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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교실의 궤네 by 수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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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수류아[suryua]  
조회 1423    추천 2   덧글 5    / 2011.11.28 12:12:34

■ 2교시 : Through the Underwear

 

 

세상은 냄새로 가득하다.

구두 밑창에 밟혀 죽은 개미 냄새, 하수구 배수관에 들러붙어 썩어가는 낙엽 냄새, 낡은 벽의 균열된 틈새에 스며든 습기에 핀 곰팡이 냄새, 침대에 흘린 과자부스러기에 몰려든 진드기 냄새…

거기에 물체가 있다는 것은 냄새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체가 냄새의 존재를 증명한다. 물체는 냄새를 내기 위해 존재하며 냄새가 없다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냄새는 목적적 존재이며 물체는 수단적 존재이다. 존재는 냄새에 의해 증명되며 물체의 시각적, 촉각적 자극 따위 존재를 증명하는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냄새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체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냄새가 났다. 기숙사 복도에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밤이 되면 밤의 냄새가 난다. 따라서 밤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은 시야가 협소하게 만드는 지구의 그림자가 아니라 밤공기를 바꾸는 바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밤 냄새를 맡고 자리를 털었다.

밤은 나의 시간.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일할’ 시간이다.

나는 어떤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그 냄새는 굉장히 농밀하고 농후하며 농염하다. 거대한 냄새가 그 조그만 섬유질 덩어리 안에 담겨 있다. 이 섬유질은 한 사람분의 정보를 통째로 축약하고 있다. 그 강렬한 존재감에 비해 무게는 거짓말처럼 가볍다. 이 농담 같은 물건은 놀랍게도, 기숙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것을 모아 정리하는 것이 내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고용주에게 이 섬유질 덩어리들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이것들이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그 섬유질 덩어리들은 내게 하등 쓸모가 없다. 그 기묘한 형태의 천 조각들이 풍기는 냄새에는 분명 그 소유주의 정보가 대량으로 함축되어 있었지만 별로 유용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생리주기 같은 걸 알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 정보를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지만, 내 고용주는 기숙사에 널브러진 이 특정한 섬유질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정보가 많이 함축된 물건일수록 고용주는 더 좋은 보상물을 내게 제공했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를 함축하지 못한 물건을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못했을 경우엔 노동의 대가를 결코 지급해주지 않았다. 철저한 성과주의의 가혹한 직무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뛰어난 후각을 무기로 밤의 기숙사를 배회했다. 허나 오늘 밤 현재 수확량은 고작 두어 개, 아직 너무나도 미진한 양이다.

[……!!]

강렬한 정보가 내 코를 찔렀다. 반년 가까이 기숙사를 돌아다녔지만 여태껏 맡아 본 냄새 중 그 어떤 것보다 진한 냄새가 기숙사 어느 방에서 풍겨 나왔다. 코를 틀어막아도 스며들어오는 그 냄새는 내 후각세포를 뒤흔들어놓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인위적이었고 작위적이었다.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나는 막다른 길에 몰린 것처럼 냄새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은 기숙사에서도 최상층에 있는 방이었다. 문틈으로 본 방은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미간이 지끈거려오는 것을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고 방 안 가득히 냄새를 뿌리고 있는 것을 찾아 헤맸다. 한 걸음 발을 떼기도 힘들었다.

방 전체가 그 섬유질 덩어리로 채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방 전체가 그 섬유질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방 전체가 그 섬유질 덩어리인 것만 같았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나는 침대 위에 놓인 ‘그것’을 보았다. 냄새가 전부인 내가 시각을 이용해 그것을 판단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하나의 냄새에 의해 이 공간의 물체는 전부 똑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색 일색의 이 방 배경에서 그것은 보랏빛의 전경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그것을 확실히 인지했을 때 나는 그것을 구성하는 섬유질에 한없이 고밀도로 농축된 정보에 또 한 번 쓰러질 뻔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정보는 대단히 단순하고 거대했다. 정보는 양적으로 많은 게 아니라 크기 자체가 컸다. 그 일관된 정보는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은 것처럼 그 천 조각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는 그 조그만 삼각형의 반투명한 천을 취하고 있었다.

가구가 아닌 과학임을 자랑하는 침대는 내가 침대 위로 올라가도 그 바로 옆에 잠든 소녀를 깨우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천우신조로 살아난 격이었다. 평범한 학생방과 달리 쓸데없이 고급침대를 들여놓은 덕택에 나는 소녀에게 들키지 않고 그 천 조각을 들고 나올 수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온 나는 눈으로 웃었다.

이번 수확물은 틀림없이 대박이었다. 고용주가 이제까지 수집한 섬유질들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최상품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경황이 경황인지라 실수로 먼저 수확했던 것을 그 방에 두고 와버렸지만, 이것 하나면 그런 사소한 물건 쯤 아무 상관없었다. 그녀가 줄 보상물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일까?

××××일지도 모르지.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 방을 뒤로 했다. 마비된 후각은 이미 어두운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기숙사 복도는 밝았다.

 

§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말이지.」

대강당의 좌우에 설치된 8개의 스피커로부터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주 월요일 할로 고등학교의 아침 조회는 대강당에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이루어진다. 1학년 352명, 2학년 197명, 3학년은 49명이 전원 착석하고도 빈자리가 그 뒤로 그 두 배쯤 남은 초거대 강당 교단에는 세 개의 마이크를 앞에 두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라고 했지만 그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딱 봐도 가짜 티가 나는 풍성한 수염을 단 그 얼굴을 봤을 땐 웬 꼬마가 날 놀리는 게 아닌가했다. 이사장실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땐 이사장 손자가 장난을 치고 있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사장 손자가 아닌, 이사장 본인이었다.

가짜 수염을 달고, 멜빵바지를 입고, 손뼈 모양으로 손잡이가 장식된 섬뜩한 지팡이를 든 소년. 하지만 숏컷으로 자른 히끗히끗한 머리카락에서는 세월이 느껴져 도저히 본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말은 흔히 어떤 것에 미칠(狂) 정도로 빠져 있지 않으면 경지에 미칠(及) 수, 이를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해석이야. 말 그대로 미치지 않으면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해석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이른 아침부터 이사장의 훈화는 격정적이었다. 그는 원고를 기계적으로 읽는 식으로 훈화를 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박아 넣을 듯이 눈을 맞췄다. 어린 소년과 비슷한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카리스마가 강당을 지배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연단은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구나….’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는, 내가 이사장의 등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한 외인교실의 학생 7명 전원은 다른 학생들이 있는 자리가 아닌 연단 뒤쪽에 배치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자리는 전교생 600명과 시선을 마주하는 자리다. 나를 바라보는 듯한-실제로는 이사장을 보고 있겠지만-1200개의 눈동자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평화, 평온, 평범의 3평 인생을 원하는 내게 있어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 그러지, 고군? 안색이 안 좋은데. 욕구불만이야?”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궤네는 앞에서 이사장이 연설을 하는데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 그 훈화는 이사장이 아닌 마을 이장님이 어느 댁에 송아지가 태어났다더라 하는 공지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궤네는 하품을 하며 품에서 은장도와 사과를 꺼내들었다. 높다란 의자에 앉아 신발을 옆에 벗어두고 맨발을 까닥거리며 그녀는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좋아하는 것만으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자기도 그 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천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게지. 그건 필부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천재를 자기와 같은 범주에 넣으려고 발버둥치는 꼴이다. 천재를 이해할 수 없기에 하는 착각이지.」

확실히 천재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연단에 앉아 있으면서 그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사과를 깎는 궤네의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사장님이 훈화하는데 용케 딴 짓을 하고 있구나.”

“그야 그대를 위해 깎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깎은 사과를 그대가 먹어주길 바라면서.”

응? 너 눈동자가 풀렸어…?

“이 사과 속살이 내 속살이라 생각하고 입술을 맞추고 혀로 핥으며 이로 깨물어주길 바라. 사과는, 내 살은 그대의 입속에서 이리저리 굴려지고 타액에 잠겨 점막을 타고 그 속으로 삼켜 들어갈 거야. 나와 그대의 살을 섞는 화학반응은 감미롭기 그지없겠지. 물론 그 감각은 그대만의 것이고 나는 도저히 공유할 수 없겠지. 그대에게 사과를 주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대용할 것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대의 피부를 벗겨 그대의 살을 씹어야겠지. 피 냄새가 진득하게 우러나오는 풍미는 꽤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오겠지만, 나는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킬 테야. 한 점, 한 점을 그대라 생각하고 내 안에 갈무리할 거야.”

무서워-!!

“그냥 네가 사과를 먹어! 내게 주지 말고!”

“응? 그럼 그대에게 내 살점을 주어야 하잖아? 그건 아파서 싫어.”

“나도 마찬가지야! 자기가 싫은 걸 남에게 강요하지 마!”

“어째서? 타인이란, 내가 싫어하는 걸 떠맡기기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 그게 더불어 사는 삶이지.”

비뚤어졌다. 이 녀석은, 심하게 비뚤어져 있다!

아니 뭐, 알고는 있었지만. 궤네가 길안내를 한다면 그건 상대를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기 위해서고,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는 건 한 번 더 넘어뜨리기 위함이며,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때리는 게 당연한 녀석이다. 그녀가 길에서 쓰레기를 줍는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버린 연애편지로 보낸 사람에게 가짜 답장을 써 보내 골탕 먹이기 위해서 주웠다는 설명 말고는 달리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천재는 범부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아니, 이해할 수 있으면 천재가 아니다! 천재는 비정상의 극단에 있다. 정규분포곡선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의 끝에 선 존재다. 제군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이 학교에 있는 거다!」

이사장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손뼈 모양의 손잡이에 깍지를 끼듯 쥐고 그 끝을 연단 뒤편으로 향했다. 지팡이의 끝을 따라 600명의 시선이 이동했다. 1200개의 눈동자는 이번엔 정말로 나와 외인교실의 학생들에게 꽂혔다.

「여기 이 7명의 학생이 우리 할로고등학교가 추구하는 목표, 그 자체다. 분야를 막론하고 그 재능이 천재의 영역에 도달한 자랑스러운 학생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제군이 지향해야할 모습이다.」

나는 이름을 불린 이등병처럼 각을 잡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나는 몸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여섯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둑판 위에서 4색 체스를 혼자 두고 있는 녀석,

의자의 한쪽 다리만이 바닥에 닿게 기울인 그 위에 미동도 않고 앉은 녀석,

연단 바닥에 분필로 알아볼 수 없는 수식을 쓰고 지우는 녀석,

아예 모포를 들고 들어와 몸에 휘감은 채 자고 있는 녀석,

그야말로 정규분포 극단에 선 인간들의 군상이 거기에 있었다.

“……”

학생회장 산단은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그저 조용히 안경을 새하얗게 백열시키고 있을 뿐.

“하아아암~”

그리고 궤네는 하품을 하며 계속 사과를 깎았다. 사과 알맹이는 버리고 껍질을 씹으며 연단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보며 이사장이 무슨 불호령을 내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이사장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다시 학생 청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능력 있는 사람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지. 사람은 모두가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생명의 존귀에는 귀천이 있으며 그것을 가르는 건 재능이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야말로 정의. 세상이 필요로 하는 건 천재다. 만 명의 범부보다 천 명의 수재가, 천 명의 수재보다 한 명의 천재가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 되새겨라! 너희들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다! 인정받고 싶다면 가치를 증명해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저 쓰레기일 뿐이지.

마이크에 대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사장은 외인교실의 학생들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지팡이를 붕붕 돌리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이사장님, 잠시…”

“뭔가?”

교장 선생님이 굽신거리며 이사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교장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이사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연단 마루를 지팡이로 내리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강당 전체를 울렸고 자리를 일어서던 학생들의 웅성거림도 순식간에 멎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죄, 죄송합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하지. 자네는 책임자들을 불러 모아! 긴급 교무회의다.”

이사장은 휘적휘적 강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교장선생님이 잰걸음으로 쫓았다.

“무슨 일이지?”

“글쎄, 흥미 없는 걸. 자, 고군. 아까 하던 걸 마저 하자.”

궤네는 바닥에 버렸던 사과 알맹이를 은장도로 찍어 들었다. 그리고는 내 뺨에 그것을 들이 댔다.

“으, 으앗, 뭐, 뭐하는 짓이야?!”

“자, 핥아. 씹어. 삼켜. 이 사과는 나의 살, 그 즙은 나의 피일지니. 이를 먹고 마시며 나를 기억하는 거야. 너의 타액과 점액과 소화액으로 내 살과 피를 뒤섞는 거야. 자, 자!”

“그, 그만 해!”

네 살과 피라면 좀 더 성의를 갖고 조심히 다루라고. 먼지투성이가 된 사과를 내 얼굴에 문대지 마.

“사양할 것 없어, 고군. 이 사과를 그대가 이빨로 으깬다고 해서 내가 아파하진 않아. 그리고 그대가 이 사과를 먹은 다음엔 내가 그대의 살을 베어 물을 테니까, 지금 먼저 사과를 나라 생각하고 잘게 씹어둬.”

“나도 사과를 안 먹을 테니까, 너도 날 물지 말라고!”

“편식은 좋지 않아, 고군. 별로 맛은 없어 보이지만, 고군의 살이라면 난 먹을 수 있어.”

궤네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전혀 맛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표정이 아니잖아.

나는 궤네가 들이대는 사과를 필사적으로 피했다. 궤네는 사과를 은장도를 꽂은 채로 휘둘러 까딱 잘못하면 얼굴이 베일 것만 같았다. 물론 그녀는 어설픈 실수는 하지 않을 테지만, 고의적인 실수는 얼마든지 할 테지. “어머, 손이 미끄러졌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강당에 있던 학생들은 뒤편의 문으로 줄지어 나가고 있었다. 외인교실의 학생들은 이사장이 나갔던 문을 통해 이미 각자의 교실로 가버린 지 오래였다. 궤네는 교묘하게 손을 놀려 나를 몰아붙였다. 아무도 궤네의 이 위험한 장난을 막아주지 못했다.

“거기까지다, 궤네. 고군이 싫어하고 있다.”

나는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었던 궤네의 사과 꽂힌 은장도를 가볍게 낚아 챈 섬섬옥수가 있었다. 교복 자켓을 한복 저고리처럼 개조한 둥근 소매 폭에서 뻗어 나온 검지는 가볍게 은장도의 칼등을 내리 눌렀다. 그것만으로 궤네는 나에 대한 공세를 시도할 수 없게 되었다.

“가란 선배!”

“흥, 또 튀어나왔네, 거구녀. 눈치 없이 방해하지 말아 줄래? 나와 고군의 애정표현에 제 3자는 빠지시지?”

“사람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이 애정표현이라면 사랑할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갈 거다. 네 장난은 너무 지나친 감이 있다. 칼에는 눈이 없다. 방향을 잘못 고른 칼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문제로, 네 칼에 애정은 없지 않은가.”

“과연 일문의 전승자는 하는 말이 다르네. 위선의 냄새가 풍풍 풍기는데? 죽도로 사람을 찌르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찔리는 욕망은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스스로 찌르고’ 있는 걸까?”

“저속한 농담은 관두지.”

가란 선배는 가볍게 궤네의 시비를 흘려 넘겼다. 선배는 궤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허리를 낮추고 말했다.

“넌 음담패설을 하기엔 아직 어리다.”

“어, 어리지 않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흐음, 나이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신체연령이다. 궤네, 너는 ‘그것’도 아직이지 않은가?”

“하, 하고 있…쓰다듬지 마!”

궈네는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저항했으나 헛수고였다. 나보다도 키가 큰 가란 선배가 늘씬하게 긴팔로 내리누르면 나보다도 머리 하나 작은 궤네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

테크닉이고 뭐고 없다.

그야말로 코끼리와 개미의 싸움.

다윗도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위해 돌물매를 사용했건만, 궤네의 유일한 무기인 은장도는 가란 선배의 손가락에 번번이 튕겨나갔다.

“이, 이익…두고 봐, 거구녀! 나중에 내게 변호를 의뢰할 일이 있다고 해도 그대만큼은 상담을 받아주지 않겠어!”

“후후후,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은 없다. 즐겁게 두고 보도록 하지. 아, 나중에 브래지어나 생리대에 대해 상담이 필요하게 되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다.”

궤네는 볼을 부풀리고 씩씩거렸다. 가란 선배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계속 궤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과연 1년 선배는 다르다. 아니, 3학년 선배는 다르다고 해야 할까.

“우우우…고군, 뭐하고 있어! 어서 이 거구녀를 떨어뜨려!”

궤네는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란 선배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저, 가란 선배?”

“훗, 알았다. 여흥은 여기까지다. 수업이 곧 시작되겠군. 각자의 교실로 돌아가도록.”

가란 선배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총총 떠나갔다. 무거운 철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강당에는 나와 궤네만이 남았다.

“그럼 우리도 돌아갈까.”

“흥, 저 거구녀. 언젠가 아픈 맛을 보여줄 거야. 그 치켜든 머리를 발로 쓰다듬어 주겠어.”

궤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껏 성질을 부리면서 그녀는 뒤편에 벗어두었던 신발의 뒷굽을 아무렇게 밟아 신고는 나를 재촉했다.

“어서 돌아가자, 고군. 오늘은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이 많군. 이래서 화요일은 싫다니까.”

“? 조회 말고 또 무슨 일이 있어?”

“벌써 잊어버린 거야?”

궤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사장 면담이 있는 날이잖아.”

 

§

 

“자네는 천재를 연기할 필요가 있다네, 고군.”

커다란 원형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이사장이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요리했다기보다는 태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새카맣게 익힌 스테이크는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점심시간. 나와 궤네는 평소 식사를 하던 궤네의 교실이나 학생식당이 아닌 할로 교육단지 중심 ‘타운’에 왔다. 타운에서도 할로 재단의 본사가 있는 중심 빌딩의 최상층 레스토랑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터무니없이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할로 교육단지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이 자리는 3평 인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왠지 내가 있어선 안 될 곳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마구 샘솟았다.

‘왜 나는 이런 곳에서, 이사장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거지…’

외인교실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사장과의 면담을 갖는다. 월화수목금토일로 반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각 요일별로 그 반의 학생과 이사장은 점심식사를 같이 하며 면담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토(土)반이지만, 학교에 적응하는 의미에서 궤네와 같이 면담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지만, 도대체 이 학교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네는 편입생이네. 그리고 외인교실에 들어왔지. 그 의미를 아나?”

“예. …아, 아뇨….”

“자네가 할로 고등학교 598명의 일반 학생들의 룰 모델이 된다는 것이네. 그들은 자네를 보며 꿈을 키워나가고 자네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겠지. 그런 자네가 일반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어선 곤란하네. 오늘 연단에 있던 다른 외인교실의 학생들을 보게나. 그들은 그들 나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았는고?”

나는 등 뒤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 앞의 스테이크에 나는 칼을 대다가도 이사장님의 말씀만 나오면 차렷 자세를 취했기에 한 입 먹지도 못했다. 아니, 먹는다고 해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을 테지만.

“고군에게 너무 무리한 걸 요구하는 거 아닐까, 이사장?”

내 옆자리에 앉은 궤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접시 위에는 이사장의 스테이크와는 정반대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가 있었다. 궤네는 그것을 한 점 입에 대지 않고 그저 자르고만 있었다. 이미 접시는 소스와 피가 섞여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그 녀석들도 결국 할 수 있는 걸 할뿐이잖아? 뭐,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고군은 편입해서 이 할로고에 들어왔잖은가. 2학년 편입에 외인교실 배정, 이는 상당히 이례적이라네. 그런 자네는 다른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지. 필요 이상으로 말일세.”

나는 오늘 아침 조회에서 나를 바라보던 1200개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건 단순한 주목이 아니었다. 600마리의 야수에게 노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시 당초, 왜 저를 외인교실에 넣으셨나요?”

내 한숨 섞인 질문에 이사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외인교실이 부담스러운가?”

“아, 아뇨! …예….”

“그건 당연한 게야. 천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지. 하지만 고군, 자네는 잊은 것이 있네. 자네는 이 할로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유를 잊어버렸는고?”

“할로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할로 고등학교는 다른 모든 고등학교에서 실패하고 다른 모든 고등학교에서 거부당한 끝에 찾아간 마지막 고등학교였다. 나는 여기서 오로지 무사 졸업만을 바랄 뿐이다.

“고군, 자네는 잊은 게 있네. 우리 학교가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 말은 전에, 할로 고등학교에 처음 전학을 오기로 했을 때 이사장과의 면담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이 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한 발판 따위의 역할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이사장은 포크를 내려놓고 깍지를 꼈다.

“나는 소위 전인교육, 열린교육 따위가 실패한 이유가 입시제도 때문이라 생각하네. 결국 고등학생들의 목표가 대학에 가는 것이며 선생들의 평가가 얼마나 학생들을 대학에 보냈는가에 결정된다면, 어떤 교육도 입시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네. 입시를 포기하지 않는 전인교육, 열린교육은 허상에 지나지 않지. 한데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학생에게 입시를 포기하라 강요할 수 없어. 고작해야 의무교육, 학생의 미래를 책임지기에는 짐이 너무 무겁지.”

그래서 우리 같은 대안학교는 입시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되네, 하고 이사장은 덧붙였다.

“할로 고등학교는 입시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입시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 있을 만큼의 미래를 졸업생에게 약속하지. 재능 있는 사람은 대우받아 마땅하다. 다만, 그 대우는 ‘정말로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지. 그래서 우리 학교는 재능 없는 학생은 졸업시켜주지 않는다네.”

“……예?”

“다시 말해, 자기가 천재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학생은 졸업할 수 없다는 것이지.”

“예엣?!”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뭐, 뭐야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은?!

“일반적인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졸업율을 전적으로 선생들이 책임이라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출석하는 것만으로 졸업을 하지. 그건 잘못된 게야. 가르치는 내용을 제대로 학습했는지 알게 뭔가?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졸업을 못하는 게 정상이야. 하지만 그네들은 졸업장을 뿌려버리지. 가르치는 게 없기 때문이라네. 그러니 졸업장의 ‘무게’가 그렇게 가벼운 것일세.”

할로 고등학교의 조회는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참가한다. 즉, 대강당에 왔던 49명이 3학년 전체 인원수다.

1학년은 다른 일반 고등학교와 비슷한 352명이지만, 2학년은 거의 절반인 197명, 3학년에 이르러서는 49명밖에 남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람이 적다. 그 이유는 별 거 없다, 고 궤네는 말했으나 내게 있어선 매우 별스런 이유였다.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이유였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학생 수가 줄어드는 이유는, 더 이상의 커리큘럼 이수를 포기하고 자퇴 후 전학을 가는 학생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졸업을 못하면 3년의 고생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더 늦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입시를 준비하겠다며 학교를 떠나는 학생이 전체 인원수의 6/7이나 된다는 이야기다.

“할로 재단은 천재라면 그 분야를 막론하고 그 재능에 높은 값을 쳐 준다. 즉, 졸업만 하면 남은 일생을 할로 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게야. 이런 조건을 거는데 졸업조차 못한다면 얘기는 끝이지.”

이사장은 바삭바삭한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포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천재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한다?

그 까마득한 기준에 현기증이 났다.

“걱정할 거 없어, 고군. 그대는 이미 외인교실의 학생이니까.”

궤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접시를 피범벅으로 만드는 것에 질렸는지 그녀는 데코레이션에 눈을 돌렸다. 곁들어진 콩과 기타 야채로 조그만 인형을 만들어 피 접시 위에 토막 살인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저 이사장이 아무나 외인교실에 넣을 거 같아? 그대는 분명 멍청하지만, 이사장의 짝짝이 눈에는 그대가 달리 보이는 모양인 걸. 뭐, 그 콩깍지도 중간고사가 끝나면 벗겨질 테지만.”

“걱정할 일이 태산이잖아! 아니 중간고사엔 대체 뭘 보는 건데?”

전학 온지 열흘 남짓, 나는 한 번도 선생님과 교실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수업을 듣기는커녕 교재조차 받지 않았다. 매 교시 텅 빈 교실에서 멍하니 노트북으로 인트라넷을 기웃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 보람도 없이 영상은 찾지 못했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네.

아니, 찾긴 찾았다. 다만 그것이 내가 원했던 영상이 아니었을 뿐이지. 그 직후 나는 기숙사로 달려가서 카메라를 끄집어냈다. 또 어딘가에 설치된 카메라가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섬뜩하다.

“응? 다른 손님이 있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고군? 이사장이 면담에 방해된다고 매번 이 레스토랑을 전세 내는 낭비벽 탓에 여긴 우리밖에 없어.”

“허허헛! 과연, 자네를 외인교실에 넣은 이 두 눈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군. 좋아, 좋아.”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없었던 식욕은 속에 있는 걸 토해내고 싶어질 정도로 떨어졌다. 나는 금방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생각지도 못했다.

내 무사 졸업을 위협하는 의외의 복병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하아…전교 7등 이내에 들지 못하면 외인교실에서 잘리는 건가?”

“그렇지 않아, 고군. 시험은 학생별로 다르게 출제 돼. 같은 문제를 풀어서 나오는 성적 차이는 상대적인 차이지, 그것이 천재와 바보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어. 전교 1등은 학교마다 있는 흔한 녀석들이야. 그런 걸 천재라고 부르진 않아. 그대의 재능에 맞는 문제로 그대의 천재성을 시험할 거야. pass or fail이야말로 올바른 평가지. 상대적인 평가 따위, 바보도 1등이 될 수 있는 ‘불공정한’ 시스템이야.”

전교 1등이 흔한 녀석이라고 말하는 건 너뿐일 거다. 세상엔 전교 1등을 해본 사람보다 못해본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하지만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학교에서, 내가 전교 7등에 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다르게 출제한다면 내게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이제까지 수업시간에서 뭘 배웠는지 알 수 있다면.

수업 시간에 선생님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그 중간고사 말이다만…”

이사장은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었다. 가짜 수염을 살짝 떼어 들추고 그 밑으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조금 문제가 생겼다네.”

“문제?”

 

§

 

“정말로 큰일이네.”

“음, 정말로 큰일이야.”

6교시가 끝나고 나는 궤네의 외인교실에 있었다. 랄까, 이사장과의 점심식사가 끝난 이후 난 내 교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궤네의 교실에 끌려왔다. 수업은 당연히 받지 않았다. 내 자신이 놀랄 정도로 무감각하게 수업을 빠졌다. ……뭐, 여태까지도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 점을 제하고도 이사장이 이야기한 문제는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대처를 생각하면 파멸적이었다.

거기에 날 엮지 말아줬으면 했는데.

“설마 이 학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니, 이 학교이기에 일어난 일인 거겠지.”

“응, 맞아. 방심한 결과지. 설마 그런 바보가 또 있었을 줄은 몰랐어.”

“또? 아아, 역시.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벌써 잊어버린 거야, 고군? 아니, 그대의 머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기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하아, 정말로 어처구니없어. 이 평화로운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나도 물러진 걸까?”

“…‘무르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아니, 내가 잘못 알고 있나? 틀림없다. ‘무르다’는 단어는 틀림없이 냉혹하고 가혹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일 것이다.

“설마하니 시험지가 없어질 줄은.”

“설마하니 내 속옷이 없어질 줄은.”

“응?”

잠깐, 지금 뭐라고.

“오늘 점심 때 이사장이 말한 건 분명히 중간고사 시험지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였지?”

“맞아. 그리고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어. 간밤에 내가 특별히 준비해 둔 속옷이 사라진 거야. 고군 그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승부 속옷이었는데 말이야. 덕택에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입지 못했지.”

“……”

정말로 입지 않은 겁니까. 차마 확인할 수 없었다.

“너는 그거냐? 규제로 속옷을 그릴 수 없는 TV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 마치 속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표현되는 류의 캐릭터냐?”

“실례네, 고군. 나를 그런 표리부동의 유상무상으로 보지 말아줘. 난 제대로 입고 있지 않다고.”

“그건 그거대로 문제야!”

대체 어느 누가 겁도 없이 궤네의 속옷을 훔쳐간 걸까. 최대 용의자였던 미소는 자퇴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또 속옷을 훔치거나 하진 않겠지. 그 이전에 여자기숙사에서 격리된 상태이니 불가능하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구소도 제외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둑인가.

이 학교는 사건이 끊일 날이 없는 것 같다.

“그 속옷은 고군, 그대를 위해 준비했던 거란 말이야. 내 림프에서 추출한 유전자 풀을 복제해 농축한 MHC 엣센스에 일주일 동안 담가 둔 페르몬의 집합체였는데.”

“너무 어려워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어! 그거 야한 거냐? 그런 거냐?”

“그야 물론이지. 그대는 그 반투명한 삼각천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을 거야. 손으로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혀로 핥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할 거야. 내가 눈을 내놓으라고 하면 기꺼이 안구를 빼어 주고 신장을 달라고 하면 간에 쓸개까지 적출해주겠지. 껍데기만 남은 네 몸은 박제하고 뇌와 척수는 포르말린에 담가 보관해줄게. 걱정하지 마. 그 부분에는 제대로 실리콘을 주입해서 커다랗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네가 그러면 진짜로 할 거 같아 무섭다고!”

조회에 이어서 오늘 궤네가 꺼내는 말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했다. 저번의 새침부끄 흉내 때처럼 이사장에게 뒤로 뭔가 들었던 거 아닐까.

궤네는 으스대며 어깨를 폈다.

“어때, 고군? 조금은 동했어? 이번 섬뜩부끄 컨셉은 자신 있었는데.”

“섬뜩부끄였냐?! 과연 네게 딱 맞을 수밖에!”

하지만 뒤에 덧붙인 말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 점에 있어선 이 녀석은 새침부끄도 섬뜩부끄도 아니다. 사이코패스인 이 녀석이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컨셉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속옷이라면 없어져 마땅해. 그런 것보다 이사장이 말한,”

“그런 거라니! 너무하네, 고군. 그대는 내가 속옷을 입지 않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거야?”

“네가 안 입고 다니는 거잖아! 그리고 브래지어는 필요 없을 걸.”

“……호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의 의미.”

적어도 보형물로서의 의미로는 필요 없겠지. 기껏해야 가리게 역할인데 레이스와 프릴 속에 파묻혀 사는 너한테 그게 무슨 소용이야? 보아하니 속옷을 그다지 입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진정한 신사라면, 속옷이 없어 고민하는 숙녀에게 자신의 속옷을 벗어줄 정도의 에티켓은 갖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 신사의 이름은 틀림없이 변태겠구나!”

“후, 이렇게까지 소녀의 마음을 모르다니. 고군, 일생동안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겠는 걸.”

“맞아, 고군. 지금 궤네양은 고군의 속옷을 갖고 싶다고 말하고 있어. 행간을 읽지 않으면 소녀의 마음에 닿을 수 없는 걸.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를 해석하면 “네가 감히 날 역겨워 할 수 없으니 만약 헤어지려 한다면 조용히 해어지지 못할 줄 알아”라는 협박성 멘트가 되잖니?”

“그건 무슨 왜곡된 해석이…어?”

“음음, 그래 맞아. 나는 지금 고군의 속옷을…으음?”

궤네는 고개를 끄덕이다말고 옆으로 돌렸다. 나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여학생이 있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내려묶은 차분한 인상의 소녀였다. 교복은 얼핏 보기에는 개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교복 자켓과 치마, 속 와이셔츠 표면에는 매우 작은 글자들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방금 전의 시는 교복 자켓 오른쪽 깃에 적혀 있었던 것을 그대로 읽은 모양이었다.

“그대는 누구지? 나는 교실 출입을 허가한 기억이 없는데?”

“에이,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보시는 대로, 나는 평범한 문학소녀이니까. 소개가 늦었네. 난 인문계 2학년 B반, 양지라고 해. 오늘은 궤네양에게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

평범한 문학소녀…라고? 방금의 시 해석을 들어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만은 않은데.

양지는 궤네 앞에 앉아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야. 내 친구를 구해줘!”

겁도 없이 궤네를 찾아온 여학생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궤네는 입 꼬리를 비틀었다.

“호오, 의뢰인인가. 양지 동기. 친구를 구해달라고? 그래, 그대의 친구인 호모사피는 무슨 짓을 저질렀지?”

“…그게, 내 친구는 사람이 아니야.”

“뭐?”

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이 아니라고? 그럼 뭐지?

양지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어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하얀색 털과 검은색 털이 복슬복슬한, 꽤나 귀여운 강아지가 어린 소녀와 함께 찍혀있었다. 이 여자애는 누구지? 여동생인가? 별로 양지랑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사진을 보여주는 양지의 얼굴에는 함박미소가 가득했다.

어머, 귀여운 아이네.

집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군.

“귀엽지? 마슬로라고 해.”

“……설마, 도와달라는 게, 이-”

“응.”

양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궤네도 아연해서 사진을 다시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해맑게 혀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의 순진한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흐음, 이 개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어이, 궤네. 말을 해도 좀…”

“그럼 개새끼라고 부를까?”

“아니 다른 좋은 말 있잖아! 강아지라던가, 그런 좋은 표현이 있는데 왜 꼭 그런 욕설 같은 말 쓰고 그래? 그것도 주인 앞에서.”

“난 마슬로의 주인이 아니야. 친구라고.”

난 왜 양 쪽에서 태클을 받고 있는 거냐. 이게 성차별인가. 그런 건가.

“그 견공께오선 어떤 곤경에 처해 계시지?”

궤네는 다시금 말을 바꾸어 양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점점 더 비꼬는 것처럼 들리게끔 바꿀 수 있는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양지는 심호흡을 하고 궤네의 질문에 답했다.

“속옷도둑, 이야.”

 

양지는 룸메이트인 생물계 D반의 시미와 함께 마슬로를 기르고 있었다. 본래 기숙사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실험용으로는 동물을 반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생물계인 시미가 그 점을 이용해 마슬로를 데려왔고 이 둘이 그렇게 강아지를 기르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누가 강아지를 기르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이 학교의 분위기였다.

“한데,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는 거군.”

“으응.”

양지는 치마를 살짝 움켜쥐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번 학기 초부터 여자기숙사에서 속옷이 자꾸 없어졌잖아. 범인은 잡히지 않고…그런데, 누가 목격하고 만 거야. 마슬로가, 속옷을 입에 물고 다니는 모습을.”

소문은 금세 퍼졌다. 기숙사 내에서 속옷이 없어지는 건 양지와 시미가 기르는 마슬로가 물어가기 때문이라는 이 소문은 피해 여학생들의 소소한 분노를 연료로 기숙사 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중간 중간 용의자가 잡힐 때마다 수그러들기도 했으나 번번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 나나 구소처럼 - 그 의혹의 불씨는 꺼질 듯 꺼지지 않고 이어져왔다.

“하지만 진범은 얼마 전에-”

“잊어버린 거야, 고군? 그 심의회의 역시 구소 후배의 속옷도둑 혐의를 벗긴 것에 지나지 않아. 그 이후 속옷도둑에 관한 심의회의는 아직 다시 열리지 않았어.”

“어? 그런 거야?”

그러고 보니 구소와 미소에 대한 징계는 자퇴 수속으로 무마되어 공표되지 않았고, 당연히 속옷도둑에 대한 진상도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도 속옷도둑 사건은 미제사건인 것이다. ‘이번에도 아니었다’는 사람들의 실망은 다시 마슬로가 진범이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안 그래도 마슬로를 이곳에 데려온 건 교칙위반인 걸. 그런데 그런 의심까지 받게 되면 정말로 마슬로가 속옷을 훔쳤든 훔치지 않았든 여기 있지 못하게 될 거야.”

양지는 절박하게 말했다. 과연, 편법을 써서 할로교육단지 내로 들여올 정도로 애정 깊은 반려동물과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정말로 괴로울 것이다. 게다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퇴율이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 각박한 학교에서 영지에게 마슬로가 차지하는 마음 속 비중은 정말로 커다랗겠지.

“영지 동기, 그래서 그대는 내게 그 마슬로의 변호를 의뢰하는 건가?”

“…그건 아니야. 마슬로는 심의를 받을 수도 없는 걸. 들어온 게 교칙위반이니까, 의혹만으로도 문답무용, 추방당하고 말 거야.”

“그렇다면 그대는 나에게 대체 뭘 바라는 거지? 설마 그 마슬로라는 동물계 척색동물문 포유류강 식육목 개과의 맬러뮤트가 속옷을 훔친 적이 없다고 증명해달라는 건가? 사람의 무효행동도 증명하는 건 무리난제야. 하물며 축생의 무효행동을 증명하는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당히 귀찮은 일이지.”

궤네는 사과에 은장도를 박았다 빼면서 수십 개의 구멍을 내며 말했다. 매우 신경질적인 손놀림이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틀림없이 엄살을 한껏 떤 다음 양지로부터 포인트를 마구 뜯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사람의 약점을 잡고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액을 청구할 거다. 내 때도 그랬고 미소 때도 그랬다.

“아니, 그것도 아닌데.”

“뭐?”

“그러니까 행간을 읽어야지, 궤네양.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 최인훈 『광장』에서 중립국을 그렇게 표현한 북한 장교의 말은 사실이지만, 전부의 사실을 말하는 건 아니었잖아?”

양지는 왼쪽 소매에 적힌 소설 일부를 인용하며 곤란한 듯 미소를 지었다. 궤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도 잠시, 궤네는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정말로 그 강아지가 훔친 거야?”

“으음~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그걸, 훔쳤다고 해야 할까, 훔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답답하군. 빨리 설명해. 상황을 알지 못하면 도와줄 수도 없어.”

궤네는 이번엔 정말로 신경질을 내며 사과를 찍었다. 양지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조금 늦고 말았어.”

“뭐가?”

마슬로는 지금 실종되었거든.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와 궤네를 앞에 두고 양지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녀의 말인 즉 이랬다. 마슬로는 평소 주인의 물건을 물어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걸로 몇 번인가 칭찬을 받았었다. 어디에 뒀는지 모를 휴대전화를 물어온다던가, 떨어뜨린 지갑을 찾아온다던가 하는 등의 기특한 행동으로 양지와 시미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마슬로는 그 기준을 동물적인 학습수준에서 판단했으며 ‘주인의 물건을 가져다주면 칭찬을 받는다’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양말을 물어오는 것까지는 봐줬지만, 오늘 아침 내 G-string을 물고 왔을 때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

“얌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대담한 속옷 선택이군, 양지 동기. 좋은 센스야.”

“고마워. 아무튼, 마슬로가 내 팬티를 물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막 화를 내고 말았어. 정말, 그건 실수였는데. 내가 그렇게 화를 내는 바람에, 마슬로가…”

“그래, 그 멍멍이가 어쨌다는 거지?”

“가출하고 말았어. 내 속옷을 입에 문 채.”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냐.

지금 교내에는 강아지가 속옷을 입에 물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가.

“언제 사라졌지?”

“반나절쯤. 되는대로 찾아봤지만,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 어떡하지?”

궤네는 곰곰이 손가락을 짚었다. 은장도로 사과를 콕콕 찌르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속옷을 물고 도망치는 개 자체만 보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야. 성장하면서 늑대로서의 본능이 애완견으로서의 사회화 과정과 충돌하면서 생기는 흔한 행동 중 하나지. 아마 이전에 마슬로가 속옷을 물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 것은 그런 맥락일 거야. 그런 행동은 보통 일시적이야.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다른 걸. 팬티를 물고 있는 것으로 완벽하게 범인, 아니 범견 취급을 받아 쫓기고 있을지도. 이미 고된 박해를 받아 야생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는 걸?”

“어, 어떡해, 그럼? 도와줘, 궤네양!”

“하지만 거절한다.”

“왜?!”

양지는 벌떡 일어나며 거세게 항의했다. 궤네는 사과의 껍질을 잘근잘근 씹었다.

“착각하지 마. 나는 탐정이 아니야. 변호인이라고. 양지 동기, 그대의 개가 심의에 올라왔다면 의뢰가 성립하겠지만 그저 행방불명. 교내를 돌아다니며 네 버터견을 찾아달라는 의뢰는 들어줄 수 없는 걸.”

“하, 하지만…!”

“그리고, 지금 나는 이사장으로부터 중요한 과제를 받은 참이라, 그대의 그 의뢰는 동시 진행하기 어렵군.”

“아까 이사장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궤네양, 속옷이 더 중요한 거 아니었어?”

“우매한 자여, 신중히 검토해서 사상의 조각칼을 가지고 이성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면 너는 발견하리라.”-요하네스 폰 랩플, 『악커만, 신의 법정에서 죽음과…귀찮군. 제목이 너무 길어. 양지 동기, 그대의 말버릇은 너무나도 길고 조잡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대의 치마 안감에 적혀 있어.”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아! 내가 적어놓은 건 한국문학뿐이라고.”

양지는 낙담해서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럼, 도와주지 않는 거야?”

“도와주지 않아. 그대는 멋대로 혼자 구원되겠지.”

“구해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고도를 기다려야지.”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떡을 바라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이야. 네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 안쪽에 적혀 있지.”

“그러니까 난 한국문학만 적어놓았다고!”

궤네는 쌀쌀맞게 손사래를 쳤다. 양지는 몇 번 더 애원하다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곧 깨닫고 힘없이 자리를 일어섰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꽃』에서는 내가 불러주기만 해도 됐지만 네가 답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양지는 터벅터벅 교실 문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궤네는 의뢰를 거절했다. 궤네에게 묶여 있는 나로서는 궤네가 거절했다면 내가 도와줄 도리가 없다. 안타까운 상황은 이해하지만, 나 혼자서는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지. 나는 그저 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는 걸 하릴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와줄까? 나중에 하루 데이트 해주는 걸로 어때, 마이 리틀 사피?

“저, 정말?! 도와주는 거야?”

물론이오, 소저. 곤경에 처한 여고생을 도와주는 것은 신사의 의무요.”

“흥, 그 신사의 이름은 틀림없이 변태겠군.”

“고마워, 고군!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지가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고 있었다. 궤네는 옆에서 툴툴거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 몇 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 잠깐, 저기…”

“고군이 도와준다니, 안심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군도 외인교실의 학생인 걸! 고군이라면 틀림없이 마슬로를 찾아줄 거야!”

반짝이는 양지의 눈동자 속에 내가 보였다. 식은땀을 줄줄 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거기 있었다.

“흥. 고군, 그대는 이사장의 과제를 잊었어? 지금 우선해야할 건 그쪽이잖아?”

궤네는 어딘가 언짢은지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이사장이 말했던 문제는 훨씬 시급한 문제야. 페로몬에 취한 개자식에게 시간을 허비할 순 없어.”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던 건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뭐, 솔직히, 이사장이 언급한 문제가 더 시급하기는 했다.

 

중간고사 문제지의 유실.

“유실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실제로는 절도일 가능성이 높지. 늘 있어왔다네. 왕도를 가지 못하고 편법을 쓰려는 나약한 녀석들이.”

이사장은 바삭하게 태운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기에, 나는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줄 알았다. 몇 초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에엑?!”하고 경악성을 내뱉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없어진 시험지는?”

“몇 장 안 돼.”

“그럼 문제없잖아, 이사장. 할로고등학교의 시험은 다른 곳과 달라. 학생 개개인에게 다른 문제를 주지. 똑같은 문제로 평가하는 시험 따위, 그 학생의 능력을 측정하지 못해. 기껏해야 누가 더 성실한가를 측정하지.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재능을 키우려고 이런 학교를 만든 게 아닐 텐데?”

“그야 물론이라네, 궤네 학생. 나는 성실한 학생을 원하지 않아. 재능 있는 학생을 원하지. 자기가 무슨 재능을 갖고 있는 줄도 모르는 범부들에도 관심 없네.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천재지,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수재가 아닐세.”

“그래서 문제도 학생마다 각기 다른 문제를, 한 문제씩밖에 내지 않잖아? 그 말인 즉, 없어진 시험지를 받아 볼 예정이었던 학생이 범인인 거겠지.”

시시해, 하고 궤네는 다시 접시위의 토막시체 조형에 열을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다. 그 시도는 다음 이어진 이사장의 말에 의해 성사되지 못했다.

“맞아, 범인을 찾는 건 간단하다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지. 시험지를 훔치려 했던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어왔네. 이번 사건이 다른 점은, 이번엔 성공했다는 점일세.”

“……호오?”

이사장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어 두어 알을 물도 없이 씹어 먹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 관심 없네. 시험 문제를 미리 알고 준비한다고 해서 잘 볼 수 있는 문제였다면 출제자를 해고했을 것이야. 하지만 절도가 일어났다는 건 공신력의 문제일세.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학부형들은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 의심하겠지. 곧 죽어도 자기 아들딸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인정 못할 족속들이니까, 이런 ‘사소한’ 실수가 트집거리가 된다네. 덕택에 시험지는 완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출제하고 보관하여 전산데이터로도 남지 않는 귀찮은 공정을 밟고 있어. 내가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는 건, 절도든 유실이든 출제된 시험지가 금고에서 사라졌다는 점일세. 고의든 우연이든, 명백하게 밝혀내지 않으면 재발의 위험에 떨어야겠지.”

시험에는 학생들의 전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고 성적이 나빠도 행복하다는 말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성적 때문에 사람은 자살도 한다.

‘차라리 시험 따위 없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훔쳤는지 몰라도 그 절실한 마음만큼은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천재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졸업이 안 되는 학교다. 그런 이 학교의 시험에서 성적은 ‘웬만큼 좋은 정도’로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전부 아니면 전무, pass or fail.

“그래서다. 이번 중간고사를 대체할 문제를 내도록 하지, 궤네. 그리고 고군.”

이사장은 가짜 수염을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시험지 유실의 진상을 밝혀내도록. 그것이 이번 자네들의 중간고사 문제다.”

 

이사장이 내준 과제는 내 중간고사다. 즉 내 졸업이 걸려 있다. 해답을 제출하는데 형식도 방법도 제시해주지 않았지만, 이사장의 태도를 보아 “알려주지 않으셨잖아요?”는 변명이라는 이름의 죄악으로 취급될 것만 같았다. 아무리 궤네와 같이 과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궤네가 순순히 묻어가도록 나를 내버려두진 않을 테지.

고로 내게는 여유가 없다.

내 손을 굳게 잡고 얼굴을 들이밀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문학소녀의 애완견을 찾을 시간은 없을 터였다.

걱정하지 마, 마이 리틀 사피. 너의 강아지는 반드시 찾아줄게.

마음 푹 놓고 기다리시오, 소저. 견공 한둘 쯤 찾는 건 일도 아니외다.

“정말로 고마워, 고군!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응? 아니, 잠깐…”

도대체 저 두 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째서 나는 양지에게 감사를 받고 있는 거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여긴 나와 궤네와 양지밖에 없으니 착각일 텐데, 어째서 내가 마슬로를 찾는 것을 도와주게 된 걸까.

“여고생에게는 사족을 못 쓰는군. 과연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

“아냐! 이건 대체…”

“포기해, 고군. 그대는 양지 동기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 괜히 그대가 여러 학교를 전전해도 적응하지 못했던 게 아니군. 과연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

“두 번 말하지 마! 난 변태가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저, 저기…”

“응? 뭔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함박 미소를 짓고 있는 양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미안, 내가 헛소리를 했네. 하하하!”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다른 특징은 없어? 그 마슬로…말이야.”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겠지. 최대한 빨리 양지의 강아지를 찾고, 궤네와 같이 시험지 유실에 대해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음~특징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냥 평범한 알래스칸 맬러뮤트야. 육포를 좋아하고, 목등을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해. 아, 꼬리는 잡으면 안 돼. 히스테리를 부리 거든. 일주일 전에 이빨이 새로 났고, 또…”

“그런 애완견 주인 입장에서의 특징을 설명해줘도 고군에겐 전혀 와 닿지 않아, 양지 동기. 보면 확 알 수 있는 것 없어? 현재 상황에서 말이지.”

“음음…아! 그렇지. 그게 있었어.”

딱 손뼉을 치고는 양지는 갑자기 치마를 걷어 올렸다. 내 바로 앞 30cm에서 또래의 여학생이 치마 자락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 위로 검정색의 끈이 나비모양으로 묶여있었다. 그 끝 한 가닥을 가느다란 두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잡아 당겼다. 보드라운 실크의 덧없는 마찰은 너무나도 쉽게 고리를 풀어버렸다.

“어…어어?!?!”

양지는 조심스럽게 치마 밑으로 그것을 끄집어냈다. 삼각형 모양의 반투명한 작은 천 양쪽으로 끈이 달린 그것을 내 눈앞에 펼쳐 보였다. 얼굴에 슬며시 풍겨오는 온기와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달려들어 손으로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혀로 핥고 싶어서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마슬로가 물고 다니고 있을 속옷이랑 똑같은 디자인이야. 색상은 조금 다르지만, 아마 지

금 교내에 있는 강아지들 중에 이 속옷과 똑같은 걸 물고 있는 애가 있다면 그 애가 마슬로일 거야.”

그녀는 자신의 속옷을 고이 접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 온기가 새어나갈 새라 나는 두 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그 천을 들어올렸다.

“전신전령으로 받았다. 이제 이 속옷은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딱!

“역시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 헛소리 말고 이리 내.”

궤네가 내 경건한 맹세를 끊으며 뒤통수에 알밤을 먹였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버둥대는 사이 궤네는 내 손에서 양지의 팬티를 강탈했다.

“무, 무슨 짓이야?”

“……G…string…!"

“G-string? 그게 뭔데?”

아까부터 얘기하고 있었지만 무슨 암혼가 했다.

“속옷의 종류. 옆구리와 등 부분, 엉덩이 사이로 들어가는 부분이 가느다란 끈으로 되어 있는 디자인의 팬티.”

“헤, 헤에…근데, 그게 어쨌는데?”

궤네는 팬티를 콱 움켜쥐었다.

“없어진 내 속옷과 똑같은 디자인이야. 단순히 종류만이 아니라 브랜드까지.”

“뭐?”

나는 아연해서 궤네를 돌아보았다. 양지도 “어, 정말?”하고 놀라워했다.

“어둠의 경로로 특별히 주문했던 건데.”

“나도 마찬가지야, 양지 동기. 그 루트는 못써먹겠군. 기성복도 아닌데 똑같은 속옷을 팔다니.”

궤네는 속옷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겉 표면만이 아니라 뒤집어 안감을 살펴 쓰다듬거나 냄새를 맡고 핥기까지 했다.

“잠깐,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

“확인이야, 확인. 이게 정말로 그녀의 것인지 알 수 없잖아?”

소유자가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건 역시 궤네, 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궤네는 천을 들어 빛에 비춰보고 끈을 다시 묶었다 풀어보고 하며 팬티를 살펴보았다.

“이건 틀림없는 양지 동기의 것이군.”

“그야 당연하지.”

눈앞에서 벗어 줬는걸.

“그대의 강아지는 찾아볼 가치가 있겠군. 고군? 그 마슬로라고 하는 느끼한 이름을 가진 개자식을 사로잡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리고 그 개새끼가 물고 있을 속옷도 반드시 확보하도록.”

“속옷은 왜?”

“왜라니! 너무하네, 고군. 그대는 양지 동기가 속옷을 입지 않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거야?”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속옷부터 돌려주라고!”

“아니, 이건 돌려줄 수 없지. 이제 이 속옷은 제 겁니다.”

“아나운서 발음으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서 돌려줘.”

“아니, 역시 돌려줄 수 없어. 이걸 참고로 개를 찾아야 하니까. 다른 속옷을 물고 돌아다니는 개가 교내에 또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 고군, 그대가 이 속옷을 갖고 있도록.”

궤네는 내게 양지의 속옷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질 새라 허둥지둥 그것을 잡아 가슴에 끌어안았다. 어째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으응, 난 별로 괜찮아.”

아니, 괜찮아선 안 되잖아. 오늘 처음 본 동년배의 남학생에게 자기 속옷을 맡겨도 되는 거야?

“그게 마슬로를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주먹을 불끈 쥐는 양지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학교에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은 가란 선배뿐인가?

“응? 이사장의 과제는?”

“그것도 같이 조사해야지. 개를 찾다 적당히 시간이 나면 교무실에 들려서 사정을 들어봐. 오늘 교무회의도 있었다고 하니,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교무회의라. 교무실에 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얼굴을 알고 있는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이랑 학생주임인 유승 선생님뿐이었다. 그 벗겨진 머리를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절대 도와주지 않으시겠지.’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뭐, 교무실은 나중에 천천히 찾아가도록 하고…

찾아가도록 하고?

“어, 어디부터 찾아봐야 하지?”

내 멍청한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두 명의 차가운 시선만이 나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오후 4시 반, 나와 양지는 여자 기숙사 앞에 있었다. 일단은 처음 사라진 곳부터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떠올린 것은 내가 아니라 궤네였지만. 궤네의 교실을 나서기 전 궤네는 이렇게 말했다.

“사흘 전에 나간 보신탕 주재료의 흔적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처음 사라진 곳을 무시할 순 없지. 고군 그대는 양지 동기와 함께 그 고단백 보양식이 주로 다녔던 루트를 다시 돌아보도록.”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양지가 그런 곳은 뒤져보았을 테니까. 하지만 할로 교육단지는 넓다. 지나치게 넓다. 총 인구가 250만이 된다는 어느 학원도시 정도는 아니지만 총 둘레가 22km에 달하는 분지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초 ․ 중 ․ 고 ․ 대학교 시설은 물론 학생, 교사, 교직원용 기숙사, 연구시설,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상업시설 및 기타 의료 등 편의시설, 이곳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의 주거시설이 전부 들어서 있다. 사법제도가 교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여기는 정말 하나의 도시국가나 다름없다.

“그만큼 넓은 곳을 돌아다니려면 조금이라도 다리가 긴 그대가 더 적임이겠지? 이 건은 그대에게 맡길게.”

타인이란, 내가 싫어하는 걸 떠맡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게 더불어 사는 삶이라지.”

“응! 역시 사람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독립했다고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길 잘했지.” -채만식, 『논 이야기』처럼 하등 쓸모없는 정부보다도 소중한 건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인 거야. 힘을 합쳐 찾아보자, 고군!”

양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오옷!” 함성을 질렀다. 나도 한숨만 내쉬고 있을 수는 없지.

“좋아, 그럼 일단 친구부터 시작할까? 마이 리틀 사피-

“응, 일단 친구부…응? 어, 저기, 고군? 지금 손이 이상한 곳에…”

전혀 이상하지 않아. 너의 그 허리 라인은 운동부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걸.”

“그, 그리고 사피는 여성 동성애주의자들을 말하는 거야. 난-”

응,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어, 사피. 처음은 친구로 시작해야지. 나의 펨(femme)이 될 때까지는 친구로, 조금 가까운 친구로 지냈으면 하는데?

“히, 히익-?!”

사사삭.

………….

“응? 거기서 뭐해?”

양지는 기숙사 벽으로 물러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바바리맨이 지나가는 것을 본 듯한 반응이었다. 어째서인가 앞섬이 풀려 있었고 눈동자에는 물방울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저, 저기, 역시 말이야. 따로 따로 찾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마슬로와 산책하던 코스는 그저 여자기숙사에서 고등부 교사까지의 길을 한 바퀴 도는 것뿐이었으니까! 교내는 너, 넓으니까! 둘로 나눠지는 편이 훨씬 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양지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안절부절 못했다. 허둥대며 주머니 속에서 마슬로의 사진과 궤네에게서 돌려받은 팬티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그, 그럼!” 하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문학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다리였다. 내가 뭔가 물어볼 틈도 없이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제 이 팬티는 내 것이외다.”

“고군, 거기서 뭐하고 있는가?”

등 뒤에서 들려온 청명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머리를 뒤로 올려 묶고 천으로 감싼 죽도를 어깨에 멘 가란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평소의 개량한복 같은 개조교복이 아닌 몸에 달라붙는 느낌의 트레이닝복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곡선의 미학은, 한복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 가란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 고군? 그 손에 든 것은 무엇인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속옷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가란 선배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 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서, 선배?!”

“무언가 감추지 않았나? 숨길 거 없다. 너와 나 사이가 아닌가? 어디어디…”

나에게 전류가 흘렀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선배의 손가락이 내 허벅지를 긁었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 이질적인 감각에 나는 전신을 비틀었다. 그 손가락이 닿는 부분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이 낯설었다. 피부를 타고 퍼지는 찌릿찌릿한 느낌에 나는 뇌가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찾았다.”

“앗?!”

크, 큰일 났다. 양지의 속옷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건전한 속옷이 아니었다. 앞쪽에는 반투명한 조그만 삼각 천으로 되어 있고 엉덩이와 허리, 등을 감싸는 부분은 끈밖에 없는 표면적이 극단적으로 작은 팬티다. 그런 걸 들키면, 아아 가란 선배 안에서 내 호감도는 자연인처럼 낙하하고 있겠지.

“…고군은, 이런 취미였나.”

“아니, 그건, 저기…”

“아무리 그래도 이 아이는 초등학생이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지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 팬티가 좀 작아보여도 초등학생의 팬티는 아니에…에?”

나는 가란 선배가 내 주머니에서 꺼내간 물건을 다시 돌아보았다. 선배의 손에 들린 것은 검정색의 G-string 팬티가 아닌 마슬로가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가란 선배는 어딘가 언짢은 표정으로 사진을 흔들었다.

“이런 어린 소녀의 사진을 보고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개인의 성적 취향을 두고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는 여자기숙사 앞이다. 궤네와 붙어 다닐 때부터 그런 기미가 있다고는 어렴풋이 생각해왔으나, 이런 백주대낮에 이와 같은-”

“저, 저기 가란 선배. 실은 그게 아니라…”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양지가 몰래 키우던 개를 잃어버렸고, 사진 속에 찍힌 여자애가 아닌 개를 찾기 위해 학교를 돌아다닐 예정이라는 것을 듣자 가란 선배는 얼굴을 풀었다.

“과연, 그런 거였나. 미안하다. 내가 괜한 오해를 했다.”

가란 선배는 사진 속의 개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선배! 이 개를 본 적이 있나요?”

선배는 다시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건드리며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착각이다. 그 개와 이 개가 같은 개일 리 없지.”

“어, 어떤 개였나요?”

“내가 봤던 개는 이 개와 비슷한 털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 개와는 달라. 그 개는 알래스칸 맬러뮤트라고 하는-”

“그, 그거에요!”

맬러뮤트. 분명 궤네는 사진 속의 강아지를 지칭하는 무수한 표현 중 하나로 그것을 사용했었다. 꽤나 특이하고 어감이 멋진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선배가 그 개를 보았다면 얘기는 빠르다. 이런 곳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거 없이 선배가 그 개를 봤던 곳으로 가서 조사하는 편이 낫다.

“그 개는 어디서 보셨나요?”

 

매년 가을, 전국에 있는 스포츠 관계자들을 바쁘게 하는 행사가 있다. 대한체육회 주최로 개최되는 전국 규모의 종합경기대회, 전국체전. 종목 또한 육상·사이클·역도·사격·승마·체조·수영(경영·다이빙)·빙상·스키·조정·축구·야구·농구·배구·연식야구·테니스·연식정구·탁구·핸드볼·럭비·축구·복싱·레슬링·씨름·유도·검도·궁도·하키·수구·아이스하키·펜싱·배드민턴·태권도 등 33개 종목으로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는 물론 체급 및 규정 거리, 조건별 분류 등 세부적으로 경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경기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체육인의 대전이다.

2학기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전국체전을 대비해 가란 선배는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전통무예 조선도가 산산심원류는 현대검도에 맞지 않는다. 본래 숭문억무 정책으로 봉문될 처지에 놓이자 관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문파다. 험하고 검로에 장애물이 많은 지형에서 무거운 칼을 휘두르기 위해 만들어진 도법, 가벼운 죽도로는 형조차 잡기 어렵다. 이제와 현대검도를 하기에 내 몸은 너무 산산심원류에 맞추어져 있다. 그것을 교정하는 건 나 혼자서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가란 선배는 요사이에 분지 외곽의 공터에서 혼자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때 특이한 개를 한 마리 보았다고 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사진 속의 그 개처럼 귀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개가 틀림없어요, 선배.”

교육단지 내에 동물이 흔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그 개는 상당히 인상적인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했다. 보통의 인조가죽이나 가벼운 사슬로 엮인 목걸이가 아닌 실크와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천.

“그런 특이한 목걸이를 한 개가 또 있을 리가 없죠.”

나는 주머니 속의 견본을 만지작거렸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을 간질였다. 그 형태는 손에 잡힐 듯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니, 실제로 손에 잡히고 있지만.

“좋다. 나도 돕도록 하지.”

“옛? 선배가요?”

“일단 그 개를 본 적이 있는 건 나뿐이다. 아니면…내가, 같이 다니는 게 불만인가?”

가란 선배는 수줍게 얼굴을 돌렸다. 그녀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에 다시 내게 전류가 흘렀다. 아까 가란 선배의 손가락이 건드렸던 허벅지가 다시 찌릿찌릿 저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뇨! 절대로 그런! 불만의 ‘ㄱ’자도 있을 리가!”

“불만에는 ‘ㄱ’자가 없다, 고군.”

“고군의 ‘ㄱ’자도 있을 리가!”

“그래서야 네가 없어진다, 고군. 그렇다면, 그, 수색에 참여해도 되겠는가?”

그거야 물론,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 도와주시는 건가요, 선배?”

가란 선배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머뭇머뭇 거리며 말했다. 두 검지를 톡톡 맞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도와주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가? 더불어 사는 게 사람 사는 삶이 아닌가.”

“-아니, 그거면 충분하죠.”

남에게 싫은 것을 떠맡기는 것이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데 이유는 필요치 않다. 나는 입가가 저절로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갈까요?”

“음, 가자. 그 전에 잠시 검도부실에 들려도 되겠는가? 내가 그 개를 본 곳은 내 수련장소다. 가져가야할 물건들이 있다.”

“네, 그러죠.”

 

검도부실은 본관 건물 옆의 실내 체육관 안에 있다. 일단 본관에 온 김에 나는 가란 선배가 필요한 도구를 챙기는 사이 이공계 교실로 향했다. 양지의 룸메이트이며 그녀와 함께 마슬로를 기르던 또 다른 주인, 시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생물계 2학년 D반 교실 문 앞에서 나는 시미를 불러내었다. 복도로 나온 그녀는 양 갈레로 댕기를 묶어 내린 날카로운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교복은 겉옷 마의를 갱지색의 실험실 가운 모양으로 개조했다. 그녀는 명백히 경계하는 눈초리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용무?”

“으, 으응, 저기 마슬로 말인데…”

나는 시미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더니 안색을 굳혔다. 시미가 사진을 땅에 버릴 기세로 내던져서 나는 허둥지둥 사진을 다시 주워야했다.

“속옷을 훔쳐서 달아난 개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양지 녀석, 쓸데없는 짓을…”

시미는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얼핏 본 그녀의 손톱은 열손가락 전부가 톱니처럼 뜯겨져 있었다.

“뭘 봐?”

“아니…”

우와, 말 걸기 어려워. 굉장히 쌀쌀맞은 태도에 나는 주춤했다. 양지와 달리 시미는 마슬로에 대해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걱정이라기보다는 조금 미워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슬로가 걱정되지 않아?”

“흥! 그깟 개, 어차피 실험용으로 들여온 거였어. 그걸 양지가 귀엽다, 예쁘다, 기르자 졸라서 몰래 기르게 된 건데, 주인 속옷을 훔쳐 달아나다니. 양지 걘 그러고도 찾아 달래? 아, 속옷을 잊어버렸지? 속옷을 찾기 위해서 마슬로를 찾아 달라 한 거 아냐?”

“아니, 그건 아니라고 봐.”

속옷에 집착했다면 내 주머니 속에 있는 그것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조금 과하게 야한 속옷을 입더라도 그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게 필사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아무튼, 볼 일 없으면 사라져 줄래? 이쪽은 외인교실의 천재님처럼 한가하지 않으니까.”

“? 그건 무슨 말이야?”

시미는 신경질을 내며 한숨을 내뱉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란 말이야! 너, 이 학교에 막 들어와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학교에서의 시험은 다른 학교 거처럼 친절하지 않아! 교과서나 문제지에 나온 문제가 숫자나 단어만 바꾸어 그대로 나오는 한심한 출제를 했다간 선생님이 모가지라고! 게다가 딱, 딱 한 문제만 낸단 말야! 못 풀면 점수가 없어. 알아? 경우에 따라서는 마이너스 점수가 나올 수도 있다고! 그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뭐? 개새끼? 그 딴 거 찾을 여유가 있다면 라이트노벨이라도 한 권 더 읽으라 그래!”

교실문을 쾅 닫고 시미는 들어가 버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다른 사람이 보면 놀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겠구나. 그것도 내 중간고사 과제가 궤네와 공동으로 진행되기 때문일 거다. 그렇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지만, 나는 왠지 중간고사에서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중간고사는 마치 나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 같게 느껴졌다.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 조금 달라.’

이전의 학교에 있을 땐 아무리 그래도 시험기간에는 조금 긴장했었다. 단지 그것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다발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나는 이제까지의 학교생활 중 가장 느긋하게 중간고사를 맞이하고 가장 느긋하게 중간고사를 방관하고 있었다.

“대체 뭘까?”

웅성웅성.

“응?”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복도로 나와 어느 한 소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웅성거림의 중심이 된 곳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갔다.

“……학생회장?”

복도 중앙으로 평범한 단발 리에 새하얗게 백열하는 안경을 쓴 평범한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 본질이 평범할 리는 없다. 그 외견과 달리 내용물은 그 궤네가 인정할 정도의 천재인 것이다.

학생회장, 산단.

‘뭐, 뭐냐 이건…’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복도를 지나고 있다는 것만으로 2학년 학생 전부가 복도를 훔쳐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학생회장이 그렇게 특별한 미소녀인 것도 아니다. 다른 학교였다면 스치고 지나가도 기억할 수 없는 평범한, 아니 인상이 약한 외모다.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냉막한 표정으로 그녀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탁.

산단의 걸음이 멈췄다. 내 앞 1m 앞에서 발을 멈추고 나를 마주 보았다. 마치 내게 용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단순히,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녀가 가는 이동선상에서 내가 비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산단에게도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찬찬히 올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D반 백석 2학년생.”

“예, 옛!”

D반에서 나와 있던 남학생 한 명이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삭막한 목소리로 산단은 그 백석이란 학생에게 물었다.

“백석 2학년생. 너의 눈에도 내 앞의 사람이 보여?”

“예? 예, 예…보여요. 보입니다.”

“그래?”

산단은 그 말을 듣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백석이란 남학생에게도, 내게도 특별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0여분 같은 10여초가 지나고 높낮이가 없는 억양으로 물어왔다.

“내게 뭔가 용무가 있어, 토반 고군 2학년생?”

“아, 아니. 딱히 없…”

잠깐. 궤네는 산단에 대해 뭐라고 말했더라?

학생회장은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궤네는 그것을 주의를 집중하건 집중하지 않았건, 감각 영역에 들어온 모든 자극을 정보로서 캐치하고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천재는 머리가 좋아. 그건 뭐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방향으로 좋은가가 더 중요하지. 그것이 단순히 머리가 조금 좋을 뿐인 범부와 천재를 구별해. 학생회장은 틀림없는 초인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지.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이라도 노력하면 가능한 영역이야. 단순히 보고 들은 것을 기계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천재의 조건이 아니지.”

“그럼 뭐야? 학생회장은 다르다는 거야?”

“물론이지. 학생회장, 산단은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 그녀는 우리와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정보를 기억해. 아니, 정보를 저장하는 것까지는 같지만 인출하는 방법이 달라. 그녀는 무의식에 저장된 정보를 자기 마음대로 꺼낼 수 있어.”

그 후 궤네는 샬라샬라 블라블라 복잡한 심리학 용어와 신경생리학 용어를 들먹이며 학생회장이 어떻게 그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했지만 그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키죠…프레니? 무슨 죠다이아? 맬러뮤트 같이 입에 착 달라붙는 용어가 아니라 머리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대충 이해하지면 산단은 그녀가 보았다고 자각하지 못한 것까지도 기억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갖고 싶은 사기적인 기억력이겠지.

‘그렇다면 그녀는 마슬로를 어디선가 봤을지도 몰라.’

“저, 저기!”

나는 마슬로의 사진을 꺼내들고 그것을 산단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혹시 이 개를 본 적이 있어?”

“……”

그녀의 안경알에 마슬로의 모습이 새하얗게 비춰졌다. 사진을 들어 올린 팔이 뻐근해진다고 느껴질 시간동안만큼의 침묵이 흐르고, 산단의 입이 짧게 열렸다.

“있어.”

“어, 어디서?”

“…………”

앞서 누적된 뻐근함에 더해 저려올 만큼 다시 침묵이 흐르고 산단은 의외의 대답을 주었다.

“교무실.”

“교무실?”

교무실? 교무실에 강아지가 숨어 들어왔었다는 건가? 아니 대체 뭣 때문에? 교무실에 개가 들어가게 될 이유를 나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길을 비켜줘, 토반 고군 2학년생.‘

“응? 아, 미안.”

나는 허겁지겁 길을 비켰다. 복도 벽에 바싹 달라붙어 피한 나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산단은 왔던 걸음 그대로 다시 걸어 나갔다.

조심해.”

“뭐?”

산단이 스쳐지나가면서 작게 중얼거린 경고에 나는 몸을 경직시켰다. 복도에 나온 구경꾼들의 소란 속에서도 그 말은 내 귀에 똑똑히 전해졌다.

“도대체 뭘 조심하라는 거지?”

나는 복도에 멍청히 서서 조심해야할 것들을 생각해봤다. 땅에 떨어진 바나나 껍질부터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다시 봐야할 꺼진 불까지 고려해보았지만 궤네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산단의 말은 자욱하게 낀 내 머릿속 안개 너머에 무언가 잊고 있는 것이 있음을 계속 알려주는 듯 했다.

“…………아.”

가란 선배를 기다리게 하고 말았다!

 

“아니, 별로 기다리지 않았다. 검도부실에서 후배들의 지도를 하다 보니, 나도 조금 시간을 잊고 있었다. 오히려 고군, 네가 가버리지 않았나 걱정했다.”

허둥지둥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란 선배는 검은색 도복 차림으로 나와 있었다. 죽도를 묶어놓은 검보 두 개를 어깨에 지고 표표히 선 가란 선배의 모습에 일순 눈을 빼앗겨버렸다. 그 사이에 간과 쓸개를 적출당했다 하더라도 나는 분명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선배의 도복 차림,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그, 그런가? 냄새가 나지는 않는가? 부끄럽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선배는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했다. 내 심장박동 수는 침묵의 시간만큼 가속했다. 나는 심장의 달음질을 견디지 못하고 이 좋은 시간을 깨버렸다.

“그, 저기! 이제부터 어디로 가나요, 선배?”

“음, 내가 그 개를 본 곳은 여기서 약 30분 거리에 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타고 분지를 약간 올라가야 있는 공터다. 조금 험한 루트가 되는데, 괜찮겠나?”

“예! 선배가 가는 곳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 드릴게요!”

“……말은 고맙게 받아 두겠다, 고군.”

가란 선배는 곤란한 듯 멋쩍게 웃었다.

“그럼 가볼까, 고군? 석양을 향해 달린다!”

“오옷!”

그리고 선배는 정말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다.

“분명히 나는 지옥으로 떨어질 테지. 그래도 너는, 따라와 줄까?”

“예? 선배,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선배가 말한 ‘30분 거리’는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앞에 ‘1시간’이라는 단어를 빼먹은 거리였다. 처음 가볍게 시작한 조깅은 어느새 전력질주를 하지 않으면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속도가 되어 있었다. 가란 선배의 발걸음은 겉보기엔 너무나도 가벼워서 인술(忍術)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산을 넘고 강을 지나 바다를 건넌 느낌이 들 만큼 먼 길을 달려 우리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할로 교육단지 외곽의 분지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었지만 정규 등산로 같은 건 아니었다. 가란 선배가 없었으면 꼼짝없이 조난을 당할 참이었다.

“학교 내에 이런 길이 있다니.”

“할로 교육단지는 넓다. 매년 길을 잃고 돌아오지 않는 실종자도 간간히 나온다.”

“…그거, 농담이죠?”

돌아보는 가란 선배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침을 삼켰다.

“물론 농담이다.”

“선배!”

“하하핫, 미안하다, 고군. 하지만 실종자가 나오는 건 사실이다. 단지 길을 잃고 나오는 게 아닐 뿐이다.”

“예?”

가란 선배는 내가 지나가기 편하도록 수풀을 세심하게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배는 말을 이었다.

“할로 고등학교의 커리큘럼에 따라가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인사를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다. 학교 측도 누가 전학을 갔는지, 누가 학교를 그만뒀는지 다른 학생들에게 따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날 학교에 가봤더니 옆 자리 친구가 없어졌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인 것이다. 포기하고 떠난 자에게 이 학교의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 어째서죠?”

“그들은 패배자니까. 하지만 그건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낙오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학교에 없다. 누구나 이 학교에 들어오고 재능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또한 언제든지 낙오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거다. 그들을 돌아볼 정도의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게 ‘실종자’가 되어버리는 거다, 고 가란 선배는 말했다.

“실종 취급을 하면, 적어도 ‘부득이하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라는 변명이 가능하니까. 이 학교 학생들 나름대로의 마음씀씀이다.”

“그건…좀, 슬프네요.”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다른 학생들은 이곳을 포기하면 다시 입시로 돌아갈 수 있다. 재미없고 모두가 다 똑같은 문제 속에 파묻혀 끙끙대는 회색빛 스쿨라이프가 시작될 테지. 할로고에서의 입시를 버린 공부에 익숙해져 적응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다. 그런 삶이라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실패하면 다시 입시로 돌아가면 된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모든 학교에서 거부당하고 이곳으로 떨어져 나온 나는?

여기서 ‘실종’되면, 나는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도착했다. 이곳이, 내 연습 장소다.”

가란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수풀을 헤치고 올라선 곳은 조그만 공터였다. 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어 해가 기울어가는 지금은 어둑어둑했다. 말 그대로 숲 속 한 가운데 같은 곳이었다. 가로등도 없고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완전히 어둠에 집어 삼켜진 느낌이었다.

“조용하고 시선이 없는 곳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곳에서 연습을 해 와서, 도장의 깨끗한 분위기가 오히려 더 어색하다.”

가란 선배는 구김살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선배의 웃는 얼굴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선배는 숫제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흙과 낙엽을 밟으며 준비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죽도를 휙휙 휘두르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넋을 잃고 쳐다보고 말았다. 선배가 밟는 낙엽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려왔다.

“이곳에서, 그 개를 본 건가요?”

“아아, 그렇다. 어제 저녁, 이곳에서 연습을 하던 도중 그 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밤중이라 명확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이쪽을 향해 으르렁 거리기에 쫓아버렸지만.”

“으음, 뭔가 더 기억나는 게 있나요?”

“글쎄…음, 타는 듯한 그 눈동자는 꽤 인상적이었다. 푸르게 빛나는 것이 마치 반딧불 같았다.” “뭔가 좀 섬뜩하네요.”

동물의 눈동자는 밤에 무섭게 빛난다. 어두운 만큼 빛을 더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데 정면에서 보면 그저 도깨비불처럼 보일 뿐이다. 저렇게 커다란 대형견의 경우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저렇게?”

“음, 저렇게다.”

나무 사이의 어둠속에서 퍼렇게 이글거리는 두 개의 불빛이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잔상이 남을 정도로 타오르는 눈빛. 그 밑으로 지옥의 겁화와 같은 뜨거운 숨결이 초가을 저녁 날씨에 김이 서리게 했다.

“저, 가란 선배가 본 개라는 게…”

“음, 저거다.”

1m는 가볍게 넘는 어깨 높이. 철근이 휘감겨져 있는 듯한 다리 근육. 유연하고 리드미컬하게 들썩이는 커다란 몸통. 상대를 노리기 위해 조용히 내린 꼬리. 섬뜩하게 빛나는 두 눈과 수십 개의 송곳니.

저건, 그냥 개가 아니다. 사진 속의 그 귀여운 강아지는 더욱 아니다. 저것은 그거다. 멸종위기로 인해 워싱턴 조약의 보호를 받는, 설원을 달리며 달을 향해 울부짖는 종류의 그것다.

그리고 그 긴장감을 완전히 떨어뜨리는 목에 걸린 삼각형의 천.

“앗!”

나는 주머니 속에서 사진과 팬티를 꺼내 들었다. 사진 속의 개와 인상은 매우 다르지만, 털의 무늬라던가 귀의 형태는 상당히 닮았다. 팬티의 경우는 두 말할 것 없이 똑같은 종류에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브랜드의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속옷을 물고 도망치는 개가 달리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똑 닮은 털 무늬. 그 옆에 찍혀있는 어린 여자애도 자세히 보면 어디선가 봤던 느낌이다. 어디서 봤더라. 별로 오래되지 않은 기억에-

【Grrrr-】

히익?! 지금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잖아!

저 짐승은 완전히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목을 울리며 앞다리를 굽혀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것처럼 리드미컬하게 약동했다. 목에 팬티를 걸치고 있어 긴장감이 폭락했지만 저 시커먼 발톱과 허연 이빨은 내 뼈와 살을 발라내기에 충분했다.

【Grrrrr-】

“저기, 마슬로? 나비야? 저기, 착하지? 우리 같이 육포라도 씹으며 친목을 다지지 않을래?”

【Grrrrrrrr-!!!】

사람에게도 통하지 않는 내 친분증진 스킬이 개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심연과도 같은 목구멍 속을 드러내며 질풍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우아아아앗?!”

“고군, 피해!”

내가 그 말을 실행하기도 전에 가란 선배는 내 목덜미를 잡아 뒤로 내팽겨 쳤다. 나는 엉덩방아를 찍고 나무에 머리를 박아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을 볼 수 있었다. 핑핑 도는 시야 속에서 가란 선배의 죽도를 물고 으르렁 대는 짐승을 보았다.

콰직!

“마, 말도 안 돼!”

개의 턱으로 죽도를 부러뜨리다니! 도대체 뭘 먹이면 저렇게 되는 거냐?! 나무 조각을 잘근잘근 씹다 퉤하고 뱉는 개가 이쪽을 보며 씨익 웃는 것 같았다. 가란 선배는 사뿐사뿐 뒤로 물러났다.

“고군, 저기 내 칼을 가져와줘. 지금 이대로라면 등을 보이면 당한다.”

“아, 예!”

나는 서둘러 선배가 옆에 세워둔 검보로 달려갔다. 그런 내 움직임을 도망치는 먹이로 인식했는지 개는 갈지(之) 자로 방향을 틀며 가란 선배를 재치고 내게 달려들었다.

“우앗?!”

“고군!”

나는 세워둔 검보에서 칼을 뺄 생각도 못하고 그것을 들어 개의 이빨을 막았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또 죽도가 부서져 나갔-

“어, 어라?”

【G, gr, gr…】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개는 갑자기 깨갱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얼이 빠져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긴장이 풀리자 새삼 그 검보가 엄청나게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보를 든 팔이 지면에 낙하했다. 개가 움츠러든 사이 가란 선배는 내게 다가와 검보를 건네받고 천을 벗겨내었다.

스릉-

검보 안에 감싸져 있던 것은 죽도 따위가 아니었다. 사극에서 볼 법한, 그것도 장식용처럼 유려한 칼이 아닌 내 팔뚝보다도 넓은 검신의 거대하고 거무튀튀한 곡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처럼은 되지 않는다. 오라.”

【G, grrrr-!】

마슬로(추정)는 고통에 대한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도약했다. 동시에, 가란 선배의 곡도가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칼을 씹어 부수려는 커다랗게 벌린 입을 마치 허공을 베는 것처럼 통과하고 회전축을 바꿔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G, g, gr-?!】

“안심해라. 칼등으로 쳤다.”

곡도를 들고 나서부터 가란 선배의 움직임은 죽도로 방어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죽도를 들었을 때의 움직임은 어딘가 경직되고 조심스러웠다면 곡도를 들었을 때는 마치 폭풍 같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보다 마슬로(추정)가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마슬로는 가란 선배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앞다리로 억누르려 했지만 잘 안 되어 데굴데굴 굴렀다. 간신히 진정하고 자세를 잡은 마슬로는 작게 으르렁 거리다…

【G, ggu…】

꼬리를 말고 달아나버렸다. 워낙에 빨라서 도저히 따라가는 건 무리였다.

“저래서야 잡을 수 없잖아…”

“방금 그 개가 고군, 네가 찾던 개인가?”

“아마도요…”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저건 이미 야생동물이다. 저것을 잡으려면 사냥꾼의 스킬이 필요하다. 평범하다 못해 열등한 나에게, 저걸 사로잡는 건 절대로 무리다.

“저건 어쩔 수 없다. 그 개는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군 네가 위험했다. 하지만 그 탓에 도망쳐 버리고 말았군. 미안하다.”

“아, 아뇨. 선배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닌 걸요. 오히려 제 쪽이 죄송하죠. 죽도는 어떻게든 변상을-”

“아니, 그건 신경 쓸 것 없다. 오늘 연습은 못하게 되었지만, 그 정도 실전이 있었으면 충분히 커버되었을 거다.”

확실히 굉장했다. 죽도를 씹어 부러뜨린 개도 굉장했지만 가란 선배의 그 기술은 마치 마법 같았다. 분명히 마슬로가 물어서 칼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마슬로를 통과해서 뒤에서 치고 들어왔다. 눈앞에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연습은 무리로군.”

가란 선배는 한숨을 내쉬며 죽도를 집어 들었다. 마슬로가 꺾어버린 죽도 조각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선배, 발은 괜찮아요? 지금도 맨발인데…”

“아아, 문제없다. 단련을 허투로 한 것은 아니니까. 나뭇가지 정도는 아무런…꺄앗?!”

가란 선배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 안겨왔다. 나도 덩달아 당황해서 선배를 끌어안고 말았다.

“서, 선배?”

“바, 발치에 뭔가가…”

나는 조심스레 바닥을 살폈다. 도복 하카마 밑으로 드러난 선배의 새하얀 발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가 선배가 베어허그를 걸어오자 얌전히 바닥을 조사했다.

“이건…”

“뭐, 뭔가, 고군? 뭐가 있었는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가란 선배의 발에 이질감을 준 녀석의 정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안심하세요, 선배. 별 거 아니니까.”

“뭐였는가?! 빨리 말해라.”

“뭐, 몹이 떨군 아이템이죠.”

나는 씨익 웃으며 삼각형 모양의 반투명한 작은 천 양쪽으로 끈이 달린 그것을 들어올렸다.

 

§

 

다음 날 아침 8시, 나는 궤네에게 어제의 일을 보고했다. 양지와 조사를 시작하고, 시미를 만나고, 학생회장을 만나고, 가란 선배와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궤네는 내 보고를 들으면서 점점 볼을 부풀렸다.

“그대는 왜 여자들하고만 만나고 있던 거지?”

“그, 글쎄…”

“그래서, 알아낸 게 뭐야? 고단백 보양식은 놓치고, 시험지 건은 조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게…어쩔 수가 없었어. 시간과 예산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떻게…”

“변명은 죄악이라는 걸 몰라? 고군, 이래서야 그대를 고용하는 의미가 없잖아? 내가 어제 혼자서 24인용 클루를 클리어 하는 동안 대체 뭘 한 거야?”

“넌 날 보내놓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던 거냐?!”

24인 클루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클리어가 되기는 하는 거냐. 혼자서 했으니 누가 범인인지는 뻔히 알고 있었겠지만.

어제 마슬로의 습격을 처리한 후에는 가란 선배와 느긋하게 밤길을 걸어왔다. 선배의 연습 장소는 기숙사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밤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시간에 돌아왔으니 더 이상 조사고 뭐고 할 수 없었다.

“그대에게 들어도 소용이 없겠는 걸. 바꿔.”

불렀어, 마이 쁘띠 쇠르?

“여전히 기분 나쁜 호칭이네, 양양. 뭔가 알아낸 게 있으면 말해.”

흐응, 가벼운 딥 키스 한 번 해주면 말해줄게.

“유감이지만 난 동성애에는 흥미 없어. 정 원한다면 내 발가락을 핥는 걸로 해 주지.”

유감이지만 난 두 눈을 마주보는 것 외에는 흥미 없는 걸. 발가락을 핥는 건 내가 하겠소!

부씨한테는 볼일 없어. 그대가 알아온 정보 따위 고군과 별 다를 바가 없잖아?”

호오,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릴 할 수 있을꼬, 궤네 소저?

“무엇을 꺼내도 달라질 일은 없…그, 그건?!”

맞소! 이것이야말로 탕견宕犬, 마슬로 공이 목에 걸고 있던 속곳! 과연 이것은 누구의 것이었을꼬…

“여전히 그 쪽 방면으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군, 부씨. 과연 경력 43년의 변태인생. 연륜이 다르다는 걸까? 좋아, 그 팬티를 넘기고 입수 경위를 설명하면 1분간 얼굴을 밟아주지.”

약속한 거외다!

………….

“호오, 과연 그렇게 된 거로군. 정말로 다른 여자애들이랑 시시덕거리기만 했다니, 고군에게는 벌을 줘야겠군. 이후 하루 동안 나는 고군과 스킨십을 하지 않겠어.” 그 무슨 잔혹한 형을…잠깐, 기다리시게, 소저! 그 말인 즉슨 나 또한 밟아주지 않겠다는 게요?

“어머, 유감이네.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해야지, 어쩌겠어?”

어허헝!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소? 내 성의를 담아 보고했거늘!

잠깐, 내 보고는 듣지 않을 셈이야? 마이 쁘띠 쇠르, 이 언니는 슬프단다.

“에에이, 귀찮아. 들러붙지 마! 멍청한 고군으로 어서 돌아오라고.”

…….

정신을 차리고 보니 궤네의 발가락이 내 눈을 찌르고 있었다.

꾸욱.

“우악?! 무, 무슨 짓이야?!”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보려는 안구 따위 필요 없잖아? 나는 언제나 그대의 마음속에 있을 테니, 눈을 감으면 내 모습이 떠오르겠지. 그대의 시각신경계는 내 모습을 담기만 하면 돼. 다른 여성의 시각자극정보를 받아들이기에는 용적이 부족하지.”

“내 눈의 용도를 협소하게 한정 짓지 마!”

OME! 내 안구에 가해진 물질적인 테러에 이어 정신적인 테러도 할 셈이더냐? 어디까지나 섬뜩부끄를 연기할 셈이겠지만, 궤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이상 새침부끄도 섬뜩부끄도 성립하지 않았다.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간신히 일어섰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궤네의 발이 닿는 눈높이에 얼굴을 가져가는 무의미한, 아니 백해무익한 행동을 하고 있던 걸까.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하기는 더욱 어려워져. 하지만 개는 단지 밖으로 도망칠 수 없지만 시험지는 인멸이 가능하지. 어차피 학생 한 명에게 하나의 문제, 그것조차 외우지 못하는 녀석은 이 학교에 없어. 이미 시험지 원본은 찾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면 훔쳐간 순간 이미 시험지를 되찾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잖아.

“아니, 문제를 미리 알고 싶었다면 굳이 훔쳐가지 않아도 그냥 열어본 후, 그대로 놔두었어도 되었다는 이야기지. 다르게 말하면 훔쳐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야. 그 이유가 어떤가에 따라 시험지는 아직도 남아 있을 수도 있어.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지.”

궤네는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들었다. 허벅지에 멘 칼집에서 은장도를 뽑아 사과껍질에 칼선을 그었다.

“시험지가 없어졌다는 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어. 그럼 그게 발각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것은 손에 잡힌 이 고군 그대의 고환처럼, 아니 잘못 봤네. 이 사과처럼 뻔한 일이지.” “무엇을 보고 내 거기와 그것을 착각한 거냐?!”

애초에 본 적도 없으면서!

“이 나뭇잎도 떨어지지 않고 조그맣게 달라붙어 있는 꼭지가 닮았지. 모양은 물론 크기도-”

덜커덩!

궤네의 근거도 없이 허황된 묘사를 끊고 외인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방문객이 있었다. 온 교복을 글자로 뒤엎고 있는 문학소녀, 양지였다.

“양지 동기? 미안하지만 무능한 고자, 아니 고군은 아직 그대의 개를 찾지 못했어.”

“…그게 아니야. 궤네양, 변호를 부탁할 수 있을까?”

“변호?”

양지는 어딘가 초조해보였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의 손에 치맛자락이 구겨지고 있었다.

“설마, 그 개가 심의회의에 회부되었어? 유승 선생님도 할 일이 없나 보군.”

“아니, 회부된 건 마슬로가 아니야. 회부된 건……나라고.”

“호오? 무슨 사유지?”

양지는 고개를 숙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시험지…도둑.”

 

할로 고등학교의 교무실은 본관 1층에 있다. 교실 3개분의 커다란 공간에는 어지럽게 배치된 선생님들의 책상에는 온갖 문제지, 자료가 널브러져 있었고 복사기를 비롯한 사무용 도구들이 즐비했다. 그 광경은 이제까지 봐왔던 다른 평범한 고등학교의 교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구와 ‘저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막다른 복도 끝인 교무실의 입구는 전자식 미닫이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도어락에 교원카드를 인식시키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비소통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이었다. 학생은 설령 용무가 있더라도 선생님을 교무실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건 아니야. 학생에게 용무가 있다면 교사가 찾아가야지. 그게 당연한 거야.”

“? 어째서?”

“선생은 평범한 사람이고, 이곳의 학생들은 잠정적인 천재니까.”

…어이없을 정도로 철저한 재능지상주의의 학교였다. 분명 천재는 교사로서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아니, 천재라면 교사일을 하지 않겠지- 그래도 사제지간이란 게 그런 식으로 형성되어도 좋은 걸까?

“그건 의식의 차이일 뿐이야, 고군. 교사가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갖게 되면 오히려 학생들과의 거리가 벌어지지. 교무실을 개방하지 않는 건 영역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일환에 지나지 않아. 다른 학교의 교무실도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잖아? 그걸 ‘원래 들어가면 안 되는 곳’으로 했을 뿐이야.”

그 차이가 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별로 깊게 신경 쓸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교무실 입구보다 더 인상적인 것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건 대체…”

거기에는 금고가 있었다. 그냥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눈금이 달려 빙글빙글 돌리는 잠금쇠나 전자식 암호가 걸려 있는 금고는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레일을 따라 캐비넷 절반이 앞뒤로 움직여 열리는 문이 없는 거대한 금고였다. 금고 측면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금고를 열 때 높이 2.4m, 너비 3.7m의 거대한 쇳덩이가 소리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모습은 꽤 신기했다.

“군대나 검․경찰청에서 대량의 서류보관에 사용하는 금고형 캐비넷이야. 부숴서 여는 건 불가능. 손잡이에 걸린 락을 해제하려면 그 밑의 입력장치에 암호를 넣어야 하지. 시험지는 그 안에 보관되어 있었어.”

오전 10시 반, 2교시 시간에 나와 궤네는 시험지 도둑 사건을 조사하러 교무실에 있었다. 양지의 심의회의는 오늘 오후 4시에 있을 예정이었다. 유승 선생님은 양지를 심의회의에 올릴 만큼의 증거를 확보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선 적어도 유승 선생님이 했던 조사보다도 더욱 깊고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부족한 걸.”

“맞아. 어제 누군가가 교무실의 조사를 빼먹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시간이 부족하진 않았겠지.”

“너는 그냥 놀고 있었잖아?!”

투덜거렸지만 궤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조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남아있던 젊은 남자 선생님에게 물었다. 변함없이 평대의 무례한 말투였다.

“한서 선생, 시험지 유실은 언제 확인되었지?”

“어제 오전, 8시 40분경이야. 요 사이는 출제기간이니까 이 금고를 열 일이 많거든. 아침에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이 시험지를 보관하러 열었을 때 시험지 문제가 흐트러져 있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전날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땐 시험지는 제대로 정리되어 있었는 걸.”

“호오?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당직이었어. 오후 5시경에 다른 선생님들 퇴근을 확인하고 금고를 닫았지. 시험출제기간에는 아침, 점심, 저녁 시간에만 금고를 잠가 두지. 시험지를 넣을 때마다 번거로워지니까 말이야. 덕택에 나는 어제 당직 오프도 못하고 졸린 채로 출근이지, 하아암.”

한서 선생님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이 학교에 부임한 지는 2년밖에 되지 않은 20대의 젊은 선생님으로 담당 과목은 국문학이었다

“응? 국문학? 분명-”

“맞아, 고군. 양지 동기, 그 문학소녀의 전공이야.”

“어, 너희들, 양지를 알아? 아, 그렇군. 양지가 변호를 맡겼겠구나. 후, 그렇구나.”

한서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와 궤네를 자신의 자리로 안내했다. 책상 여기저기에는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교실의 위치부터 사소한 약속, 숙제 내용, 교무용 컴퓨터의 암호 등 별의별 내용이 다 적혀있었다. 교무실 옆에 붙어있는 탕비실에서 인스턴트커피를 종이컵에 타 주며 그는 의자에 앉아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나는 커피를 입에 대고 순간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며, 몇 스틱을 한 잔에 넣은 거냐…’

종이컵에 든 것은 스프마냥 진하게 탄 인스턴트커피였다. 그것도 설탕은 뺀 것 같아, 쓴 맛이 혀끝을 타고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궤네는 이것을 맛있다고 계속 홀짝이고 있었다.

저 녀석은 미각도 평범한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건가.

그런 의미에선 한서 선생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군. 우리랑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역시 외인교실의 학생은 괴짜로군. 골려주려고 여섯 스틱을 설탕 빼고 한 잔에 쏟아 넣었는데 그걸 맛있게 마시다니.”

“단순한 괴롭히기였습니까?!”

“워워, 너무 열 내지 마. 단지 특별대우를 받는 학생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라고.”

거기에 솔직하기까지 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두드리는 한서 선생님의 태도는 시원스러운 곳이 있어 그다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상황은 양지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어. 그 애의 시험지가 없어졌고, 그 시험지가 없어진 추정시간 내에 출입한 사람 중 한 사람이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그 애가 시험지를 훔치지 않았다고 확신해.”

한서 선생님은 커피를 들이켰다. 선생님의 손아귀에서 종이컵이 구겨졌다.

“분명 그 애는 당일 내게 상담을 하러 왔었어. 하지만 늘 있었던 일이야. 양지의 평소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문장에 다소 얼토당토않은 해석을 갖다 붙이는 경향은 있었지만…이 학교에서는, 그게 오히려 좋은 경향이 아닐까, 궤네?”

“좋다고만은 볼 수 없지. 천재는 괴짜일 가능성이 높지만 괴짜가 천재일 가능성은 낮으니까.”

궤네는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한서 선생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그러하군. 내 쪽에서 보자면 그 차이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지만, 과연, 천재는 다르다는 건가. 하긴, 범부인 내게 너와 같은 천재의 견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하나만 묻자, 궤네. 너는, 양지가 시험지를 훔쳤다고 생각해?”

“내가 변호를 맡는데 유․무죄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치 않아.”

“…그렇군. 실언이었다. 부디 양지를 구해주길 바라지.”

그 후 한서 선생님은 시험지가 없어진 시간대에 교무실을 출입했던 사람들의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당일 당직이었던 한서 선생님을 시작해서 현재 유력한 용의자로 심의회의에 회부된 양지, 그 외에는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상당히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시미랑 산단 회장?”

“그래. 학생회장은 이사장으로부터 무언가 조사를 명령받은 모양이더군. 매일같이 교무실에 들어와 일사분란하게 학생기록부를 훑어보고 있어. 시미의 경우는, 개를 쫓아 들어왔더군.”

“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미와 관련된 개라면 한 마리밖에 없다. 한데 그 개에 대해 시미는 냉정하게 말했었다.

‘뭐? 개새끼? 그 딴 거 찾을 여유가 있다면 라이트노벨이라도 한 권 더 읽으라 그래!’

내 그 의문을 더욱 미궁 속으로 빠뜨려는 듯 한서 선생님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개가 교무실로 들어왔어. 그리고 그 개를 쫓아 시미도 교무실로 들어왔지. 여기 어디에 CCTV 자료가-”

“그 자료는 이미 내가 증거물로서 회수해 두었네, 한서 선생. 유감이지만 궤네, 네게 지금 보여줄 수는 없지.”

한서 선생님의 말을 끊고 들어온 다른 선생님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학생주임, 유승 선생님이었다. 옆머리로 앞머리를 가리려 필사적으로 머리카락을 이마 쪽으로 모아 보았지만 이미 그 방위라인 자체가 한없이 후퇴한 뒤였다.

“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는 걸, 유승 학생주임. 나와 고군은 이사장으로부터 중간고사 과제로 이번 시험지 유실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받았어. 그렇다면 그 자료는 내게 공개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엣헴, 그 수에는 놀아나지 않는다네. 어차피 보게 될 걸세. 심의회의에서 말이지. 그리고 너는 내가 밝혀낸 시험지 유실, 아니 도난사건의 진상을 이사장에게 제출하게 될 걸세! 생각만 해도 통쾌하구먼, 으하하핫!”

유승 선생님은 한껏 웃고는 교무실을 나가버렸다. 한서 선생님은 얼굴을 굳혔다.

“양지는 그럴 애가 아니야. 유승 학생주임 선생님에게는 뭐라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잠깐 먼저 일어나 보겠어. 유승 선생님? 유승 선생님!”

한서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 걸음으로 유승 선생님을 뒤쫓았다.

“훌륭하신 선생님이네.”

“과연 그럴까? 학생은 선생에게 있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야.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어느 한 명에게 특별한 내리사랑을 주기 위해선 당연히 이유가 필요하지.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주는데 실패해서 공평한 미움을 주게 되어 있어. 학생인권조례의 체벌금지규정이 내려진 도단, 선생들이 학생들에 대해 제어권을 잃어버린 건 그 때문이지. 사람을 움직이는 두 요소, 포상과 처벌에 있어 선생들은 진심으로 처벌을 내릴 순 있었지만 진심으로 포상을 내리진 못했던 거야. 그래서 선생들의 칭찬은 공허하고 매질에는 감정이 실리는 법이지.”

궤네, 너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진심으로 돕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도 선생님들은 선생님들 나름대로 학생들을 위해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지만.

“흥, 선생들이 제대로 일을 한다면 내신 같은 게 성립할 리가 없어. 등수를 매기는 시점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쓸 수는 없다는 건 명백해. 한데 이곳은 그런 등수는 물론, 모든 고등학교의 절대명제인 입시나 취직과도 연이 없는 대안학교야. 이곳에서 다른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이 그대로 긍정적으로 적용될 거라 생각하고 있다면 저 선생 또한 참으로 무능하기 그지없을 뿐이지.”

궤네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한서 선생님의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포스트잇을 확인하고 자료를 들추며 서랍을 뒤졌다.

“뭐 하는 거야?”

“말했잖아? 선생이 학생을 도우려 하는 데엔 이유가 필요하다고. 그 이유가 될만한 게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이어이, 양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조사는 어쩌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저 궤네의 심심풀이 상대가 되어주는 것 말고는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찾았다.”

서랍을 들어낸 궤네가 나직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게 나왔군. 그래, 세상은 이런 법이지.”

“뭣…?!”

나는 궤네가 서랍 밑에서 꺼낸 것을 보고 아연했다.

분홍색 천에 자수 장식이 들어간 삼각형의 천.

즉, 여성용 팬티였다.

 

§

 

오후 4시. 징계심의회의실. 양지의 징계심의회의로 회의실에 왔을 때 우리는 의외의 얼굴을 참관인석에서 보았다.

“어이, 왜 이사장이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쓸데없는 심의에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뭐, 나쁠 건 없어. 이래저래 보고서를 따로 작성할 일은 없겠군. 이번 심의회의 기록으로 제출하면 그만이겠는데? 흥, 보라고, 저 유승 선생이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을. 이사장 앞에서 화려하게 날 누르고 어필하고 싶은 모양이로군. 비비는 손바닥이 남아나질 않겠어.”

궤네는 여유자작하게 개회를 기다리며 사과를 깎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지는 정말로 시험지를 훔친 걸까?”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고군. 하지만 조금 귀찮군. 저번 구소 후배의 사건에서는 그녀가 속옷을 훔치지 않았다는 점만 입증하면 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양지 동기가 시험지를 훔치지 않았다는 점에 이어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훔쳤는가 또한 입증해야 해. 귀찮은 일이지.”

학생회장 산단이 교탁에 섰다. 그녀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게 개회를 선언했다.

“그럼 지금부터 제 2217회 징계심의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피고 학생을 피고석에.”

학경에 이끌려 양지는 중앙의 피고인석에 섰다. 그녀에게서는 어제까지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초조와 불안으로 양지의 양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유승 학생주임, 사건 개요를.”

그에 반해 유승 선생님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미끈하게 벗겨진 머리에 다시 머리카락이 자랄 기세로 힘차게 일어난 선생님은 사건을 설명해나갔다.

“엣헴, 피고 학생의 이름은 양지. 인문계 2학년 B반 학생입니다. 사건 당일 오후 6시 반, 양지 학생은 다른 교사들이 전부 퇴근한 틈을 타 그 날 당직이었던 한서 선생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본래 상담은 전문 상담교사가 맡아야 정상이나, 양지 학생의 담당 선생님이었던 한서 선생은 제자의 요청을 가볍게 받아들였습니다. 중간고사도 가까워지고 학생의 불안한 마음을 이해한 호의였겠지요. 하지만 양지 학생은 그 호의를 이용했습니다! 한서 선생이 탕비실에 커피를 타러 간 사이 교무실 입구에 손을 써 문이 잠기지 않도록 한 다음 한서 선생이 순찰을 나간 틈을 노려 다시 들어와 시험지를 훔쳐낸 겁니다!”

“호오, 꽤나 자세하군. 하지만 상당히 복잡한 방법이로군. 인스턴트커피를 끓이는 짧은 사이 그런 대담한 행동이 가능할까?”

“흥, 그 점을 지적해 올 줄 알고 있었다. 여기 그 증거 영상을 제출합니다.”

프로젝터를 통해 폐쇄회로 영상이 흘러나왔다. 교무실 입구를 찍고 있는 CCTV 카메라로 기록된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시면 오후 여섯시 반 경, 한서 선생의 안내에 따라 교무실에 들어오고 있는 양지 학생의 모습이 찍혀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엣헴, 이 부분입니다!”

유승 선생님은 빨리 감기로 녹화영상을 돌리다 한 곳에서 멈추었다. 느리게 다시 재생되는 화면 속에서 양지는 교무실 입구 족으로 다가와 잠금쇠 부분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었다.

“이, 이건…”

“엣헴! 양지 학생이 붙인 것은 반 자기성 테이프입니다, 네. 전자석으로 잠금장치가 걸리는 도어락 부분에 이 테이프를 붙여놓는 것으로 문이 완전히 잠기지 않도록 해둔 것이지요! 여기, 문고리에 붙어있던 테이프 조각의 감식 결과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감식 결과 자료의 사본은 곧장 우리 변호인 측에도 전달되었다. 테이프의 자세한 성분이나 기타 사항들은 복잡해서 잘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테이프에서 발견된 지문은 양지 학생의 지문과 일치…”

이게 무슨 일이냐.

아무리 봐도 양지는 계획적으로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후 저녁 8시 경, 한서 선생이 순찰을 나간 사이 양지 학생이 다시 교무실에 들어왔던 것은 녹화된 CCTV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실된 시험지의 피출제자에 해당하는 학생들 중 유일하게 교무실에 출입했던 학생이 바로 양지 학생입니다. 이상의 이유로, 학생주임 측은 양지 학생이 시험지를 훔쳤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유승 선생님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 이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궤네도 이전에 이야기 했었다. 없어진 시험지를 받아 볼 예정이었던 학생이 범인, 이라고. 그 말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유승 선생님의 주장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 궤네는 은장도를 뽑아 들고 유승 선생님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 주장에 이의 있음! 현재 증거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지 동기가 교무실에 계획적으로 침입했다는 것뿐이야. 양지 동기의 시험지가 없어졌다는 건 정황증거밖에 안 돼. 그리고 없어진 건 양지 동기의 시험지만이 아닐 텐데? 거기에 대해 학생 주임측은 뭐라 설명할 거지?”

“흥, 그거야 간단한 논리지. 한 사람의 시험지만 없어지면 그 사람이 의심을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니 관계없는 학생들의 것도 몇 개 빼내온 것이겠지.”

궤네는 조소했다. 은장도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반박했다.

“얕아. 참으로 비참하게 얕은 논리야. 양지 학생에게 그 정도 계산이 가능했더라면 절대 훔치지 않았어. 문제는 어차피 1인 1문, 그냥 보고 나오면 그만이란 말이지.”

“! 그, 그건…”

“또한, 당일 방과 후 교무실에 출입했던 사람은 총 4명이야. 양지 동기와 한서 선생님을 포함하고 또 2명이 더 있는 것이지. 이 4명은 모두 시험지를 훔칠 수 있었어. 그것을 단지 양지 동기 한 명에게 특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거 아닐까?”

“흐, 흥! 그렇다면 변호인 측은 양지 학생이 훔쳤다는 것 외에 양지 학생의 시험지가 없어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건가? 그날 교무실에 출입한 것은 4명, 그 모두에게 시험지를 훔칠 기회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학생 주임측도 인정하는 바요. 하지만! 그 면면들을 보면 없어진 시험지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 한서 선생과 저기 교탁 위의 산단 학생회장은 시험지를 훔칠 이유가 없고 나중에 잠깐 들어왔던 시미 학생에 이르러선 애초에 양지 학생이 교무실 출입문에 붙여놓은 테이프가 없었다면 들어오지도 못했네! 동기와 수단이 동시에 성립하고 있는 건 양지 학생뿐이야.”

유승 선생님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반론했다. 궤네에게 일순 허를 찔린 것 치고는 꽤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그 반론에 대해 궤네는 여유롭게 대응했다.

“훗, 그럼 양지 동기 또한 시험지에 대한 동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최근까지 상담을 받아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겠군.”

궤네는 손가락을 튕기고 은장도를 치켜들었다.

“국문학 담당 교사, 한서 선생을 증인으로 요청할게. 증언 내용은…그렇지, 당일 양지 동기는 한서 선생에게 상담을 명목으로 방과 후에 교무실을 방문했지. 그 때의 상담 내용을 듣도록 할까?”

탁!

“변호인측의 증인요청을 인정합니다. 한서 선생을 증인석에.”

잠시 후 심의회의실로 한서 선생님이 불려왔다 증인석에 앉은 선생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양지를 바라보았다.

궤네는 변호인석을 나와 증인석 앞에 섰다. 한서 선생님의 앉은키와 궤네가 선 눈높이는 거의 동일하여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한서 선생, 그대는 오늘 내게 이렇게 말했었지? 양지가 시험지를 훔쳤을 리가 없다, 라고.”

“아아, 그랬지.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애가 시험지를 훔쳤을 리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좋아, 그럼 그 믿음의 증거를 보여줘. 회개가 아닌, 증언의 형태로. 일단은 양지의 상담내용부터.”

한서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지는 내 담당 학생이야. 성적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뭐, 이 학교에서 ‘나쁘지 않은 편’이라는 것으로는 통용되지 않지만 말이야. 이 학교에서의 성적은 천재, 혹은 그 외의 두 기준밖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지는 성적에 그다지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어. 오히려 입시 걱정이 없는 이 학교에서, 자유롭게 문학을 해석하고 향유하는 것을 즐기는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그런 그 애가 내게 상담해 오는 건 정말이지 별 일 아닌 것들뿐이었지. …뭐, 그 애한테는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양지가 한서 선생님에게 상담해 오는 것들은 실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중심부에 있는 타운의 맛집에 시미와 같이 가자든지, 단지 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옷이나 악세사리를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서의 대리 주문이라든지, 인스턴트커피를 맛있게 타는 법이라든지 등의 잡다한 것들이었다. 그나마 시미와 마슬로와 관련된 상담들이 섞여있을 때는 조금 진지했다고 했다.

“하지만 사건 당일, 양지는 내게 처음으로 성적과 관련해서 상담을 해왔어.”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했다. 졸업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 및 그것이 어렵다면 전학을 고려하는게 어떻겠냐는 내용의,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상담이었다. 2학년 2학기가 되어 중간고사 시즌이 되니 확실히 불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고 한서 선생님은 말했다.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답해주었지?”

“내 답이 중요한가? …뭐,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 자신이 천재가 아니니까. 평범한 조언밖에 할 수 없었지. 그저 열심히 하라는 수준의 답밖에 해줄 수 없었어.”

궤네는 씨익 웃었다.

“범부의 발상은 어쩔 수 없군. 하나 확인하지. 한서 선생, 그대는 사건 당일 양지 동기로부터 성적에 관한 상담을 받았다는 거군?”

“아아, 그래.”

궤네는 휙 돌아 학생회장이 있는 교탁을 향했다.

“들은 대로야, 산단 학생회장. 세상에 어떤 바보가 시험지를 훔치기 전에 나 성적에 고민있어요, 하고 상담을 하겠어?”

“이, 이의 있습니다! 성적에 고민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시험지를 훔치지 않을 동기를 입증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학생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주임의 이의를 인정합니다. 변호인, 그 증언에 다른 의의가 있습니까?”

“있고말고, 학생회장. 앞서 말한 건 단순한 상식에 기초한, 그렇기 때문에 예외에 약한 내용일 뿐이지. 하지만 증인이 먼저 한 말과 합쳐지면 어떨까? 한서 선생은 양지 동기가 시험지를 훔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또한, 사건 당일 양지 동기는 한서 선생에게 성적에 대해 상담을 했다. 그리고 없어진 시험지 안에는 양지 동기의 시험지가 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이 ‘양지 동기가 시험지를 훔쳤다’라는 건, 어딘가 위화감이 들지 않아?”

“어,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잖나?”

유승 선생님은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나도 궤네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황상, 양지에게는 시험지를 훔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게 느껴졌다. 양지는 성적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험지가 없어졌다-솔직히, 여기서 뭘 더 생각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멍청하긴. 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한서 선생의 양지에 대한 신뢰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이냔 말이야.”

뭐?

나는 궤네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선생님이 학생을 믿는다는 말에 근거를 요구할 줄이야.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는 했다. 변호인 측 사람인 나조차도 양지를 의심하는데, 당일 성적에 대하여 상담까지 받은 선생님이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궤네의 말을 듣고 증인석에 앉은 한서 선생님의 낯빛이 샐쭉해졌다. 그 표정을 본 궤네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한서 선생, 그대의 확신은 아무래도 이상해. 아무리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학생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건 교사들의 미덕일지도 모르지. 다른 학교에서라면 말이야. 하지만 여기는 할로 고등학교야. 피도 눈물도 없는 재능지상주의의 학교지. 그대는 내게 말했었지? 양지는 문장에 다소 얼토당토않은 해석을 갖다 붙이는 경향은 있다고. 그 시점에 이미 뻔하잖아? 양지가 졸업하기는 글렀다는 것을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 상황에 처한 학생들이 얼마나 무모해지는지 그 사례를 굳이 들어줄 필요도 없겠지. 거기다 그녀는 교무실의 침입을 준비하고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녀가 시험지를 훔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어. 거기엔 사제지간의 신뢰 이상의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확실하지.”

“…뭐가 말하고 싶은 거냐.”

궤네는 웃었다. 저 웃음은, 절벽 끄트머리에 선 사람의 등을 밀어버릴 때 짓는 웃음이다. 궤네는 품속에서 ‘그것’을 꺼냈다. 그 삼각형의 천 조각을 보고 한서 선생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학생회장! 이것은 한서 선생의 책상 서랍 속에서 발견한 것이야. 증거로 제출할게.”

“무, 무슨?! 이, 이의 있습니다, 학생회장님! 저, 저것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그 이의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 설명은 끝까지 들어, 유승 학생주임. 이 속옷은 저기 증인석에 앉은 한서 선생의 부도덕함을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서 선생이 말한 신뢰에 다른 증거를 요구하는 보조적 증거이지. 그리고, 이 속옷의 주인을 이 심의회의에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돼.”

“그 속옷의 주인은?”

“생물계 2학년 D반, 시미 학생. 그녀의 심의회의실 증인 출석을 요청할게.”

그 말을 듣고 양지와 한서 선생님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궤네에게 궁지에 몰렸던 사람들이 짓는 표정과는 조금 달랐다. ‘엉? 왜 여기서 그게 나오지?’라는 느낌의 표정이었다.

탁!

“변호인의 요청을 인정합니다. 시미 학생을 증인석에.”

잠시 후, 징계회의실의 문을 열고 시미가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뭐야? 시험기간에 사람을 오라가라하고! 이런데서 낭비할 시간은 없단 말이야!”

“그럼 이틀 전, 오후 8시 45분경, 교무실에서 그대가 했던 시간 낭비에 대해 설명해 주겠어? 별로 많은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거야. 그대가 제대로 증언하기만 한다면.”

궤네의 말에 시미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증인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뭘 말하란 건데?”

“사흘 전, 그대가 늦은 저녁 시간에 교무실을 방문한 경위, 그리고 거기서 한 일. 그 모두를 말하면 이 심의회의가 끝나. 깔끔하게 말이지.”

시미는 이를 갈았다. 험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혀를 찼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증언을 시작했다.

“그 때는 마슬로랑 산책 중이었어. 시험공부도 안 되고, 답답한 기분에 그 개새끼가 자꾸 엉겨 붙으니 영 귀찮아서 말이지. 적당히 운동 시켜주면 얌전해 질 테니까, 기분 전환을 겸해서 나왔던 거야. 근데 그 똥개 녀석이, 제멋대로 달려 나가 버렸어.”

마슬로는 평소의 산책코스에서 벗어나 본관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시미는 그 뒤를 쫓아 들어갔고 교무실로 들어가는 마슬로를 보고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평소에 그 문은 열리지 않을 텐데 말이지. 어쩔 수 없이 나도 교무실로 따라 들어갔어.”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무실에서 약 10분 정도 마슬로가 도망 다니는 것을 쫓다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그것뿐이야. 됐어? 이제 가도 될까?”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유감이야. 전부를 말해주기 않았으니 이대로 보내줄 수야 없지.”

“…무슨 소리?”

궤네는 시미의 눈앞에 분홍색 천 조각을 흔들었다. 시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증인석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녀는 성을 냈다.

“그, 그건!”

“솔직히 대답해. 이 팬티가 그대의 팬티인가?”

“아, 아냐! 그런 팬티, 내 것이 아냐.”

시미는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깨물며 궤네와 시선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흠, 그게 아니라면 이건 어떻지?” “?!”

궤네는 품속에서 다른 팬티를 꺼냈다. 처음에 들고 있던 분홍색의 무늬가 들어간 얌전한 팬티와는 다른, 더 작은 삼각형의 반투명한 천에 실크 끈이 매달린 G-string이었다. 궤네는 그 팬티도 시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럼 이 팬티가 그대의 팬티야?”

“모, 몰라! 그 팬티는…그…팬티…?!”

시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궤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팬티도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어때?”

궤네는 또 다른 G-string을 꺼냈다. 극서은 내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마슬로를 격퇴하고 득한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지금 여기에는 3개의 팬티가 있어. 검사하면 다 나올 테지만, 하나는 시미 동기의 것, 하나는 양지 동기의 것, 마지막 하나는 내 거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소유주보다도 발견된 장소와 시간이지. 첫 번째, 시미 동기의 팬티는 한서 선생의 책상 서랍 속에서 오늘 오전에. 두 번째, 양지 동기의 것은 내 침대 위에서 어제 아침. 세 번째, 내 속옷은 마슬로에게서 어제 저녁.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이 세상은 정말 신비로 가득하기도 하지. 물론- 설명하고 나면, 한심한 현실만이 남지만 말이야.”

갑작스럽게 열린 팬티들의 향연에 심의회의실 안의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이번 징계사항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였지만 유승 선생님은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모두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궤네는 설명을 계속했다.

“시간 순서로 설명하는 게 더 낫겠군. 먼저 제일 먼저 발견된 것은 양지 동기의 속옷이야. 사실 양지 동기가 마슬로의 실종 조사를 의뢰하면서 개가 물고 간 속옷과 비교하기 위해 샘플로 주었던 속옷을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시험지 유출이 있고 이튿날, 내 방에서 내 속옷이 없어지고 다른 속옷 하나가 남는 사건이 발생했지. 이 우연하고도 멍청하고 사소한 사건 덕에 지금 이 심의회의에서 다루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어.”

“이의 있습니다. 변호인이 말하는 내용은 지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

“닥치고 들어, 유승 선생. 그리고 그날 당일, 고군은 마슬로로부터 다른 속옷을 탈환했지. 근데 그 속옷은 내 속옷이엇어. 내가 MHC엣센스에 담가두었던 속옷이라 강렬한 페르몬에 아마 그 게가 물고 가버린 것이었을 테지. 그 와중에 원래 갖고 있던 속옷을 놓쳤고. 이는 양지 동기가 일전에 했던 말에서 알 수 있었어. 마슬로가 가출한 이유는 양지 동기가 자기의 속옷을 물고 있는 걸 보고 화를 냈기 때문이엇지?”

“아…!”

양지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에,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지? 양지의 속옷을 물고 있던 마슬로가 궤네의 방에 들어가 궤네의 속옷을 물고 양지의 속옷을 거기에 떨어뜨렸다는 건가?

“마슬로는 단순히 속옷을 물고 있었기 때문에 양지에게 혼난 것이 아니야. 그 속옷을 물고 있었기 때문에 혼이 난 것이지. 그 속옷은 또 묘하게도 시미 또한 본 적이 있었어. 단순히 룸메이트로서 같은 방에서 본 것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말이야.”

양지와 시미의 얼굴이 동시에 썩어 들어갔다. 궤네의 표정은 그 둘의 표정과 반비례해서 환하게 생기를 발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어. 그 가설은 어처구니없지만 대담하고, 놀랄 만큼 다이내믹하고 파멸적이야.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어. 이사장?”

“뭔가, 궤네양?”

갑자기 불렸음에도 이사장은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느긋하게 답했다. 궤네는 이사장을 보며 손을 허리춤에 두고 은장도를 치켜들었다.

“지금부터 설명하는 가설이 내 중간고사 과제에 대한 해답이야. 보고서를 다시 내기는 귀찮으니까 잘 들어 둬.”

이사장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궤네는 왼쪽 눈의 붉은 외안 렌즈를 빛냈다.

“사건 당일, 양지 동기는 자신의 담당 교사인 한서 선생에게 상담을 신청했어. 평소와 다르게 이번 상담 내용은 무거웠지. 하지만 이제껏 시시콜콜한 상담만 받아주며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고 있던 한서 선생은 진짜 상담이 들어오자 당황해서 제대로 된 대책을 알려주지 못했지. 거기서 양지는 한 가지 제안을 했어.”

「선생님, 시험 문제를 알려주세요.」

양지는 한서 선생님에게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는 선생으로서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한서 선생은 알려주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선 별로 관심 없지만, 이것이 한서 선생 그대가 ‘양지 동기는 시험지를 훔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야.”

생각보다 손쉽게 시험문제를 얻기는 했지만, 양지는 이미 준비했던 계획이 있었다. 혹시 한서 선생이 시험문제를 알려주지 않거나 엉뚱한 것을 알려줬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 필요했다.

“그래서 양지 동기는 몰래 교무실로 다시 들어와 한서 선생의 약점을 만들고자 했어. 그 방법은 앞서 유승 선생이 설명한 바와 같지.”

양지는 반자기 테이프를 붙여 교무실 문이 자동적으로 잠기는 것을 막고 한서 선생이 순찰을 돌러 나간 틈을 노려 교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서 선생의 책상 서랍 속에 자신의 팬티를 벗어 넣은 것이다.

“교사가 제자의 속옷을 소지하고 있다는 건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어. 가볍게 찔러도 면직은 쉽게 얻어낼 수 있었을 거야. 만약 한서 선생이 엉뚱한 문제를 가르쳐 줬거나 나중에 문제를 가르쳐 준 것을 자백하고 나설 때를 대비해 족쇄를 채울 셈이었겠지. 하지만 엉뚱한 방해가 나타났어.”

산책을 나왔던 마슬로가 교무실에서 주인의 냄새를 맡고 속옷을 찾아내 버린 것이다.

“양지 동기, 그대는 한서 선생의 서랍 속에 숨겨두었을 속옷을 마슬로가 물고 있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을 거야. 그래서 그 보양식도 가출을 했겠지. 그대가 미처 속옷을 회수하기 전에 달아나 버려서 그대는 심히 당황했겠지. 그래서 다음 날 바로 내 교실을 찾아온 거 아니야? 그 속옷은, 목격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슬로는 밤중에 그 속옷을 궤네의 방에 두고 가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으로, 궤네의 속옷과 양지의 속옷은 브랜드도 디자인도 같은 제품이었다. 그래서 궤네는 마슬로가 자신의 속옷을 물고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군의 개 수색을 허락했던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지. 그럼 어째서, 한서 선생님의 책상 서랍 속에는 시미의 속옷이 남아있었을까? 그건 서랍 속에서 룸메이트의 속옷을 발견한 시미가, 룸메이트와 선생의 관계를 오해했기 때문이었지. 오해, 그 오해가, 그리고 오해가 부른 다른 오해가 이 시험지 유실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어.”

시미는 한서 선생님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양지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과목이 이과, 문과로 나누어지는 마당에도 시미는 양지를 따라 한서 선생과 교류하고 있었다. 한서 선생의 시시콜콜한 상담 내용에는 항상 시미도 끼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미는 친구의 속옷을 동경하던 선생님의 서랍 속에서 발견했다. 어떻게 오해했을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시미 동기, 그대는 자신의 속옷을 벗어 그 서랍 속에 담았어. 마슬로가 물어간 양지 동기의 속옷을 대신해서 말이지. 그대가 어떤 기분으로 자기 속옷을 벗어 넣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야. 질투? 애욕?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집어넣은 속옷이 방아쇠가 되어버렸어. 바로-”

한서 선생님이, 양지의 시험지를 없애버리게끔.

한서 선생님이 순찰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서 서랍을 열었을 대, 거기에는 본 적 없는 여성용 속옷이 있었다. 그것도 새것이 아닌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입었던 것. 한서 선생님은 그것을 양지의 속옷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속옷은 다른 이의 것이었지만 한서 선생님은 양지의 의도를 파악했다. 양지는 너무 일찍 발각되지 않도록 속옷을 깊게 숨겨두었지만 시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속옷을 발견하고, 한서 선생님은 양지에게 시험문제를 알려준 것을 후회했다.

선생님은 양지에게 그대로 이용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문제를 알려준 것은 돌이킬 수 없어.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자수할 수도 없지. 문제를 유출한 게 들켰다가는 면직감이니까. 보다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수밖에 없었어. 그것도 양지 동기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면서.”

그래서 한서 선생님은, 양지의 시험지를 훔쳐내었다. 양지에게 적당히 의심은 쏠리도록, 하지만 그 의심을 확정할 수 없도록 관계없는 다른 몇몇 사람의 시험지까지 함께 훔쳐냈다. 시험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유출을 우려해 문제를 새로 출제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교사이니 교무실 출입도 금고의 암호도 문제되지 않았다. 관리 소흘로 감봉 정도는 먹겠지만, 면직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한 때의 실수에 대한 수업료라고 생각하면 위를 부여잡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대가.

“이상이, 앞서 말한 모든 조건을 클리어 하는 가설이야.”

“이, 이의 있습니다. 벼, 변호인의 이야기는 너무, 너무나…”

새파랗게 질린 유승 선생님의 얼굴에는 나도 심히 동정이 갔다. 사실 들으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우연과 오해의 연속. 궤네의 말대로 실로 다이내믹하고 파멸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사건에 얽힌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결말만을 담고 있었다.

“증거, 증거는 있나?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CCTV 영상을 잘 보도록, 유승 학주. 시미 동기가 마슬로와 교무실을 나갈 때 마슬로의 입에는 양지 동기의 속옷이 찍혀 있을 거야. 또한 한서 선생이 무모하게 시험지를 그냥 두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걸? 아마 세절기 안의 종이조각을 검사해보면 시험지에 쓴 종이 성분이 검출되겠지. 뭐, 상당히 고된 작업일 테지만.”

“아니, 그 작업을 할 필요는 없어, 궤네.”

“하, 한서 선생……?”

한서 선생님은 씁쓸하게 웃으며 깍지를 끼고 몸을 의자 뒤로 기대었다.

“내가 시험지를 훔쳤어. 그리고 갈아버렸지.”

“서, 선생?! 어, 어쩌자고 그런 짓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임 선생님. 양지에게 문제를 알려줘 버린 건 사실이니까요.”

한서 선생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제게 성적으로 상담을 해왔을 때 단순히 노력만으로 안 된다고,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고 해야만 할 때, 저는 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성적으로 고민하는 양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선생으로서 한심하기 짝이 없네요.”

한서 선생님은 자조하며 웃었다. 나는 한서 선생님의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외인교실에 왜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는지 깨달았다.

천재에게는 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것은 교사라는 직업에서 얼마나 절망적인 학생일까. 하물며 천재를 육성하겠다는 이 학교에서, 교사는 어떤 절망감을 갖고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오전 10시.

나는 홀로 외인교실 토반에 있었다. 평범한 교실에 달랑 하나 있는 책걸상에 앉아 나는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는데, 여유작작하구먼.”

도대체 다른 외인교실 학생들은 이 남아도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각자 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나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다른 반 녀석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딱 한 명, 궤네는 나와 비슷하게 빈둥거리고 있을 테지. 은장도로 사과를 깎으며, 알맹이는 버리고 껍질을 씹으며 여유작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아, 정말로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한서 선생님은 그 사건 이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평범한 일반 고등학교에 있는 편이 학생을 가르치고 보듬는 보람이 있을 거라면서 미련 없이 떠나버리셨다. 양지는 시험지 도둑 혐의에서는 무혐의가 되었지만 한서 선생님에게 문제를 요구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역시 자퇴를 하고 전학수속을 밟고 있다. 그렇게 시미는 졸지에 가장 친했던 룸메이트와 동경하던 선생님을 잃게 되었다.

“…역시 궤네, 라고 해야 할 대목인가.”

궤네의 손을 거치면 어디서 무슨 플래그를 세웠던 간에 배드 엔딩 루트로 돌입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미 얽히고 섥혀 버린 내게도 해피 엔드 따위는 인연이 없겠지. 혹은 내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고, 지금은 배드 엔딩의 스크립트가 계속 흘러가고 있는 도중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나는 쭉 기지개를 폈다. 누구에게 거리낄 것도 없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하품을 했다. 공허한 메아리도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궤네한테나 가 볼까.”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발언이었다. 그거 말고 달리 할 게 없다는 건 더욱 서글펐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다른 교실에서는 수업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어 복도는 적막했다. 뚜벅뚜벅 내 발소리만 복도를 울렸다.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올라 다시 몇 개의 교실을 지나 도착한 곳. 외인교실 화반.

“하아…”

한숨이 깊어졌다. 어째서 나는 또 이런 곳에 와버린 것일까.

노크를 할 것도 없이 그냥 문을 열었다. 눈이 아프도록 시뻘건 교실 속으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여어, 고군. 그대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응?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후후훗, 역시 그래 보여? 실은 좋은 소식이 있었어. 그대에게는 한시 바삐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대가 오늘은 일찍 오질 않더군. 무슨 일이 있었어?”

“별로. 그저 아침부터 소소한 감상에 젖어있었을 뿐이야. 앞으로 나는 쭉 배드엔딩 스크롤을 보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그거 꽤 즐거운 청사진인데? 참으로 처참한 미래도에 나도 한 획을 그어주도록 할게.”

“대체로, 아니 이도 저도 다 너 때문이잖아! …그런데, 좋은 소식이란 게 뭐야?”

궤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저 웃음은, 절벽에서 밀어버린 사림이 기어 올라왔을 때 그 손등을 지그시 밟으며 짓는 웃음이었다.

“가란, 그 거구녀가 변호를 의뢰해 왔어.”

나의 배드 엔딩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

 

『외인교실의 궤네』2화입니다.

지적 및 태클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평을 해주신 분께는 애정드립니다.



태그
24 수류아  lv 24 85.64% / 32141 글 1295 | 댓글 2419  
인류최약人類最弱의
망량망상魍魎妄想 수류아라고 합니다.

[完] 자살의 메커니즘 32편
/여름/촉수군은 청춘을 구가한다 7편
외인교실의 궤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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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1/29/12:35
아니 왜 이런 글에 추천이 없는거야?!
24 서륜 12/04/11:14
한 화가 1권 같아...
0 12/09/11:13
작가를 설레게 하는 설리☆
0 12/09/11:14
물론 추천은 정★
24 수류아 12/09/12:33
아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레이고 말았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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