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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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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85    추천 0   덧글 0    / 2019.01.21 13:32:53
  수북이 쌓여있던 눈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눈 덮인 하얀 무언가가,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사람의 얼굴과 비교하자면 여드름 같은 그것은 거뭇거뭇했다. 거뭇거뭇한 물체는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자 쌓여있던 눈이 사라졌다. 검은 물체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검은 물체는 눈밭에서 기어 나왔다. 

  “데리고 가셨어. 아무도 없다.”

  알타이르는 눈 속에 파묻힌 덕분에 젖어버린 머리를 헝클었다. 알타이르의 신호에 맞춰 차례대로 눈구덩이에서 소년들이 기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빠져 나온 페아르는 옷에 묻은 눈을 털며 게오르그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오르그는 페아르의 손을 붙잡았다. 빠져나온 게오르그는 머리에 묻은 눈만 대충 털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허름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으며 말했다.

  “뭐……, 오늘도 우리끼리 놀아야겠네.”

  알타이르는 엘사가 갈라테아를 데리고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아르는 아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공주 역할은 없는 거네.”

  “어쩌겠어. 늘 하던 대로 셋이서 놀아야지.”

  페아르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게오르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페아르의 모습을 지켜보던 게오르그는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다는 걸 직감했다. 무엇으로 화제를 돌리면 좋을지 생각해보던 게오르그는 엘사의 생일과 생일 선물에 초점을 맞췄다. 게오르그가 말했다. 

  “테아 엄마 생일 선물 말인데.”

  화제가 전환되었다는 걸 깨달은 알타이르가 경계감시를 그만두고 게오르그를 쳐다보았다. 화제에 흥미를 느낀 페아르의 얼굴도 살짝 펴졌다. 게오르그는 잔뜩 기대에 찬 페아르의 눈빛과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는 알타이르를 향해 헛기침을 해보였다. 덕분에 눈치가 빠른 알타이르가 게오르그에게 의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알타이르는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원체 표정이 없는 얼굴이지만, 세 소년 중에서는 갈라테아에게 가장 잘생겼다는 평을 받은 알타이르의 입매를 살짝 비튼 모습은 제법 여자들의 마음을 훔쳐봄직했다. 하지만 게오르그는 알타이르의 얼굴에서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각오해라.’는 생각을 읽어냈다. 게오르그는 기겁하며 말을 이었다.

  “뭔가를 선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게오르그를 죽일 것처럼 달려드는 알타이르를 간신히 말린 페아르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리고 게오르그를 쳐다봤다. 페아르의 무거운 시선을 받은 게오르그는 뒷짐을 지며 고개를 돌렸다. 

  사태를 대충 진정시키고 중재하는데 성공한 페아르는 게오르그와 알타이르를 한자리에 모아 머리를 맞대고 한동안 침묵의 심연 속에 빠져들었다. 

  침묵은 퍽 오래갔다. 너무 오래 대화는커녕 혼잣말도 오가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자 게오르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어떻게든 침묵을 깨려 몸부림치는 게오르그와 달리 페아르와 알타이르는 현 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게오르그가 말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을 보자.”

  알타이르와 페아르가 반쯤 감은 눈으로 게오르그를 쳐다보았다. 게오르그는 쳐다보든지 말든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우린 가진 것도 뭣도 없는 그냥 열한 살짜리 꼬마들이란 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부모님들이 좋아할만한 물건을 구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고.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만 방법은 한정적이고 실천 가능한 건 아직 꼬마라는 점과 우리가 가진 각자의 이점을 생각해보면……, 도둑질밖에 없다고! 그런데 생각해보자. 도둑질해서 선물하는 물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없어! 아, 물론 우리가 그 물건을 훔치기 위해 한 각고의 노력은 의미가 있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테아네 부모님들은 우리가 집도 없고 부모도 없는 애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이 멍청한 놈들아. 그러니까 뭘 선물하면 테아와 가까워질 수 있는지, 이렇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는지 생각해내란 말이야! 개처럼 너희 머리통 안에 들어가 있는 조그마한 호두를 굴려보란 말이다!”

  그리고 페아르가 말했다.

  “혼자 늙은 티 다 내내. 책 좀 읽더니 머리 굵어졌다 이거냐?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자식아. 알기 쉽게 말 좀 해봐.”

  알타이르도 페아르를 거들었다.

  “네 머리 좋은 건 아는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에이 씨. 선물 뭐하는 게 좋겠냐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입 안 아팠지.”

  게오르그는 이마를 턱 소리 나게 붙잡았다.

  “그래. 미안. 사실 하도 말이 없다보니 미쳐버릴 거 같았어.”

  “너 그거, 아무래도 병인 거 같다.”

  게오르그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아르의 말을 끝으로 일행은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게오르그는 침묵을 깨트리는 걸 포기했다. 페아르와 알타이르는 애초부터 침묵이 깨지던 그렇지 않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뿐이지 억지로 침묵을 유도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페아르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테아는 꽃을 좋아하지.”

  알타이르와 많이 초췌해 보이는 게오르그의 시선이 페아르를 향했다. 페아르는 영혼 없는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 게오르그와 알타이르에게 퍽 섬뜩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딸이 꽃을 좋아하면, 엄마도 안 좋아하겠냐?”

  페아르는 게오르그와 알타이르를 한 번씩 훑어보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모든 걸 해결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게오르그와 알타이르는 이어질 페아르의 말에 기대를 걸었다.

  “밥 먹을래?”

  “집어 치워라. 이 등신 새끼야. 널 믿은 내가 잘못이지. 어휴.”

  알타이르는 바닥에 등을 깔고 누웠다. 페아르는 허허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누워있는 알타이르와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게오르그를 향해 말했다.

  “언젠가는 우리도 어른이 되겠지?”

  “뜬금없이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들어봐.”

  알타이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게오르그는 페아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페아르는 청중들이 들을 준비가 끝났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다른 손은 태양을 향해 내밀며 말했다.

  “언젠가는 우리도 어른이 될 거야. 물론 그때도 우리가 친구라는 건 변함없겠지만, 그래도 약속 하나만 하자.”

  페아르는 두 손을 다 주머니에 넣은 채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페아르가 씩 웃었다.

  “믿자. 무슨 일이 생겨도 서로를 믿자. 난 알타이르 너처럼 달리기가 빠른 것도 아니고, 조용히 움직이지도 못해. 그리고 게오르그처럼 머리가 좋지도 않지. 내세울 거라고는 힘밖에 없는 나라서, 나는 너희를 믿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가진 거 없는 나에겐 너희가 전부니까.”

  알타이르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게오르그는 울먹이며 페아르를 바라보았다. 페아르가 말을 이었다.

  “믿자.”

  “갑작스러워서 당황했는데, 그래. 그럼 나도 약속 하나만 하자.”

  페아르와 게오르그는 알타이르를 쳐다보았다. 알타이르가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가 페아르의 고동색 눈을, 게오르그의 연초록색 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알타이르가 입을 열었다.

  “우린 친구지만 꿈이 다 다르잖아. 가야할 길과 종착지가 다르니 어쩔 수 없이 언제까지 함께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설령 말없이 사라지더라도, 이해해라.”

  게오르그는 훌쩍였다. 페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타이르는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별 일이 없을 거라는 듯한 따뜻한 미소였다. 페아르는 알타이르와 게오르그에게 마을로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게오르그가 한 발 빨리 먼저 말했다.

  “……돕자.”

  어느새 굳은 표정을 하고 알타이르와 페아르의 중앙에 선 게오르그는 두 친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친구니까. 믿고, 이해하고, 돕자. 알타이르의 말처럼 말없이 헤어지더라도, 약속하자.”

  페아르는 피식 웃더니 울먹이는 게오르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알타이르는 “그건 별로…….”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페아르는 손을 내려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게오르그를 무시하며 나지막하게 말을 뱉었다. 

  “그러면 운명의 신님께 맹세하자. 우리의 약속은 절대 깨지지 않을 거라고.”

  세 소년은 마을로 내려갔다. 내려가던 중 게오르그는 계속 마음 한편에 바늘처럼 남아 짜증을 유발하는 원인을 제거해보기로 했다.

  “근데, 운명의 신이 여자야 남자야?”

  “알아서 뭐하게.”

  “그래도 난 여신님이 좋은데.”

  “신이니까 남자겠지.”

  “와, 싫다.”

  “그럼 여신님한테 맹세하면 되지.”

  “아…….”

  알타이르는 게오르그의 궁금증을 간단히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행은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로 내려가지 못한 한 소녀는 집안에서 엄마에게 아빠가 벌 받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아니……, 말을 해줬어야 불을 끄지.”

  “그게 집에 내내 있던 사람이 할 말이에요?”

  엘사는 웃고 있지만 잔뜩 화가 난 몸짓으로 파뿌리를 움켜쥐었다. 클라이프는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파뿌리에 맞지 않으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하지만 결국 클라이프는 파뿌리에 맞았다. 

  클라이프가 엘사에게 맞는 동안 갈라테아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라테아의 머릿속에는 온통 엘사의 생일에 대한 것뿐이었다.

  ‘선물로 뭘 하면 좋을까?’

  갈라테아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엘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잠깐 엄마 좀 도와줄래?”

  “네!”

  갈라테아는 부엌으로 가던 중 벽난로 위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 꽃의 색깔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액자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꽃들은 광활한 하늘이 가진 공허한 매력과 잘 어우러진다. 갈라테아는 새삼스럽게 꽃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일 아침 일찍 숲속에서 꽃을 따 목걸이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갈라테아는 내일 아침을 고대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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