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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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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더미 - Chapter. 겨울.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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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24    추천 0   덧글 0    / 2019.01.17 13:39:18
  왕좌에 걸터앉은 테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초월기를 유지하느라 바닥난 오러를 갈무리하며 살아남은 지휘관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아이트라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페너트레인은 곳곳에 멍든 몸으로 궁전을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 말하려던 찰나 짜증을 이기지 못한 써렐이 먼저 말했다.

  “페너트레인,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이번 전쟁에서 눈 하나를 잃은 써렐은 페너트레인을 쏘아보았다. 하나뿐이 남지 않은 눈에서 뿜어지는 짜증은 페너트레인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페너트레인은 써렐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테이라와 아이트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흠흠. 아무래도 언령을 쓰고 난 뒤에는 자연이 저를 가만히 놔두질 않아요. 계속 부른다니까요?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써렐 경.”

  써렐은 짙은 갈색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페너트레인의 말은 사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의 마지막까지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에게 짜증을 내는 건 도리가 아니다. 써렐은 주름진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긁으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너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심술을 부렸군.”

  “에이, 아닙니다. 가끔 저도 이런 제 모습에 짜증이 날 때가 있으니까요.”

  써렐이 피식 웃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눈가를 매만졌다. 그를 지켜보던 페너트레인이 테이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페너트레인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울돌레이와 전쟁은 끝났는데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로고스가 울돌레이가 이렇게 넘어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텐데요.”

  테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페너트레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페너트레인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테이라가 이마를 짚었다. 

  “우리 임무는 울돌레이를 점령, 수비하는 것까지입니다.”

  “수비요? 뭔……?”

  “예. 페너트레인 경, 경의 말대로 로고스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울돌레이가 자담과 로고스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진 않았다고 한들 자담이 가져가는 걸 지켜만 볼 위인들은 아니니까요.”

  “허어……. 헌데 로고스 쪽에서 작정하고 들어온다면 현재 남은 병력으로는 수비가 불가능합니다. 부상자도 너무 많고요.”

  “그래서 세자저하와 제1공주께서 울돌레이에 오실 예정입니다.”

  페너트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이트라를 쳐다보았다. 제국 실반의 상급기사이자 테이라의 후견인인 그녀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한마디 해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트라는 그저 근심에 가득한 표정을 한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같은 제국 기사인 일한과 만나고 온 뒤로 쭉 저 상태다. 페너트레인은 언제나 냉철하던 아이트라가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써렐을 돌아보며 아이트라를 가리켰다. 써렐도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페너트레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세자랑 제1공주가 테이라 님의 공적을 가로채겠다는 뜻 아닙니까?”

  써렐이 신물이 난다는 투로 말했다. 

  “하아……. 정말이지 정치판은 더럽기 그지없군. 아이트라 기사장님이 후견인으로 나서고 힘이 강해진 테이라 님을 견제하기 위해 울돌레이에 보내놓고, 일이 다 끝나니 와서 거저먹겠다? 잘들 노는군.”

  테이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아이트라를 바라봤다. 허나 그녀는 여전히 근심에 가득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일말의 배신감을 느낀 테이라가 고개를 떨궜다. 

  왕은 울돌레이를 14일 만에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유능한 인재들을 만나 성공시켰다. 다만 그들은 모두 사비로 사들인 용병들이었고, 지금은 다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녀의 병사들에게도 희생에 대한 대우를 해줘야만 했기에 그들을 두 번 고용할 돈은 없다. 

  ‘내놓은 자식이라는 게 이렇게도 발목을 잡나……. 왕위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식구들 잘 먹고 잘 사는 걸 보는 게 이렇게도 힘들다니…….’

  “짜증나.”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테이라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페너트레인과 써렐은 자담 왕국의 적폐를 씹고 뜯느라 바빠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즈음 아이트라가 말했다.

  “뭐가요?”

  “드, 들었어?”

  “아, 따등나! 이거요?”

  테이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트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써렐, 페너트레인. 집중하세요. 테이라 님도 그만 얼굴 드시구요. 자, 여러분. 전달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써렐과 페너트레인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아이트라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런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하지 않다. 그런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아이트라가 말을 이었다. 

  “우린 수많은 병사들과 그들의 지휘관을 잃었습니다. 장례를 치러주기에는 아직 제대로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고 준비할 게 많아 미뤄둔 상태입니다. 출발할 때는 6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지만, 지금은 그 절반 가까이 됩니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도 모자라지만 여러분들이 얘기들 나누셨다시피 로고스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세자저하와 제1공주께서 울돌레이의 공을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자담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들이 병력을 지원해준다거나 하지는 않겠죠. 최악의 경우 로고스와의 싸움도 우리끼리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페너트레인이 탄식했다. “말도 안 돼!” 써렐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테이라 또한 연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아이트라는 그들을 타이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운이 좋습니다. 용병들이 떠나기 전에 선물을 주고 가더군요.”

  다들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하고 아이트라를 쳐다보았다. 아이트라가 궁전의 입구를 향해 턱짓했다. 

  “정말 운이 좋습니다. 우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써렐과 페너트레인은 경계했다. 테이라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멍한 얼굴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써렐은 아이트라를 웃도는 수준의 위상을 느끼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궁전의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모습을 비췄다. 

  게룬의 잿빛 갑옷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

  “질기네.”

  보급용 육포를 뜯어먹던 윈터펠이 말했다. 카로스는 말들에게 여물을 먹이며 윈터펠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잘만 처먹네.”

  윈터펠은 메마른 몸을 이끌고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온 몸에 칭칭 감은 붕대가 거슬렸다. 윈터펠이 짐칸에 올라타자 카로스는 마부석에 앉았다. 말들이 여물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며 카로스가 말했다.

  “안 자도 되겠냐?”

  “어차피 계속 기력 빌려오는 중이라 상관없어. 생각보다 형벌이 짧기도 했고.”

  윈터펠은 짐칸에 실려 있던 카로스와 자신의 몫인 각각 30만 루블이 담긴 두 개의 주머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딴 푼돈 때문에 천 명이라…….”

  “고작 이딴 푼돈이라도 우리 같은 하루살이들은 몇 달을 먹고 살지.”

  “그래도 천 명은 수지 안 맞아.”

  카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펠이 돈주머니를 베게 삼아 누웠다. 

  “이번에 불멸자 일 끝나면 돈 더 준다 했으니 분배하고 남는 걸로 용병 때려치고 다른 일이나 찾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카로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화창했다. 카로스가 말했다.

  “무슨 일? 칼 쓰는 거 말고 우리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냐?”

  윈터펠이 머리를 벅벅 소리가 나도록 긁었다.

  “뭐든 있겠지. 장사를 하든 술을 팔든. 남은 애들마저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다들 고생했으니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지. 이제 우리도 평화롭게 좀 살자. 지친다야.”

  카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가 말했다.  

  “맞는 말인데 네가 하니까 진짜 개소리 같다. 내가 예상하는데 너 몇 년 뒤에 분명히 규모 커졌다고 좋아하고 있을 거다.”

  “헹. 두고 보던가. 아, 야. 너랑 싸웠다던 그 기사들,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돼? 둘 다 잘 살아 있지. 못 죽여 내 실력으로.”

  “아니, 네 실력 끽해야 나랑 비슷한 수준인 거 다 알아서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너나 나나 찌끄래기니까 못 이기는 놈들 천지잖아. 포섭 건 어떻게 됐냐고.”

  “실패입니다. 손님. 실패한 김에 협상 좀 해서 자담 쪽에 힘 좀 보태달라고 하긴 했는데.”

  “네가 그럼 그렇지. 멍청한 새끼. 갈 데 없는 그 좋은 인재들을 놓치냐? 에효.”

  “지금 마차 돌릴 테니까 네가 가서 포섭해올래? 너도 못하면, 마침 우리 규모도 절반으로 줄었으니 그날로 우리 단장은 셋에서 둘 아니면 하나 된다?”

  “죄송합니다. 제가 뭘 아나요. 헤헤.”

  실없이 웃는 윈터펠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카로스는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짐칸에 누워 있던 윈터펠이 시가냄새에 코를 막으며 성을 냈다. 

  “아, 씨. 머리 아프다고 병신아!”

  “어쩌라고? 너도 피던가. 아니면 네가 마차 몰아.”

  “아……, 아……! 아아악! 개새끼 진짜!”

  카로스가 코웃음 쳤다.

  “음……. 우리 엄마는 분명 죽기 전에 사람이었는데?”

  “아오! 꺼져 병신아!”

  신경질을 내는 윈터펠을 보며 카로스가 큰 소리로 웃었다. 말들이 여물을 다 먹은 걸 확인한 카로스가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 불멸자 일 한다며?”

  “아이 씨……. 기다려봐.”

  윈터펠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짐칸 한구석에 처박아뒀던 가죽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대륙의 남동부, 신성제국 페스벤과 정의의 왕국 나크셔스, 빛의 왕국 펜실펜 그리고 대양의 왕국 길갈라드가 패자로 군림하는 지역의 지도였다. 지도의 한 지역을 손등으로 툭 치며 윈터펠이 말했다. 

  “우선 나크셔스 북부, 겔러스문드로 가자.”

  “우선?”

  “그래, 우선. 그쪽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지 우리한테 일임했거든. 꾸준히 정보 모아본 결과 그쪽에 있을 확률이 높아서.”

  “염병한다. 나크셔스면 완전 먼데. 마차 타고 가면 몇 년이 걸릴 줄 알고……. 집결지에 마차 두고 그리핀 타고 가야겠다.”

  카로스가 시가 연기를 내뱉었다. 이제 보니 ‘불멸자’의 의뢰가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카로스가 말했다.

  “근데 의뢰가 대체 뭐냐? 뭔데 나까지 필요하고 나크셔스까지 가야해?”

  “너만 필요한 거 아니야. 우리 전부 필요해.”

  “아, 그니까 뭐냐고.”

  “사람 하나 찾아서 ‘검은 숲’으로 데려가는 거. 방해되는 건 다 치우라더라.”

  카로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윈터펠을 향해 몸을 틀며 말했다.

  “미친…….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대제국 3개 인구 합하면 못해도 170억 명 정도 되는 걸로 기억하거든?”

  “거의 180억 된지 좀 됐다고 들었는데.”

  “아니, 씨발! 야! 말이 돼? 대륙 전체도 아니고 제국 세 개 합한 게 180이야! 다 합하면 대체 얼마인지 감도 안 잡히는데! 이 미친 정신 나간 또라이 개 씨발 새끼야! 왜 사람 찾는 흥신소가 돈을 많이 받는데? 이 씨발! 말이 안 되게 넓은 이 땅덩어리에 그만큼 말도 안 되게 머리수가 많아서 그런 거 아냐! 정신병자 새끼야! 대체 얼마 받고 이딴 병신 같은 일거리를 받아온 거냐? 어? 진짜 또 개소리하기만 해라! 그 아가리 찢어가지고 제국에 네 목 들고 간다?”

  “황금 1톤. 순금으로. 그것도 선금.”

  “장난……!”

  역정을 내던 카로스가 무언가를 깨닫고 입을 벌렸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퍽 소리 나게 붙잡았다. 

  “진짜였냐…….”

  “진짜라 했잖아.”

  카로스는 허탈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 야, 그럼 이번에 죽은 애들 거 제대로 빼놔라.”

  “진즉에 빼서 우리 부대는 나눴어. 측백이랑 편백만 나누면 돼.”

  “하여튼 소나무 이 양아치 새끼들 진짜…….”

  윈터펠이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카로스가 짐칸으로 자신의 칼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아! 미친놈아!”

  “웃음이 나오냐? 웃음이 나와? 지금 나크셔스 가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어휴, 하여튼 이 병신은 진짜……. 처 자 병신아! 요 앞에 마을 하나 있던데 거기 도착하면 술이나 한 잔 할 거니까 알아서 일어나고. 근데 그거 기한은 얼마나 되냐? 선뜻 돈 준 거 보면 기한 무제한, 뭐 그런 거냐?”

  “어. 그냥 우리 살아 있는 동안까지라고 하던데?”

  “그나마 낫네. 일단 가자. 어차피 일을 맡은 순간 조진 거 같은데. 이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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