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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토커와 결혼해버렸다. by 자리끼

학창시절 스토커와 같은 여자아이와 만나 어쩌다보니 연해하게 되고 결국은 결혼까지 하게 된 한 남자. 아니 이제는 가장이 된 그는 아내를 빼닮은 딸까지 낳고 3명이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자 했으나, 그 3명이서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이상 조용할 수가 없는 매일매일, 그런 시끌벅적한 가족이야기.

[러브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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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16    추천 1   덧글 2    / 2013.12.30 00:23:28

당연한 결과지만 역시나라고 할까. 난리가 났다.

여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떨어진 것이다. 경찰, 기자, 학교 관계자들 모두가 달려들었다. 잠겨있는 학교 옥상 문을 따서 들어간 다음 떨어진 것이다. 누가 봐도 자살시도.

특히나 영은이는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다. 우등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국내대회에서는 탑클래스에 들어간다. 게다가....... 부모님을 여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아마 기자들은 이런 기사를 내고 싶었던 것이겠지. [국내 대회에서도 여러 수상경력이 있는 수재의 김양. 가족 잃은 슬픔에 못 이겨......] 같은 거.

참 나....... 진짜 역겹다.

하지만 오히려 이 요소가 도움이 된 것도 있다. 학교 측에서는 이런 영은이의 자살소동이 멀리까지 퍼지는 걸 원치 않기에, 필사적으로 소문을 막았다. 애초에 큰 신문사들이 온 게 아니기에, (수재라고 해봐야, 그저 흔한 학생 한 명. 커다란 신문사는 오지 않았다.) 몇몇은 입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다 막을 순 없어서, 인터넷을 검색한다면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도 참 많이 힘들었다. 나는 바로 경찰서에 끌려갔으니까. 증인으로 간 게 아니야, 가해자로 간 거지. 당연한 수순이지. 예쁘고 똑똑하고 한창인 여자애가 갑자기 자살이라니? 그리고 그 장소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나니까.

별별 질문을 다 받았지. 간단한 신원조사부터 시작해서 세밀한 상황까지 다. 하지만 그 중에서 경찰들이 가장 주목한 게 뭔지 알아? 나와 영은이의 관계.

형사님이 김영은 학생과는 무슨 사이야?”라고 물으셔서 전 남자친구입니다.”라고 답하니까, 갑자기 엄청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변하시더라고. 그리고선 왜 헤어졌는데?”라 묻길래, 개인적인 사정인데, 그걸 꼭 말해야하냐고 하니까. “그 사정이 이 소동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라는 거야. 거기서 느낌이 확하고 오더라고.

, 이 형사님. 내가 헤어진 것에 대한 복수로 영은이를 떨어트렸다고 생각하는구나.

솔직히 조금 화가 났어, 나를 그렇게 봤다는 거에. 그런데 또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더라고. 영은이가 나한테 엄청나게 매달려서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거지, 다른 사람이 보면 영은이와 나 사이의 차이는 확실하거든. 그 형사님 생각도 이해가 되긴 했어 하지만 그래도 화는 나잖아? 그래서 말했지.

저기요.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지 훤히 다 보이거든요? 확실히 말씀드리겠는데, 제가 찬 겁니다. 제가 헤어지자고 한 거라고요. 어차피 지금 이렇게 말해도 안 믿어주시겠지만 조금 있다가 사실이 다 밝혀지면 알겠죠. , 경찰이 사건을 제대로 밝혀냈을 때의 얘기지만요.”

건방지지? 솔직히 나도 말하면서 다리가 떨리고 말하고 나서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했어. 무섭잖아, 경찰한테 그런 막말을 했으니. 하지만 역시 형사님이더라고 이런 어린애 도발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는 프로셨고 뭣보다 어른이셨어. 내 말에 잠깐은 멈칫하셨지만 아무 말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시더라고.

그리고 별로 안 있어서 내 무죄는 밝혀졌어. 학교 CCTV에 영은이가 찍혔거든. 학교 내에는 학생들의 사생활인가 뭔가를 위해 CCTV가 없지만 바깥에는 있거든. 건물 안에 없는 거지, 학교 내에 없는 건 아니니까.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CCTV에 나온 영은이가 뭘 했는지 알아?

스케치북에 글을 써서 메시지를 남겨놨더라. 내용은 이래.

 

[저는 지금 옥상에 올라갑니다.]

[누구의 부탁이나 요구, 협박을 받은 게 아닌, 제 의지로 올라가는 겁니다.]

[아마, 아니 확실히 사건 하나가 일어날 거예요.]

[그 사건의 원인은 바로 저에게 있습니다.]

[뒤이어 한 남자가 옥상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러니 애꿎은 사람을 책하지 말아주세요.]

[이상입니다.]

 

영은이는 내가 범인으로 몰리는 걸 대비해서 저렇게 메시지까지 남겨놨더라. 대단하지, 자살을 시도하려는 녀석이 저렇게까지 주위사정 다 살피다니 말이야.

너희들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범인으로 안 몰려서 다행이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슬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 걸?

뭐 네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뭐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 근데 내 생각은 어떠냐면.

, 엿 같다.

이거야. 진짜, 엿 같아. 다른 여러 감정들도 있지 당연히. 근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이 말이더라고, 엿 같다.

이런 대비까지 해주면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자기 딴에는 또 날 배려한답시고 한 거겠지? , , 내가 피해입기를 원치 않는다, 뭐 이런 건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이 난다, 웃음이!!!!!!

 

애초에 뛰어내리질 말라고, 씨발!!!!!!!!!!!!!

 

? 잊지말아달라고? 내 앞에서 자살시도를 하면서 잊지 말라고, 말하다니 얼마나 이기적인 거야, 이년은!!!!! 미친년이잖아, 이건!!!!!!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거 같냐? 감사할 거 같아? 아주 엿 같다고!!!! 네 이런 배려가 아주 역겹다고!!!!

하아, 하아......... 미안, 내가 좀 흥분했네. 뭐 흥분할만한 일이기도 하잖아? 그치?

그러면 현재. 나는 뭐하고 있냐고?

, 그런 걸 궁금해 해. 그래도 굳이 알려주자면, 나는 지금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어.

? 뭘 고민하냐고?

사실 영은이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계속 귓속을 맴돌아서 말이야. 그거 때문에 내가 좀 힘들어.

? ‘잊지말아주세요.’란 말이 그렇게 귓속을 맴도냐고? 아니야, 아니야. 그 말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뭣보다 그건 마지막 말이 아니라 마지막 전 말이잖아.

~. 너희는 모르는구나. 뭐야, 이것부터 가르쳐줘야 하나.

나 영은이가 뛰어내리려할 때,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달려들었잖아. 뭐 늦기는 했지만 그...... 볼 수는 있었어, 영은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볼만한 모습이 아니지. 그런데 잊지는 못 하겠고 말이야. 키키킥, 결국 영은이 부탁은 들어준 건가.

쨌든, 내가 봤거든. 아니, 들었다고 해야 하나. 영은이가 떨어지면서 한 마디, 하더라고. 그게 진짜 마지막 말인 거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 말 때문에 죽을 거 같은 거고.

무슨 말인지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참나, 그래도 나한테는 아픈 기억인데, 막 말하네.

무척 짧은 말인데다가 그렇게 특별한 말도 아니야, 기대했다가 손해 본다고. 그래도 나한테만은 강렬한 말이었지만. 영은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떨어졌어.

 

엄마, 아빠.

 

 

개학까지 10.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에 별 일이 다 있다. 너무 거짓말 같은 말들이라 믿지 않은 그런 일들이 실제로 세상 곳곳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가령, 자판기에서 거스름돈이 안 나왔다고 자판기를 발로 차다, 반동으로 쓰러진 자판기에 깔려 죽은 남자.

정말 황당한 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 이런 일이 있나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있던 일.

, 이런 일도 있다. 아기가 잠든 사이 빨리 장을 보려 나간 엄마. 하지만 그 잠시 동안에 아기는 깼고 엄마를 찾으려 돌아다니던 아이는 베란다에서 떨어졌다. 아이가 떨어진 곳은 아파트 10.

하지만 신의 장난이지 구원인지 아기는 살았다. 아파트 10층이라면 엄청난 높이다. 하지만 거기서 다 큰 성인도 아니고 아직 기어 다니는 아기가 떨어졌는데도 살아남다니, 정말 놀랄 일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해도 되려나, 영은이도 살아있다.

주위 말에 의하면 어제 내린 폭우를 운동장의 흙들이 다 흡수해서 평소 때보다는 부드러웠다나 뭐라나.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상황이 어떻고 뭐든 간에 거기서 떨어졌는데, 살아있는 거면 그냥 기적이다. 그 때의 요건이 이랬네, 저랬네 떠들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 영은이는 지금 혼수상태이다.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의사선생님이 말해주셨지만 잠에선 깨어나질 않고 있다. 아무래도 떨어질 때, 머리에 충격이 갔다나 보다.

지금의 영은이는 그저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숨만 쉬고 있다. 팔에 링거를 꽂고 코에 이상한 호스를 달고 그저 잠을 자고 있다.

영은이가 무슨 어디의 재벌도 아니기에 병실은 2인실이다. 병원까지의 수속은 영은이의 법적 보호자인 아저씨가 해주셨다. 물론 돈까지도. 아저씨 말로는 영은이가 깨어나면 다 받을 거니까 걱정마라고 하셨다. 그 말 속에서 영은이가 무사히 깨어났으면 하는 아저씨의 마음이 느껴져, 괜히 나까지 가슴이 아파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영은이 옆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내가 뭘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저 이것저것,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식으로 생각에 잠겨있다.

아무래도 그런 일이 있다 보니 혼란에 잠겨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단 하나 맴도는 말이 있다.

엄마, 아빠.

이 맴도는 단어만큼이나 내 머릿속을 휘젓는 기억도 있다. 내가 감금당했을 때, 영은이가 했던 말.

오빠, 저는 고아잖아요.

이 두 가지가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날 괴롭힌다. 그래도 나는 계속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개학까지 9.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영은이 옆에 있다. 잠을 자러 집에 가고 눈을 뜨면 다시 이곳에 있다. 내가 이곳에 있을만한 명분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 자리에 있다.

사람이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 언제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아마 가장이라 손꼽히는 순간은 숨을 거두기 직전일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 또한 그렇다.

내가 의사가 아니기에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 생각이 맞는 거라면 영은이는 해리성 기억장애일 것이다. 이 기억장애를 방패삼아 영은이는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던 것이다.

아니, 방패는 나였나.

히하하.

괜히 실소가 나온다.

쨌든 영은이는 이것으로 자신이 고아이기에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런 영은이가 떨어지면서 엄마, 아빠라고 말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뻔할 뻔자이다. 나는 왜 이걸 가지고 바보같이 하루씩이나 고민했는지, 그게 더 의아할 정도이다.

영은이는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시점 직전에 속마음을 꺼낸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본심을. 자신의 진짜 감정을. 간절한 마음을.

부모님을 보고 싶다고.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부모님이 그립다고.

떨어지면서 허공을 향해 말한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있을 당시의 영은이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영은이와 사귀고 싶어 많은 대시를 했다. 학년이 달라 만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나는 꾸준히 영은이를 찾아가 말을 붙였고 우연인 척 가장하기 위해 영은이가 지나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재에게 이것저것 부탁해서 영은이와 말을 붙여볼 계기를 만들었고 고백하기로 정한 날은 가슴이 너무 떨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 된 우리였지만 연인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영은이와 나 사이의 갭도 한 몫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영은이의 가족 사랑이었다.

애써 구한 영화표를 들이밀어도 그거 다음 주에 엄마, 아빠랑 보러가기로 약속한 거라서 안돼요.” 라면서 거절당한 게 몇 번이던가. 그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식재랑 영화를 보러간 것이 몇 번이던가. 내가 먼저 일찍 끝나 영은이를 기다리면 같이 하교할 수 있지만 영은이가 먼저 끝나는 날이면 집에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셔서요.” 라면서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갔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나는 몇 번이나 영은이에게 거절당해왔는가.

솔직히 이 정도면 병적이라고 생각해도 될 지경이지만 그만큼 영은이에게는 부모님이 아주 큰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을 잃고 나서 비어버린 그 큰 부분에 나를 향한 집착을 채운 것인가?

그러면 그 집착이 왜 그렇게 강했는지도 설명이 된다.

하아~.

괜히 한 숨이 나온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아주 큰 문제고 본질적인 문제가 할 수 있지.

나보고........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이런 영은이를 위해서 뭘 해줄 수가 있나? 기껏해야 나이도 18살인 내가 뭘?

영은이의 병을 고쳐줘?

그 병으로 영은이가 버티고 있는 건데?

영은이의 부모님을 되살려줘?

지금 나랑 장난 쳐?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근데 너는 왜 영은이에 곁을 지키고 있는 거야?

나도 몰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개학까지 8. 생각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개학까지 7. 생각한다.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개학까지 6. 생각한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곧바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개학까지 5.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뭘 이리도 고민하는지 조차 잊어버릴 것만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은이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개학까지 4. 밖에 나간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지쳐, 나는 병실을 나왔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딱히 어디 갈 곳도 없기에 근처 공원에나 가자고 결심했다.

숨이나 돌려볼 거 나온 것치고는 너무나 화창한 날씨다. 이런 날씨면 밖을 거닐기에는 최고다. 역시 내 기분이 어쨌든, 주변 상황이 어떠하든, 세상은 아랑곳 않고 돌아간다.

머리 좀 비웠으면 해서 밖에 나왔지만 전혀 게워지지 않아 불쾌한 심정으로 공원에 도착했다. 날씨는 화창하지만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니라서인지 애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님들이 많이 있었다. 애들은 꺄르르 웃으며 뛰놀고 엄마들은 호호호 웃으며 수다를 떤다.

왠지 내가 있을만한 장소가 아닌 것 같아 공원을 나가려고 하는데, 길거리 화가 아저씨가 보였다.

분명 내가 전에 랑이랑 시내에 놀러갔을 때, 나와 랑이를 그려줬던 아저씨다. 주위에서 나오는 저 분위기와 꽉 눌러쓴 모자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 틀림없이 그 아저씨다.

그 때는 시내에서 봤던 아저씨가 어째서 여기에? 전철을 탄다면 그렇게까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원래 길거리 화가는 이렇게 여러 곳을 도는 건가?

밖으로 나가려던 발을 아저씨 쪽으로 돌린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발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 때 봤던 때와 똑같이 주위에 걸려있는 아저씨의 그림들은 멋있었다.

내가 주위에서 얼쩡대고 있어도 아저씨는 날 투명인간 취급하듯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체, 그저 연필을 움직이고 계시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다시 떠나려다가. 왠지 좀 아쉬워 아저씨한테 말했다.

저기, 그림 한 장만 그려주세요.”

“....... 앉아.”

간결한 대답.

아저씨 말대로 앞에 있던 의자에 앉는다. 별로 웃고 싶은 심정은 아니기에, 그저 무표정으로.

주변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얘기소리가 넘치지만 아저씨는 그저 묵묵히 연필을 움직이신다. 나도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묵묵히 본다.

분명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서 나온 건데, 이렇게 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생각들이 몰려온다. 계속해서 영은이의 엄마, 아빠.’이 말이 귓가에서 맴돈다.

아무래도 그림 그려 달라했던 건 안 좋은 선택인 것 같다.

“........ 아니야.”

갑자기 아저씨가 펜을 멈췄다.

? 뭐가 아니라고?”

지금 네가 받고 싶은 그림은 이런 게 아니야.”

? 그게 무슨 소리.......”

네 모습을 그리고 있는 내 연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 뭐라는 거야, 이 아저씨.

아저씨는 그리고 있던 그림을 꾸기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 그리는 그림은 네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야.”

아저씨의 저 말들은 내 가슴을 후벼 팠고 그게 기분 나빴다.

아저씨, 아까부터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짜증이 일었다.

뭐가, 제가 원하지 않는 그림이에요.”

괜한 화풀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저는 손님이니까, 아저씨는 그냥 그림 그려주시면 되는 거잖아요.”

말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정말 쓰레기 자식이란 걸.

아저씨가 뭔데요!!!!”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공원에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 시끌벅적하던 소리들이 다 조용해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날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에 내가 한 짓이 창피해 재빨리 다시 자리에 앉고 고개를 숙인다.

내가 뭘 한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물러날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그 시선들이 점차 줄어들자 나는 차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나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여태까지 그림자에 감쳐줘 있던 아저씨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아저씨는 외눈이었다. 뜨고 있는 건 오른쪽 눈, 왼쪽은 누가 칼로 그은 것 같은 흉터가 남아있다.

말해라.”

아저씨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네가 안고 있는 생각들을 말해 봐라.”

아까 내가 한 무례한 행동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들어주마.”

조용히 말하셨다.

외눈이라는 그 위압에 겁먹은 것일까, 아니면 아저씨의 눈빛이 날카로워 겁먹은 것일까. 아니면 내 속을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해서일까.

왜일까? 나는 어느샌가 아저씨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왜지? 그렇게까지 마음속에 담아둔 게 많았던 걸까? ? 처음 보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런 생면부지의 아저씨에게.

나는 많은 걸 털어놨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과 그 결과들. 물론 감금얘기와 자살얘기는 빼고 적당히 돌려서 말했다. 정확한 상황들을 전달하는 건 못했을 거다. 그러나 내 감정을 전달한 건 확실히 했다고 생각한다.

내 얘기를 듣는 동안 아저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솔직히 내 이야기를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셨다.

얘기를 다 하고 나면 개운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나,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놓으면 개운해질 거라고.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었나 보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니 왠지 숨이 찼다. 딱히 빨리 말한 것도 어디서 달리고 온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빴다.

“....... 기다려봐라.”

뭘 기다리라는 건가 싶었는데, 연필을 계속 움직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림이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 같다. 무슨 그림을 그리기에.

막상 다 얘기하고 보니, 왜 얘기했을까 하는 후회를 느끼며 나는 아저씨의 그림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기다렸을까.

“.......”

아무 말 없이 아저씨는 내게 그림을 내밀었다.

무슨 그림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이런 느낌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림은 어디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흔한 그림이었다.

용사가 있었고 용이 있었고 족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공주가 있었다.

그 잠시에 그렸다는 것치고 그림의 세밀함은 대단했으나 나는 왜 이 그림을 내게 보여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저씨, 갑자기 이게 뭔.......”

이게 뭐냐고 물어보려고 하니, 아저씨는 또 아무 말 없이 다음 그림을 내미셨다.

마치 만화와 같이 아까의 그림과 연결되는 그림이었다.

용사가 공주의 족쇄를 풀어주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용은 아직 물리치지 못했다.

근데....... 이게 내 얘기와 무슨 상관인가?

아저씨, 아까부터 이 그림들이 제 얘기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 아직도 모르겠냐.”

아저씨는 한심하군.” 이라 말하면서 다음 그림을 건네주셨다.

그리고 그림을 건네받은 나는.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실컷 웃었다. 정말 실컷 웃었다. 속이 후련해지도록 웃었다. 주위의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지워버릴 만큼 큰 소리로 웃었다.

아저씨께 내 얘기를 다 털어놓은 건 정말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용사는 도망쳤다. 공주의 족쇄를 풀고 혼자서 도망쳤다. 용은 건재하다. 공주를 안고 달려 나가는 것도 아니다. 공주를 묶고 있던 족쇄를 풀어줬을 뿐, 용을 무찌르지도 않았고 공주를 데려가지도 않았다, 그냥 자기 혼자서 도망갔다.

나는 아저씨가 이 그림으로 내게 뭘 가르쳐주고 싶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고.

나는 웃음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으면서도 말을 했다.

키킥, 아저씨, 이거, 키키킥, 용사가 용을 무찔러야죠.”

인간이 어떻게 용을 이겨. 인간이 못 이기니까, 용인 거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또 터졌다. 아직 별로 살지도 않은 인생이지만 이렇게 개운하게 웃은 건 진짜 인생에서 처음인 것 같다.

아저씨, 그러면, 그러면 공주는요. 적어도 데리고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위험한 데까지 가서 족쇄 풀어줬으면 됐지. 뭘 더 해줘.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 그렇죠. 아저씨 말씀이 맞아요.”

용이 살고 있는 곳까지 가서 공주를 옭아매고 있던 족쇄까지 풀어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건 행동 아닌가? 더 이상 뭘 더 해달라는 거야.

용사도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있는 거고.

하아, 아저씨 감사해요. 속이 다 후련해요.”

“....... 그런 감사인사는 됐다. 돈이나 줘라.”

당연히 드려야죠, 얼마예요?”

“7만원.”

! 엄청 비싼데요! 왜 이렇게 비싸요?!”

그만한 가격은 하지 않았냐.”

“........ , 그러네요.”

내 입장에서 본다면 7만원도 무척이나 싼 가격이다.

그래서, 답은 알아냈냐.”

7만원을 꼬깃꼬깃 주머니에 넣으면서 아저씨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답이 어디 있겠어요, 아저씨. 애초에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 그래, 그렇지.”

여태까지 내가 고민했던 것들이 정말 바보 같았다는 걸 아저씨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어디의 영웅인 것 마냥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영웅이더라도 분명 할 수 없는 것은 있다.

내가 영은이를 위해서 뭘 해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다니....... 정말 건방진 생각이었다.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안 건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누굴 위해서 뭔가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능력 부족이다.

실력 부족이다.

뭣보다 자격 부족이다.

난 일개 고등학생이다. 자만하지말자.

결론은 나왔다.

내가 영은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은 있다.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 이라는 자만도 더 이상 부리지 않겠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부탁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니, 잘난 척도 그런 잘난 척이 없다.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있고 자격은 누구한테나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다.

내가 해주고 싶다.

내가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제 제가 할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눈부시도록 화창하고 맑은 날씨를 나는 지금에서야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다.

 

개학까지 3.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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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화월화 12/31/12:56
이거 흥미진진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다음 내용이 기대됩니다
0 기원전 01/01/04:20
네이버 웹소설에 들어가서봤더니 월요일연재더라구요 맞는거죠? 맞는거라면 기대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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