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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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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터펠은 카로스의 기백이 느껴지는 곳에서 거대한 굉음을 들었다. 그러자마자 하늘을 찢고 튀어나온 것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인의 붉은 손이 뭔가를 낚아채 찢고 나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 순간 그와 칼을 맞대고 있던 알란이 도주했다. 윈터펠은 그를 쫓을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수성 측에게 야습이라는 있을 수 없는 선공을 당했다. 아무리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도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대로 쫓아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아군의 사기는 오르고 적의 사기는 꺾이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상대하던 알란은 생각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단순 기백만으로 카로스와 자신에게 견줄 수 있어 긴장했었다. 여차하면 무리해서라도 확실하게 숨통을 끊을 준비까지 해두었었다. 허나 알란은 스스로가 뭘 할 수 있고 없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애송이었다. 그 결과 윈터펠은 알란의 오른팔을 들고 있었다.
  팔꿈치 아래로 매끈하게 잘린 팔을 내던졌다. 윈터펠은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뒤 그는 지쳐 쓰러진 카로스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몇 번 죽었냐?”

  “몰라. 다섯 번 이후로는 안 셌어.”

  “상태 보니 다 끌어썼나보네. 한두 번 더 죽었으면 완전히 갔을 텐데, 좀 아쉽다.”

  카로스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윈터펠은 피식 웃었다. 그는 코골이를 하며 뻗은 카로스를 지나쳤다. 윈터펠은 우시르에게 다가갔다.

  그는 담배연기를 쉬지 않고 뿜어대는 우시르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진 않았네.”

  “사실 대다수의 부상자가 당신 마법 덕분이었지.”

  “이것 참 쑥스럽군.”

  “내 병사들 위로는 제발 쓰지 말라고, 마법사 형씨.”

  우시르가 윈터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마법은 이제 못 써.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이 앞에서부턴 주술사들이 손을 쓰고 있거든.”

  윈터펠은 우시르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아직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숲이 보일 뿐이었다. 윈터펠이 꽁초를 버리는 우시르에게 말했다. 

  “당신이 상대하고 있던 놈은? 죽였나?”

  “치명상은 입은 거 같은데, 안 죽었을 걸.”

  “그래?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당신 친구, 카로스라고 했나? 엄청 특이한 초월기를 쓰던데.”

  “별로 특이할 건 없지. 찾아보면 저런 거 쓰는 놈 많을 테니까.”

  우시르는 지금껏 저런 초월기를 본 건 손에 꼽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답을 피했다. 두 남자가 말없이 서 있을 때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우시르는 담배를 꺼내 물었고 윈터펠은 등을 돌렸다. 

  뿔피리가 다시 울렸다. 
  
*

  대지가 울렸다. 적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칼리모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적들의 공세는 멈출 줄 몰랐다. 울돌레이라는 거대한 성의 수비를 책임진 칼리모스는 야습이 성공한 이후 단 하루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성을 감싼 주술진의 관리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때 적의 특임조가 하수도로 잠입해 온 뒤로 그에게 휴식은 사치가 되었다. 

  땅이 울린다. 칼리모스가 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땀과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 뭉친 머리카락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칼리모스는 마나가 담긴 공성병기의 공격으로 성을 덮은 주술진에 균열이 생기는 걸 지켜보며 혀를 찼다. 그는 루벤가드가 최대한 적의 공격을 늦춰주길 바라며 정신을 집중했다. 

  정수가 그의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외성에 주둔 중이던 휘하 주술사들이 성벽과 이어진 지맥으로부터 칼리모스에게 힘을 보탰다. 
  
*

  시위를 당기는 손에 땀이 흥건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허벅지에 땀을 닦았다. 손가락에 낀 골무가 어느 때보다 답답했다. 심호흡을 하며 시위를 당겼다. 활대를 쥔 손이 떨렸다. 루벤가드는 떨어진 기력으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투기를 끌어올렸다. 덜리던 손은 진정됐고 화살에 담긴 패기는 화살촉을 더 예리하게 빛냈다. 그가 시위를 놓았다. 

  튕겨진 화살은 소리보다도 빠르게 전장을 가로질렀다. 루벤가드의 목표는 공성병기와 그것들을 강화하고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화살은 공격을 준비 중이던 공성병기의 두꺼운 밧줄 묶음을 끊어놓았다.

  외성과 적 공성병기까지 거리는 눈대중으로 보아도 킬로미터가 넘었다. 그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공성병기를 무력화 시키는 모습은 아군의 사기를 한층 드높였다. 그러나 루벤가드는 기뻐하지 않았다. 

  성벽 아래로 끓는 기름을 붓고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는 병사들의 머리통과 성벽 일부를 뜯어버리는 정신 나간 위력의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칼리모스와 주술사들의 주술진 때문에 위력과 정확도가 상당히 꺾였을 터인데도 이런 파괴력이다. 루벤가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오러가 담긴 화살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부딪친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초인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병사들은 그 후폭풍에 모조리 제자리에 자빠지거나 뒤로 날아가기까지 했다. 루벤가드는 눈앞을 가리는 연기 사이로 활을 들었다. 

  화살을 날리는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적의 저격수가 자신보다 사거리와 위력이 뛰어나다는 걸 인정했다. 그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가 심호흡했다. 

  화살은 마나를 모으며 영창 중이던 마법사의 마나 보호막을 뚫고 머리를 관통했다. 그 즉시 자신을 노리고 반격하는 적의 화살을 활대로 쳐냈다. 손바닥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강한 위력이었다. 튕긴 화살은 그 위협적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당량의 오러가 붉게 피어올랐다. 루벤가드는 투기를 회복에 집중했다. 그가 소리쳤다. 

  “적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게 느껴지나!”

  수천 명의 함성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외침이었다. 루벤가드는 병사들이 자신을 주시한다고 느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내 활을 박살내던 저격수의 공격이 볼품없어졌다! 저들은 지쳤다! 앞으로 두 시간만 버텨라!” 

  곳곳에서 악에 받친 괴성과 함성이 들렸다. 루벤가드는 다시 한 번 적 마법사의 골통을 꿰뚫었다. 

*

  “이런 젠장! 사람을 굴릴 줄 아는 놈이잖아!”

  윈터펠은 방패를 머리 위로 쳐들며 소리쳤다. 카로스가 수긍했다.

  “두 시간 뒤에 지원 같은 건 없겠지. 놈들도 전면전에 힘을 투자하고 있으니까. 저렇게 다 들리는 큰 소리로 지껄였다는 게 그 증거지. 아군에겐 두 시간 후면 뭔가 있을 거라는 것처럼 해서 사기를 올리고…….”

  카로스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만한 바위덩어리를 굴러 피했다. 욕지거리를 내뱉는 카로스를 대신해 윈터펠이 소리쳤다.

  “두 시간 뒤에 적의 지원 따위는 없다! 속아서 지레 겁먹는 멍청한 새끼들이 내 용병단에 없겠지! 안 그러냐!”

  윈터펠과 카로스를 따라온 겨울 용병단은 큰 소리로 웃었다. 

  “생각 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진 않아 윈터펠.”

  “다 저 활잡이 때문인 거 아니야!”

  카로스가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공성병기들이 성벽 위의 활잡이 한 사람에게 무력화 되고 있었다. 초월기도 사용하는 덕분에 충차부터 공성탑, 노포에 땅굴을 파기 위한 전호피차까지 모조리 박살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힘이 달리는지 공성전 시작 당시처럼 마구 난발하지는 못하고 있다. 카로스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기름이다!”

  그가 침을 뱉은 자리에 끓는 기름이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두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는 용병과 자담 병사들을 죽이며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성벽의 높이에 태양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성벽의 웅장함과 이걸 뚫지 못해 며칠째 소모전만 계속되는 양상에 지친 윈터펠이 이를 악물었다. 

  “카로스! 아킨둔 때 기억하냐?”

  “……이걸 올라가자고? 활잡이한테 뚝배기 날아갈 일 있냐? 사다리로는 턱도 없어. 공성탑 없이는 불가능해.”

  “더는 짜증나서 안 되겠어. 휘둘리는 것도 질린다. 일단 해보자!”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카로스는 윈터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아킨둔 공략전에서 썼던 그대로 성벽을 넘기로 했다. 

  윈터펠이 방패를 버렸다. 그는 죽은 병사의 대방패를 짊어졌다. 그 위에 카로스가 올라탔다. 

  “준비 됐냐?”

  “몸에 구멍나면 저주한다!”

  “좋아, 던진다!”

  윈터펠은 현재 기력으로 다룰 수 있는 투기를 활성화했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가 악을 쓰며 대방패와 카로스를 집어던졌다. 대방패를 타고 윈터펠의 힘으로 날아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간 카로스는 균형을 잡기 위해 골고루 퍼뜨린 투기를 두 다리로 몰았다. 십여 미터를 날아오른 그 와중에도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혀를 차며 카로스가 방패를 디딤돌 삼아 도약했다. 

  기름을 붓기 위해 열리는 틈의 이음새를 노렸지만 닿기 직전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이 카로스의 머리통에 박혔다. 

  “젠장! 저 개자식은 뭐 저리 반응이 빨라?”

  허공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보며 카로스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카로스의 시체가 한 병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병사는 기겁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걸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쳇……, 서로 못쓰는데 감도 좋군.”

  윈터펠이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카로스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한번 더 해보자. 또 죽는 건 사절이니 확실하게 지원 받아야겠어. 펙서스! 챈슬러! 아킨둔에서 했던 거 시도한다. 지원 준비해!”
  
*

  우시르는 어깨에 박힌 화살을 신경질적으로 부러뜨렸다. 고통스러웠지만 길게 내색할 수 없었다. 울돌레이의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려대는 궁수는 쉬지 않았다. 우시르는 그와 함께 투석기를 강화하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바람의 벽을 만들어 빗나가게 했다. 

  “저런 공성병기급 위력을 가진 놈이 왜 저기서 버티고 있는 거지?”

  칼리모스의 주술진에 방해받아 마나를 다루는데 애를 먹고 있는 우시르를 향해 하이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시르는 욕하고 싶은 걸 참았다.

  “……이봐요. 지금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우시르는 자리를 이탈한 하이람을 쏘아보았다. 하이람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우리는 태반이 기병이잖아. 뭘 하겠냐? 고용한 목적도 결국 너 때문이었지 기병이 필요했던 건 아니잖아. 돈 좀 벌려고 덤터기 씌운 거지.”

  “아니……, 알긴 아는데.”

  우시르는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위력이 줄어들 법도 했지만 패기의 특성 때문에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우시르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안 남았다고 인생 던지는 거요? 나 이적 자리 찾을 때까지 좀 기다리라니까 뭘 그렇게 서둘러?”

  “그것도 맞는데, 이 공성전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만드는 게 누군지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지.”

  “거 늙은이 노망났나. 헛소리 말고 성문 열리면 돌입할 준비나 하쇼. 주술진 깨고 전부 저쪽으로 보내줄 테니까. 아직 당신 통솔력 필요해. 죽지마.”

  하이람이 코웃음쳤다.

  “투석기 맡고 개인적으로 주술진까지 찾아 두드리는 모양인데, 네가 이렇게까지 오래 걸린다는 건 이 진의 총책임자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잖냐? 다른 마법사들은 그 정도 역량도 없는 모양이고, 네가 주술진을 깨면 내 장담하는데 너라도 탈진와서 누워 있을 걸?”

  우시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다룰 수 있는 초인의 힘도 초월기도 없는 맨몸으로 수십 년을 이따위 전장에서 버텨온 이다. 그의 통찰은 날카롭다. 하이람이 주름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난번 지하수로 공격이 막힌 뒤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그래서 내가 하지 말자 그랬잖아. 실패하면 다음은 없으니까 신중하게 노리자고.”

  “야, 왜 나한테 화풀이야? 기각한 건 고용주야. 실행한 것도 그쪽이고.”

  “씨발.”

  우시르는 뜨거운 콧바람을 내쉬었다. 하이람이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이런 소모전은 좋지 않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최전방 지휘관들이랑 본진으로 찾아와.”

  “왜요? 뭐 방법이라도 있간?”

  퉁명스럽게 말하는 우시르를 향해 하이람은 피식 웃어보였다.

  “전장을 지배하는 건 막사에서 뒷짐 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놈들이 아냐. 멀리서 지도랑 상황에 대한 보고로만 다 할 수 있으면 천재란 말로도 부족해. 전장은 언제나 최전선의 병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뛰는 지휘관들의 세상이야. 지금쯤 기발한 생각 하나 쯤은 나왔을 거다. 그걸 실행하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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