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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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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의 수는 채 쉰 가구가 되지 않는다. 보이는 집의 수가 적은 만큼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도 많지 않음은 당연한 말이다. 

  왕국 페이서스의 변두리에 위치한 아달탄에서도 더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집 한 채에서는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밤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만, 뚝. 공주님, 뚝.”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진정시키는 아버지는 아이의 나이에 비해 젊어보였다. 그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신비한 힘이 담겨있지 않았지만 방금까지 세상을 떠내려 보낼 것처럼 시끄럽게 울어대던 여자아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아이는 퉁퉁 붓고 벌겋게 변한 두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인자한 느낌을 주는 고동색 눈동자로 여자아이를 마주보았다. 아이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백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을 가지고 있다. 사내는 백금을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뽑아낸 듯한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내는 여자아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아가씨, 그만 울어요! 빵이야 다시 구우면 되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오늘 페아르 생일이에요.”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답했다. 사내는 아이에게 울지 말라는 뜻으로 하얀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아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사내가 쥐어준 손수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사내가 말했다.

  “아, 오늘이 페아르 생일이구나. 알타이르나 게오르그는 언제니? 우리 딸이 챙기는 걸 본적이 없는데?”

  아이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고개만 주억거리는 것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가 말하지 않는 아이를 대신해 먼저 입을 열었다.

  “딸! 아빠가 전에도 말했잖아. 엄마한테는 말 못할 것이라도 아빠한테는 말해도 된다니까? 알잖아. 이 아빠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

  사내는 믿어달라는 듯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귀를 대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사내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겉으로는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딸에게 귀를 가져다댔다. 아이는 사내의 귀에 속삭였다.

  “사실 걔들 생일이 없어요! 그래서 셋이 만난 날을 생일로 하는 거래요…….”

  아이는 아버지의 귀에서 멀어졌다.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한 채 말했다.

  “아빠. 엄마한테는…….”

  “응. 비밀이지.”

  아이는 방금까지 울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밝은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내는 그런 딸을 보며 아버지라는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앗!” 

  한참을 웃으며 아버지에게 이것저것을 떠들던 아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 타버린 빵을 두 손에 쥔 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방방 뛰었다. 사내는 요리에는 전혀 손재주가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최대한 딸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딸, 딸!”

  “으앙, 왜!”

  “그, 다 타버리긴 했어도 정성을 보면 좋아할…….”

  “싫어! 페아르가 놀린단 말이야.”

  사내는 두 손에 빵을 꼭 쥐고 집안을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는 딸의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사내는 뒷목을 가볍게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사. 좀 도와줘.”

  “뭐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사내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답이 들려오자 퍽 놀랐다. 그는 두 눈을 바보처럼 끔뻑였다. 사내의 뒤에 서 있던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훤칠한 키의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내는 탁자 위에 장을 봐온 물건들을 내려놓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빵을 태웠데.”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황한 사내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사내는 집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딸을 가리켰다. 딸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그녀는 씩 웃더니 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마늘 빻아놓고 감자랑 무 깎아요, 클라이프.”

  “예, 마님.”

  클라이프는 고개를 꾸벅인 뒤 엘사가 장을 봐온 물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클라이프는 그녀가 시킨 대로 마늘과 감자, 무를 찾았다. 그런 뒤 먼저 마늘을 빻으며 두 모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늘을 빻는 건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클라이프는 상당한 양이었음에도 몇 분 만에 엘사가 장을 봐온 것들을 전부 다진 마늘로 만들어 놓았다. 

  클라이프가 열심히 마늘을 따고 빻을 즈음 엘사는 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엘사의 긴 금색의 머리카락이 아이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우리 딸, 무슨 일이기에 그래?”

  “엄마, 엄마! 이거……, 이거, 빵!”

  엘사는 딸이 보여주는 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빵은 빵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검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먹으면 복통과 설사를 유발할 것만 같은 흉측한 몰골에 엘사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딸에게 왜 빵을 태워먹었냐고 윽박지르는 대신 엘사는 왜 딸이 빵을 만들려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클라이프나 자신에게 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생일 선물로 빵을 준비하는 중이었다면 말이 되지만 엘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엘사나 클라이프의 생일은 아직 조금 남았다. 벌써 준비하기엔 이르다. 그리고 설령 준비 중이었다면 딸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빵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답은 하나네. 또 그 아이들이겠지.’

  엘사는 딸이 빵을 만든 이유를 바로 유추해낼 수 있었다. 이 깊은 산골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던 어린 사내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딸이 출신도 알 수 없는 사내아이 세 명과 어울린다는 게 퍽 마음 놓이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비하겠다는 딸을 말릴 정도로 매정한 엄마는 되지 못했다. 그녀는 흉측한 몰골의 빵을 단상 위에 올려두고 딸의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랑 같이 만들자.”

  “엄마랑?”

  아이는 엄마랑 빵을 만든다는 사실이 기쁜 반면, 어딘지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엘사는 미소 지은 채 딸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아빠는 저거나 하게 내버려두고, 엄마랑 둘이서 만들자.”

  “……이보세요. 나만 따돌리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 들지 않아요?”

  “글쎄요?”

  클라이프는 입맛을 다시며 감자와 무 껍질을 마저 벗겨내기 시작했다. 마늘을 빻을 때 보여주었던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껍질을 벗겨낸 클라이프는 손에서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칼을 쥐고 있던 손을 움직여보았다. 손은 지금까지 클라이프라는 사내가 살아온 날들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클라이프의 시선이 벽난로를 향했다. 정확히는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벽걸이형 액자였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빵 만들기가 한창인 모녀들을 쳐다봤다. 

  엘사는 하루 종일 딸과 빵을 만들었다. 덕분에 고독해진 클라이프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장작으로 쓸 겸 패왔던 나무토막을 하나 집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칼 하나를 꺼내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한참 겨울이 진행 중인 산속은 무척 추웠다. 몸을 녹이기 위해 가져왔던 따뜻한 물이 두껍게 얼어붙었다. 영혼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 속에서 클라이프는 묵묵히 나무를 깎아내는 데 집중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금방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측백나무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준다. 그 나무들 사이사이로 찬 공기와 함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클라이프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안에서 큰 소리가 들리자 나무를 깎던 손을 멈추었다. 뜨거운 물도 오래지 않아 얼어버리는 추운 날씨였음에도 그의 손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창문 사이로 드문드문 엘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하얀 크림 같은 것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엘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도 없는, 언제나 차갑고 냉정한 여인이었던 걸 생각해본다면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클라이프는 창문 너머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클라이프는 다시 칼을 쥐고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게 된 나무토막이 열댓 개가 넘어갈 즈음 집안에서 빵을 만들고 있던 딸이 클라이프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딸의 목소리에 클라이프는 절로 흘러나오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클라이프는 칼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딸의 빨리 오라는 손짓에 클라이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런 기분 좋은 마음으로 걸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수 있기를.’

  집안으로 들어간 순간 구수한 빵 냄새가 클라이프의 코끝을 간질였다. 클라이프는 구수한 빵 냄새를 맡으며 딸과 아내가 만든 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딸이 자랑스럽게 가리켰기 때문에 그녀들이 만든 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빵이었다. 어디에도 크림이나 잼이 들어간 것 같지는 않다. 

  도대체 왜 아내의 얼굴에 하얀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지, 딸의 손이 잼 범벅인지 이해할 수 없던 클라이프는 딸이 주는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빠, 아.”

  “아.”

  빵은 무슨 짓을 했는지 안쪽에 크림과 잼이 가득 차있었다. ‘제법, 다네.’ 클라이프는 딸이 만든 음식을 먹으며 이렇게 몸이 멀쩡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내가 함께 만든 덕을 톡톡히 본다고 생각하며 클라이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맛있네.”

  말하는 동시에 고개를 슬쩍 들어 엘사와 눈을 마주친다. 엘사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클라이프와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턱짓했다.

  “우리 딸이 만들었죠.”

  클라이프는 피식 웃었다. 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엘사는 부녀가 장난치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다. 엘사는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 즈음 클라이프의 시선도 밖을 향하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엘사가 어렴풋이 들린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엘사가 클라이프와 딸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클라이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로 휘파람을 부르고 있었다. 엘사는 사라진 빵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테아는?”

  클라이프가 딸이 나가며 열어두어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가리켰다. 엘사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클라이프를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노려보던 엘사는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클라이프가 문을 막아서는 덕분에 딸을 뒤쫓을 수 없었다. 엘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해요? 비켜요.”

  “벌써 8년이나 지났어. 적어도 여기는 위험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믿나요? 그것들이 얼마나 끈질긴지, 얼마나 악랄한 것들인지 당신이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그것들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추격을 멈춘 적 없을 거라구요. 그리고 저 애들이 끄나풀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나요? ……전, 단장님이 왜 테아를 방치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왜 그러시는 거죠? 일레나 님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말은 벌써 잊으셨나요? 겨우 8년 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타성에 젖으신 건가요? 비키세요.”

  클라이프를 밀어낸 엘사는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거의 부술 듯한 기세로 문을 닫아버린 엘사의 뒷모습을, 클라이프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딸의 이름을 부르짖는 엘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클라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벽걸이형 액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라리 타성에 물들고 전부 다 잊어버린 채 너와 살고 싶다고 몇 번을 생각해봤는지 몰라. 하지만 나도 너처럼 그럴 수가 없더라. 너에게만은, 행복한 삶을 주고 싶었는데……. 그게 일레나와 크라서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차라리 네가 모든 걸 잊고 갈라테아만 바라보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엘사.”

  고개를 떨구고 있던 클라이프는 벽난로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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