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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않는 행운과 달콤한 불행(完) by 에어피트

행복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행운이 있다고 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시각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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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에어피트[btydntjddls]
조회 1386    추천 0   덧글 0    / 2012.01.12 01:15:03

 


그녀는 걷는다. 벌써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에서는, 누구 하나 밝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불행해 보인다. 마치 죽어가는 병자처럼 느릿느릿 도시를 거닐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침울한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어두운 시선을 준다. 목에 걸린 넥타이가 느슨하다 못해 다 풀린 저 직장인은 세상을 원망하고 있는 것일까.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맨 저 학생은 현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일까.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저 취객은 지금을 잊고 싶은 것일까. 지하철 역 근처에서 신문지를 이불삼아 잠들고 있는 저 노숙자는 모든 것을 다 내던진 것일까.
저 직장인은, 직장 동료에게 빼앗긴 승진 기회를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저 학생은, 소소한 선발기준 미달 때문에 명문 학교에 선발되지 못한 것에 절망하고 있지 않을까.
저 취객은, 가족의 심각한 병세 때문에 하늘을 저주하고 있지 않을까.
저 노숙자는, 거래처의 사기행각 때문에 무너져버린 회사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세상은 불행에 차 있다.
하지만 어째서.
불행은 세상에 있어서, 어느 한 방향에만 편중되어 있다.
세상에 균형이 존재한다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아랫입술을 악문다. 피가 맺힐 정도로.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서는, 넘칠 정도로 행운을 누리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빼앗겼다.
불행한 이들은, 그들에게 행운을 빼앗겼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빼앗은 이도, 빼앗긴 이도.
그 소년은, 행운에 사랑받은 특별한 존재.
불균형한 이 세상의 핵심적인 존재.
하지만 소년은, 스스로의 행운에 도취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을 혐오할 뿐.
그러한 아이러니함. 그녀는 소년에게서 씁쓸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결심한다.
그녀는 소년을…….

 

 


 

 

각오를 하고 교실 문을 조용히 연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려 당황스러웠지만 모른 척 하고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어, 류서영 왔네? 생각했던 보다 빨리 퇴원했구나.]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눈치 챈 건 우리 반 반장인 서아연이었다. 잔머리가 삐져나오지 않게 머리를 뒤로 꽉 묶고,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여학생. 그래도 융통성이 있어서 말이 통하는 재미있는 녀석. 그 녀석은 약간 놀란 기색을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주목을 끌지는 않았기에 내심 안도하면서 서아연과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교통사고 당했다기에 완전 걸레짝이 된 줄 알았는데. 멀쩡하니 다행이네.]
[왜, 걸레짝이 됐으면 했냐?]
[아니, 걸레짝이 되면 내 일이 많아지니까 귀찮아지잖아. 부반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남아서 다행이네.]

 

내가 살아남은 건 학급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굳이 걸고 넘어갈 건 아니었기에 속으로 삼킨다.

 

[의외로 멀쩡한 게 신기할 지경이야. ……어?]

 

그런데, 갑자기 서아연은 살짝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둘이 같이 온 거야?]

 

정작 대화의 화젯거리가 된 장본인은, 내 등 뒤 이십 센티미터의 거리를 둔 채로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냥 우연히 요 앞에서 만났어.]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안녕? 차미 너도 같이 왔어?]
[응.]

 

서아연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애들이 살갑게 인사를 해왔지만, 녀석은 인사해 온 사람이 무색할 정도로 짧게 대꾸만 할 뿐이었다. 나라고 해서 다른 사람과 인사하는 게 편한 것만은 아니지만, 이건 도가 지나칠 정도다.
대충 가볍게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뒤에서 여학생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였는데, 대충 나와 정 차미가 같이 온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이야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뻔하다.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몸을 날려 그녀를 사고에서부터 구해주고, 그녀가 내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병문안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든 그런 오해를 하겠지.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다만, 오해는 오해일 뿐 사실은 어디까지나 다르다.

 

[부반장께서는 교통사고를 겪는 대신에 여친 한 분 낚으셨나봐?]
[멍청아, 그런 거 아니야. 난 피곤하니까 좀 내버려 둬.]

 

대충 얼버무리며 쫓아내는 시늉을 하자, 서아연은 쯧쯧 혀를 차면서 다른 여자아이들 무리로 되돌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감시당하는 긴장감에 쫓기면서 학교에 등교했다.
불찰이었다. 결국 일 주일 동안의 입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아침, 정차미가 내 집 바로 앞에서 감시원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는 것이다. 어제 귀가하던 길에, 퇴원한다는 해방감에 젖어 위기감이 흐려졌던 모양이다. 모르는 사이에 미행을 당했던 것 같다. 말이 좋아 감시지, 스토커랑 다를 바가 없다. 스토커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애정의 지나침에 의한 것도 아니니 더 미칠 노릇이다. 딱 봐도 수상한 짓거리를 해대는 주제에 한다는 변명이 뭔가 하니,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완전히 나을 때까지 힘든 일 있으면 옆에서 도와줄게.]

 

나는 한마디만 했다

 

[꺼져.]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겐 너무 무거운 임무인 것 같네요.
침착한 뻔뻔함의 끝을 향해가는 정 차미 앞에서 내 욕지거리 따위 전혀 소용없었다. 부축해준답시고 팔짱을 끼려는 것 때문에 집 앞에서 한동안 난동을 부렸지만, 끝끝내 내 등 뒤에서 이십 센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졸졸졸 따라오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집이 어딘지를 알아챘다면 이젠 집에서도 맘 편히 있을 수도 없게 됐다. 성가시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물 떠다줄까.]
[…….]

 

머리를 감싸 쥐고 그대로 책상에 엎드리고 싶었다. 원래 내 뒷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을 텐데, 어느새 내 뒷자리에 새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필요 없어. 독이라도 타려고?]

 

성가셔서 대충 쫓아버릴 작정으로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독 먹고 죽을 사람이라면 해볼 수도 있겠지만]

 

정 차미는 목소리를 작게 낮추더니,

 

[너한테는 안 해.]

 

성실하게 내 볼멘소리에 대해 꺼림칙한 대꾸를 해댔다.
이 불쾌한 상황에 대해 상담할 상대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 인하가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여간에 지각 일보 직전으로 들어오는 건 여전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들어올 바에야 차라리 속 시원하게 언제 지각이라도 한번 하는 게 낫겠다.]
[내, 내신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잖아.]
[내신에 금 가는 게 신경이 쓰이면 중간고사 준비를 똑바로 하라고.]

 

나는 혀를 찼다. 만신창이가 된 인하를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들어도 뻔하다. 항상 등교시간 때마다 불행한 사건사고에 휘말리기를 밥 먹듯이 하는 녀석이니. 저번처럼 동네 뒷산에서 조교시킨 멧돼지를 타고 깽판 부리며 내려온 정신 나간 인간 때문에 도로가 점령당해서 지각한 것 이상의 사건이라도 겪은 걸까. 이쯤 되어서는 인하가 운이 없다기보다는, 집 터가 안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안인하. 나 좀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아?]
[뭔데?]

 

인하가 숨을 고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뒤를 힐끗 쳐다봤다. 혹시 끼어들까 걱정되었지만, 정차미는 인하의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인하와 나를 순서대로 쳐다보더니, 인하에게 한 순간이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드르륵 하고 교실 문을 열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더니만, 왜 갑자기 자리를 뜬 걸까. 화장실이라도 간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지만, 뭔가 껄끄러웠다. 아니, 일단 지금은 인하와 이야기할 거리가 있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자.

 

[나, 쟤한테 미운 털 박혔나?]
[알게 뭐야.]

 

나는 대충 말을 자르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내가 뭐 하나 물어보겠는데 말이야. 인하 너, 혹시 정차미 보고 뭐 수상쩍은 낌새 못 느꼈어?]
[혹시, 정차미가 스탠드사인가?]

 

인하는 마치 DIO님 같은……아니, 정체 모를 괴상한 포즈를 취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개드립 치지 말고.]

 

나는 인하의 농담을 가볍게 넘겼다.

 

[그야 물론, 독특하다고는 생각하지.]

 

나는 어깨를 축 내려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성격 같은 부분 말고. 하는 행동거지나 그런 부분이 어딘가 수상쩍게 느껴지지 않으냐고.]
[예를 들자면 어떤 부분이?]
[교통사고가 날 뻔했던 걸 구해줬는데, 사람 가슴팍에다 총을 쏜다든지.]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의심할 만한 발언을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인하의 표정이 미심쩍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환각이나 망상은 아니고?]
[이건 무슨 개소린가 싶겠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나도 개소리처럼 들리는 말을 남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게 전부 실제로 있던 일이니까 나도 환장할 것 같다.
나는 몇 분에 걸쳐 정차미와 처음 만났을 때 있던 일과 정황을 설명했다. 인하는 이야기를 다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마디 했다.

 

[단순히 피해망상일 가능성은 없어?]
[너 내 얘기 제대로 안 들었지.]
[아니면 평소에 사회에 좀 불만이 있다든가?]

 

미칠 노릇이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더 열이 뻗친다.

 

[서영이 네 말을 안 믿는 건 아닌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말 밖에 안 나오는걸.]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한테 허튼 소리를 하겠냐.]

 

하긴 솔직히 인하쯤 되니까 이렇게 들어주지, 이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했다가는 바로 병원에 가보라고 진지하게 조언해 줄지도 모르겠다. 일단 시아라면 말보다 먼저 발로 걷어찼겠지.

 

[말했잖아. 난 너한테는 거짓말 같은 건 안 한다고.]
[그랬지.]

 

인하는 씩 웃어보였다.

 

[서영이 네가 말한다면 정말이겠지?]
[그래.]
[근데, 어떻게 넌 살아남아있는 걸까?]
[몰라.]

 

인하도 내가 불쾌함을 속으로 삼키는 걸 알았는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근데 정차미는 왜 그런 행동을 한 걸까? 걔 말마따나, 자기 생명의 은인한테 대고 말이야.]
[그걸 나도 모르겠으니까 너한테 상담하는 거지.]
[음…….]

 

인하는 관자놀이 근처를 긁적거렸다.

 

[정차미라는 애랑은 그 이전에 만났다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
[없어. 정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판 남이라고.]
[혹시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 쪽에서는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접근한 건지도 모르잖아.]
[말도 안 돼. 걔가 어떻게 알고. 교통사고가 날 때 내가 구해줄 줄 알고 일을 벌였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나와 인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봤지만, 정작 그럴듯한 생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본다는 건 어때?]
[걔한테 물어본다고 해서 솔직히 말하기나 하겠어?]

 

자기가 누구를 총으로 쐈네, 어쩌네 하고 솔직히 말해준다는 것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이상하다.

 

[그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뭐하면 내가 물어볼까?]
[됐어. 괜히 너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미친 놈 취급 받게?]
[하긴.]

 

인하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얌전히 평범한 학생인 척 행동하고 있지만, 속에 무슨 속셈을 감추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위험 부담도 크다. 인하에게 그런 부담을 씌울 수야 없다.

 

[너한테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는 거 아닐까?]

 

인하는 심각한 표정을 띄우며, 내게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그럴까?]
[아마도. 네가 병원에 입원해있을 동안 나나 시아한테 대했던 태도를 비교해 보더라도, 너한테만 유독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것 같으니까.]

 

정차미의 관심대상이 나 하나로 한정된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어지려나. 그렇다면 그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근데 아직도, 왜 그러는 건지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네.]
[그러게. 숨통을 끊으려 했었더라면 그 이전에도 기회가 많았을 텐데 말이야.]

 

가볍게 살 떨리는 소리를 한다. 

 

[그러고 보니, 걔가 이상한 소리를 했었어.]
[언제?]
[그니까, 내가 구해준 직후에.]

 

그냥 죽게 내버려 뒀으면, 이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한 눈을 하고.
마치 죽음을 원하던 사람처럼.
절망해버린 불행한 인간의 단편적인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앞으로, 가능하면 정차미랑 가까이 있는 건 피하도록 해. 특히 단 둘이 있는 상황은 더더욱.]

 

나는 평소 같지 않은 인하의 쓴 소리에 기가 눌려, 짧게 대답했다.

 

 

 

인하는 자기가 아는 정보통에게 정차미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보겠다고 먼저 일찍 돌아갔다. 인하는 고등학생답지 않게 여기저기 뒤쪽 세계의 일을 잘 아니만큼, 믿어도 될 것이다. 굳이 거기까지 해주지 않아도 될 텐데. 정차미가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른다며 인하가 같이 돌아갈 것을 권했으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끌 위험이 있는 만큼 괜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인하를 안심시켰다. 오히려 인하와 같이 붙어 다녔다가는 어쩌면 인하까지 목표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 귀가하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가기 위해 가는 길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흘러나오는 뉴스는 화제의 의식불명 사건. 우리 지역의 청소년들이 일정 주기마다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 소문 상으로는 질병으로 의식되고 있으나, 의식 불명에 빠지는 조건이나 상황 같은 것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벌써 이 사건에 대해 너무 많이 들어본 탓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이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일에 정신이 쏠려서 그럴 겨를이 없다.

 

[저 녀석…….]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쫓아오더라도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내 뒤를 밟는 누군가를 향해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십오 미터 정도 떨어진 자판기 뒤에 숨어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골목길을 택하기를 잘 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애초에 나는 그녀의 기척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시범삼아, 다섯 걸음 정도를 빠르게 걸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바로 근처의 전봇대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다시 천천히 걷는 척 하다가, 나는 일부러 갑작스럽게 그 자리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감시하던 녀석의 기척이 살짝 동요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쫓아온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지역에서 몇 년은 살았다. 지리는 녀석보다 잘 안다. 일부러 옆길로 빠져, 녀석을 따돌린다. 그렇게 몇 분간, 일부러 골목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는 등, 추적을 어렵게 하기 위해 불규칙한 방식으로. 그렇게 마지막으로 녀석의 기척이 있던 곳을 찾아 다시 되돌아왔다. 일단 다른 길로 빠져, 주위를 둘러보고는 녀석의 모습이 없는지 살펴본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애초에 기척이 사라졌다. 역으로 추적하는 걸 들키기라도 한 걸까. 귀찮은 녀석이네.

 

[에비.]
[으왓!]

 

귓가에서 뜨거운 입김이 느껴져서 볼품없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깜짝 놀랐잖아!

 

[얌전히 부르면 될 것이지 변태같이 무슨 짓이야!]

 

순간 심장이 몇 초쯤 멈출 뻔 했다. 심장 건강에 상당히 안 좋은 장난이다.

 

[어떻게 부르든 놀랄 것 같아서 큐트함을 더해봤어.]

 

이 상황에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큐트하지 않아.

그나저나 상황이 안 좋다. 인하가 정차미와 가까이 있지 말라고 경고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공간에서 단 둘이 있게 되어버렀다.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도록 퇴로 쪽을 향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일단 입을 열었다.

 

[뭣 좀 하나 묻자.]
[물어봐.]
[왜 날 계속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무슨 스토커마냥.]
[스토커라니, 듣기가 좀 그러네.]

 

정차미는 눈썹을 몇 밀리미터 정도 일그러뜨리며 대꾸했다.

 

[난 그저 류서영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실시간으로 꼼꼼히 관찰한 것뿐인데.]

 

정작 풀어서 말해도 스토커의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부분에서 웃으면 되나.

 

[그래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글쎄?]

 

환장할 노릇이다.

 

[장난하냐, 지금!]

 

기가 막혀서 고함을 내질렀다.

 

[소리 지르지 마. 내가 깜짝 놀라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눈 깜짝도 안하면서 무슨.]

 

자기는 먼저 내 귓가에 대고 입김을 불어넣은 주제에 말은 잘한다.

 

[이유도 없이 쫓아다니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정차미는 입을 닫고 침묵했다. 차라리 무슨 변명이라도 늘어놓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하지, 이런 식으로 침묵하는 건 기분 나쁘다.

 

[아.]

 

그런데 갑자기, 정차미는 드물게도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무언가를 보고 놀란 표정이다.

 

[뭐야?]

 

나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껴 곧바로 뒤를 돌아봤다.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그런데 정작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보고 놀란 건가하고 그녀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려보니…….

 

[아.]

 

깡충깡충 재빠르게 도망친다!
놓칠세라 곧바로 뛰어가서 뒷덜미를 낚아 올렸다. 뛰어봐야 벼룩이지.

 

[꺄흐응.]
[이상한 소리 내지 마!]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이미지나 성격과 괴리감이 생긴다고!

 

[목덜미 쪽을 다른 사람한테 만져진 게 처음이라 그래.]

 

민감하거든, 하고 되도 않는 소리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다. 표정이나 바꾸면서 말해.

 

[뜬금없이 무슨 짓거리야? 고백하려다 창피해서 도망치는 여학생마냥.]
[고백?]

 

내가 빈정거릴 작정으로 던진 말을, 정차미는 천천히 곱씹는 듯 했다.

 

[응, 그게 좋을 것 같네.]
[뭐가?]
[내가 류서영 너를 쫓아다니는 건 너를……좋아? 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왜 자기가 말하면서도 의아하다는 듯이 의문부호를 넣는 건데.
사람을 바보로 알아도 유분수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지금껏 졸졸 쫓아다닌 게 날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흐름상 그렇게 되나?]
[뭘 남 일 마냥 중얼거리냐? 지금 콩트라도 하는 줄 알아?]
[왜, 좋잖아. 콩트처럼 알콩달콩한 고등학생의 연애라는 것도.]

 

기가 차다 못해 이젠 현기증마저 날 지경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체념해버릴 뻔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상대로.

 

[사랑은 허리케인 같은 거니까.]

 

갑자기 찾아와서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지, 라고 같잖은 말로 받아친다. 그 허리케인에 머리까지 맛이 가버렸나.

 

[만약 여기서 내가 너보고 싫다고 그러면 어쩔 건데?]
[상처 입을 지도.]

 

이제 좀 떼어내려나 싶었는데,

 

[그 상처를 속에 품은 채로 네가 받아줄 때까지 따라다니겠지만.]

 

정차미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찰거머리 같은 녀석이었다.

 

 

[어휴…….]

 

나는 품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여섯 시 반. 정차미를 만나고, 애써 무시하면서 여기까지 오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흐른 모양이다. 점차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간대에, 다른 학생들이라면 지금쯤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시간이니 교복차림인 우리 두 사람은 괜히 더 눈에 띄는 것 같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평소대로였다면 이대로 집으로 갔겠지만, 일단 정차미와 단둘이 있게 된 이상 일단 인하에게 연락을 하고 응답을 기다려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오늘 하루 스토커와 같은 행동거지를 제외한다면, 정차미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려 들거나 하는 그렇게 정신 나간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인하가 주의를 준 것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꺼림칙하긴 하다.

 


[이제 어쩔 거야?]

 

정차미는 어느새 내 뒤에 소리도 없이 다가오며 물었다. 기척 좀 내고 다니라니까. 무슨 자객도 아니고.

 

[너는 언제까지 계속 따라올 셈이야?]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도록 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누가 계속 따라오는 게 느껴지는데.]
[누군가 자기를 미행한다고 느껴지면 두근두근하거나 짜릿짜릿하다던데.]

 

안 그래.
내 상식이 똑바로 박혀있는 게 확실하다면, 적어도 그런 인간은 세상에 없다.
없다고 믿고 싶다.

 

[난 이제 장보러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저녁준비는 혼자 해?]

 

어랍쇼. 말을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고는 말 돌리는 것 보게.

 

[어.]
[혼자 살아?]
[그런데 왜.]

 

나는 얼버무리듯 말했다.

 

[요리 잘하나 보네.]

 

하지만 정차미는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넘겼다. 동정의 시선은 없다. 정작 본인은 의식하고 말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수준으로 만드는 정도지, 그렇게 잘 하는 건 아니야.]
[적어도 반찬투정으로 누구랑 싸울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좋은 거 아니야?]
[영양도 신경 써야 되니까, 그렇게 아무거나 좋아하는 것만 만들 수는 없지.]
[그런가?]

 

정차미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하면서, 나는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나저나 너는 이제부터 어쩔 건데?]
[네가 가는 곳이 곧 내가 갈 곳이야.]

 

질렸다. 이래놓고 자기가 스토커가 아니라고 하고 싶나.

 

[물론 농담이야. 나도 분별은 있으니까.]
[뻥 치지 마.]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은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거나 하지 않는다고.

 

[그럼 난 이만 갈 테니까 얌전히 너도 집에 가.]

 

나는 쐐기를 박듯 딱 잘라 말했다.

 

[따라갈래.]
[안 돼.]
[안 되면 되게 하라, 라는 말이 있어.]

 

젠장. 끈덕지다. 아무래도 좋을 기분이 되어버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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