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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않는 행운과 달콤한 불행(完) by 에어피트

행복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행운이 있다고 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시각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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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에어피트[btydntjddls]
조회 1317    추천 0   덧글 0    / 2012.09.09 14:51:07


[왜 지금까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미안. 처음부터 전부 밝혔다간 네가 괜히 불안해 할 것 같아서.]


머쓱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 건 영락없이 평소의 인하 모습 그대로였다. 방금 전 그토록 격렬한 전투를 벌인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안양천을 건너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의 한 폐 공장. 방금 전의 격렬한 전투 후, 나와 인하는 함께 그들의 검정색 밴을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분명히 일시적 대피를 위해서라고 했었다. 지금 우리 지역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하를 보좌하는 그 검은 옷의 남자들이나 지금 머물고 있는 수상쩍은 이 공장이나 모두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인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에 나는 잠자코 따라온 것이다.


[미안해.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될 줄은 몰랐어.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아. 우리가 금방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곤란할 때 짓는 쓴웃음을 약하게 지어보이며 인하는 입을 열었다.


[정차미가, 이렇게 끈질기게 너한테 달라붙어있을 줄 몰랐어. 그리고 이 사건이 이 정도로 급격하게 발전할 줄도 몰랐고. 다 내 불찰이야.]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만약에 뭐라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와서 누구 잘못이고 그런 걸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야. 뭐가 어떻게 됐던 간에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네. 서영이 너는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다행이야.]


정말 그 말에 기운을 차린 건지, 그새 표정이 풀렸다. 단순한 건지 기분 전환이 빠른 건지.

 

[이제야 물어보는 것도 좀 그런데, 인하 너는 정체가 뭐야?]
[정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건 없는데.]


인하는 곤란한 듯 머리를 왼손으로 긁적였다.


[나는, 어느 ‘조직’의 구성원이야.]


이제 말할 용기가 생긴 건지, 인하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굳이 어떤 곳이고 무얼 하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진 않을게. 그냥 네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비밀 조직’이라고만 생각해 줘.]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딴죽 걸고 싶은 것도 또한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우선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한 가지 우리 조직의 이념을 말하자면……행복과 행운의 추구야.]
[행복을 추구한다고? 누구를 위해서?]
[소수의 특별한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의 사욕을 위해 일하는 것도. 단지, 모두를 위해서.]


그 모두라는 건,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겠지. 세상의 모든 이들. 그 정도의 스케일을 상대로, 인하는 지금 일하고 있다고 말한 걸까?


[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이 경우에는 ‘공욕’을 위해서 일한다고 해야 하나?]


썰렁한 농담에 스스로도 피식 웃기는 했지만, 인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인하와 알고 지냈던 몇 년간 정말 인하는 타인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자신을 내던지고,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해 왔다. 그걸 알고 있는 나이기에 더더욱, 인하의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 오해하지 말아줘. 내가 비밀 조직의 구성원이라고 해서 너나 시아, 그리고 선생님들이나 다른 친구들과의 우정이 가짜라는 건 아니야. 그건 다 내 뜻으로, 내 의지로 이룬 관계니까.]
[알아. 너는 항상 공과 사를 구분 못하니까.]
[욕이야, 칭찬이야?]
[당연히 욕이지, 멍청아.]


인하는 골이 난 듯 눈가가 꿈틀거렸고, 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뭐, 일단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널 여기로 부른 건, 해를 입히려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야.]

해치지 않아요, 하고 애써 어색하게 웃는 인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야?]
[굳이 말 안 해도 알잖아? 널 보호하기 위해서지.]
[그니까 무엇에서부터 보호하려는 건데. 설마 정차미로부터라고 하진 않겠지?]
[정답이야. 너는 정차미라는 녀석의 악랄함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김빠질 정도로 간단히 대답한다.


[다 거짓말이야. 정차미가 너한테 했던 말은 다 거짓말. 한 치의 진실도 없는 새빨간 거짓말. 너를 이용하려고 교묘하게 꾸며낸 거짓뿐이야.]


처음에 입을 열면 나오는 것은 거짓말이고, 마지막으로 입에서 꺼내는 말도 거짓말. 그야말로 존재부터가 거짓말로 점철된, 가짜이자 거짓말쟁이 여자. 인하는 신랄하리만큼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처음 정차미라는 인간을 알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 감정이 없는 인형 같은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내뱉는 점이 말이야.]
[전부……거짓말이라고?]


같이 식품매장에 들렸을 때 어딘가 모르게 즐거워 보였던 모습이나, 자신을 믿어달라고 스스로를 상처 입혀가면서까지 애절하게 부탁했던 일이나, 감정이 무뎌졌기에 나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걸 사과하던 그 모습들이 뇌리에 스쳤다. 그런 모습들까지도 전부 거짓이라고는,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걸까.
인하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인하를 의심할 수 없으니까. 다른 어떤 말보다도, 인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있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걔는 왜 나를 끌어들이려 한 거지?]
[당연한 거지.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고, 여차하면 죽일 수 있는 인질로 사용하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꺼내는 걸 듣자니, 솔직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었기에 괜히 오한이 들었다.


[차미가 무슨 말을 했을 지야 대충 예상은 가지만 일단 물어볼게. 서영이 너는 걔한테 무슨 말을 들었어?]
[사람들이 계속 의식불명에 빠지는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했었어.]
[그거 이상하지 않아?]


인하는 딱 잘라서 내 말에 의문을 표했다.


[잘 생각해봐. 정차미 걔가 너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해? 비상한 머리에, 일반인을 크게 상회하는 전투 능력까지 지닌 그 녀석이 말이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만 생각해보더라도, 나는 그녀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지 특별히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었을까 싶다. 게다가 내가 의식불명 환자들에게 포츈을 나누어주는 일을 돕겠다고 했어도 딱 잘라 거절까지 했었고.


[참 영악하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움을 달라는 적절한 구실을 붙여서 네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너 자신이 인질이라는 자각도 없이 스스로 뒤를 따라다니게 했으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계속 가지고 있던 믿음에 하나둘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뒤통수를 세게 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이다.


[그런데 말이야, 정차미는 우리 지역 사람들은 지금 포츈이라는 걸 한계 이상으로 빼앗겨서 의식불명에 빠지고 있다고 했어. 그것도 역시 거짓말인 거야?]


사람들이 쓰러졌을 때와, 정차미가 응급처치라는 걸 했을 때 내가 느꼈던 그 미묘한 공감각 때문인지, 나는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정차미를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번엔 드물게도 사실을 말했구나. 하기야, 완전히 거짓말만 늘어놓다가는 설득력이 없었을 테니까. 원래 거짓말쟁이들은 약간 진실을 섞어서 말을 하잖아?]


인하도 약간 의외라는 듯 했다.


[그런데 그것도 이상한 게, 행운을 빼앗겨 쓰러진 사람들을 남의 행운을 빼앗는 체질의 소녀가 구하려고 한다는 건 뭔가 어색하지 않나?]


거침없이, 인하는 하나 둘 근거를 들어가면서 설득을 이어갔다. 그때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렇게 들어보니 의심이 계속 피어오른다. 혼란스럽다.


[상식이 있다면 보통 이렇게 생각하겠지. 행운을 빼앗는 체질의 소녀가, 다른 이들의 행운을 빼앗으려 한다고.]


상식적으로도, 정황상으로도 그렇게 되겠지. 반론할 요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의 핵심에 정차미가 있어. 자신의 체질을 이용해, 이 도시의 사람들의 포츈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는 거야.]


즉, 지금의 사건의 범인은 정차미라고.
모든 악행의 근원은 그녀라고 인하는 말했다.


[내가 걔랑 같이 다닐 때만 해도 그렇게 수상쩍은 행동은…….]
[정말 없었어? 아무 것도?]


그렇게 강하게 몰아붙이면, 자신감이 사라진다.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 미연의 피해자들을 미리 찾아갔던 적이 있다는 것이나, 갑자기 쓰러졌던 이들에게 응급처치라고 칼을 댔던 일이나ㅡ


[……없진 않지, 역시?]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이 사건을 막으려고 생각했었다면, 미연의 피해자들을 찾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칼로 상처를 내어 응급처치라고 한 것도, 어디까지나 그녀의 말밖에 믿을 근거가 없다. 정말 무슨 짓을 하려 했었던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다행인 건, 차미가 너한테서 떨어져 나갔다는 거야. 지금까지는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는데, 이젠 거리낄 게 없어졌어.]
[어쩔 작정이야?]
[물론, 되갚아 줘야지. 지금까지 마음대로 난동부린 것들을 말이야.]


손가락 마디를 빠득, 하고 꺾으며 인하는 씩 웃어보였다.


[또 싸울 거야?]
[당연하지.]
[위험하지 않겠어? 너 방금 전에만 하더라도 총에 몇 발씩이나ㅡ]
[괜찮아. 봐봐.]


인하는 조금 전의 싸움에서 총알을 맞았던 부위를 내게 보여주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복부. 하지만 흔히 생각할 만큼의 큰 부상은 없었다. 아니, 생채기 하나 없었다.


[내 신체는 일반적인 강도를 넘어섰어. 총탄 정도야 여유롭게 받아낼 수 있지.]


콘크리트 바닥을 맨발로 박살내고, 총알을 반사 신경만으로 피하고, 그 총탄을 받아내고도 생채기 하나 없는 신체. 확실히 기이하다 할 정도의 강도다.
지금껏 끊임없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온 결과 얻어낼 수 있었던 강인함. 이쪽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하의 노력의 결실. 그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차미와 싸우겠다는 건 반대야.]
[왜? 그새 정이라도 들었어?]
[농담하는 거 아니야. 걔랑 싸우는 건 위험하다고.]


농담을 애써 무시하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인하는 내가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는지 의아한 표정을 띄웠다.


[물론 위험하겠지. 하지만 해야만 할 일이야.]
[그렇다면 나도 데려가.]
[……갑자기 왜 그래?]


인하의 표정이 굳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몇 가지, 정차미한테 물어볼 게 있어.]


인하 말대로 정차미가 지금까지 했던 말과 행동들이 모두 거짓이라면, 꼭 확인해 두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인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영아, 지금 우리는 장난으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장난할 생각 없어.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한 거야.]
[내 말 못 들었어? 우리가 널 여기에 데려온 이유 말이야.]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나도 지지않고 대꾸했다.


[나도 내 몸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어. 여차하면 너를 도와줄 수도 있을테고.]
[무리야.]


답지 않게 한숨까지 내쉬며 말한다.


[너까지라면 아슬아슬하게 지킬 수 있겠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진 않아.]
[무슨 뜻이야?]
[시아가 위험해.]


나는 인하에게 언성을 높이려다 말고 멈칫했다. 왜 또다시 시아의 이름이 거론되는 거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정차미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그렇다면 왜 시아가 위험해진다는 거야?]
[그 녀석한테는 또 다른 인질이 필요할 테니까.]


인하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정차미는 너라는 인질을 잃고 나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 줄 총알받이가 없어졌어. 그래서 우리 조직이 급습해 오기 전에, 또 다른 인질을 붙잡아 둘 필요성을 느낄 거야.]


그래서 다음으로 노리는 게, 인하와 가까운 또 다른 인물인 시아라는 말일까.


[너랑 같이 있을 때 시아가 범행에 관계되어 있다고 한 것도, 아마 자연스럽게 두 번째 인질로 포섭하려고 지어낸 이야기겠지. 영악하달까,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 해야 할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젠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지금부터 정차미를 붙잡으러 시아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줘.]
[야, 잠깐. 네 멋대로 결정하지 마!]


나는 참다 참다 악에 받쳐 빽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와서 너한테 다 맡겨놓고, 나는 손 놓고 기다리라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류서영.]


지금껏 듣지 못했던,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로 인하는 내 말을 잘랐다.


[이건 이제 장난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도 장난이라 생각 안 해.]


사람이 수십명씩 쓰러지는 광경을 봐 왔다. 나라고 어중간한 각오로 이런 사건에 뛰어든 건 아니다.

[하지만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데?]
[…….]
[도움이 되지 않을 바에야,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할 때도 있는 거야.]


인하는 그 말을 끝으로,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서넛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나타나 내 팔을 꺾어 움직임을 봉했다. 개중 한명이, 손수건 같은 것을 내 코와 입에 억지로 갖다 댄다. 수면제, 혹은 신경 마비제. 약 기운에 저항하려 했으나, 야속한 눈꺼풀은 스스로 감겼다.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인하가 쓴 웃음을 지으며 내게 등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해. 이런 거친 방식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인하 너는…….]
[걱정 마. 너희는 반드시,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언젠가 겪었던 일처럼,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의식을 억지로 일깨우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순식간에 며칠이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약을 쓴 건지, 아직까지 약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난 뭐하고 있는 거야 대체…….]


폐 공장 안의 어느 깜깜한 방 안. 그 검은 옷 인간들에게 잠재워졌다가 깨어나니 이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보고, 방문을 쾅쾅 두드리고 걷어 차보고 했으나 지금까지 누구도 내 소란에 반응하지 않았다. 인하가 말한 대로, 다들 이곳을 떠나 정차미를 붙잡으러 간 걸까. 물론 완전히 사람이 없는 건 아닌지, 특정 시간마다 방문 밑의 조그만 문을 통해 식사만 툭 던져주기도 한다. 그때를 노려 소리를 지르거나 무언가를 묻거나 해도 철저히 무시하지만.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일까. 인하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인하라면 정차미를 붙잡을 수 있을 테고, 시아를 상처 없이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사태는 해결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 일도 없다. 하지만 목구멍에 무언가 끼어 있는 것만 같은 답답한 느낌은 가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간 계속 이 곳에 갇혀 생각을 해보니, 내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잘 생각을 해보면, 애초에 내가 이런 일에 끼어든 이유라는 것도 대단치도 않은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사건에 대해 분노하여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도 아니다. 대의를 위한 것도, 정당함을 따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제는 스스로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인정 할 수 있었다.
내가 운이 좋다는 것 때문에 느낀 죄책감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이것도 나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겉치레 변명일 뿐이다. 내가 이런 사건에 뛰어들게 된 건 더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내 주위의 평화를 위해, 내 조그만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


결국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다. 나는 정차미와 함께 돌아다니며 수많은 의식불명 환자를 보았으나,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 속에 조그만 안도감을 느꼈었다.
아아, 인하가, 시아가, 안수이 선생님이 아니라 다행이다.
자조어린 쓴웃음만이 내 입가에 비릿하게 퍼졌다.
이런 이기적인 이유로 끼어드는 건, 비겁하겠지. 나는 인하와 같은 강인한 신체능력도, 정의감도 없다. 안수이 선생님과 같은 천재적 재능도, 헌신적 사랑도 없다. 심지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정차미와 같은 각오조차 없다.
이런 겁쟁이에, 비겁한 내가 끼어들어봐야 좋아할 사람 따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과열되어있던 머리에서 생각을 멈춘다. 인하 말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 바에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난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어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내가 ‘인형’이었을 무렵 들었던 목소리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동적으로 살았던 ‘인형’.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그 무엇을 위해서도 살지 않았던, 죽어있는 것만 같던 시절. 지금의 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XXX, 너는 이대로도 괜찮겠어?’


또 다시 들렸다. 이 목소리. 이번에야말로 기억해냈다. 어른인 주제에 어린 아이처럼 꿈에 차 있던 철없는 그 사람. ‘선생님’이다.
왜 지금 와서 그 사람의 말이 떠오른 것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그 사람의 말을 다시 되뇌어본다.
나는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인하에게 모든 걸 맡기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이라는 것도, 내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내 이기적인 이유조차 전부 제쳐놓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괜찮지 않다. 아니, 오히려 불만투성이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에는 내가 내 의지로 개입한 것이다. 정차미와 가까워 진 것도 나 때문이다. 책임과 의무 모두 내게 있다.
자잘한 이유따위는 지금만큼은 잊는다. 비겁하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그런 건 지금 잊는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내 손으로 직접 이 사건의 결말을 낸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누군가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지킨다.


그렇게 결심하자, 우선 떠오른 건 시아였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도, 인하도, 심지어 정차미까지 없어진 이 상황에 떨면서 혼자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번에 말실수로 상처 입혔던 일도 아직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그녀가, 더 이상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전화나 문자라도 한통 넣을까, 하다가 스스로 비웃었다. 이런 비밀조직 같은 곳에서 내 몸 수색 한 번 안했을 리가 없다.
내 휴대전화나 발목에 숨겨둔 호신 용품 같은 건 벌써…….


‘위잉’


가벼운 진동에, 내 예상도 산산조각 났다. 진동의 출처는 내 교복 재킷 안주머니. 그 안에는 떡하니 휴대전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하가 요원들한테 명령을 내려 몸수색을 하지 않은 건지, 단순히 찾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운이 좋다’ 해야겠지.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휴대전화를 꺼내 방금 전 울린 진동의 출처를 확인했다. 열자마자 기겁했다. 부재중 전화 87통, 문자 93통. 문자를 확인해 보니 다섯 통 정도는 인하, 일곱 통은 학교 친구들, 열 통은 안수이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시아였다.
문자를 하나하나 확인해 본다. 첫 문자. ‘죽을래?’ 심각한 분위기였던 것도 잊고 풋 웃고 말았다. 귓가에 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 번째, ‘야 장난해?’. 세 번째, ‘문자 계속 씹을래?’ 뒤로 갈 수록 더 심한 폭언과 육두문자가 섞여 있어 쓴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가면 갈 수록, 그 거친 면모는 사라져갔다.


‘지금 어디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연락 좀 줘……제발.’


마음 한 구석이 미어지는 것 같다. 며칠간 이 폐 공장에 갇혀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을 때, 시아는 계속해서 걱정하고 있었겠지. 그렇게 계속 문자를 확인하다, 방금 전 도착한 마지막 문자를 눈에 담는다.


‘도와줘…….’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신기하게도 그 마지막 문자 한 통에 축 처져있던 몸 곳곳에 힘이 돌아왔다. 의욕이 생기자 신체의 엔진이 점화되면서 구석구석에 에너지가 공급되는 느낌이었다. 우선 이곳을 탈출하자. 그것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선결과제였다.
인하가 나를 여기에 데려온 것은 아마 배려를 위해서겠지.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건 역시 내 적성엔 안 맞았다. 인하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에 계속 머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선 내 소지품을 확인한다. 우선 휴대전화와 항상 교복 앞주머니에 넣어놓는 수첩과 펜. 그리고 목에 차고 다니는 회중시계. 또…… 정차미에게 호신용으로 받았던 손바닥만 한 주머니칼. 그 외로, 입이 심심할 때 먹으려 넣어둔 알사탕이나, 어떤 편지 같은 것 등 잡다한 것. 영화 속의 첩보 요원이라면 넘치도록 충분한 소지품일지 모르나, 지금의 내게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진다.


다시 휴대전화를 든다. 경찰한테 기대려는 만큼 나도 무르지는 않다. 아마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바쁜 와중인데 인력을 내줄 수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이런 비현실적인 사태에 경찰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금 반칙을 쓰기로 결심했다.


최신 통화목록 중, 부재중 전화 87통 이전의 목록을 뒤져본다. 아슬아슬하게, ‘운 좋게도’ 그 녀석과의 통화 내역이 남아있었다. 곧바로 전화를 건다. 요란스러운 착신 멜로디가 끊기고, 그 녀석의 활달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화 주셔서 감사 합니다- 관심 있는 여학생의 비밀이든, 다음 차수 복권의 당첨 번호든, 인류 종말까지 남은 시간이든- 혹은, 정체불명의 조직 아지트인 폐 공장에서의 탈출 방법이든 무엇이든 가르쳐드리는 FT 정보업체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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