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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토커와 결혼해버렸다. by 자리끼

학창시절 스토커와 같은 여자아이와 만나 어쩌다보니 연해하게 되고 결국은 결혼까지 하게 된 한 남자. 아니 이제는 가장이 된 그는 아내를 빼닮은 딸까지 낳고 3명이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자 했으나, 그 3명이서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이상 조용할 수가 없는 매일매일, 그런 시끌벅적한 가족이야기.

[러브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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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4    추천 1   덧글 1    / 2013.12.23 04:46:27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하는 나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저는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당신은 제 반쪽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반쪽은 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개학까지 13. 영은이와 조우한다.

비는 거세게 내려 마치 창과 같이 느껴진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면 혹시나 손이 베이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다.

하지만 그 한 가운데에 김영은은 서있다. 설령 진짜 창이였더라도 그녀를 물러서게 만들진 못하리라.

랑이야, 먼저 집에 가.”

나는 랑이에게 우산을 넘기며 말한다. 랑이를 내 등 뒤에 숨기고 영은이와 마주한다.

우산 밖으로 한 걸음. 영은이와 같은 공간에 들어선다. 머리에, 어깨에, 몸에 빗방울이 부딪힐 때마다, 그 무게가 느껴진다. 하지만 별로 아프진 않다.

창 같아서 베일 것 같다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떤 거 같다.

내가 잠깐 쟤랑 할 얘기가 있어가지고 말이야. 먼저 들어가.”

갑자기 닥쳐온 알 수 없는 상황에 랑이의 의식은 아직 따라오지 못했는지, 그저 지금 상황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 저기, 선배는요?”

난 잠깐 얘기할 게 있다니까.”

이 우산 선배 것인데.”

나중에 돌려주면 되니까, 빨리 가.”

오빠, 그 년 가면 안돼요. 이리로 보내요.”

영은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다. 이 거센 폭우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 너 자꾸 왜 그래. 랑이는 아무 상관없잖아.”

버럭 소리 지르려는 것을 억지로 짓누른다.

랑이 앞이다. 여기서 소리 질러봤자 불안감만 줄 뿐, 득될 게 하나 없다.

? 왜 상관이 없어요?”

영은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 년이 오빠 곁에 있잖아요. 저보다 오빠하고 가까이에 있잖아요. 근데 왜 상관이 없는 거예요?”

......!!”

튀어나오려는 고함을 꾸역꾸역 다시 밀어 넣는다.

랑이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평온한 척 가장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참기 힘들다.

나는 어금니를 강하게 문 상태로 랑이를 재촉한다.

랑이야, 쟤 말 듣지 말고 어서 집에 가.”

저 사람 누군데요?”

알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찰라, 랑이의 눈동자를 봤다. 내가 걱정된다는 그런 간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알려주기도 싫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던 나지만 그 눈빛을 보자니 아무래도 랑이한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전 여자친구.”

“....... 그러면 여긴 제가 낄 자리가 아니네요.”

랑이는 걱정과 쓸쓸함이 뒤섞인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내 셔츠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선배, 다음 주 화요........”

그 손 당장 떼!!!!!”

영은이가 소리친다. 늑대가 포효하는 것 같은 위협의 외침.

오빠한테 손대지 마!! 그 손 당장 떼!!! 그 손 체로 떨어트려버리기 전에 당장!!!”

랑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오빠하고 단둘이 있으려고 오빠가 너한테 말 거는 것도 간신히 참고 조용히 있었더니 말이야!!”

영은이는 지금의 폭우보다 더 거세게 화를 내며 말했다.

오빠도 너보고 집에 가라고 하잖아. ? 그러면? 오빠도 나랑 단둘이 있고 싶다는 얘기인가? ........ 히히히힉, 그래 그런 거야, 그런 게 틀림없어!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으신 거야, 그래, 오빠도 나랑 단둘이서. 히히히히힉

영은이는 지금의 폭우보다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오락가락하는 영은이. 지금의 영은이 상태가 어떤지 이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랑이부터 돌려보내고자

다음 주 화요일에 방송실에서 만나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지 랑이야?”

라고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다음 주에 만나자.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

랑이는 발이 떨어지질 않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 우산 가지러 꼭 오셔야 해요.”

라고 말하고는 등을 돌려 이 골목을 떠났다.

드디어 이 골목에는 나와 영은이만 남았다.

오빠, 사랑해요.”

아무 맥락없는 말을 입에 담는 영은이.

오빠,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는다는 것은 기분 좋아해야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심기가 불편해진다.

무슨 소리세요. 저는 항상 이 말을 오빠에게 하고 싶었어요. 오빠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줄곧, 계속.”

영은이는 기도하듯이 양손을 모으고 입술을 그 손에 대고선 오빠에게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어요.” 라고 중얼거린다.

만약 사람이 본다면 신에게 기도드리는 수녀와 같아 보일 모습이다.

김영은.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왜 나타난 거야? 갑자기 왜 나타난 거냐고.”

무슨 소리세요, 오빠? 남자친구를 만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이제 랑이는 없다. 나는 이를 바득 갈며 소리쳤다.

누가 네 남자친구야!!! 난 더 이상 네 애인이 아니야! 이제 우리는 남남이라고, 남남!!”

내 말에 영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오빠, 그러면 아까 그 년한테 말한 전 여자친구라는 말이 진심이었던 거였어요?”

진심이다.”

왜요?”

? ?”

황당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 몰라서 묻는 거예요!!!”

영은이가 소리쳤다. 마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인가.

왜요? 왜 헤어진 거예요, 저희? 진짜 왜요? 오빠 그 동안 저한테서 많이 받아갔잖아요, 지금까지 계속 받아갔잖아요.”

지금 영은이는 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 폭우 속에서 눈물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방학식 다음 날, 어머님이 오빠 밥하는 거 깜박하시고 외출하셔서 제가 대신 밥 차려놨어요. 맛있게 잘 드셨잖아요. 2주전 토요일, 오빠가 방 청소하기 귀찮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몰래 가서 대신 치워드렸어요. 오빠는 어머님께서 하신 줄 아셨겠지만 제가 한 거였어요. 오빠한테 힘든 일시키기 싫었어요. 그래서 편해하셨잖아요. 저번 주 수요일, 오빠가 제육볶음 먹고 싶다고 어머님한테 말씀드렸잖아요. 근데 그거 아세요? 어머님이 시장에서 사간 돼지고기가 너무 싸구려인 거예요. 아무래도 어머님은 싸서 사셨겠지만 저는 그런 싸구려 고기 오빠한테 먹이고 싶지 않아서 어머님 몰래 좋은 고기로 바꿔놨어요. 그래서 그 날 오빠가 제육볶음 맛있다고 소리치셨잖아요. 그거 제가 고기를 좋은 걸로 바꿔서 그런 거라니까요, 오빠. 그리고 저번 주 일요일, 어머님 아버님 둘 다 출근하셔서 오빠가 먹을 밥이 없길래, 제가 다 차려놨어요. 오빠는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에서 그냥 꺼내 드셨겠지만 그거 제가 준비한 거예요. 웬만하면 직접 차려주기까지 하고 싶었지만 오빠가 놀라실까봐, 그냥 음식들만 만들어 놨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오빠가 항상 치우지 않는 책상. 정리하지 않는 옷장. 정돈되지 않은 서랍. 가구 밑에 있어 치우지 않는 먼지와 쓰레기, 등등. 그 동안 제가 다 해드렸어요. 오빠한테 도움이 되려고 제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시겠어요? 저는 이렇게나 오빠를 사랑해요, 근데 왜 헤어지는 거예요? ?”

경악했다. 소름이 돋는다.

카메라를 발견하고 영은이가 우리 집을 훔쳐보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숨겨진 사실에 놀란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니, 영은이가 말을 잇는다.

? 왜 헤어지는 거예요. 오빠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전 정말 오빠를 위해 모든 걸 바칠 거예요.”

지금 영은이의 모습은 흡사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죽기 전에 신에게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방금 그 여자 때문이에요? 그 노랑이라는 계집애.”

또 다시 랑이가 표적이 되는 것 같아 나는 부정한다.

걔는 아무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냐니까요? 요즘 오빠 저한테는 소홀하시면서 저 년이랑은 친하게 지내시잖아요. 쟤가 뭔데요? 오빠한테 뭔데요? 그 년이 오빠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요?”

영은이는 긴박한 목소리로 소리 지른다.

제가!!! 제가!!! 제가 그 년보다 오빠한테 잘 해줄 수 있어요!!!”

영은이가 조금씩 나에게 다가온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길고양이를 만지러 접근하는 듯한 걸음걸이처럼 조심히.

뭘 원하시는 건데요? ? 저 돈 많아요, 오빠. 저 집에 돈 꽤 있어요. 저 혼자 살잖아요. 근데 돈이 많아요, 저 그 돈 쓸데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남아요. 오빠한테 다 드릴 수 있어요. 돈을 원하신다면 제가 드릴게요. 저 장담해요, 나중에 사회 나가서도 돈 잘 벌 자신 있어요. 진짜예요. 나중에 제가 다 일해서 오빠 먹여 살릴게요, 오빠는 아무것도 안하셔도 돼요, 돈은 제가 벌어올게요. 분명 오빠가 만족스러워하실 만큼 벌어올 수 있어요. 오빠가 돈으로 쪼달리지 않게 만들겠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오빠는 그냥 제 곁에만 있어주세요.”

“........”

사랑을 원하세요? 이건 말할 필요도 없잖아요, 제가 세상에서 오빠를 제일 사랑해요. 오빠도 아실 거 아니에요. 저만큼 오빠를 사랑할 여자가 세상에 또 있다고 생각하세요? ? 누구랑 비교해도 제 사랑이 뒤처지진 않아요. 왜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적 만남이라는 거 있잖아요. 그게 저희예요.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요. 제 운명의 남자는 오빠뿐이에요. 제 사랑을 받아줄 남자는 오빠뿐이라고요.”

“........”

예쁜 애인을 원하시는 거예요? 오빠, 저 예뻐요. 인기도 많아요. 저 여태껏 고백도 많이 받아봤어요. 오빠와 사귀기 전부터 많은 남자들이 제 외견을 보고 사귀자고 했다고요. 심지어 오빠랑 사귀고 있을 때도, 남자들이 벌레처럼 꼬였다니까요. 저랑 대화해보지도 않고 저랑 어울려보지도 않고 제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들이 그저 제 겉모습만 보고 사귀자고 한 거라고요. 저 예쁜 편이라고요, 오빠. , 제 키가 작아서 그러세요? 이 정도면 괜찮잖아요. 전 여자예요. 저는 제 키가 플러스 요소가 됐으면 됐지 마이너스 요소가 된 적은 없어요. 오히려 모두 좋아했다고요. 그리고 오빠보다 키 크면 그게 더 별로잖아요. 오빠 옆에 나란히 설 때는 이 정도 키가 적당하다고요.”

“........”

그러면....... 그러면 뭐예요? 뭐가 부족한데요? 혹시, ? 몸을 원하시는 거예요?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오빠. 제가 항상 말씀드렸잖아요. 전 오빠한테 모든 걸 드릴 거라니까요. 저 몸매도 좋아요. 군살 하나 없고, 키는 작지만 비율이 좋아요. 그 노랑이라는 년보다 오빠를 더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어요. 아니, 저만이 오빠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오빠가 어떤 요구를 하던 저는 기쁘게 받아드릴 수 있어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저는 그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아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든 저는 다 좋아요. 설령 지금 여기서 라고 해도!!!!!”

“.........”

영은이는 바로 내 앞까지 당도했다. 이제 우리 사이에 거리는 3cm도 남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 부딪힐 거리다.

영은이는 울먹이며 말한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비에 섞여 바닥에 떨어진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으니까 드디어 그녀가 울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울고 있다는 사실 여부조차도 이렇게 가까워야 알 수 있다. 내가 영은이의 마음을 제대로 알려면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 걸까.

제발....... 제발....... 말해주세요, 제가 뭐가 부족해요. ?”

“....... 나한테 뭐든 줄 수 있다고?”

. 뭐든지 줄 수 있어요.”

나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 제가 다 알아서 할 게요.”

그저 네 곁에만 있어달라고?”

, 다른 건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그저 제 곁에만 있어주세요.”

나는 영은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영은이의 표정이 환해졌지만....... 그건 순간이다.

그런 건, 연인 사이의 관계가 아니야. 아니 그런 것 이전에, 사람 사이의 관계조차 아니야.”

내 말에 영은이 주위에 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영은이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물었다.

그럼...... 그러면, 어떤 게 사람 사이의 관계인 거예요....... 뭐가, 연인 사이의 관계인 건데요.”

나는 영은이의 어깨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른다고.”

그리고 영은이를 밀쳤다.

하지만.”

영은이는 쓰러졌다. 밑에 물웅덩이가 있었지만 어차피 다 젖은 몸, 어디 떨어져도 똑같다.

네가 틀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

나는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빗소리에 섞여 영은이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들려왔지만 강한 폭우 탓에 점차 소리가 지워진다.

폭우한테 감사할 일이다.

 

 

괴롭습니다.

힘겹습니다.

당신을 부를 때 저는 온 힘을 다해 부릅니다.

혹여나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봐.

당신을 생각할 때 저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생각합니다.

혹여나 내 머릿속에서라도 당신에게 소홀할까봐.

저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 사랑에 보답해주지 않습니다.

개학까지 12일 아침. 감기에 걸렸다.

아이구, 아이구.”

숨 쉬기가 힘들다. 이미 코로 숨 쉬는 건 포기하고 입으로 숨을 내쉬고 있다. 너무 추워서 여름 이불은 잠깐 치우고 장롱에서 겨울 이불을 꺼내서 덮고 있다.

아무래도 어제 비에 홀딱 젖은 게 원인인 모양이다. 아니 그것 빼고 이렇게 몸살에 걸릴만한 이유가 없다.

지금 집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 부모님은 모두 외출. 밥은 먹었고 약까지 먹었으니 이제 자는 것만 남았으므로 부모님은 볼 일 보러 가신 거다.

이게 만약에 일본 만화였다면 감기 하나 걸린 거 가지고도 머리에 수건을 놓고, 뜨거운 죽을 끓여주고, 몸에 땀을 닦아주고, 옆에서 간병해주고, 친구들이 병문안을 와주고 그러겠지만.

역시 그건 만화, 현실에서 그런 건 볼 수 없다. 그냥 밥 먹고 약 먹고 이불에 누워서 자는 게 끝. 감기 하나에 죽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면서 간병까지 와 줄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솔직히 이정도만 해도 감기는 뚝딱 낫는다. 뭐가 더 필요하리.

하지만 지금 나는 이 감기가 솔직히 조금 마음에 든다.

잠에 들어도 아파서 중간, 중간 깨버리지만, 그래도....... 악몽을 꾸지는 않는다.

아픈 상태에서 자는 것이라 그런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기절하듯이 잠에 빠진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 꿈도 꾸지 않는다, 물론 악몽도.

내가 멀쩡한 상태였더라면 어제의 일에 대해서 끙끙대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아마 감기가 다 나으면 그 후부터라도 끙끙댈 게 틀림없다. 그저 시간벌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이라도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다.

그러니 지금은 자자.......

 

휴식은 잠깐이었다.

나는 휴대폰 메시지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약발을 잘 받았는지, 머리는 가벼워졌고 쑤셨던 몸도 말끔해졌다.

어두운 방 속에 휴대폰을 여니 액정에서 나오는 빛이 눈 부셔서 잠깐 눈을 찌푸렸다. 곧바로 눈은 빛에 익숙해졌고 액정에 떠오르는 글자를 읽고는 다시 눈을 찌푸렸다.

[지금 학교 옥상으로 와주세요.]

예전에 전화번호를 삭제했지만 저 번호가 누구 것인지 잊을 리는 없다.

몸도 개운해졌겠다. 나는 이불에서 나와 옷을 챙겼다.

이제 이 일도 끝맺어야하겠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증오합니다.

저주합니다.

차가운 내 손을 포근히 감싸주던 그 손은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떠나버린 그 손을 돌려받기 위해 칼을 꺼냅니다.

세상 어느 꽃보다 아름답던 그 미소는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사라진 그 미소를 되찾기 위해 칼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당신이 다치는 모습은 보기 싫습니다.

그러니

이 칼이 향하는 곳은 제 목덜미........ 저를 잊지말아주세요.

 

개학까지 12일 밤. 영은이가.......

적어도 내가 다녔던 학교 중, 옥상을 개방해놓는 학교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옥상에 오라는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역시 괜한 의심이었다.

학교에 가보니, 이런 밤중이라면 잠겨있을 후문이 열려있다. 분명 영은이가 한 짓일 테지. 열려있는 후문으로 학교에 들어가니 나를 안내하듯이 대놓고 학교 문이 열려있었다. 그 친절한 안내를 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가 옥상으로 향한다.

평소에 자물쇠로 잠겨있던 옥상 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열려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밤바람. 그 밤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옥상으로 나가니, 영은이가 있다.

영은이는 내 쪽에 등을 보인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원래 이런 장면에서는 하늘에 별이 가득하고 달은 환하게 빛나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원하는 대로 사정이 돌아가진 않네요.”

영은이 말대로, 하늘에 별이라고는 잘 찾아봐도 한 개. 달은 구름에 가려져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어두운 느낌의 밤이다.

저 열심히 생각해봤어요. 오빠가 말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뭐일까 하고요. 정말 머리 싸매고 열심히 고민해봤어요.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어요.”

영은이는 뒤돌아 얼굴을 보여줬다. 어두워서 그런 것일까? 지금 영은이의 표정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던 중 한 가지는 알아채고 말았어요.”

영은이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오빠도 모르는 걸, 나 같은 여자가 어찌 알겠냐는 걸요.”

또 다시 한 걸음 뒤로.

저는 그 답을 알아내서 오빠한테 알려주고 그러면 오빠가 다시 저랑 만나줄 거라 생각해서 열심히 생각해봤던 건데.”

또 한 걸음 뒤로.

결국 알아낸 건, 제가 알아낼 수 없다는 것뿐이었어요.”

한 걸음 뒤로.......

오빠. 저는 오빠가 첫 번째로 고백한 여자가 맞죠?”

영은이의 물음에 나는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저는 오빠의 첫 번째 연인이 맞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첫 번째로 고백 받아본 여자는 아니죠?”

끄덕인다.

하하하.”

영은이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진 않는 웃음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나한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뒤이어 영은이가 계속해서 말할 거라는 것을 분위기로 알 수 있었으니까.

저는 그 때, 그 때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들을 열심히 노력해왔는데....... 그 선택들이 틀렸던 걸까요? 항상 열심히 했는데.”

거센 바람이 분다. 바람에 밀려 내가 들어왔던 문이 쾅하고 닫힌다.

하지만 저 진짜로 오빠를 사랑해요. 이 마음에 거짓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오빠가 알아주셨으면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제 욕심인 거 같아요.”

영은이는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진 않는 미소다.

오빠, 이런 욕심쟁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영은이는 검지 손가락을 세우면 딱 하나 만요.” 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항상 오빠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저를 위한 거였어요. 오빠 일을 거들면서 나는 오빠한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자기만족하고....... 그런 주제에 오빠를 위해서였다고 하다니, 저 참 위선자죠.”

순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제 마지막 부탁은 오빠의 새로운 첫 번째가 되는 거예요.”

영은이가 난간 위로 올라갔다.

오빠 머릿속에서 절대 잊히지 않는 첫 번째 여자가 되는 것.”

나는 영은이가 무슨 짓을 벌이질 단박에 알아챘다.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을 때,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위선자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말 하지 않을게요.”

아니다, 분명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는 설마라고 생각했고 그 가능성을 무시했다.

제 솔직한 감정을 말할게요.”

학교 옥상은 아예 문이 잠겨있기 때문에 옥상에서 떨어질 때를 대비한 철책은 구비되어있지 않다.

사랑해요, 오빠.”

나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역시....... 늦었다.

 

저를 잊지말아주세요.”

 

영은이가........

떨어졌다.

영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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