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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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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95    추천 0   덧글 0    / 2019.01.15 14:43:41
  두 번째 카로스는 일그러진 카시프람의 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순간적으로 상대를 꿰뚫는 창이라 여겼을 때 열 개의 손가락에는 패기가 담겼다. 타 병장기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상당한 관통력을 갖게 된 손가락은 카시프람의 두개골을 비집고 들어가 뇌에 구멍을 뚫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기분 나빴다. 카로스는 그대로 적 병사들에게 카시프람의 시체를 집어던졌다. 그는 연이은 두 명의 지휘관과의 싸움에 지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맘 놓고 쉴 수는 없었다. 적이 몰려나오고 있다. 

  땀이 눈가를 적셔 쓰라리다. 그는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열었다. 기대했던 시원한 공기는 없었다. 사방에서 적과 아군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열기에 숨이 막힌다. 잠시 숨을 고르며 전황을 주시했다. 

  두 명의 울돌레이 지휘관, 카시프람과 주르반을 죽였지만 이쪽도 자담의 불칸을 비롯한 제법 많은 수가 죽었다. 적의 남은 일선 지휘관은 많아야 두셋. 아군은 카로스 자신을 포함한 자담의 써렐, 옹고쉬 용병단의 프롬푸쉬, 아트람 용병단의 리디아 총 넷이다. 그중 카트레아의 존재는 포착되지 않는다. 그녀가 야습 이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카로스를 불안하게 했다. 그는 땀에 절은 투구를 벗었다. 뜨거운 공기가 얼굴 전체에 와 닿았다. 

  카로스의 두 눈에 악을 쓰며 달려오는 울돌레이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카로스의 두 손에 무기는 없었다. 그는 벗은 투구를 붙잡고 그대로 병사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투기가 담긴 투구에 맞아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채 나자빠진 병사 위에 올라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칠이 벗겨져 드문드문 회색빛을 띄는 투구가 병사의 피와 뇌수로 물들었다. 카로스는 확실하게 곤죽이 됐다는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심호흡했다. 

  내성을 뚫고 들어오는 길목은 좁다.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에 포진하고 있던 적에게 아군은 둘러싸여 몇 배나 많은 머리수를 상대로 불리한 싸움을 이어간다. 

  아무리 초인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병사들이라 해도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스스로의 노력 위에 쌓인 게 아니다. 투기 운용의 기본인 ‘진자제어’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두세 명의 직접적인 공격에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된다. 

  단지 울돌레이 측의 병사 전부가 초인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지리적 열세를 억지로 뒤집어가고 있을 뿐이다. 

  진득한 피 냄새와 역한 땀 냄새가 섞여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벌써 몇 시간째 밀고 당기기의 연속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카로스는 자신의 계획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첫 번째 카로스가 영주의 머리를 가져오지 않았다. 분명 단숨에 결판을 낼 수 없는 강자를 만난 탓이리라. 

  그가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카트레아를 배제하고 여기서 죽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죽을 순 없다. 혹시라도 그의 죽음을 계기로 적 지휘관들이 작정하고 아군 지휘관을 한 명씩 노릴 수도 있다.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투구를 벗어 병사들의 괴성이 그대로 귓바퀴를 통해 머리에 전해진다. 그들의 소란에 힘입어 몸이 고양된다. 카로스가 시체에서 챙긴 방패와 도끼를 갈무리했다. 그는 방패와 도끼를 부딪치며 짐승처럼 포효를 질렀다. 

  눈앞에 보이는 적의 머리통을 도끼로 찍었다. 투기로 몸을 두른 병사였기에 머리가 한 번에 박살나지 않았다. 도끼를 수차례 내려쳐 머리를 수십 개로 쪼개 놓은 후에야 다음 병사를 향했다.

  체중을 실어 방패와 함께 적에게 부딪친다. 적이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면 도끼로 다리를 찍어 자른다. 다리 하나 없는 부상병은 언제든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다. 확실하게 목을 잘라 후환을 없앤다. 

  머리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방패를 들어 막는다. 몸을 웅크리는 사이 누군가가 방패를 전투망치로 내려쳤다. 손을 저리게 하는 위력을 보면 평범한 병사는 아닐 것이다. 카로스가 방패로 망치를 쳐냈다. 

  화살이 그의 투기를 찢고 어깨에 박혔다.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망치를 든 적의 가슴팍에 도끼를 꽂아 넣고 있는 힘껏 비틀며 빼낸다. 그의 억센 손길에 이끌려 가슴이 뜯겨져 나왔다. 누가보기에도 확실한 죽음. 허나 카로스는 약간의 변수조차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도끼가 가슴이 뜯겨나간 병사의 머리를 잘랐다. 

  아군 병사에게 철퇴를 휘두르는 적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피 때문에 미끈거리던 도끼가 카로스의 손을 빠져나갔다. 의도치 않게 날아간 도끼는 아군의 머리통을 찌그러뜨렸다. 죽은 아군에게 미안함을 느낄 새는 없다. 

  철퇴를 든 병사의 목을 방패로 가격한다. 그가 고통에 무기를 놓친 사이 방패를 여러 병장기에 맞아 상처가 난 부분으로 고쳐 잡았다. 울퉁불퉁하고 날카롭고 뾰족한 방패의 일부에 패기가 담긴다. 카로스는 그대로 내려찍었다. 허나 그가 구하려고 했던 병사의 얼굴은 이미 철퇴에 맞아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다. 살리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같은 건 없다. 카로스는 방패로 찍어 죽인 병사의 발밑에 떨어진 철퇴를 집었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입으로 들어온 피를 뱉어내고 병사의 머리에 박힌 철퇴를 끄집어냈다. 잘 빠지지 않았다. 발로 시체를 걷어찼다. 철퇴가 빠져나왔다. 

  살점이 묻은 철퇴는 그 자체만으로 살의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쉬는 사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큰 기백이 느껴졌다. 카로스의 어깨가 피곤함에 짓눌려 반응속도가 잠깐 느려진 사이 울돌레이의 지휘관 헹크 하크의 칼이 철퇴와 함께 오른손을 잘라갔다. 잘린 팔이 가져오는 고통에 주춤하는 사이 헹크의 칼이 머리를 노렸다.

  방패로 칼을 막은 카로스는 그대로 쳐내며 헹크의 무릎을 발로 후려쳤다. 생각보다 짙었지만 헹크의 투기는 무릎이 부러지는 걸 막지 못했다. 예상 했던 것보다 서로의 힘이 다른 면에서 차이가 난다. 

  패기는 헹크 쪽이 훨씬 날카롭다. 하지만 투기는 카로스가 더 짙다. 삼기는 기백이 비슷해도 부딪치기 전까지 어떤 게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다. 헹크와 카로스는 서로의 힘을 가늠하며 거리를 벌렸다. 

  헹크는 부러진 다리에 투기를 집중했다. 그는 근접전 기량은 카로스가 한참 위라고 판단했다. 잠깐 사이 팔을 잃었지만 바로 반격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을 때 계속 붙어 있는 건 위험했다. 그는 등에 걸어 두었던 활을 꺼냈다. 확실하게 죽이려면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카로스는 화살을 방패로 막으며 전진했다. 루벤가드의 짜증날 정도로 예리한 패기를 두른 화살에 비하면 그나마 맞아줄 만했다. 이럴 때마다 자신의 고속이동 초월기인 전투질주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서로 긴 싸움이 될 거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싱겁게 결판이 났다. 카로스와 헹크가 서로에게 집중하는 사이 뛰쳐나온 자담의 병사들이 헹크에게 달려들었다. 카로스가 시선을 잡아 끄는 틈에 그들의 병장기가 헹크의 몸에 박혔다. 카로스는 놓치지 않고 방패를 집어던졌다. 투척무기가 된 방패는 투기가 사라지며 패기가 담겼고 이내 헹크의 목을 잘랐다. 

  숨 돌릴 틈도 없다. 한 번에 네 명의 병사가 카로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선두의 병사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나머지가 휘두르는 칼을 피하고 하나 남은 팔로 갑옷과 투구의 틈을 노렸다. 눈을 찔러 안구를 터트린 병사의 팔을 짙은 투기가 주는 압도적인 완력으로 꺾었다. 그가 쓰던 칼을 빼앗고 휘두른다. 

  별다른 부상 없이 처리했다는 생각이 든 찰나 아군의 창대가 부러지며 날아와 늑골을 찔렀다. 평소라면 쉽게 피하거나 투기를 집중해 막아냈겠지만 최악의 상태에 가까워 감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결과다. 카로스는 출혈을 억제하며 천천히 창을 빼냈다.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회복을 서두르는 그를 수십 명이 덮쳤다. 

  한두 명을 죽이는 와중 카로스는 잘린 팔을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오른손이 있다 생각해 적을 향해 휘둘렀으나 병사가 입은 피해는 얼굴에 핏물이 조금 튄 정도였다. 대여섯 개의 병장기가 그의 몸을 찔렀다. 개중 패기와 오러가 담긴 창칼은 갑옷과 안에 입은 사슬갑옷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카로스가 주춤하는 사이 또 다른 무리가 달려들었다. 카로스는 이를 악문 채 아군 진형으로 뛰어들었다. 

  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아군 병력이 몰려나오며 지친 카로스를 자빠뜨렸다. 완전무장한 상태의 철갑 무게가 카로스를 짓눌렀을 때 그가 탄식했다.

  “이 씨발!”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녔다. 그중 아군에 밟혀 죽는 병사는 수도 없이 많이 봤다. 카로스와 비슷한 수준의 투사들도 부상을 입은 채 쓰러지면 밟혀 죽기 십상이었다. 다만 본인이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군에 밟혀 죽어가며 카로스는 전투속행을 사용할까 말까 고민했다. 허나 헹크를 죽여 전황이 유리해졌다고 판단한 그는 미련을 버렸다. 이제 이곳은 남은 병사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가 죽었다. 아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를 밟으며 전진했다. 

  그리고 두 번째 카로스가 죽음으로써 단 하나 남은 카로스는 고속이동 초월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

  뱃가죽과 장기를 보호하던 근육이 뜯겨나갔다. 카스트로는 힘없이 흘러내리는 장기를 두 손으로 애써 붙잡았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 보통사람이었으면 의식을 유지하기는커녕 바로 죽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자신을 찾아온 죽음에 맞섰다.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잿빛 기사가 다가오는 소리라 생각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잿빛 기사가 도끼를 높게 치켜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한 죽음이 목전이었지만 카스트로의 핏발 선 눈에 두려움은 없었다. 잿빛 기사, 게룬 딜 하이우든은 카스트로의 불굴의 정신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살려줄 수 없다. 그가 도끼로 카스트로를 내려치려는 순간 초월기의 흔적이 느껴졌다.

  등 뒤의 흔적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게룬은 카스트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죽어가던 카스트로가 사라졌다. 당황하는 사이 검은 기사가 다가왔다. 카로스가 어깨를 끊어놓은 탓에 갑옷 틈새로 피가 흘러나온다. 

  “마커스.”

  “죄송합니다. 게룬 경.”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마커스의 목소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게룬은 초월기로 보호받고 있는 영주를 돌아보았다.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투구를 쓴 채였지만 마커스는 게룬이 짜증이 났다고 느꼈다. 

  ‘무엇에 대한 짜증이지……?’

  게룬과 마커스의 정면, 궁전의 출입구에 다 죽어가는 카스트로와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카로스가 서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저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삼기 투사들이 가진 끝없는 저력에 몸서리치며 게룬이 말했다.

  “방금 전 초월기는 고속이동 계열인가?”

  “아마도 그렇습니다.”

  게룬이 카로스를 주시했다. ‘그럼 왜 진즉에 안 쓴 거지?’ 의아해하는 게룬을 향해 카로스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무슨 행동인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도발을 하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커스가 움직이려는 순간 카로스는 카스트로에게 부러진 칼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카스트로가 카로스의 목을 쳤다. 갑작스러운 아군 살해에 놀라 멈칫한 마커스를 향해 게룬이 소리쳤다. 

  “이런……! 마커스!”

  그 순간 ‘전투속행’으로 자신을 복제해낸 카로스가 ‘전투질주’로 달려들었다. 그의 칼날은 마커스의 머리를 노렸다. 두 팔로 있는 힘껏 휘둘렀지만 투구에 작은 상처를 내는 데 그쳤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카로스는 초월기로 보호받는 영주에게 다가갔다. 그는 영주를 지키는 보호막을 힘껏 내려쳤다. 

  패기가 담긴 칼날과 초월기가 부딪치자 불똥이 튀었다. 초월기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카로스는 이 초월기를 깰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곧바로 카스트로에게 돌아갔다.

  카스트로의 상태는 심각했다. 하지만 삼기 투사인 이상 지금 당장 죽지는 않을 것이다. 즉사가 아니라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투기는 카스트로의 몸을 회복시킨다. 카로스가 심호흡했다. 

  지금 저 두 기사가 함께 달려온다면 승산은 없다. 두 번째 카로스가 제때 죽어줬지만 혼자서 룬 무기를 든 오러 투사 두 명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다. 그는 카스트로를 데리고 도망치는 걸 우선순위로 삼았다. 

  지금 당장 영주의 머리를 취하지 못한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유용한 전력인 카스트로를 잃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지 기회는 온다. 카로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격할 수 있게 감을 두 기사에게 집중했다. 그는 카스트로의 상태를 살폈다. 

  내장이 쏟아지는 걸 두 손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 투기는 떨어져나간 뱃가죽과 복근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룬이 가진 룬과 카스트로 본인의 초월기로 인한 상처는 투기가 회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서서히 상처가 넓어지는 걸 지켜보던 카로스가 말했다. 

  “사는 건 어렵겠어.”

  누구보다 스스로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카스트로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억지로 폈다. 조심스럽게 복면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복면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카로스는 두 기사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복면에 감춰져 있던 얼굴은 평범했다. 마흔이 가까워오는 사내의 얼굴은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밤과 그림자의 여주인이시여……. 미천한 종이 단신을 알현하러 가는 것을 반겨주시옵소서.”

  그가 고개를 떨궜다. 

  “나는 카사둔의 암살자, 카스트로 두라베타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섬긴다. 밤과 그림자의 여주인께 영원한 안식 있으리.”

  카스트로가 손으로 붙잡고 있던 장기를 쏟아버렸다. 그의 장기가 있던 곳으로 어둠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카스트로의 곁으로 륜이 다가왔다. 그녀는 카스트로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고 급하게 주술각인을 박아 넣으려 했다. 

  “이봐, 움직이지 마.”

  그런 륜을 카스트로가 제지했다. 카스트로는 륜이 사용한 왕국 페이서스의 언어로 말했다. 

  “소용없어. 내 몸은 이제 끝났다.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저 자를 도와줘. 혼자 둘을 상대하느라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니.”

  륜은 입술을 깨물었다. 카스트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무리 뛰어난 이가 와도 회복시킬 수 없다. 단순히 ‘육체’만 너덜너덜해진 게 아니다. 카스트로의 영혼도 갈기갈기 찢어져 ‘존재’ 그 자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마나, 정수, 황천. 마법사, 주술사, 흑마법사의 힘의 원천. 륜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다룰 수 있다. 그리고 흑마법사들의 황천은 그들에게 ‘영혼을 볼 수 있는 눈’을 준다. 륜은 카로스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카스트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카스트로가 편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죽을 수 있게끔 그의 몸에서 고통을 지웠다. 비틀거리던 몸이 제대로 걷기 시작했다. 

  마나를 카로스의 몸에 감는다. 그 마나를 정수로 바꿔 카로스의 몸 곳곳에 주술각인을 새긴다. 각인이 카로스의 육체를 강화한다.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해지는 육체를 느끼며 카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륜과 카스트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그가 검은 기사의 갑옷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그녀의 몸이 수 미터를 날아갔다. 동시에 게룬이 륜과 카스트로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카로스는 게룬의 몸을 발로 찼다. 

  게룬의 초월기가 발동했지만 카로스는 고속이동으로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그는 부러진 칼을 내던지고 게룬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그대로 게룬을 붙잡은 채 뒤로 넘겼다. 당황하는 사이 게룬의 몸뚱이는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카스트로의 몸에서 짙은 어둠이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감기는 눈을 강한 정신력으로 붙잡는다. 카스트로는 죽기 직전의 상태임에도 기력이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로군.”

  어차피 죽는다면, 그럼에도 완전한 사망 전까지 기력이 평소와 같다면 이제 아낄 필요 따윈 없다. 그가 품속에서 새까만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구슬을 깨트렸다. 

  “퀘이사님. 살아남으라고 주신 힘,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못하는 걸 용서해주십시오.”

  깨진 구슬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카스트로를 붙잡았다. 어둠은 점차 카스트로의 몸을 좀먹었다. 잠깐 사이 어둠은 그의 몸뚱이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입고 있던 옷가지와 무장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모습이 기괴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카스트로를 잡아먹은 어둠이 영주를 향해 움직였다.

*

  게룬과 마커스는 강화된 카로스의 몸을 4등분했다. 허나 카로스는 ‘전투속행’을 통해 다시 나타났다. 마커스는 끊어진 어깨가 가져오는 고통에 신음하며 말했다.

  “게룬 경. 저 남자, 죽긴 죽는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어깨의 지속적인 출혈이 마커스의 체력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게룬은 금이 간 그녀의 투구를 흘기며 답했다.

  “죽긴 죽더군. 자네도 봤지 않나? 다만 다시 나타날 뿐이지.”

  오른쪽 어깨가 꿰뚫려 방패를 포기했던 마커스의 몸이 떨렸다. 게룬은 그녀가 간신히 몸을 움직이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오러 투사가 아닌 삼기 투사였다면 저 정도 부상은 순식간에 회복했을 것이다. 게룬이 시간을 더 끌면 안 되겠다 결정하고 룬이 가진 초월기를 사용하려 했다. 그때 카스트로를 먹은 어둠이 궁전 내부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게룬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초월기가 아니군.’

  게룬은 자신의 룬 ‘축성’이 가진 초월기를 사용했다. 마커스와 자신을 보호하며 울돌레이 성의 영주 베오른을 지키던 초월기를 취소했다. 어둠이 그들을 지나쳐 영주를 향했다. 그 모습에 마커스가 당황하며 자신의 초월기 ‘철벽’에서 뛰쳐나가려는 걸 붙잡았다. 

  “게룬 경? 지금 영주님이……!”

  게룬은 마커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는 일어서려 버둥거리는 그녀의 투구를 도끼자루로 내려쳤다. 기절한 마커스를 뒤로하고 게룬이 자신의 초월기를 벗어나 카로스를 향해 다가갔다. 어둠은 그런 게룬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영주만을 노렸다.

  ‘죽은 뒤에도 목표를 이루려하는 저 의지. 참으로 삼기 투사답다고 해야할까. 정말 본받지 않을 수 없군.’

  그는 카스트로의 마지막 초월기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걸 확신했다. 저 초월기에 담긴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커스가 가진 룬, ‘정의’로도, 영주 베오른의 균열의 조각, ‘명료해지는 의식’으로도 막을 수 없다. 

  물론 그의 룬, ‘축성’이라면 완벽하게 막진 못해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그 틈에 영주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게룬은 그러지 않았다. 

  게룬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카로스와 카스트로, 두 사내와 싸우느라 땀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이 이겼다.”

  어둠이 게룬의 ‘철벽’이 사라진 영주를 집어삼켰다. 그는 균열의 조각이 가진 초월기를 사용했지만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감히 자신에게 대항하려한 것이 불쾌했는지 오히려 더 격하게 움직였다. 

  노인의 비명소리가 귀를 간질였지만 게룬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게룬의 눈앞에 선 카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을 버렸다. 

  “왜 안 막지? 충분히 가능할 텐데.”

  현지인이 아닐까 의심되는 유창한 로고스 왕국의 말이었다. 게룬은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며 답했다.

  “전쟁에 미친 늙은이는 죽었다.”

  “그런가? 하긴 당신들도 여러 사정이 있겠지.”

  게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로스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남자는 충분하다고 받아들였다. 카로스가 게룬을 지나쳐 왕좌로 다가갔다. 

  그곳엔 영주의 옷가지와 그가 사용하던 균열의 조각이 남아 있었다. 카로스는 균열의 조각을 전리품으로 챙겨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필요한 건 룬이지 균열이 아니야.’

  필요 없는 물건을 갖고 다녀봐야 짐만 된다. 카로스는 몸을 돌렸다.

  “저거, 안 가져가?”

  륜은 균열의 조각을 돌아보며 말했다. 카로스는 고개를 가로 저였다.

  “균열의 조각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나빠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존재가 건드리면 공격해. 룬이 말로 잘 타이르는 것과는 다르다고.”

  “네가 주인이 될 수도 있잖아? 시도라도 해봐.”

  카로스가 갑옷을 하나씩 벗어던졌다. 땀에 절은 근육질 몸뚱이가 드러났다. 그가 심호흡했다. 

  “후. 룬은 대부분 성격이 느긋해서 잡아봐야 알지만, 균열의 조각은 성격이 급해. 마음에 드는 놈이 다가오면 그쪽에서 먼저 반응하지. 나한텐 안 그랬잖아. 다가오지 말란 뜻이야.”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로스는 카스트로의 옷가지와 장비를 챙겼다. 륜이 말했다. 

  “그런 건 왜 챙겨? 지저분하게.”

  카로스가 륜을 노려보았다. 그는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분노한 채 이를 갈았다. 

  “고작 나 따위의 작전에 목숨을 걸고 함께 한 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삼기 투사로서 보여줄 수 있는 불굴의 의지를 실현했어.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너나 나나 여기서 죽었다. 감복할 줄 모르면 그 입이나 다물고 있어. 나와 함께해 죽음까지 간 사람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살의가 담긴 카로스의 시선에 륜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도와주러 왔더니 화를 내고 난리야…….”

  시무룩한 륜을 무시한 채 카로스는 궁전을 나섰다. 밝은 태양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시가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그는 연기와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열된 몸이 식어간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마무리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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