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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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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3    추천 0   덧글 0    / 2019.01.08 11:36:32

  “아직 버틸만 한가보네?”


  카트레아의 물음에 루벤가드는 고개를 들었다. 모닥불 앞에 주저앉아 있던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카트레아를 쏘아보았다. 카트레아는 그의 살벌한 시선에 환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루벤가드가 말했다. 


  “언니한테 잡혀가더니 그새 도망쳤나보네. 이번엔 또 어떻게 도망쳤어?”


  “그냥 키스 좀 해주고 알랑방귀 좀 뀌었지. 거기다가 내 남자가 거기서 기다린다고 하니까 좋다고 보내주던데?”


  루벤가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남은 기력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적의 공성병기의 7할 이상을 무력화시키느라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더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음 해가 떴을 때는 놀라울 정도로 저조한 상태일 것이란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버티고 버티다 외성에서 죽는 게 현재 계획이었다. 


  ‘그 뒤는 알아서 해주겠지.’ 


  카트레아는 쪽잠을 자는 루벤가드를 뒤로한 채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 기름과 오물, 불에 타는 시체와 피의 냄새가 진동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병사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들은 수년을 씻지 못한 것처럼 지저분했고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몸에 피와 불의 그을림이 없는 이를 찾기 힘들었다. 몸이 성하지 않은 병사도 여럿 보였다. 그들 못지않게 쌓여 있는 시체들도 즐비했다. 


  성의 안쪽도 만만치 않았다. 적의 투석기에 찌그러지고 불타버린 시체와 함께 잠을 청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바쁘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성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처 해자를 넘지 못해 화살에 맞아 죽은 이, 끓는 기름에 맞아 아군의 자비를 받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며 죽은 이, 떨어진 돌에 깔려 죽은 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뒷걸음질 치다 아군에게 밟혀죽은 이.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죽음의 형태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카트레아 님.”


  카트레아는 감상을 방해하는 알란을 마주보았다. 윈터펠에게 잘린 팔이 다시 자라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기괴하게 보였다.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언니가?”


  사색이 된 카트레아를 보며 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레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알란의 가슴팍을 오러가 담긴 손으로 뚫어버렸다. 


  “죽었다고 말했구나?”


  “당신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것 또한 주인님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버러지가.”


  카트레아가 손을 뺐다. 그녀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알란을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눈앞에 허공이 찢어졌다. 그 틈으로 화려한 장식품과 우아한 가구들이 보였다. 순간 카트레아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주눅 들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기처럼 웅얼거렸다. 


  “언니, 그게 아니구…….”


  찢어진 틈새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이 카트레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어깨에 올라온 손을 쳐냈다.


  “손대지마. 꺼져.”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찢어진 틈새로 그녀와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


  알란을 포함한 사내들은 하나같이 틈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것이 가진 힘은 엄청났다. 단순한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한 힘은 자고 있던 루벤가드를 깨웠다. 그리고 현재 울돌레이의 공성전을 위해 모인 모든 이들이 몸서리치게 서늘하고 강인한 힘의 편린에 몸을 떨었다. 카트레아는 울상이 되었다.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응…….”


  카트레아가 틈새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알란을 제외한 나머지 사내들도 따라갔다. 틈이 닫혔다. 알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주인이 가진 힘은 이미 죽어 공포가 없는 그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


  “…….”


  칼리모스는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방금 전 느껴진 말도 안 되는 거대한 힘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는 무너진 수로를 지켜보았다. 눈치 채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적군이 가지고 온 폭약은 지하수로와 함께 성벽의 일부를 날려버렸을 것이다. 


  기사들이 생각할 법한 일은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오만해서 자신의 무력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믿지 않는다. 이런 전술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 건 용병들일 것이다. 그것도 공성전의 경험이 출중한 이들. 칼리모스는 주술진을 점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적들은 물러났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칼리모스의 누적된 피로를 예상해 수로를 날려버리려고 했다. 그가 조금 더 지쳤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중앙 주술진을 바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틀림없이 그리 됐을 테다. 칼리모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성을 덮은 결계는 완벽하다. 칼리모스는 이 거대한 주술을 앞으로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 예상해보았다. 


  지속된 공격으로 균열이 생긴 결계를 복구하느라 그가 손댈 수 있는 범위의 정수를 대부분 사용했다. 몸을 혹사시킨다면 앞으로 일주일은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계속된 전투로 루벤가드가 적의 공성병기를 대부분 무력화시켰다. 루벤가드가 좀 더 힘내준다면 최대 이 주는 가능했다.


  ‘문제는……, 어제 오늘 같은 힘싸움만 계속된다면……이지.’


  적들은 멍청하지 않다. 이대로 머리를 들이박는 무식한 짓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생각보다 다음 계획의 실행이 빨라지겠다고 생각했다. 

  

*


  카로스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수건은 금세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시가를 문 그 곁으로 윈터펠이 다가왔다. 윈터펠은 큰 그릇에 한가득 담아온 스프를 내밀었다. 카로스가 스프를 받아들고 한참 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카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스프냐? 이 새끼들은 어떻게 전쟁 시작부터 지금까지 스프만 내와?”


  “그러면서 잘만 처먹네.”


  윈터펠의 지적처럼 카로스는 말을 끝맺고 쉴 틈 없이 스프를 떠먹었다.


  “기력 보충해야지. 그래야 또 그 미친 년 만나면 몸으로 때우기라도 하니까.”


  “몇 번 죽더니 완전 쫄았네, 이거.”


  “……너라면 대충 열댓 번은 죽은 거 같은데 안 쫄겠냐? 일대일로는 답도 없어. 내성 인원이 어떤 전력을 갖고 있는지 모르니까 더 조심해야지.”


  윈터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 먹은 그릇을 카로스에게 넘겼다. 카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윈터펠이 턱짓했다. 갖다 놓으라는 몸짓에 카로스가 불쾌함을 내비췄다. 


  “아 그냥 여기 두면 알아서 정리하겠지. 넌 꼭 그러더라?”


  “……저기, 혹시 사람 새끼 맞으세요?”


  윈터펠은 그릇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로스를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카로스는 시가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는 구시렁대며 그릇을 정리하는 윈터펠을 향해 말했다.


  “대충 하고 따라와.”


  “내가 널 왜 따라가?”


  “고용주께서 오라잖냐. 누군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아냐?”


  윈터펠은 똥 씹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는 구시렁대며 그릇을 병사에게 넘겼다.


  “넌 그, 용병은 신뢰가 무기다 하는 신념 좀 어떻게 안 되냐?”


  “넌 그 용병은 용병일 뿐 하는 신념 좀 어떻게 안 되냐? 사람 새끼가 맞냐는 말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시르는 진한 시가 향기에 고개를 들었다.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얼굴에 다 드러낸 카로스와 윈터펠이 오고 있었다. 우시르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를 본 카로스가 말했다. 


  “뭔 일이래?”


  “낸들 아나? 뭐 하이람 씨 말로는 현장에서 뛰는 당신네들이면 돌파구 하나쯤 나왔을 거 같다고 하긴 했는데, 고용주도 그리 생각하고 우릴 불러 모은 건 아닐 거란 말이지.”


   카로스가 한쪽 얼굴을 찌푸렸다.


  “돌파구? 뭔 돌파구? 기름 뒤집어쓰고 화살 피한다고 정신없는데.”


  우시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영감탱이가 노망났나보지. 일단 당신들하고 나까지 들어가면 전원 모인 거야.”


  카로스는 노골적으로 들어가기 싫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윈터펠은 불편한 심정을 내비쳤다.


  “뭔 얘기냐?”


  “들어가래.”


  “암만 봐도 그런 건전한 얘기를 하던 건 아닌 것…….”


  “그냥 들어가, 좀!”


  떠밀려 막사 안으로 들어선 윈터펠은 카로스가 뒤따라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한 마디 쏘아주려던 그는 지휘관 전원이 모였다는 걸 확인한 아이트라의 말에 입을 닫았다. 


  “전원 모였군. 회의를 시작하시죠.”


  테이라는 초췌한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닷새간 진행된 전투에서 우리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공성전을 계속할 수는 있지만 승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술사가 버티고 정신나간 활잡이가 다 때려 부순 덕분이지.”


  우시르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는 아이트라를 노려보았다. 


  “우리 쪽에도 그런 활잡이가 하나 있던 것 같은데, 처음에 견제를 좀 하더니 그 뒤로는 놀더라고? 설명 좀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아이트라는 테이라를 바라보았다. 테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이 있자 아이트라는 자신의 갑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목, 가슴과 배 그리고 허리까지 상체를 덮은 모든 것을 벗었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여리지만 탄탄하고 육감적인 몸매는 감탄을 자아냈다. 다른 이들은 급작스런 아이트라의 행동과 몸에 놀랐지만 우시르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카로스와 윈터펠의 환호를 무시하며 우시르가 말했다.


  “저주? 흑마법사나 강령술사가 있나보군. 저기, 도사한테 풀어 달라 하지 그러나?”


  페너트레인은 깜짝 놀라 우시르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하기 전 아이트라가 가슴의 붕대를 풀며 말했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가슴의 붕대를 풀어헤치자 봉긋한 가슴 사이에 주먹만한 새까만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아는 우시르와 페너트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너트레인이 앳된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각인입니다. 저주를 전문으로 사용하는 이들 중에서도 제법 격이 있는 이의 소행입니다. 제 수준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기술이고요.”


  “게다가 걸린 저주도 고급이군.”


  아이트라는 다시 붕대를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로스가 윈터펠을 쳐다보았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윈터펠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그의 뺨을 때렸다.


  “야, 너 저주 해제 가능하지 않냐?”


  “때리기 전에 말로 해줄래? 입은 뒀다 어디다 쓰니, 이 개새끼야? 그리고 해제는 못해. 내가 도사냐? 걸리기 전으로 돌리는 거지.”


  “가서 저거 좀 떼줘.”


  “저거 저주야? 그럼 내가 당분간 못 움직이는데.”


  “룩이랑 펙서스 데리고 하면 돼. 넌 회복되는 대로 뛰어오면 되고. 빨리 가서 해결하고 이야기 진행하자.”


  윈터펠은 구시렁대며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윈터펠을 향하자 카로스가 말했다.


  “우리 이름만 단장인 놈이 그걸 풀 수 있다. 대신 당분간 활동은 못해. 알겠나?”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윈터펠과 하이람을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우시르는 놀라면서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굉장한데? 도사도 아닌 삼기 투사가 저주를 해제할 수 있다고? 설마……, 융합할 수 있는 거냐?”


  “쟤가 융합을 쓸 줄 알았으면 내가 대들지도 못했지. 단순 초월기다.”


  갑옷을 입고 있던 아이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월기로 저주의 해제가 가능하다고? 무슨……,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다.”


  “흔한 건 아니지. 연비도 안 좋고.”


  카로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우시르가 눈을 빛냈다. 윈터펠이 아이트라 앞에 섰다. 윈터펠이 카로스를 돌아보았다. 


  “몸, 만져야는데?”


  카로스가 통역해주려는 찰나 우시르가 손뼉을 쳤다. 


  “부정시공(不定時空)! 부정시공이구나! 정말…… 놀랍군! 부정시공 초월기를 보는 게 얼마만이지? 이봐요, 하이람. 부정시공이랍니다.”


  윈터펠은 시끌벅적한 뒤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아. 접촉하지 않은 상대에게 쓰는 건 아직까진 공격뿐이야. 접촉은 불가피…….”


  “너 가슴 만지려고 그러지?”


  카로스를 쏘아본 윈터펠이 헛기침을 했다. 카로스는 그런 윈터펠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윈터펠은 자신의 진짜 의도를 들키는 걸 꺼렸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그, 흠. 만져야……, 어……. 접촉해야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가슴일 필요는 없달까? 그래도 몸이…… 아니, 그 후유증 같은 게 남을지도 모르니까 확, 확실하게 하자는 의미에서…….”


  아이트라와 테이라는 윈터펠이 사용하는 대국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들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아이트라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의 붕대를 풀었다. 


  “사내놈들 짐승인 거야 백 년 전이나 지금이냐…….”


  아이트라의 말을 알아들은 이들은 얼굴을 붉히거나 그녀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중 웃는 이는 카로스뿐이었고, 윈터펠의 초월기에 집중하는 이는 우시르밖에 없었다. 그리고 윈터펠의 손이 아이트라의 가슴에 닿았다. 그가 초월기를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췄다는 걸 인지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윈터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카로스 혼자였다. 그를 이어 아이트라와 우시르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보던 카스트로가 깨닫고 경악했다. 


  아이트라는 그녀의 가슴에 닿은 손에서부터 댐이 터지듯 오러가 흘러나오자 윈터펠을 주시했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초월기를 발동하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트라는 백 년 동안 단 두 명밖에 보지 못한 시공간을 다루는 사내를 눈여겨봤다. 단순한 용병으로 남기에 너무 아까운 인재다. 


  카스트로는 어둠 속에서 나왔다. 그는 집중하고 있는 우시르의 곁에 서서 말했다.


  “초월기를 사용하는 것에 집중하면서도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군.”


  우시르는 카스트로의 말에 공감했다 .초월기를 사용할 때 생기는 흔적을 지우는 건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소양이다. 초월기는 썼을 때 상대방이 느끼고 반응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그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반드시 갈고 닦아야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우시르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헌데 부정시공은 워낙 다루기 까다로워서 그러기 쉽지 않지. 그런데도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저 비정상적인 기력 소모와 관련이 있겠군.”


  “아, 당신도 삼기 투사인가?”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카로스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부정시공은 원래 기력을 많이 먹는 게 아니라고?”


  카스트로가 답했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저렇게 많이 먹진 않아. 당장 철신(鐵神)의 부정시공 초월기를 멀리서 지켜본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손해는 없을 거다.”


  우시르는 삼기를 쓰지 못하기에 윈터펠의 기력이 줄어드는 걸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유심히 초월기의 사용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제길. 저것들은 봐도 이해가 안 돼. 좀 써보고 싶은데, 역시 이번에도 힘들겠어.”


  아이트라는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오러를 느꼈다. 그녀는 완벽한 상태가 된 정신과 육체를 확인하며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윈터펠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가 머리를 붙잡았다.


  “토할 것 같아…….”


  휘청거리는 윈터펠을 아이트라가 붙잡았다. 그녀는 힘없이 축 늘어진 윈터펠의 등을 토닥였다. 천천히 다가온 카로스가 윈터펠을 부축하며 말했다.


  “얼마나 썼냐?”


  윈터펠이 신음했다.


  “저거 건 놈 장난 없다. 삼일 썼어.”


  “오늘 남은 거 까지?”


  “어. 나 쉰다.”


  “시작하면 며칠 앞에 거 더 끌어와서 바로 합류해라.”


  “넌 진짜 사람도 아니다.”


  카로스는 윈터펠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겨울 소속의 용병들에게 윈터펠을 인계한 뒤 막사로 돌아왔다. 아이트라는 사슬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윈터펠의 초월기를 보지 못한 자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카스트로와 우시르는 서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카로스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아직 회의는 끝난 게 아니다. 아이트라가 복부에 갑옷을 걸치려 할 때 테이라가 말했다. 


  “카로스? 당신의 단장의 도움에 감사하는 바요.”


  “그런 겉치레는 됐고, 돈이나 잘 챙겨주쇼. 당신네 최고 실력자를 살려준 거니.”


  “걱정하지 마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소.”


  카로스는 가볍게 목례했다. 테이라는 좌중을 훑어본 뒤 짧은 박수를 쳤다. 시선이 모인 걸 확인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공성병기의 타격이 심한 터라 제대로 된 공성 작전이 불가능한 것에 가깝소. 상대의 전력을 얕본 내 실책이지. 그럼에도 무리한 정면승부를 시도한 건 더할 나위 없는 우책이었고.”


  우시르에게 통시통역으로 그녀의 말을 전해들은 하이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의 방어가 너무 견고했다. 그리고 그 궁수는 너무 균형이 안 맞는 비대칭이고. 정면에서 승부를 보려한 건 최선이었지. 우책이었던 건 수로폭파를 너무 성급하게 시도한 것이라고 전해줘.”


  “저 아가씨들은 당신 같은 영감이랑 달리 다국어 할 줄 알아요.”


  “…….”


  하이람은 멋쩍은 듯 콧수염을 만졌다. 우시르가 팔짱을 꼈다. 그는 테이라의 말을 기다렸다. 테이라는 하이람과 우시르를 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어쨌든 우린 지금 불리합니다. 계속된 적들의 보급품과 보급로 공격에 눈 뜬 채 얻어맞고 있는 것도 한 몫하고 있소. 최대한 우리 쪽 지휘관들을 이용해 더 큰 피해가 생기지 않게끔 막는 건 가능해졌지만 그만큼 전장에 소홀해져 진척이 더딘 상태요. 우리 사기는 내려가고 있지. 적들은 그 반대일 것이고. 얘기가 길어졌소만 결론은 하나요.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게끔 그대들의 경험과 생각을 들어보고 싶소.”


  우시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성벽을 넘거나 울돌레이를 공략하는데 마땅한 의견이 없었다. 그건 하이람도 마찬가지였기에 입을 다물었다. 자담의 기사들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지휘관들이 의견을 내놓지 못하자 테이라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적막 사이에 아이트라가 테이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겨울 용병단 부단장. 당신은 할 말 없나?”


  여유롭게 시가를 문 채 내일 있을 전투에 쓸 기력을 비축하던 카로스는 느닷없는 호명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이트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고 있던 시가를 껐다. 그는 마지막으로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었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있지.”


  하이람이 우시르를 팔꿈치로 건드렸다. 우시르는 하이람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감을 보며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다. 회장에 있는 모든 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카로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테이라가 말했다.


  “그대의 생각을 말해줄 수 있겠소?”


  카로스는 테이라의 정중한 모습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턱을 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뭐지?”


  “윈터펠이 빠져서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호흡을 맞출 상대가 없어. 뭐, 금방 합류하긴 하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정확한 계산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지.”


  하이람과 아이트라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이람은 턱을 매만졌고, 아이트라는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카로스가 말했다. 


  “다음 작전의 지휘권을 나에게 주고 당신들은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 이게 조건이다.”


  용병 지휘관 둘과 카스트로는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자담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테이라와 아이트라를 제외한 모든 이가 역정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카로스에게 손가락질하며 무기를 꺼냈다. 당연한 반응이었기에 카로스는 싱긋 웃으며 두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넘겼다. 네 명의 기사단장 중 성격이 불같은 불칸이 시뻘게진 얼굴로 테이라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런 무례한 시정잡배 같은 놈의 말을 들을 필요 없습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당장 내일까지 이 불칸이 공략법을 세워오겠습니다.”

  테이라와 아이트라는 왕국 기사단장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세 사람 또한 불칸에게 동의하는 듯했다. 테이라는 한숨을 내쉬고픈 걸 참았다. 


  “어떻게?”


  “말씀 드렸다시피 제게 하루만 주신다면…….”


  “하루? 우리에게 시간이 많습니까, 아이트라 기사장?”


  씩씩거렸던 불칸은 아이트라를 쳐다봤다. 아이트라의 보석 같은 푸른 눈이 불칸을 쏘아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공주님께 주신 시간은 14일입니다.”


  “공성전 시작 후 부터입니까?”


  “왕성을 떠난 순간부터입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사흘이 채 되지 않습니다.”


  테이라가 턱을 괸 채 아이트라를 가리켰다. 불칸은 이틀 안에 울돌레이를 함락시킬 방법이 전무하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테이라가 카로스를 향해 말했다. 


  “그대의 지휘가 있으면 이틀 안에 가능하겠소?”


  “이틀이면 차고 넘치는 시간이지.”


  “좋소. 얘기해 보시오.”


  “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총지휘권을 갖는 건가?”


  테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설명하지.”


  그렇게 말한 카로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다들 의아해하던 중 챈슬로와 함께 돌아온 그는 막사 내부를 훑었다. 테이라와 아이트라의 자리가 시선이 모이기 쉽다고 본 그는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과 함께 의자를 가져온 챈슬러에게 말했다. 


  “거기 올라가서 잘 볼 수 있게 펼쳐.”


  챈슬러는 갖고 온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지도는 챈슬러의 팔길이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시르는 챈슬러가 힘겹게 펼친 지도 모서리를 허공에 고정시켰다. 카로스가 간단한 감사인사를 전했다.


  자세한 지도의 모습에 감탄하는 사람들을 향해 카로스가 말을 이어갔다.


*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챈슬러의 물음에 카로스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투구를 만지작거렸다. 며칠 제대로 씻지 못해 떡진 머리를 만지작거린 카로스는 어스름에 밀려 윤곽만이 보이는 울돌레이를 주시했다. 


  “첫 전투를 시작할 때부터 조급했거든.”


  챈슬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카로스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하지만 카로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챈슬러는 전투에 앞서 온 신경을 가다듬는 카로스를 더 건들지 않았다. 그는 주의를 돌렸다. 


  그들의 뒤로 나란히 오와 열을 맞추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겨울 용병단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눈이 풀리고 의욕이 없는 모습에 실망스러워할 법도 했다. 개중에는 도박을 하는 이도, 무기를 손질하는 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실컷 떠드는 이 등 전투 시작 전의 고양감 따윈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챈슬러를 비롯한 겨울의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어떠한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선봉인 겨울의 뒤로 자담 왕국의 병사들과 용병들이 미동도 없이 대열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챈슬러는 카로스를 바라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투기를 갈무리하고 살기를 가다듬는 모습은 더 없이 믿음직스럽다. 허나 평소와 같은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다. 챈슬러는 카로스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동이 트는군.”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던진 카로스가 투구를 썼다. 그를 따라 챈슬러는 투구를 고쳐 쓰고 땅바닥에 꽂아두었던 창의 허리를 붙잡았다. 장비를 점검한 카로스가 내려놓았던 방패를 들고 세워두었던 창을 붙잡았다. 그의 몸에서 투기가 솟아올랐다. 투기는 몸과 갑옷을 빠짐없이 뒤덮었다.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평범한 재질의 천을 바위와 강철과도 같은 강도를 부여하는 투기가 쇳덩이에 닿았을 때 카로스는 움직이는 성채가 되었다. 


  임전 태세에 들어간 카로스의 기백은 평소의 구름 같은 뭉실함은 없었다. 예리한 창날처럼 뻗어나간 그의 기백을 느낀 이천 명의 용병들은 하나둘 장비를 점검하며 있어야할 자리로 향했다. 그들은 우왕좌왕 하지 않았다. 망설임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일 분이 채 되지 않아 오와 열을 갖춘 번뜩이는 눈을 가진 병력을 돌아본 챈슬러가 말했다. 


  “전 병력 위치했습니다.”


  카로스가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내렸다.


  “시작하자.”


  챈슬러가 숨을 들이마시며 초월기를 사용했다. 초월기로 강화된 소리가 용병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전군! 돌격!”


작성자에 의해 2019.01.08 11:38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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