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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I;요정의 시각 by 커리

『――――사실 우리의 뇌내세계 속에 2000년, 2001년, 2002년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밀레니엄 쇼크, 9.11테러, 한일 월드컵이라는 사건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을 뿐이야. 고등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더 나아가면 취업, 결혼 같은 인생 대소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사망에서 매듭이 지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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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삼처럼 6년 묵은 커리  lv 4 10% / 1050 글 45 | 댓글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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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74    추천 0   덧글 1    / 2007.07.31 02:08:16




강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칵……!!」

아무래도 몸 내부에 상처가 난 것 같았다. 피를 한바가지 내쏟으면서도 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계노인이 끌고 온 비행선의 내부는 생각보다 무진장 넓었다. 오른손엔 진영이가 가지고 있던 나이프, 왼손엔 시계를 굳게 쥐고, 두 다리는 온 힘을 다해서 땅을 내딛어 뒤로 밀어낸다. 당연히 시간은 오버클러킹에 의해 뻥튀기되어있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빨리 달리지는 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100미터를 8초에 주파할 자신이 있다. 다만 그 정도의 스피드를 받쳐줄 정도로 내 각력은 뛰어나지 못하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 몸은 여전히 개운하고,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는 커다란 태엽 같은 고철덩어리가 지나치게 많이 널려있어서, 발 딛는 곳을 생각하는 것만 해도 벅차다.
정면에 나무로 된 문이 보였다. 속도를 줄이고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귀찮게 느껴져서, 달려오는 힘까지 실어서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쿠쾅, 빠직!
문짝이 통째로 부서졌다. 문 너머에는 한 면이 온통 유리창으로 둘러진 큰 방이 있었다. 샐 수 없이 많은 촛불과 촛대가 조명을 대신하고 있다. 창문 너머, 멀리에 달이 보인다. 달은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처럼 푸르지도, 하얗지도, 크지도 않고 단지 누리끼리한 색이 강해서 보기에 재수가 없었다.
「Greetings!」 (환영합니다!)
「!」
왜 이제야 알았을까.
방 한가운데엔 시계노인이 서 있었다. 두 팔을 신처럼 벌리고, 유머러스한 얼굴을 하고 있는 괴인이었다. 방의 인테리어에 눈을 빼앗긴 탓에 빠르게 인식하지 못했다.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오버클러킹의 힘이 떨어지기 전에, 맹렬한 기세로 시계노인의 가슴팍에 뛰어들어 나이프를 내질렀다.
쨍그랑.
나이프의 타격점을 중심으로 시계노인의 상에 금이 갔다. 순간, 시계노인의 상 너머에서 강한 돌풍이 유입된다. 유리파편이 온 몸을 노리고 날아든다. 젠장, 이것 한 면만 거울인가!
잽싸게 뒤로 물러나서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노인은 아까 내가 날려버린 문의 그늘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
그는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전투의욕을 상실시키는 유쾌한 표정이다.
한 번 크게 한숨을 쉬고, 시계의 특수능력을 해제했다.
끼리릭, 끼리릭, 끼리리리리……찰칵.
기습의 의미가 없어진 이상, 시간을 끌면서 몸을 추스리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더 이상 덤벼들지 않자 시계노인도 순순히 방 가운데 즈음에 와서 걸음을 멈췄다.
『여어. 살아계셨군요』
시계노인이 입을 놀렸으나 소리는 안 나오고, 머릿속에 곧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우리말로!
「……텔레파시냐?」
『음. 미국인들이 말하는 텔레패스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세하게 이 교감에 대해서 밝힐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뭐……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걸 할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쓰시지 그러셨나」
『하하핫』
웃어넘겼다. 동양인을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
『실례. 하지만 그래서는 dialogue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이얼로그. 그러니까, 대화다.
설마하니……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표층심리뿐이라면 가능합니다. 호오호오, 한국어는 이런 언어입니까……대단히 합리적이고, 또 흥미로운 언어 시스템이군요』
엇흠.
시계노인이 기침을 하고, 크게 두 팔을 벌렸다. 맨 처음 봤을 때의 그 자세였다.
『그나저나……멋지지 않습니까? 이곳은』
그 자세엔 너무나도 신 같은 품위와 기세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가혹할 정도로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이 비행선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뭔가 더 크고 넓은 곳? 장소?
「――――Who, are, you」 (누구냐, 너)
일부러 큰 소리로, 또박또박 질문했다.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그를 맨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이 걸 물었어야 했었다……!
「I, am, BREGUET」
나는, 브레게이다――――.
저번처럼 내 이름이 브레게이다(My name is Breguet)라고 말하는 것보단 그 인명(人名)에 대하여 보다 더 지배력을 가지는 답변이었다.
말뜻을 이해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렇군……그런 거였어」
「……」
그는 잠자코 미소 지을 뿐이었다.
「바로 당신이 브레게였군」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1747.1.10~1823.9.17. 스위스 뇌샤텔에서 출생한, 프랑스의 시계기술자.
환상의 제1시계를 만든 창조자 본인이 세월을 넘어서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잘도 아셨군요』
「아아. 얼마 전에 현 브레게 사의 사장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거든」
나 같은 다른 시간능력자도 시계의 수리에 쩔쩔매는데, 그는 이미 3개나 되는 시계를 하나로 합쳤다. 즉 그는 코어 블록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장님, 그러니까 에린 로쉐필 브레게는 시계노인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같은 브레게란 성을 쓰면서 세현이가 알고 있는 시계노인이란 사람이 가문 내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하나 덧붙이자면, 사장님은 거짓말을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것은 순전히 내 감이다.
하지만 이 추리는 계속 미완이었다. 중대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세현이 말론, 브레게는 요정왕의 복수를 당해서 요정의 세계로 끌려갔다고 하던데」
끄덕끄덕. 그는 고개를 몇 번이고 숙였다.
『음……그렇지요. 조금 설명을 해 둘까요. 한진용님은 요정의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음? 요정의 세계? 그야……
「아발론(Avalon)?」
『……다소 거리가 있군요. 그 곳은 수많은 민중에 의해 그 귀환이 기대되는 자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안식의 땅입니다』
「틀렸나?」
『아아, 하지만 적룡왕 팬드래건에 대한 전승은 저도 좋아합니다. 그는 켈트인의 자랑이지요』
아닌 모양이다. 끄응, 그렇다면…….
「피터 팬에 나오는 네버랜드(Neverland)?」
『하하핫. 꿈이 있어서 좋군요』
「음……그럼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요정왕 오베론?」
『그는 제가 태어나기도 수백 년 전에 통치했던 왕입니다』
끄응……한참을 더 궁리하다가 겨우 그럴듯한 단어를 떠올렸다.
「티르 나 노이(Tir‐Na‐N‐Og)?」
켈트 신화에서 말해지는 신들의 도피처, 영원한 젊음의 나라다. 그 곳에 사는 사람은 늙지 않고, 보석이 열리는 나무가 있고, 향기로운 냄새와 멋있는 풍경과 미소녀들이 있다.
『지금까지 열거하신 것들 중에선 그게 가장 비슷할 것 같군요. 물론 재패니메이션적인 가치관에서 말하는 미녀는 드뭅니다만』
풋. 브레게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왠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런 데로 끌려갔다가……돌아온 건가?」
『정확하게는 빠져나온 겁니다. 이쪽 세계의 시간으로 4년 전에 선대 요정왕이 피살당했지요.
그들의 궁정은 아직도 절대군주제라서 말입니다. 역시 왕권교체기란 혼란스러운 법이에요.
물론 보통은 체인즐링(Changeling)이라 해서 5세 미만 쯤 되는 아동들이 주로 두 세계를 오갈 수 있습니다만, 저 같은 늙은이도 수명(壽命)의 리스크만 감수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다. 시계노인의 이런 점은 세현이와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요정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그들은 제가 이쪽 세계에 오면 곧장 시계의 복원부터 시도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전 세계에서 가끔씩 감지되는 패러독스의 진동(振動)을 찾아서 지금도 세계를 해매고 있지요. 활발하게 시간능력을 사용하는 세현양이 한국에 왔으니, 그들의 세력이 극동 아시아에 닿는 것도 의외로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세현이를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바로 너잖아」
『……』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을 참이었지만, 왠지 말이 격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마지막으로……하나만 묻지」
『얼마든지』
「너, 제2시계를 다 모아서 환상의 제1시계를 만들면, 무얼 할 작정인 거냐」
정말로 세계정복이라거나, 순수한 수집가로서의 욕망 같은 하찮고 개인적인 이유를 말해주길 바랬다.
그렇다면 나는 이 녀석을 나보다 더 거대한 악(惡)으로 규정하고, 마음 편하게 저 웃는 얼굴을 때릴 수 있다. 하지만, 시계노인은 마지막까지 내 기대를 저버렸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발주를 받은 물건이 있고 그걸 완성시켰으니까, 건네드려야지요』
――――――――뭐?
발주를, 받은……물건? 잠깐, 분명 제1시계의 주인이 되었을 사람은……하하……설마.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미 죽었다. 이미 죽은 사람한테 어떻게 완성시킨 시계를 준단 말인가.
『가능합니다. 달리 환상의 제1시계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 뭐냐, 어어, 그러니까, 아아 젠장. 갑자기 단어가 안 나오네.
「Timeslip」
맞아 그거! 시간여행!
『전 시계기술자이지 마법사가 아닙니다. 죽은 왕비를 되살리는 건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제가 완성된 시계를 들고 왕비께 나아가면 됩니다.
소름이 돋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말로 하지 않는 진심이 흘러들어왔다. 이 자식, 정말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시계를 전달할 작정이다.
「그런 짓을 했다간, 역사가 이상하게 꼬여서……패러독스가 문제가 되는 거 아니야?」
뭐, 드래곤볼에도 나오는 게 타임 패러독스이긴 하지만…… 그걸 실제로 겪어야 하는 200년 뒤의 현대인들은 대체 어찌 되는 걸까.
『하핫, 착각은 마십시오. 저는 펠젠 공처럼 왕비에게 홀려있는 남자도 아니고, 왕당파의 손을 들어줄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일개 시계 장인일 뿐이니까요. 저는 단지, 살아있는 왕비에게 시계를 전해주면 그걸로 족합니다. 어떤 상태의 왕비에게 전달하든 상관은 없으니, 패러독스가 문제가 된다면 처형 직전의 그녀에게 시계를 전달해주도록 하지요』
「잠깐……그러면 환상의 제1시계를 손에 넣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간의 지배자가 되는 거잖아?」
『그거야 제 고객이 알아서 할 일이 아닙니까? 저는 최선을 다해서, 최상의 시계를 만들 뿐입니다. 뒷일은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요』
이 녀석, 뼛속까지 장인이다. 좋은 의미로 미친 사람이다.
『요정계로 끌려간 제 자신의 처우는 뭐, 납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복수당할 만한 심한 짓을 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완성까지 시켜놓고 고객 본인에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끌려가있는 내내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요. 200년……아니, 영원에 가까운 시간동안 계속 그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찝찝함이 사라질까 하고』
「OK. 거기까지」
끼리릭, 끼리릭, 끼리리리리리리릭――――
시계에 달아놓은 버튼을 꾹꾹 눌렀다.
그 소리를 듣고 시계노인도 반사적으로 시계를 꺼내들었다.
「이것 참……뭐랄까. 감사해야겠네」
크게 웃는다. 껄껄껄. 이게 내 목소리 맞나 싶을 정도로 메마르게.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선 스파르타 군인들은 웃음으로 공포를 이겨낸다고 한다. 내 경우엔, 하도 기가 차서 더 화를 낼 것도 없어진 꼴이지만.
『무얼 말입니까?』
「덕분에――――여러모로 극복할 수 있게 생겼어」





일단 직선으로 뛰어들어서, 시계노인을 향해서 나이프를 그었다. 목을 노릴 생각이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휭. 크게 헛스윙을 돌고, 시계노인은 이미 크게 한발 뒤로 빠져있었다. 나도 또한 한발을 딛고, 다시금 나이프를 휘둘렀다.
카랑!
격돌과 함께 불꽃이 튀어 오른다. 레이피어가 사선으로 떨어뜨려지면서 내 나이프도 자연스럽게 흘러졌다. 예상한 바다. 검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퍽!
『큿――――』
검만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까, 걷어찼다. 시계노인의 검도 정상인의 것은 아닌 가속된 시간 축을 흐르고 있지만, 일순간에 걸리는 절대가속도에선 내 시계 쪽이 더 우위에 있다. 격투게임으로 다져진 순발력은 이럴 때에 발휘되는 법이다. 녀석이 나가떨어지면서 벽을 네모나게 두르도록 설치되어 있었던 촛불이 이리저리 넘어졌다.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시계노인에게 덤벼든다.
「으아아아아!」
소리도 질러본다. 하지만 시계노인은 나가떨어지면서도 왼손에 들고 있던 회중시계를 흩뿌렸다. 오른팔에 시계의 체인이 감겼고, 시계노인은 내 팔을 오른쪽으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내 나이프는 시계노인의 머리통 바로 옆에 박혀 들어갔다.
「?!」
이어서, 복부에 묵직한 발차기가 들어왔다. 퍼억!
이번엔 내가 나가떨어질 차례다. 나이프를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가속도까지 받아서 벽에 박힌 나이프는 두고, 몸만이 바닥을 굴렀다. 누워있으면 죽는다! 얼른 다시 일어나서 정면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번에도 또 팔에 묶인 체인이 휙 하고 잡아당겨졌다.
으득.
오른쪽 발목에서,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
달려들던 힘이 있었으니 그야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호호오. 전보다는 시계의 능력에 익숙해진 것 같군요』
「……남이사!」
발목을 접질렸으니 아까처럼 뛰어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사슬이 팽팽해지고, 이번엔 녀석과의 힘 대결에 들어갔다. 잡아당기는 힘들이 교차했다. 호각이었다……녀석이 먼저 시곗줄을 놓기 전까진.
「엇……!!!!」
순간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억지로 버티려다가 다시 발목에 무리가 갔다. 어찌나 아픈지 찌이잉‐하고 온 몸에 전율이 왔다. 왈칵 눈물이 다 쏟아진다.
『더 하겠습니까?』
「……」
『그 육체로는 슬슬 한계겠지요. 현대인으로 살아선 그 정도 고통에도 내성이 없게 되니까요』
녀석은 검을 곧추세우고 천천히 간격을 좁혀오고 있었다. 슬슬 끝장을 보자는 거겠지. 문득 내 팔에 감겨진 녀석의 시계를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제2시계라면 이렇게 간단히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시계는 어디에 있나?」
『허허, 무슨 말씀을. 그것이 진짜 시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함정이다.
함정이니까, 속으면 안 된다. 사실은 어딘가에 따로 시계를 가지고 있어서――――음? 잠깐, 잠깐만.
「너……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
그는 웃고 있었다.
『예. 표층심리만이라면』
「그럼――――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겠군」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타이밍 좋게, 큰 소리로 외친다.
「Bluff!」
「W……What?!」
녀석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검을 내리쳐왔다. 목표는 시계가 아니라 내 목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목에 칼에 들어오기보다 빠르게,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빠르게 시계판 앞의 초침을 돌렸다.
끼리리리릭――――……찰칵.
그것은 천사가 부는 승리의 나팔소리였다.
아하하. 이제는 아예 세계가 나를 두고 멈춘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잔꾀를……!』
「남을 속이려면 속을 각오도 했어야지!!」
녀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하긴……신사도를 신봉하는 녀석이니 오죽할까. 느릿느릿하게 오는 검을 가볍게 두 손바닥에 끼우고, 그대로 옆으로 꺾었다. 녀석의 손에 더 이상 무기는 없다. 녀석의 검을 허공에 던져서, 한 바퀴 돈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시계노인의 시계에는 가속 능력이 있다고 했다. 내 시계, 그러니까 가칭 오버클러킹은 사용자가 체감하는 시간을 가속시킨다. 쉽게 말하면 긴급한 동작을 더 숙고하면서 할 수 있는 셈이다. 때문에, 빨리 피하고 정확하게 맞출 수 있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저냥 민간인의 공격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다르다. 이건 문자 그대로 몸 자체가 빨라지는, 게임 마법의 헤이스트(haste)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이번엔 정면에서 놈에게 달려들었다. 들어갔다!
「체에에에스토오!」
툭. 분명히 녀석의 심장을 관통해야할 검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막혀서 부러졌다. 부러진 칼날이 눈앞에서 공회전한다. 어……라?!
퍼억!
놀랐다. 그 신사적인 시계노인이 강렬한 훅을 날렸다. 머리통이 송두리째 꺾인다. 창피하게도, 시야와 함께 허리까지 돌아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회전의 충격이 또 발목에 들어가서 송곳을 찌르는 것 같은 격통이 되어 뇌를 찔렀다. 이 자식이!?
하지만 아직 쓰러지지는 않는다. 자세를 낮춰서, 쓰러지기 전에 부러진 검을 한 번 더 박아 넣었다.
푸슉!
그리고 잽싸게 돌린다. 피가 쏟아진다.
「으아아아아아!!」
밀어낸다.
아니, 밀어붙인다. 절뚝거리기는 하지만, 제아무리 절름발이라도 헤이스트를 받으면 보통 사람보단 빠르겠지.
꼬챙이에 시계노인을 꿴 채로 달려 나간다. 파앗‐하고, 누리끼리한 색깔의 달이 눈 앞 한가득 들어왔다.
이대로 달리면 저 달까지도 찌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추석엔 이르지만……」
「!?」
「――――같이, 달구경이나 할까」
쨍그랑――――!
유리가 깨지고, 달들이 여러 개가 된다. 중력의 가호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날개가 없는 것은 떨어져야 한다. 언뜻 봐도 지상에서 수십 미터는 보인다. 여기서 떨어지면 보나마나 즉사겠지. 하늘하늘, 느릿하게 추락하고 있던 시계노인은 내가 레이피어를 놓자마자 허망한 표정을 하고선 급속도로 작아져갔다. 미안하게 되었군. 하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야. 시큼하니 코가 찡해진다. 아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게임은 끝났다. 하지만 보스를 잡았으니 이것은 해피엔딩이다.
시계노인도 죽였으니 이제 세현이는 더 이상 쫒기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세현이다. 어딜 가도 고생은 안 할 아이다. 이대로 서울에 정착해도 되겠고, 다른 먼 나라에 가서라도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겠지.
가끔,
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 날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한진용――――――――!」
움찔.
대학로를 휩싸고 올라오는 상승기류를 타고,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만감이 교차하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주마등이 흘렀다. 주마등이…….
「시계――――――――!」
제……젠장! 나보다 시계가 더 중요하냐!! 억지로라도 살아나주겠어!!
「우와아아아아아아앙!!」
다짜고자 위를 향해서 시계를 내뻗었다. 아까 시계노인이 한 것처럼 밤하늘에 은색 궤적을 그리면서 시계가 나선을 그리며 올라가다……운이 좋게, 무언가에 딱 걸려주셨다. 손등에 체인이 박히면서, 뼈가 부서질 것 같은 아픔이 찾아왔다. 그래도 죽는 것 보다야 낫다. 살아야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대로 죽었다면 결국 이득 보는 건 윤세현뿐이었잖아!
못 본다. 그런 꼴은 절대로 못 본다.
「으갸갸갸갸각……」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위로 올라간다. 한참을 끙끙거리면서 비행선에 완전히 몸을 싣고 나자 완전히 녹초가 다 되었다.
비실비실 유리조각이 없는 곳까지 가서, 마룻바닥에 벌러덩 나자빠졌다.
「……」
제아무리 열대아가 가득한 여름이어도, 높은 곳의 바람은 시원했다. 내 손엔 두 시계가 얽혀있다. 시계를 얻고, 시계노인……아니, 브레게를 쓰러뜨렸다.
「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나를 지켜냈고, 세현이도 지켜냈다.
지지직――――무전기에서 전파가 잡혔다. 여간해선 소리를 지르지 않는 세현이가 큰 소리로 나를 반겼다.
『축하해!』
「아아. 너도」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하고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세현이가 나오는 꿈이었다는 것만은 일어나고 나서도 한동안, 손에 잡힐 정도로 생생하게 뇌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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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삼처럼 6년 묵은 커리  lv 4 10% / 1050 글 45 | 댓글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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