜 체포 당시 바로 나서서 구소를 변호하지 않았지? 그는 구소 후배가 구속된 후 2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찾아왔어. 왜 그런 딜레이가 발생했을까?”

궤네의 시선이 미소를 향했다. 궤네는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듯 양팔을 감싸 안고 부르르 떨었다. 미소의 겁에 질린 표정은 궤네에게 있어선 핫 스팟이나 다름없었다.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 광경을 봤다는 것. 알기 쉽잖아? 우리가 CCTV의 영상을 확인하는 거랑 똑같아. 공용세탁소에도 말이지.”

“아니, 그곳엔 CCTV 카메라가 없는데…서, 설마?”

“맞아. 몰래카메라지. 미소는 공용세탁소에 설치해둔 카메라에 저장된 영상으로 구소가 잡힌 것을 확인한 거야.”

몰래카메라라니. 그런 게 여자기숙사에 설치되어 있단 말이야?

나는 퍼뜩 방과 후에 궤네와 교실에서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학내 인트라넷에 떠돌아다니는 학교 기숙사 도촬 영상. 설마 그것은,

“요 사이 학내 인트라넷에 도촬 영상이 유출된 일이 있었어. 아마 그것은 찍은 사람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겠지. 인트라넷 특성 상 쉽게 퍼지진 않았지만 그걸 본 사람들은 카메라가 어디쯤 설치되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는 영상이었으니까. 설치자는 최대한 빨리 이를 회수하고 싶었겠지. 자, 여기서 문제. 카메라는 대체로 어디에 설치될까?”

피부노출이 많고,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공용장소.

기숙사에서 뽑자면 스포츠 센터의 탈의실, 공중목욕탕 같은 곳.

“그래. 구소 후배가 목격된 장소들이지.”

“그럼 구소가 기숙사에 들어온 이유는-”

“당연히, 카메라를 회수하기 위해서야. 카메라만 찾아내면, 설치한 사람은 쉽게 알아낼 수 있으니까. 이런 폐쇄된 학교에서는 말이지.”

동복체육복은 아마 작업복 대용이었을 거야, 하고 궤네는 덧붙였다. 카메라는 구소와 미소, 이 두 명이 같이 설치했을 것이다. 공학부인 구소는 카메라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있었고 미소가 알아본 장소에 교묘하게 설치했다. 이 카메라로 이들은 대량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한데 영상이 유출되었고 이 때문에 덜미를 잡힐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카메라를 회수하려 했으나 미소에겐 구소만큼의 기술이 없었다. 한 학기 동안 들키지 않게 감쪽같이 숨겨놓은 카메라들을 꺼내는 것은 구소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소를 기숙사로 들여보냈는데, 들켜버린 거야.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여자 속옷을 입고 있는 여자애를 남자애로 오인하다니. 하지만 문제는 그쪽이 아니었어. 구소가 속옷도둑으로 확정되면, 이제까지 없어진 속옷을 찾아 구소의 방을 수색하게 되겠지. 그러면 도촬기기들이 걸리고 말아. 그것만은 막아야 했어. 왜냐하면 진짜 속옷도둑이 잡히고 말 테니.”

공용 장소에 설치된 카메라는, 프라이버시의 침해 여부를 묻지 않고 소녀들의 은밀한 속옷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가는지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었을 설치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열등한 나라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미소가, 속옷을 훔쳤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우리의 의뢰인은 여자 속옷을 위해 성별을 바꾸어 기숙사에 들어올 정도의 열정적인 변태였다.

“즈, 증거는 있나? 구소가 몰카를 설치했다는 증거는?”

“그거야 간단해. 미소 후배는 구소가 잡히는 장면을 어떤 카메라가 찍은 영상으로 봤을까?”

“……아앗…!”

그랬다. 미소는 당시 기숙사에 없었으므로 나중에 몰카에 찍힌 영상을 확인하고 구소가 잡혀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랬다면 공용세탁소에는 카메라가 남아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회수하기위해 구소를 기숙사에 들여보냈을 정도다. 미소는 쉽게 회수하지 못했겠지. 누가 설치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최고의 증거물이다.

정말로, 미소의 그 증언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감추어 두었던 몰래 카메라의 존재, 구소의 동기, 미소가 의뢰를 한 이유까지. 거짓말과 사실이 섞여있던 그 증언은, 그 거짓말 탓에 모든 것을 드러내고 말았고 그 사실 탓에 모든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그, 그렇다면 진짜 속옷도둑은…?”

“글쎄? 미소 후배일수도, 아닐 수도 있지. 구소가 잡힌 지 2시간 만에 내게 의뢰했으니 속옷을 처분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어. 기숙사 근처를 찾아보면 나오지 않을까? 그런 건 나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야. 내가 입증해야할 것은 어디까지나 구소는 속옷도둑이 아니었다, 이 한 가지뿐인걸.”

“하, 하지만 그, 아니 그녀는 미소 학생과 공범일 가능성이 있…”

“여죄를 추궁하는 건 나중에 하시지, 선생. 이 건에서 구소 학생은 어디까지나 현행범으로 구속되었고 그 현행범죄가 입증되지 않은 이상, 이 심의회의에서 다룰 내용이 아니야. 구소는 당시 속옷을 훔칠 이유도 없었고 훔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입고 있던 속옷을 강탈당했지. 거기다 그 어떤 여자애가 발정기, 실례, 사춘기의 남자애들이 득실한 기숙사에 홀로 지내고 싶을까? 구소 후배는 오히려 피해자야. 늑대 우리 속에 숨어든 양이지. 한 남학생이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의 실현을 위해 소꿉친구 내지는 여자 친구를 희생시켰다. 이 사건은 그런 불행에서 나타난 오해였던 거야.”

궤네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그녀를 따라 끄덕일 수 없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기숙사에 홀로 남자라는 미소의 꿈만 같은 상황에 눈이 멀어, 반대로 남자 기숙사에 홀로 여자라는 구소의 상황을 깨닫지 못했다.

“그거 동하지 않나?”

“본인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래 보이는걸. 과연, 그대의 방에 내가 이사를 하면 그대가 동하겠는데.”

“아니, 그렇지 않을 걸.”

네가 내 방에 들어왔다간 한 숨도 못 잘 거다. 동해서라기보단 다른 의미로.

늑대와 양이 한 우리에 들어간다면 양은 불면증에 시달릴 것이 틀림없다.

나는 구소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건네준 교복 앞섬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만 굴려 미소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구소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솔직히 잘 알 수 없었다. 소꿉친구를 위해, 혹은 남자친구를 위해 반년이나 성별을 속이고 남자들 사이에서 지내온 소녀는 지금 발가벗겨진 채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

구소는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심의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피고인으로서의 발언을 요구할 때에도 그녀는 그저 얼굴을 품에 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절한 미소의 자기변론도, 식은땀 섞인 유승 선생님의 사건검증도, 양날의 칼 같이 모두를 상처 입히는 궤네의 변호도 구소에겐 마치 TV 속 잡음처럼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구소 학생이 속옷을 훔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무효 행동의 입증보다 유효 행동의 입증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선생? 그보다 미소 후배, 그대가 속옷도둑이라고 자백만 하면 구소의 누명은 참으로 쉽게 벗길 수 있어. 어때?”

“웃기지 마…! 이, 이런 결과를 바라고 너에게 의뢰한 게 아니야!”

미소는 치를 떨었다. 궤네는 웃었다.

“후배가 어떤 결과를 바랐는지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딱히, 미소 후배 그대를 위해서 변호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저 말투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여전히 새치미와는 거리가 먼, 그냥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지만.

‘구소는 어떤 결과를 원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의회의에서 구소는 한 마디 변명도, 한 마디 변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누명이 벗겨지길 원했을까? 피고로 심의회의에 나오게 되었는데도 그녀는 유승 선생님의 제멋대로인 검증에도 반론하지 않고, 속옷을 빼앗기면서도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다지 누명을 벗고 싶었던 것이 아니지 않을까?

변호인 측으로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좀 어떤가 싶지만, 구소의 태도는 옆에서 보고 화가 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의뢰를 해온 것도 미소였지만 그 미소의 노력에도 구소는 아무런 리액션을 취해주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피고인석에 서있었을 뿐이었다.

“유승 학생 주임,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처음 증거로 제출한 엑사브라 외 구소 학생이 속옷을 훔쳤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그, 그건…에, 에헴, 그, 그게…”

유승 선생님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학생회장은 의사봉을 휘둘렀다.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도주 중에 구소 학생은 입고 있던 속옷 외에 다른 속옷을 갖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공용 세탁소에서 잡히기 이전에 그녀는 속옷을 훔치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도주 중인 사람이 속옷을 훔칠 것으로는 판단할 수 없으며 체포 직전의 상황은 체포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사고일 가능성이 있으며 학생 주임 측은 이것이 고의적인 절취임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구소 학생과 미소 학생은 성별을 속인 점은 허위로 서류를 작성한 것으로 엄연한 교법 형법분야 제 20장 문서에 관련법 제 227조에 위반합니다만 지금의 심의는 어디까지나 금일 있었던 여학생 기숙사에서의 속옷 절취에 대한 건으로 한정됩니다. 당 혐의에 대해 구소 학생이 유효행동이 있었음을 학생주임측이 입증하지 못했으므로 따라서 당 혐의에 한정해 구소 학생의 무죄를 의결합니다.”

딱, 딱, 딱!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나무망치가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로 심의회의는 종결되었다. 구소와 미소는 무죄가 결정됨과 동시에 심의회의 중 입증된 문서 위조 및 무단 기숙사 침입 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유승 선생님은 분을 삭이며 우리를 일별했다. 선생님의 머리는 열흘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연히 더 벗겨져 있었다. 내 심의회의 때에 이어 이번 구소의 건까지 2연속 패배다. 학생 주임 경력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겠지. 그 등 뒤로 궤네는 빈정거렸다.

“이걸로 끝이로군. 한 건 해결 했는걸?”

아니, 해결이고 뭐고 피고인은 물론 의뢰인까지 구속시켜버리는 변호사가 대체 어디 있냐고. 엉망진창인 결과다.

미소는 끌려가면서 궤네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등 쪽이 찢어진 옷을 입고 학경에게 끌려가는 그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구소는 옷깃을 여미며 그 뒤를 따랐다. 골뱅이 안경 밑으로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이걸로 끝난 걸까?”

뒷맛이 씁쓸했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심의회의실을 정리하고 나오면서도 무언가 개운하지 않았다.

미소의 억지로 구소는 남장을 한 채로 남학생 기숙사에서 1학기가 넘는 기간을 생활해 왔다. 그건 그야말로 늑대 우리 안에 사는 한 마리 양 같은 신세다. 그 동안 그녀가 남모르게 마음 졸여왔을 그 고통은 대체 어디의 누가 보상해준다는 걸까.

한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이 옷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그 등가에는 처음부터 옷을 벗고 있던 한 사람이 존재하는 불합리가 섞여있다.

구소는 처음부터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옷을 뺏어갔던 미소는 이제 대가를 치르지만, 구소는 그에 대한 배상을 받지 못하고 미소와 같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 저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입학 서류에 허위사실을 기재하고 들어온 셈이니, 이번 심의에서 밝혀진 도촬까지 포함하면 제적이 아닐까? 아마 입학 취소처분이 내려질 거야. 영영 이 학교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테지.”

궤네는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실제로도 남의 일이었지만.

“구소에겐 안 된 일이네. 남자 친구를 잘못 사귄 탓에 이런…”

“아니, 그렇지 않아, 고군. 내가 보기에 그 둘은 천생연분이었는데?”

“천생연분?”

“그래, 고군. 구소 후배는 이번 심의회의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왜일까? 피고인 본인에게도 발언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데.”

“그야…”

그건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구소의 태도는 누명을 쓴 피고인으로서 너무나도 불성실했다.

“구소 후배는 지쳤을 뿐이야. 이 학교에 다니는 게 말이지.”

“누명을 벗고 싶지 않았다는 거야?”

“누명을 벗고 싶지 않았다면 내 논리에 반대했겠지. 구소 후배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누명을 쓰든, 누명이 벗겨지고 도촬범이 되든, 이 학교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았어. 구소 후배는 그녀의 학생생활을 끝내줄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궤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싶은 나에게, 학교를 그만두기 위한 노력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구소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

“엑사브라. 그건 입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커진다는 마법의 기능성 브래지어지. 효과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그게 왜?”

“구소 후배는 남장을 하고 학교를 다녔어. 그런 그녀가 가슴을 키우고 싶어 한 이유가 달리 있을까?”

그랬다. 남장을 위해서라면, 가슴은 오히려 방해만 된다. 가란 선배처럼 압박붕대로 감아 두지 못할망정 기능성 속옷으로 커지게 놔둘 리가 없다.

강요에 의해 남장을 하고 학교생활을 해온 구소.

거기에 어떤 불안과 스트레스가 있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엑사브라는, 누군가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채주길 간절히 바란,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한 구소의 소심한 자기표현이 아니었을까.

“아,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끝난 사건에 계속 의문을 갖다니, 좋지 않은 버릇이야. 일사부재리라고, 고군. 지나간 사건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마. 항소할 생각이 아니라면 꺼내들지도 마. 과거를 들추어내는 건 아물어가는 상처를 후비는 짓이야. 혼자 자해하는 거라면 말리지 않지만, 그건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거라고.”

“…그걸 네가 말 하냐? 아무튼 별로 대단한 건 아닌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무엇을?”

“미소와 구소가 성별을 바꾸어 생활하고 있다는 거.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건 정말로 이상했다. 구소가 여자였다는 사실은 이번 심의회의에서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구소의 성별이 밝혀진 순간 속옷을 훔치러 기숙사에 들어왔다는 전제가 무너졌다. 하지만 정작 구소가 여자였다는, 미소가 남자였다는 증거는 궤네가 직접 옷을 벗겨서야 증명되었다. 아니 그 이전에, 궤네는 엑사브라가 제출되기 이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걸 그대가 묻는 거야?”

궤네는 도리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궤네가 구소의 옷을 벗기기 전까지 나는 진짜 성별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의 반응을 보고 알아챘는데.”

“……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대는 미소를 처음 만났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귀여운 면상이었는데. 한데 구소를 처음 봤을 때는 발정…, 아니, 반응을 하더군. ‘어머, 제법 귀여운 아이인 걸’하고 말이야.”

……내가, 그랬던가?

금시초문이다. 어딘가에서 들려온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와 착각한 거 아닐까?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네.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분명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상망측한 추리 과정이 있었겠지. 더 들어봐야 머리만 아프다.

“맞아, 고군. 그대에겐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무엇보다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잖아?”

“응? 그런 게 있었나?”

“돌아가서 천천히, 느긋하게 고민해보도록.”

궤네는 기분 나뿐 미소를 흘리며 심의회의실을 떠나갔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더 중요한 게 대체 뭐지?

 

§

 

나는 인트라넷을 뒤적이고 있었다.

“젠장, 망할 검색엔진 같으니. 아무리 인트라넷이라지만 전혀 나오질 않잖아?”

인트라넷 특유의 특성 상 검색엔진은 학교가 게시한 내용들만 그 내용을 추려 올리고 있었다. 인트라넷이라고 그 안에 웹사이트나 커뮤니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순전히 링크를 이용해 찾아다녀야만 했다. 네×버나 다×처럼 인트라넷 전체를 통괄하는 편리한 검색엔진은 제공되지 않고 각 웹사이트 내에서만, 커뮤니티 내에서만 부분적으로 검색이 가능했다. 그래서 되는 대로 커뮤니티와 웹페이지를 닥치는 대로 열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찾느라 이 고생을 하냐고?

어허, 왜 이러시나. 발정기…아니, 사춘기의 남자 고등학생이 정보세계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별로 많지 않잖아?

“벼, 별로 가란 선배의 동영상을 찾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나 치고는 훌륭한 새치미였다.

아니, 그냥 변태지만.

오늘 심의회의에서 밝혀진 사실 중 내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예를 들면, 구소는 가란 선배의 로커를 열었다든가 하는 것이다.

구소는 가란 선배의 옷가지를 꺼냈다. 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당연히 거기에 설치된 카메라를 회수하기 위해서다.

구소와 미소가 카메라 회수를 결심한 것은 영상이 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란 선배의, 그 뭐랄까, 말로 표현해선 안 될 것 같은 은밀한 무언가를 찍은 영상이, 인트라넷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라고는 죽어도 말 못한다.

말을 못하니까 나레이션 정도는 봐 주라고.

“여기도…제길, 저기는, 아냐아냐, 이것도 아니라고…”

딸각, 딸각, 딸각, 딸각……

수십 개의 창이 열리고 닫히며 페이지를 바꾸어갔다. 링크에 링크를 물고 자잘한 커뮤니티를 돌아다닌 끝에 나는 하나의 파일에 도달했다.

[20xx0xxx_김레알_기숙사몰카_KR004.avi]

“차, 찾았…나?”

확장자가 avi. 틀림없이 영상 파일이겠지. 제목 앞쪽은 찍힌 날짜일 것이다. 그 내용은 제목 그대로, 뒤의 KR이, 내가 아는 그 선배님의 이름 앞글자라면-

마우스 커서가 부들부들 떨렸다.

죄책감과 배덕감과 두근거림이 뒤섞인 끈적하고 달콤한 침을 집어 삼키고, 클릭.

다운로드는 오래 걸리지 않고 끝났다. 재생 프로그램은 코덱이 없다고 딴죽을 걸지 않고 착실하게 영상을 재생했다.

로커 안쪽에 설치된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을 로우 앵글로 찍고 있었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로커문이 열리고 갑작스레 늘어난 빛의 양에 화면은 일순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새하얀 빛 속에서 익숙한 손이 옷을 집어 던지고…

익숙한 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 속에서 뻗어있는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우스를 잡은 내 손을 돌아보았다. 손등에 박힌 점부터 뼈가 두드러진 부분의 조그만 흉터 위치까지 똑같았다. 이윽고 뒤집어 올린 옷 밑으로 드러난 허리 라인도 꽤나 익숙했다. 그 위에 있어야할 천으로 감싼 봉긋한 가슴 대신 샤워실 거울에서 자주 보던 넓적한 가슴이 비춰졌다.

“푸흡-”

이, 이건 나잖아?!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영상이 재생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 안 돼, 겨드랑이 밑을 무심코 드러내지 말라고. 제길, 배에 힘을 줘, 풀어졌잖아, 그 밑은, 그 밑은, 아악 제발 가려줘!

영상이 재생되는 약 30초 동안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넉다운되었다. 거울로 볼 때와 컴퓨터 화면의 영상으로 볼 때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의자 등받이 뒤로 고개를 넘기고 하늘로 내 영혼을 올려 보낼 지경이었다. 어, 어째서 남학생 기숙사의 탈의실 몰카가 올라와 있는 거냐. 그것도 하필, 날 찍은 동영상이! 이런 게 수요가 있기는 하나? 대체 누가…

“아…”

답은 뻔했다. 여학생 기숙사에 카메라를 설치했던 사람은, 한 학기 동안 남학생 기숙사에 살고 있었으니까.

뭐가 늑대 무리 속의 양이냐.

그녀야말로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궤네가 말했던 더 중요한 게 이거였냐…”

내 한숨 소리와 함께 수업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공허하게 교실을 울렸다. 적막한 정적은 쉬는 시간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교실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

 

『외인교실의 궤네』1화입니다.

지적 및 태클, 감상은 대환영입니다. 


suryua 님에 의해 2011.10.07 02:09 에 수정되었습니다.

태그
24 수류아  lv 24 85.64% / 32141 글 1295 | 댓글 2419  
인류최약人類最弱의
망량망상魍魎妄想 수류아라고 합니다.

[完] 자살의 메커니즘 32편
/여름/촉수군은 청춘을 구가한다 7편
외인교실의 궤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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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우항헹헹 11/29/02:07
파도님의 감평을 읽고서- 왔습니다. 주인공에게 뚜렷한 '목적' 부여라는 과제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수정 없이 마저 완결을 낸 후에 퇴고를 거쳐서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고 생각하네요. 글에서 뚜렷한 색깔을 느꼈습니다. 시간 문제상 극 초반만 읽었는데, 아무튼 완전히 완성된 이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이 글은 옴니버스식인가요? 어떤 식인가요.
24 수류아 11/29/03:44
넵 저도 목적 부여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 중입니다. 수정은 말씀하신대로 완결 후 퇴고를 통해 진행할 예정이고요.

옴니버스 형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음, 기본적인 골격은 추리만화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건 하나 당 한 화를 소모하는 형식이 되겠지요.
0 12/02/06:41
일단 읽기 전에 선 리플, 게시물에는 리플이 13개 달려있다고 써있는데 왜 두개밖에 안보일까요?;; 허허
24 수류아 12/02/11:33
전에 달린 리플들이 다 안 보이네요ㅠ 서버 문제인 듯
24 서륜 12/04/11:54
좋은뎅...!
24 수류아 12/09/12:33
ㅠㅠ 뜯어고쳐야할 부분이 태산....이랄까 나중엔 다 갈아 엎을 것이지만요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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