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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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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더미 - Chapter. 겨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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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08    추천 0   덧글 0    / 2019.01.14 13:33:32
  윈터펠은 창을 내지르며 생긴 틈으로 장검을 찔렀다. 허나 루시는 한 발 빠르게 방패를 끌어당겨 칼을 막았다. 윈터펠이 그녀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나려 땅을 박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루시가 그의 몸을 발로 찼다.

  “어딜!”

  균형을 잃은 채 바닥을 구르는 윈터펠을 향해 바로 창을 집어던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발차기에 맞아 반응이 느렸던 윈터펠은 그녀의 창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직격이 아니라 스친 정도였지만 창에 담겨 있는 오러는 막대한 회전력을 품고 있었다. 윈터펠은 갈비뼈가 다 드러난 옆구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신음하며 두 번째 투창을 피했다. 이대로 거리를 벌린 채라면 벌집이 되고 만다. 그는 상처에 투기를 집중해 회복을 서둘렀다. 하지만 루시의 투창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상처에서 피를 쏟아내며 윈터펠이 바닥을 굴렀다. 고통이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제기랄! 뭐 저딴 게 다 있어? 저 빌어먹을 창은 자꾸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균열의 조각도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네 번째 투창이 날아오는 순간 몸의 회복이 끝났다. 그는 다시 초월기를 사용해 투창과 루시의 시간을 제어했다. 

  쏜살같이 달려들어 투창을 봉인했지만 루시의 오러를 뚫을 수가 없다. 그런다고 거리를 벌리자니 투창이 몸을 예쁘게 뚫어놓을 것이 뻔하다. 윈터펠은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득하는 게 귀찮더라도 륜을 데려왔어야는데!’

  루시의 방패를 감싼 오러가 변했다. 윈터펠의 감은 저 방패에 맞으면 폭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곤 루시가 휘두르는 방패를 피해 뒤로 굴렀다. 곧바로 강력한 회전력의 오러에 둘러싸인 창이 간발의 차로 머리카락과 얼굴가죽 일부를 뜯어갔다. 
  두 사람은 몇 번의 공방을 더 주고받았다. 허나 윈터펠은 루시를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루시는 조금씩이지만 윈터펠의 몸을 찢어갔다. 두어 번의 죽을 고비를 더 넘긴 후에야 윈터펠은 화가 치솟았다. 

  초월기를 사용해 루시의 오러를 지속적으로 풍화시키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미 벼림이 끝난 오러를 망설임 없이 포기하고 새로운 오러로 대체한다. 통상적으로 저런 게 가능한 오러 투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기에 윈터펠은 곤혹을 치루고 있다. 저런 짓은 말도 안 되는 방대한 오러를 가지고 있을 때나 가능한 짓이다. 윈터펠은 아이트라를 곁눈질했다. 

  아이트라 또한 지치고 있을 뿐 일한에게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이지 못하고 있었다. 일한의 방어력이 상식을 벗어난 덕분이다. 윈터펠은 혀를 찼다. 이대로 가면 결국 아이트라와 그는 죽고 만다. 잠깐 마음이 흔들리는 사이 창날에 담긴 오러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피가 뿜어져 나왔고, 회전력이 갑옷을 해체하고 가슴팍의 살가죽을 뜯어갔다. 윈터펠은 심호흡했다. 그리고 아이트라를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루시는 놓치지 않고 창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창이 채 손을 벗어나기 전에 윈터펠의 초월기에 묶였다. 한순간에 1초가 7초가 되어버린 그녀의 몸은 달려가는 윈터펠을 죽일 수 없었다. 부정시공 초월기의 부당함에 루시는 짜증이 났다. 

  “큰 거 쓸 테니 여자부터!”

  아이트라는 깜짝 놀라 윈터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을 놓칠 일한이 아니었다. 그의 대검이 아이트라의 목을 날려버리기 직전, 윈터펠이 죽은 사람처럼 힘없이 고꾸라졌다. 

  시간이 멈췄다.

  아이트라는 눈을 깜박였다. 창을 던지는 루시의 모습, 오러가 담긴 대검과 그걸 휘두르는 일한이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다. 세상은 원래 갖고 있던 색을 잃고 오로지 회색만 남아있다. 정신을 차리자 멈춰있는 게 일한과 루시 두 사람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게 멈춰있다. 병사들은 물론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우시르와 칼리모스의 격돌로 인한 충격파마저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제자리 박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트라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허나 목 위를 제외한 어떤 부위도 말을 듣지 않았다. 당황보다도 놀라움이 먼저 찾아온 그녀를 향해 윈터펠이 악을 쓰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 금방 풀어……줄 테니까! 풀리……는 데로 저…… 여……자부터…… 정리……해!”

  일어선 윈터펠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나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몸은 미라처럼 말라갔고,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든지 상체를 일으킨 두 팔이 격하게 떨린다. 

  “이봐 괜찮…….”

  윈터펠이 피를 토했다. 치사량에 가까운 피를 토해냈고, 지속적인 출혈이 있음에도 윈터펠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초월기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잃으면 시간의 틈에 갇혀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그가 남은 힘을 쥐어짰다. 

  아이트라는 점차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팔과 활이 멈춘 시간 속에서 자유가 됐을 때 그녀는 바로 루시를 겨냥했다. 일반 공격으로 루시의 갑옷과 오러는 뚫을 수 없다. 그녀가 쥐고 있는 투명한 활이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그녀는 황금빛 활의 시위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이 미천한 제가 도움을 구합니다. 힘을 빌려주세요, 벨레도르!”

  당기는 시위를 따라 눈을 아프게 하는 샛노란 빛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그녀가 시위에서 손을 놓았을 때 루시의 가슴을 비롯한 화살이 지나간 모든 자리에 사람 머리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분명히 머리를 노렸음에도 화살은 원하는 데로 날아가지 않았다. 아이트라는 아직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자신의 역량을 한탄하며 바로 일한의 머리통을 노렸다. 

  두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시간이 되돌아왔다. 루시는 진흙이 흘러내리듯 제자리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화살은 일한의 머리에 명중했지만 룬으로 만들어진 투구를 부수진 못했다. 허나 화살의 파괴적인 힘을 버텨내지 못한 일한은 내성벽을 뚫는 것도 모자라 영주의 궁전 바로 앞까지 튕겨져 나갔다. 모든 충격을 상쇄하지 못했기에 일한은 기절한 채 자신이 부순 성벽의 돌무더기에 깔렸다. 허나 그의 대검은 마지막까지 남아 아이트라의 등허리를 끊어놓았다. 

  완전히 동강이 나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이트라는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등허리에 박힌 대검을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칼에서 손을 놓다니……. 진짜 괴물이 다 됐구나.’

  아이트라는 최대한 오러로 육체를 지탱했다. 그녀는 대검을 뽑아내려했다. 하지만 척추가 끊어진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장수의 축복 탓에 지금 당장은 죽지 않을 것이다. 축복은 그녀에게 엄청난 생명력을 주었다. 허나 그것도 오러의 힘으로 육체를 지탱하고 있을 때뿐이다. 오러가 사라지면 대검의 무게로 그녀는 동강 날 것이다. 그때 찾아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녀는 점차 숨이 막혔다. 

  기절한 일한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그가 깨어나는 순간 이 전쟁은 이겨도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것이다. 아이트라는 안간힘을 썼지만 대검을 빼지 못했다.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박힌 대검을 뽑았다. 절단면에서 출혈은 없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많이 늦었나보네.”

  왕국 페이서스의 언어였다. 아이트라는 힘들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이트라의 몸에서 대검을 뽑아낸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예쁜 언니! 아직 움직이면 안 돼!”

  그녀는 아이트라의 등허리에 주술 각인을 새겼다. 각인은 정수를 통해 절단면을 재구축했다. 동시에 마나를 사용해 만든 피와 뼈, 신경, 살 등을 각인 속으로 집어넣었다. 각인 속에서 분해와 재구축을 반복해 아이트라의 몸이 된 것들은 끊어졌던 허리를 다시 붙였다. 이윽고 대검이 잘라낸 절단면마저 완벽하게 수복되자 아이트라가 고여 있던 피를 토해냈다. 뒤늦게 진정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트라와 같은 밝은 금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싱긋 웃었다. 전쟁터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백사장의 얕은 바닷물 같은 녹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눈동자로 아이트라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건강한 살구빛을 띄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말했다.

  “윈터펠은 저기 있고, 카로스는 어디 있으려나?”

  아이트라를 땅에 눕힌 여자는 윈터펠에게 다가갔다. 

  미라처럼 말라버린 윈터펠의 몸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의 두 눈은 진즉에 터져 볼품없이 머리맡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웬만한 시체도 윈터펠의 모습보다 형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썼나보네. 그렇게 쓰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그녀는 윈터펠의 몸에 손을 대려다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아직 ‘형별’이 끝나지 않았다. 지금 그를 건드린다면 분명히 ‘쳐형’될 것이다. 그녀는 뒤돌아 말했다.

  “아케인. 지금 윈터펠 건드리지마. 그리고 글랜이랑 라시드한테 펙서스나 챈슬러 둘 중 아무나 찾아오라고 시켜. 너는 윈터펠 근처에 아무도 접근 못하게 막고.”

  “예.”

  “우리 애들은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어?”

  “이번 ‘공간도약’으로 측백나무 전원 도착 예정입니다.”

  “와봐야 우리가 할 건 없겠다. 대기시켜. 챈슬러나 펙서스 오면 윈터펠의 형벌이 끝나는 대로 전장에서 이탈시키고, 현재 이 지역에 남은 편백나무랑 소나무 인원 점검해. 사망자는 시체든 인식표든 뭐든 찾아놓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싸우지 말고 정비! 알겠지?”

  “알겠습니다. 륜 님.”

  아케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륜은 윈터펠이 쓰러져 있는 땅 밑에 주술진을 새겼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윈터펠을 둘러쌌다. 아케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할 게 없던 그녀는 육포를 씹었다.

  잠시 후 펙서스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륜은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돌을 펙서스에게 던져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카로스는 또 수장 잡으러 갔나보지?”

  “언제 오셨……, 아, 예!”

  “알겠어. 아케인 오면 둘이서 저거 지키다가 주술진 사라지면 형벌이 끝났다는 거니까 데리고 바로 이탈해. 이것도 좀 먹이고.”

  륜은 펙서스에게 검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넘겼다. 그녀는 펙서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한눈에 울돌레이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높이가 되자 륜이 두리번거리며 카로스를 찾았다.

  “오, 저기 하나 있네.”

  그녀는 내성을 돌파한 카로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초월기를 쓰지 않고 평범하게 걷고 달리며 싸우는 중이라는 걸 확인했다. 또 다른 카로스가 어딘가에 있단 뜻이다. 그녀는 다른 카로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울돌레이 성의 한가운데 지어진 궁전에 시선이 닿았다. 그곳에서 오러의 파동이 느껴졌다.

  “다른 하나는 저쪽인가?”

  그녀의 몸이 궁전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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