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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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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42    추천 0   덧글 0    / 2019.01.13 13:54:29
  테이라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앞으로 울돌레이 측 병사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의 앞발로 그를 내려찍었다. 그녀의 초월기는 타고 있는 말도 투기를 두르게 했다. 투기를 두른 말의 앞발은 손쉽게 병사의 가슴팍을 주저앉혔다. 테이라는 숨을 몰아쉬며 전장을 훑었다. 

  지휘관들의 분투로 전황은 유리했다. 곳곳에 흩어진 그들의 상황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휘관 중에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초월기 ‘가장 낮은 곳에서 짊어지는 짐’은 영향 받는 모든 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힘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이끌어낸 힘이 죽음을 통해 사라졌을 때 그녀는 알 수 있다. 초월기의 안배를 받은 모든 이들의 죽음을 그녀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숨을 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고, 테이라는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촛불이 하나하나 꺼져가는 것 같다. 눈앞을 환하게 비추던 아름다운 불꽃들이 점차 꺼져간다. 테이라는 그들의 죽음을 모두 느끼는 것만으로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6만을 넘던 촛불의 숫자가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5만으로 줄어들었다. 아니 4만에 가깝다. 칼리모스의 주술로 희생된 이들만 해도 수천 명이 넘는다. 그리고 일한과 루시의 공격에 지속적으로 수십 명씩 죽어나간다. 

  테이라는 두통을 느꼈다. 계속된 죽음과 지속적인 초월기의 사용으로 몸과 정신이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잠깐 초월기를 풀고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그녀의 초월기는 사용하는데 막대한 양의 오러를 잡아먹는다. 대신 유지하는 동안에 빠져나가는 오러의 양은 많지 않다. 지금 초월기를 풀면 한동안 사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일한의 충격파에 죽어나가는 병사가 수십에서 수백 명으로 늘어날 것은 자명했다. 

  테이라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는 갑옷 안에서 차오르는 열기에 지쳐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열었다.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싶었다. 테이라는 현기증을 지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깐 뒤로 빠져 몸을 방어하는 오러의 소비만이라도 줄여야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벤가드가 화살을 걸었다. 

  전투가 과열된 외성과는 달리 루벤가드가 있는 내성 성벽의 구석은 한적했다. 모든 인원이 정면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말을 타고 있는 테이라의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루벤가드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긴 시간 지켜본 결과 저 여자가 적의 구심점이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우두머리를 잡아야한다. 생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쉽게 풀리진 않을 것이다. 테이라의 곁을 호위하고 있는 페너트레인과 에소스를 뚫을 정도의 실력자는 하나같이 바쁘다. 그리고 아무리 아래로 한 수, 두 수 차이가 난다 한들 그건 일대일이라는 상황에만 통용되는 말이다. 정말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절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생포가 불가하다면 사살하는 게 최선이다. 거기다 적병을 모조리 투사로 각성시킨 초월기라 추정되는 힘을 사용하는 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루벤가드는 몸에 투기를 둘렀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그를 감싼다. 미세하게 떨리던 활대가 멈췄다. 온 몸에 흘러넘치는 힘과 생명력을 느끼며 그가 패기를 사용했다. 

  투기와 달리 제어가 불가능한 패기는 루벤가드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기’라고 인식한 활과 화살에 스며들었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초월기를 화살에 담은 루벤가드가 시위를 놓았다. 
  
*

  테이라는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말에 타고 있던 그녀는 땅에 다리를 딛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루벤가드의 초월기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 육편 조각이 전장에 흩뿌려져 있었다. 

  “생명력을 잔뜩 모아 한곳에 집중하기에 뭔가 했더니, 저 궁수를 살리기 위해서였나 봅니다.”

  테이라를 적 병사와 위치를 바꿔 살려낸 페너트레인은 흐물흐물 변해가는 몸을 붙잡았다. 그는 루벤가드의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연달아 몸으로 막았다. 테이라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페너트레인 경! 괜찮……!”

  씩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의 몸에 박힌 두 개의 화살이 폭발했다. 테이라는 페너트레인이 폭발한 순간 흩뿌려진 뜨뜻한 액체를 뒤집어쓴 채 넋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정신적으로 무너진 테이라의 오러가 사그라들었다. 그런 무방비한 상태를 루벤가드는 놓치지 않았다. 

  화살이 그녀에게 닿기 전 흩뿌려졌던 액체가 한데 모여 화살을 삼켰다. 거대한 폭발이 일었지만 그 모든 피해를 액체 덩어리가 감당했다. 

  루벤가드는 혀를 찼다.

  “왠지 자신 있어 보이더니, 하늘 도사였나…….”

  루벤가드는 더 이상의 공격이 의미 없다 생각해 활을 내렸다. 그는 라나텔을 돌아보았다. 라나텔은 연보랏빛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어떻게 하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루벤가드와 달리 다국어를 할 수 있던 라나텔은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결국 루벤가드는 손가락으로 적진을 가리켰다.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그것을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라나텔은 곧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루벤가드는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했다. 그러자 라나텔이 그의 모국인 왕국 솔츠의 언어로 말했다. 

  “그거, 내 고향에선 좆을 잘라버린단 뜻이야.”

  “아……, 이거 실례. 그건 그렇고 말 할 줄 알았으면 진즉 해주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통하는 애들을 붙여놨겠어?”

  루벤가드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가 피곤한 눈을 비볐다.

  “죽었다 살아나서 상태가 좋진 않아. 싸움이 길어지면 불리해.”

  라나텔이 성벽에 턱을 올려놓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테이라와 벌거벗은 페너트레인을 주시했다. 아랫도리만 대충 가리는 페너트레인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했다. 

  “도사는 상대해본 적 없어. 거기다 상극이잖아. 저거 어떻게 안 돼?”

  “상태가 좋았다면 문제없었겠지. ‘동화’ 할 수 있는 하늘 도사를 잡는 거야 살기의 ‘낙인’을 다룰 수 있는 삼기 투사한테는 일도 아니니까. 다만 지금 내 상태가 이래서 저건 못 잡아.”

  라나텔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흐음,” 그녀는 손가락으로 성벽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루벤가드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내가 도사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데 저…… 변하는 거, 뭐라 하지?”

  “동화?”

  “아무튼 그래, 그거. 그거 하는 중에는 못 죽여?”

  “쟤들은 저게 공방일체의 힘인데 그랬으면 하늘 도사가 최강이었겠지. 당연히 공격 가능하지.”

  “어떻게?”

  루벤가드가 턱을 괴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삼기 투사는 살기의 다섯 가지 특성 중 하나인 ‘낙인’을 쓸 수 있으면 일도 아니고, 오러 투사는 동화한 몸체에 치명적인 힘으로 오러를 벼리면 쉽지. 성기사야 ‘용기’ 앞에서 너도 평등 나도 평등하니 상관없고. 땅 도사는 같은 자원을 공유해서인지 상대하기 쉬운 모양이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생각을 정리한다고 느낀 라나텔은 그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루벤가드가 인상을 썼다. 

  “투사 쪽 말고는 잘 모르겠는데?”

  “에효.”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걸 드러내면 상대방은 상처받는다는 것도 안 배웠나?”

  “아, 예.”

  “이참에 뭐라도 해보시던가.”

  “그럴까?”

  “좋을 대로.”

  루벤가드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라나텔의 기술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 저 도사의 수비를 깨는 건 불가능하니 힘을 아끼려는 취지였다. 물론 라나텔의 공격 중 틈이 보이면 바로 쏠 수 있게 활과 화살은 손이 닿는 곳에 던져두었다.

  라나텔에게서 소름끼치는 기운이 치솟았다. 루벤가드는 그 끔찍한 기운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는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라나텔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어두운 녹색 기운이 시선을 잡았다. 말로만 들어오던 흑마법사들의 힘의 원친이다. 루벤가드가 팔짱을 꼈다.

  ‘저게 황천이라는 건가? 더럽게 소름끼치는군.’

  라나텔이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녹색 기운이 모였다. 흐물흐물하던 기운이 완전한 원을 이루었을 때 그녀가 강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테이라와 물처럼 반투명해진 페너트레인의 발밑에서 녹색 빛이 번쩍였다. 

  라나텔의 곁에서 전장을 주시하던 루벤가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곤 테이라와 페너트레인을 응시했다. 그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멀쩡한데?”

  “당신들 눈에는 안 보이겠지.”

  라나텔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광경을 보며 미소 지었다. 루벤가드는 턱을 괸 채 라나텔을 바라보았다. 도통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테이라가 피를 토했다. 깜짝 놀라는 루벤가드를 뒤로하며 라나텔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끝났어. 저 아리따운 공주님은 이제 죽은 목숨이니까.”

  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성벽에 걸터앉았다.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한가한 모습에 루벤가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테이라와 페너트레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페너트레인은 다급하게 테이라를 감싼 채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라나텔과 루벤가드 모두 페너트레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루벤가드는 타고난 시력과 투기의 추가적인 강화 덕에 그의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루벤가드는 자신의 고향인 왕국 솔츠의 몇몇 지역의 말 빼고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사들과의 수많은 싸움이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말했다.

  “도사들의 언령과 정안이라는 걸 알고 있나?”

  “나야 모르지. 도사를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인 걸.”

  루벤가드가 활을 들고 화살을 걸었다. 

  “언령이란 말이 가지는 힘을 말하고, 정안이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눈을 말해.”

  “그래서?”

  옆머리를 쓸어 넘기는 라나텔을 흘끗 쳐다본 그는 시위를 당겼다. 잠깐 쉰 정도로 기력은 충분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페너트레인의 언령을 방해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그가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페너트레인의 몸에 박히는 걸 확인한 후에 초월기를 사용했다. 

  지금껏 단순한 폭발을 일으키던 초월기와 달리 이번 건 터지지 않았다. 대신 페너트레인의 몸에 박힌 화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화살과 함께 깨끗하게 증발했다. 루벤가드는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활을 내려놓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도사의 언령은 막을 수 있을 때 막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좀 늦었나? 저렇게 되거든.”

  루벤가드는 어느새 육체를 복구한 페너트레인을 가리켰다. 그의 곁에서 피를 토하던 테이라가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라나텔은 테이라의 영혼이 황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걸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쉽게 풀리는 게 아닌데, 용케도 해주셨군?’

  루벤가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됐네.”

  반투명했던 페너트레인의 몸이 완전한 물이 되어 땅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루벤가드는 곧바로 활을 들어 테이라를 노렸다. 라나텔은 그가 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지금 충분히 테이라를 노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울돌레이에 합류한 다른 용병들과 애초에 목적이 달랐다. 라나텔은 이미 원하던 바를 얻었고,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말했다.

  “난 싸움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말이야. 여기까지 하고 손 떼야겠다.”

  “……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봐, 난 학자야. 당신들 같은 싸움꾼이 아니라. 그리고 당신들은 돈이 목적이겠지만, 난 원하던 걸 얻었거든. 목표가 달성됐으니 더 머물 필요 없다는 뜻이지.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적으로는 안 만났으면 좋겠네.”

  당황하는 루벤가드를 뒤로하고 라나텔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몸이 녹색 기운에 삼켜졌다. 순간 벙 쪄있던 루벤가드는 성벽의 틈으로 물방울이 하나씩 떠오르자 뒤늦게 얼굴을 구겼다.

  “칼리모스도 이건 예상 못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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