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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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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5    추천 0   덧글 0    / 2019.01.26 16:03:09
  “미친놈아.”

  난데없는 욕지거리에 페아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좋은 아침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몸은 따뜻했고, 힘이 넘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페아르는 눈을 뜰지 말지 고민했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결국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욕지거리가 들려온 곳이 현실일 것이 분명했다. 페아르는 이대로 꿈속에서 살고 싶었다.

  “안 돼! 하지 마!”

  청아한 목소리가 페아르의 귓가를 맴돈다. 목소리는 절박한 심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페아르는 이렇게까지 절박한 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분명 아는 사람의 목소리인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은 확실히 기억한다. 

  아름다운 백금을 보는 듯한 머리카락과 저녁 하늘에 떠올라 세상을 물들이는 예쁜 노을 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다. 페아르는 그 소녀가 보고 싶어 눈을 떴다.

  “죽어라!”

  “컥!”

  눈을 뜨자마자 어째서인지 분노에 가득 찬 알타이르가 복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페아르는 고통을 호소했지만 알타이르는 그만두지 않았다. 철저하게 페아르의 호소를 무시하며 알타이르는 그의 배를 터트릴 것처럼 짓밟았다. 

  갈라테아가 울부짖으며 알타이르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어디 있었는지 보이지 않던 게오르그가 갑자기 튀어나와 갈라테아를 떼어놓았다. 갈라테아는 게오르그에게 저항했지만 게오르그는 소년임에도 어른 못지않은 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갈라테아는 게오르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물론 게오르그 또한 운동 한 번 안 해본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나올 수 없는 압도적인 힘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게오르그가 갈라테아를 막는 덕분에 알타이르는 손쉽게 페아르의 몸뚱이를 두드릴 수 있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려 맞는 면적을 줄이고 방어력을 높인 페아르가 소리쳤다.

  “뭐야, 젠장! 왜 이러는 거야?”

  “뭐? 왜 이래? 이 새끼가 아직 덜 맞았나!”

  “억!”

  페아르는 알타이르의 주특기인 체중을 가득 실은 발차기에 맞고 침대 위를 날아갔다. 땅바닥을 향해 날아간 페아르는 아이답지 않은 순발력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침대 위에 선 알타이르는 페아르를 내려다보았다. 정강이가 욱신거렸다. 

  ‘뭐지? 이렇게 단단했던가? 돌덩이를 차는 느낌이었는데…….’

  알타이르는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페아르는 팔뼈가 아려오는 걸 참았다. 싸늘한 알타이르의 시선에 맞서 페아르는 눈매를 매섭게 바꾸었다. 이대로 맞기만 하다간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알타이르의 시선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치 야생의 맹수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페아르는 긴장했다.

  ‘그 곰처럼……. 곰?’

  “아…….”

  페아르는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멍한 얼굴로 알타이르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즈음 알타이르의 시선도 마냥 매섭게 보이지는 않았다. 알타이르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동을 피우던 갈라테아는 게오르그의 턱을 박았다. 게오르그는 비명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갈라테아는 곧바로 페아르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갈라테아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왜들 그래! 아직 다 낫지도 않은 페아르한테!”

  알타이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페아르는 괜찮냐고 물어보는 갈라테아를 달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몸짓이었다. 그리고 페아르가 말했다.

  “……미안.”

  “알면 됐어.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다행이지. 미친놈아.”

  알타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아르는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알타이르와 게오르그를 마주보았다. 알타이르는 이제 됐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게오르그는 아직까지도 쓰린 턱을 만지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닌 갈라테아의 아버지, 클라이프였다. 클라이프는 방을 둘러싼 어색한 공기 속에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페아르, 잠깐 나와 볼래?”

  페아르가 답하기도 전에 갈라테아가 막아섰다. 하지만 곧바로 페아르가 갈라테아를 저지했다. 알타이르와 게오르그는 클라이프를 따라 나가는 페아르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재빨리 난동피우기 시작한 갈라테아를 진정시켰다.

  클라이프는 페아르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터로 데리고 갔다. 클라이프는 페아르의 작은 몸을 훑어보았다. 잘 먹지 못해 말랐지만 단단히 균형이 잡혀 있었고, 탄탄했다. 어린 나이에 저런 몸을 가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생 깨나 했을 페아르의 과거를 생각해보던 클라이프는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페아르는 나뭇등걸에 앉았다. 클라이프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강해지고 싶니?”

  페아르는 클라이프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페아르의 본능은 이성보다 빠르게 움직여 그를 당황하게 했다.

  “네.”

  클라이프는 페아르를 쳐다보았다. 페아르는 갑작스러운 오한에 몸을 떨었다. 클라이프는 알겠다고 답한 뒤 페아르를 돌려보냈다. 페아르가 돌아가자 숲속에 숨어있던 마룬과 에히놀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룬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반대로 에히놀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한가득이었다. 클라이프의 곁으로 온 마룬이 말했다.

  “이건 아닌 거다.”

  에히놀과 클라이프의 시선이 마룬을 향했다. 마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클라이프도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마룬의 말을 경청했다. 마룬이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저 어린 아이에게 짊어지게 한다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이래서는 안 돼. 이 일은 우리 대에서 끝내야 하는 거야. 다음 세대까지 넘기는 건 죄야.”

  마룬은 말을 마쳤다. 그는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마룬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미소 지은 채 듣고 있던 에히놀이 받았다.

  “장담할 수 있어?”

  “뭘?”

  클라이프가 마룬을 대신해 답했다. 에히놀은 마룬과 클라이프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는 걸 깨달았다. 에히놀은 두 사내를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에서 사명의 완수가 가능한지 장담할 수 있느냐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장담 못해. 우리에게 에반스가 있다고 해도 그것뿐이야. 나는 ‘사도’들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는 있지만 이기리라고는 장담하지 않아. 오히려 생채기라도 내면 최선을 다한 거겠지. 너희들 벌써 잊었냐? 그분들이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돌아가신 이유. 그게 단 한명의 사도 때문이라는 거 말이야.”

  “베이오르…….”

  클라이프는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괴물은 수백 명의 포진을 상대로 그 어떤 기교도 술수도 부리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쳐들어왔다. 그는 단어가 가진 뜻 그대로 포진을 이루는 기사와 병사들을 박살내며 진격했고 성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군주를 죽였다. 

  이미 인간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클라이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베이오르의 강철 같은 육체는 클라이프의 ‘불’을 우습다는 듯이 꺼트려버렸다. 베이오르는 너무나도 강했다. 과연 어느 누가 그 남자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을까. 왕국의 기사장이 와도 장담할 수 없다. 자괴감에 빠져 있는 클라이프를 쳐다보던 에히놀이 말을 이었다.

  “난 우리 대에서 그놈들을 상대할 자가 없다는 걸 잘 알아. 기껏해야 에반스 한 명뿐이지. 그래서 보험을 들 생각이야. 저 꼬마들 페아르, 알타이르, 게오르그를 수호자로 만들 거다. 너희도 봤으면 알겠지만 페아르는 벌써 투기와 패기를 사용하고 있어.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열한 살에서 열세 살이겠지. 에반스보다 빠른 각성이야. 
  그리고 알타이르는 살기가 가득하지. 저렇게까지 살기가 짙은 인간은 위리아나 카사둔 암살자 녀석들밖에 본 적이 없어. 어떤 특성이 우세한지는 몰라, 하지만 알타이르가 삼기를 사용하는 투사로 각성하게 된다면 다섯 개의 특성을 모두 사용하는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또 게오르그는 내 평생 봐온 사람들 중 그 어떤 사람보다 머리가 뛰어나. 너희도 알 거 아니야? 게오르그는 심심해서 지도를 만들었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시장의 흐름을 단번에 파악했지. 그리고 한 번 보여준 전술서를 통째로 외워버렸어. 
  거기에 마룬, 너와 딘에게 자랑스럽게 알려줬던 전략. 난 그걸 보고 솔직히 놀랬다. 어떻게 저런 어린애가 재화의 흐름, 시간의 경과, 환경, 인간의 심리를 전부 계산해서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흐르는 전략을 만들 수 있는지 말이야. 아니지. 전략이라는 말은 평가절하야. 미래 예지에 가까워. 
  난 인간의 머리에서 이런 생각이 과연 나올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나는 녀석들을 잘만 키우면 대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못해도 갈라테아 님을 지키고 다음 세대까지 대를 이어나가게 만들 수는 있을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아직 애들이야…….”

  마룬이 중얼거렸다. 에히놀은 코웃음쳤다. 두 친구들의 모습을 번갈아보던 클라이프는 눈밭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는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머리털을 다 쥐어뜯을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저앉은 클라이프의 어깨를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청년이 붙잡았다. 클라이프는 고개를 들었다. 에반스의 금색 머리칼이 눈을 아프게 했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들. 몇 분은 안 보이네요?”

  속삭이듯이 말한 에반스는 클라이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마룬과 에히놀의 시선이 에반스에게 향했다. 에반스는 세 명의 전 기사단장들을 마주보았다. 고개를 들어 에반스를 쳐다보던 클라이프가 말했다.

  “은혜 갚는 거 끝났다더니?”

  에반스는 씩 웃었다.

  “은혜는 다 갚았지만 내 흥미는 아직 왕성합니다. 아시잖아요, 젊은 거. 저보다 더 빨리 삼기 투사의 자질을 보이는 어린 친구가 있다기에 한 걸음에 달려왔지 뭡니까? 그래서, 그게 누굽니까?”

  에반스는 클라이프를 쳐다보았다. 클라이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라이프는 에반스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에반스는 그를 따라갔다. 둘만 남겨진 마룬과 에히놀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마을로 내려갔다.

  클라이프는 눈밭에서 뛰어 놀고 있는 페아르를 가리켰다. 에반스는 장난기 없는 얼굴로 페아르를 유심히 살피었다. 클라이프는 에반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에반스는 페아르를 관찰하고 있었다. 에반스가 말했다.

  “재밌네요.”  

  에반스는 재밌다는 한마디를 던진 채 입을 닫았다. 클라이프는 이렇게까지 진지한 제자의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에반스가 마른 목을 축이려 침을 삼켰다. 에반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괴물을 찾아내신 것 같네요. 저 나이에 저렇게 큰 기백은 처음 봅니다. 가르친다면 일이 년 안에 기백은 저를 따라잡을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저 애가 발라카스의 초월기를 전수받는다면 저 못지않은 뛰어난 투사가 될 겁니다.”

  클라이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반스를 바라보았다. 에반스의 얼굴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클라이프는 페아르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에반스를 일이 년 안에 뛰어넘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에반스의 기백은 ‘위대한 벽’에서도 통할 정도다. 

  옛 제자의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가르치면 정말 일이 년 안에 자신의 기백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기대와 그렇게 성장한 제자와 함께 ‘위대한 벽’을 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에반스의 얼굴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에반스가 허허 웃었다. 

  “워낙 인외괴물들이 많은 곳이라 나만 아무것도 못하고 손가락 빠는 느낌이었는데, 이젠 거기 가서 맞고 다니며 살진 않아도 되겠네요.”

  클라이프는 에반스에게 연락하길 잘했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천재는 천재가 알아볼 것이란 예상이 맞았다. 클라이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에반스에게 내밀었다. 에반스는 이게 뭐냐는 얼굴로 클라이프를 쳐다봤다. 클라이프가 말했다.

  “발라카스의 힘은 불. 그래서 모든 움직임이 다 공격적이고 그 끝에서 승계할 수 있는 초월기가 바로 ‘그을음’이지. 하지만 너도 느꼈을 테지만 이건 그저 건물을 쌓기 위한 주춧돌에 지나지 않아. 끝이 없는 무궁무진한 힘 중에 우리가 터득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그거 하나뿐이야. 아직 그 끝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몰라. 그을음이 주는 발라카스의 힘 하나만 다루는 것도 어려워. 그래서 너한테 이걸 주는 거다.”

  에반스는 책을 받았다. 에반스가 책을 펼쳐보았다. 클라이프는 말리지 않았다. 책을 한 장 한 장 뒤로 넘기던 에반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 배운, 기초 검술이군요. 왜 이런 걸 주십니까? 가르치는 건 기억으로도 충분한데요.”

  에반스는 책을 덮었다. 클라이프는 낡은 책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에반스는 클라이프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클라이프는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했다.

  “그 책에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게 변형되고 퇴화된 발라카스의 일부가 들어있지. 그리고 거기에는 그을음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이자 마지막 초월기로 기록되어 있단다.”

  “흠. 아는 얘긴데.”

  “그건 발라카스 정통 계승자에게만 전수된다. 왜 그런지는 마지막 장을 보면 너도 알게 될 거다.”

  클라이프의 말대로 에반스는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에반스는 뭔가에 홀린 듯 마지막 장에 쓰인 글귀를 읽었다. 

  “계승자여, 우리는 아직 무엇이 극인지 알지 못한다. 어쩌고저쩌고, 이것 ‘시간과 공간을 자르는 힘’이란 것도 어느 거대한 파편의 일부일 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자르는 힘? 뭐야, 부정시공 초월기도 있습니까?”

  “내가 그때 시간 벌기 위해 사용한 것도 이거야.”

  “뭐, 대충 알고 있었죠. 그때는 몰랐지만.”

  “벽에 갔다 오더니 모르는 게 없게 됐구나.”

  “거긴 인외괴물이 너무 많아서요. 평생 겪을 신기한 경험 다 하고 왔습니다.”

  “이젠 정말 너에게 상대도 안 되겠는 걸.”

  “원래 안 됐잖습니까. 절 상대로 10초 정도 버티면, 스승님이 성장한 거겠죠.”

  클라이프는 에반스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에반스는 스승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기에 큰 소리로 웃었다. 짜증 가득한 클라이프의 얼굴을 보며 에반스가 말했다. 

  “부정시공이라……. 누가 뭐라 해도 시공간에 간섭하는 힘이라 최고로 치긴 합니다만, 사용하기 까다로울 텐데요. ‘형벌’도 장난 없잖습니까. 지금 스승님도 그 때문에 몸이 맛이 갔잖아요. 뭐, 잘 쓰기만 하면 벽에서도 알아주긴 합니다만 사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

  “운명이지, 뭐.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이 그거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페아르가 그 알아주는 경지까지 오르게 잘 가르치는 것.”

  “글쎄요. 제가 또 부정시공이랑은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냥 시공간에 간섭하고 개개인마다 능력편차가 하늘과 땅이라는 거? 가르친다고 하면 엄청 오래 걸릴 겁니다. 저도 배우는 느낌으로 해야해서요.”

  “그렇게 해. 너도 부정시공 사용자들을 상대로 언제까지고 수비적으로 싸울 수는 없잖아. 상대방의 능력을 보고 대응하면 죽기 딱 좋지.”

  “아, 수비적이진 않는데. 스승님이랑 달리 전 천재거든요.”

  “이 자식이 진짜……. 맞는 말이라 뭐 딴지 걸 수도 없고…….”

  클라이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에반스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었다. 제자의 웃는 모습을 보던 클라이프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에반스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이걸 제대로 승계한다면 너도 잘 알다시피, 페아르의 몸에 ‘뒤틀린 기운’이 생길 거다. 공간을 다룰지 시간을 다룰지는 승계 받은 후가 아니면 몰라. 난 시간에 간섭했지만, 기껏해야 신체 일부를 묶어두는 정도였어. 결국엔 ‘검은 숲’ 습격 당시 ‘모헤오스’라는 사도 한 놈 멈춰보겠다고 ‘형벌’을 받아서 못 쓰는 상태고. 웬만하면 페아르가 공간 쪽이길 기도하고.”

  “시간도 좋던데요? 상대를 아주 존재 이전으로 돌려버리는 모습은 진짜……, 눈앞에서 바로 그 사람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지는데 정말……. 정신 차리고 봤더니 바지에 오줌 쌌더라고요. 쎄봐야 얼마나 쎄겠어, 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제가 한심합니다. ‘위대한 지배자’들과 ‘영웅’들은 대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죠.”

  “……‘위대한 지배자’고 ‘영웅’이고 잘 모르겠다만, 존재 이전으로 돌리는 건 너무…….”

  “말이 안 나오지 않습니까? 그 정도 시간의 힘이면 누가 상대라도 해 볼만 할 겁니다. 기회가 돼서 스승님도 벽에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기회가 안 돼서 다행이다.”

  “그것 말고도 신기한 거 엄청 많습니다. 그냥 완력으로 누베르 섬 만한 땅을 뜯어서 내려치는 양반이 있는가 하면, 칼 한 번 땅에 꼽아서 전부 갈아버리는 인간도 있죠.”

  “정말 기회가 안 돼서 다행이다. 재수없는 제자 놈 앞에서 똥오줌 지릴 수는 없잖아.”

  에반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클라이프가 말했다. 

  “아무튼.” 

  클라이프는 갈라테아와 알타이르 그리고 게오르그와 놀고 있던 페아르의 이름을 불렀다. 페아르는 클라이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환한 얼굴로 달려왔다. 알타이르와 게오르그는 왜 저러냐는 얼굴을 하고 페아르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갈라테아는 페아르의 배와 등에 흉측하게 남은 상처를 생각하며 울먹이고는 그를 따라갔다. 페아르와 갈라테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두 사람이 마지못해 그들을 따라갔다. 

  다가오는 페아르와 갈라테아를 쳐다보던 클라이프가 말했다.

  “페아르를 가르칠지 말지는 네가 정해. 뭐, 엘사한테 발라카스 가르쳐준다고 이상한 짓 하던 널 보면 대충 감이 잡힌다. 넌 가르치는데 재능이 전혀 없으니까. 안 해도 비난하진 않으마.”

  “신경 긁는 투로 말하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노땅 스승님?”

  에반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무척 반항적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클라이프는 에반스의 얼굴을 보며 코웃음 쳤다. 에반스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클라이프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에반스가 말했다.

  “두고 보십쇼. 저 애는 내 손으로 키워낼 겁니다. 그래서 같이 벽을 향할 겁니다. 스승님은 거기서 손가락이나 빨고 계시던가요.” 

  “그러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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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잿더미. 9 0 9959 19.01.30 404 0
24 잿더미. 8 0 9959 19.01.28 341 0
23 잿더미. 7 0 9959 19.01.26 386 0
22 잿더미. 6 0 9959 19.01.24 390 0
21 잿더미. 5 0 9959 19.01.23 381 0
20 잿더미. 4 0 9959 19.01.22 358 0
19 잿더미. 3 0 9959 19.01.21 357 0
18 잿더미. 2 0 9959 19.01.20 375 0
17 잿더미. 1 0 9959 19.01.19 336 0
16 잿더미 - Chapter. 겨울. 16 0 9959 19.01.17 373 0
15 잿더미 - Chapter. 겨울. 15 0 9959 19.01.16 407 0
14 잿더미 - Chapter. 겨울. 14 0 9959 19.01.15 372 0
13 잿더미 - Chapter. 겨울. 13 0 9959 19.01.14 369 0
12 잿더미 - Chapter. 겨울. 12 0 9959 19.01.13 843 0
11 잿더미 - Chapter. 겨울. 11 0 9959 19.01.12 418 0
10 잿더미 - Chapter. 겨울. 10 0 9959 19.01.12 374 0
9 잿더미 - Chapter. 겨울. 9 0 9959 19.01.10 373 0
8 잿더미 - Chapter. 겨울. 8 0 9959 19.01.08 364 0
7 잿더미 - Chapter. 겨울. 7 0 9959 19.01.07 39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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