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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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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2    추천 0   덧글 0    / 2019.01.28 12:57:32
  “예. 끝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페이서스의 기사장급 실력자 둘을 상대로 쉬울 수는 없죠. ……아니. 페이서스의 기사장을 죽였단 소리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인크레시아 그 남자와 싸웠다면 제가 멀쩡할 리가 없잖습니까. ……하. 그때는 상대적으로 멀쩡했을 때 아닙니까? 지금은 오늘내일 하고 있는데 무슨…….”

고급스러운 예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주변에는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성이 있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홀로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남자는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석류를 하나 꺼냈다. 두 손으로 움켜쥐어도 다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실한 석류를 반으로 쪼갠 그가 말했다. 

“하하. 밥도 먹으면서 먹고 있습니다. 제가 과일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르면서 과일만 먹는 멍청이는 아닙니다.”

거짓말이다. 남자는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그는 석류 알갱이를 엄지손가락으로 털어내 입에 넣었다. 석류 알갱이를 우물거리던 사내는 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올 것 같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석류가 쓰다거나, 눈이 온다는 것에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석류는 놀라울 정도로 달았고, 눈이 오는 날은 남자가 정말 선호하는 날씨였다. 그가 말했다. 

“카사둔이 말입니까? ……저 없을 때 난리가 났나 보군요.”

남자가 예복의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통이 넓은 소매 사이로 양팔에 장착한 쇳덩이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뭐, 제가 있었어도 그분께 엎드려 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가 석류 알갱이를 긁어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인재 아니었습니까, 카스트로라는 사내. 그가 죽고 몇 년을 슬픔에 빠져 공식석상에 모습을 비춘 적 없으십니다.”

왼손으로 긁어낸 알갱이를 오른손에 담아 입에 넣었다. 남자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왼손잡이인 남자는 오른손보다 왼손이 더 두껍다. 그가 왼손의 손목을 뒤로 젖혔다. 

“멍청한 짓입니다. 설령 정말로 그분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잠적하셨다고 해도 말입니다.”

손목을 뒤로 젖혔다 구부리기를 반복하던 중 남자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이런. 그렇게 많이 죽었습니까?”

남자가 뒤로 젖힌 손을 주먹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목에 달린 쇳덩이에서 족히 30센티는 될 법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가 손을 펼쳤다. 칼날이 쇳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큰일이군요. 파견 나가 있는 친구들을 제외하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남자가 알갱이를 털던 손길을 멈췄다.

“흐음…….”

그가 알갱이를 털어 입에 넣었다. 

“애초부터 카사둔과 싸운 게 잘못입니다. 슬퍼하는 퀘이사 님과 함께 애도하지는 못할망정 화나게 했으니까요. 하아……. 그분이 우릴 놔두던 건 ‘루트글리사르의 번개’ 때문입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존중’해서 밟지 않고 놔뒀던 거라는 거요.”

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지금껏 아무도 풀지 못한 ‘외로운 산’의 세 가지 수수께끼. 처음 그걸 푼 건 수천 년 전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발라카스의 불’을 손에 넣었죠. 그리고 얼마 전에 제가 또 하나를 풀어 이 ‘루트글리사르의 번개’를 얻었습니다.
퀘이사 님은 그 긴 시간 ‘학자’였던 우리를 존중해주셨습니다. 언젠가 외로운 산의 수수께끼를 풀 것이라 기대하시면서요. 기억 안 나십니까? 제가 이 힘을 얻어 돌아갔을 때 카사둔만이 축하해주었습니다. 심지어 한 집단의 수장인 퀘이사 님 본인이 직접 오셔서 말이죠. 그렇게 우리를 존중해주던 사람에게 칼을 들이미는 짓을 했잖습니까. 다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다고 엎드려 백번 절해도 모자랍니다.”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한참을 웃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너무 웃어 아픈 광대를 매만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르테미시아! 고 당돌한 녀석! 하긴 딱 퀘이사 님이 좋아할 성격이죠. 당당하고, 거침없고, 지기 싫어하고. 딱 퀘이사 님이 자식이 있다면 아르테미시아 같았을 겁니다. 휴……. 그래도 그렇지 그 ‘암흑의 꽃’에게 맞설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남자가 알갱이를 다 긁어낸 석류 껍질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바구니에서 귤을 꺼내며 말했다. 

“원래 우리가 싸움으로 벌어먹고 사는 집단이 아니잖습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몸집을 키우려 했던 제 잘못입니다. 예. 외로운 산은 제게 ‘루트글리사르의 번개’를 주었지만 도전에 대한 대가로 참 많이도 가져갔죠. 처음으로 ‘발라카스의 불’을 얻어간 그 사람도 단명했을 겁니다. ……예. 모든 필멸자의 운명이죠.”

귤껍질을 까 석류 껍질 위에 던져 넣던 손길이 멈췄다.

“아뇨. 어차피 위리아나 카사둔처럼 강력한 지배자가 없던 우리 말고르는 ‘학자’라는 지위를 등에 업고 썩을 대로 썩어 있었습니다. 싹 쓸려나간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는 껍질을 깨끗하게 벗기고 반으로 쪼개 입에 넣었다. 귤을 우물거리며 남자가 말했다. 

“예. 솔직히 너무 많았습니다. 수십, 거의 수백에 가까운 ‘암살의 대가’들이라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죠. 정작 그 암살의 대가 중에서 어느 누가 직접 나서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까? 당장 울돌레이에서 사망했던 카사둔의 카스트로, 이 사내만 해도 말고르 암살의 대가란 자들을 수도 없이 죽였던 실력자죠. 그럼에도 카사둔에서 그의 지위는 대가는커녕 말단입니다. ……물론 퀘이사 님이 애지중지 하시기는 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참에 마저 싹 숙청할 겁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썩은 가지를 쳐내고 뿌리를 끄집어낸 뒤 오염된 토양을 걷어내야죠. 그리고 새로운 터를 찾고 깨끗한 흙과 거름을 뿌리고 묘목을 심을 겁니다. 아, 흙은 스승님입니다.”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른 것처럼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나머지 귤 반쪽을 입에 넣었다. 

“어우……, 화통을 삶아 드시나 여전히 목청도 크십니다. 옛날 생각나네요. 아무튼 거름은 접니다. 하하하! 갑자기 그렇게 시무룩해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누군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그것도 다 밤과 그림자의 여주인께서 내어주신 과제입니다. ……예, 그럼요.”

그가 피식 웃었다.

“묘목은 당연히 아르테미시아죠. ……아, 그래도 고놈에게 이 번개는 안 줄 겁니다. ……아니, 심술이 아니라 못 줍니다. ……아니, 아니라니까요? 말을 좀 들으세요. 아르테미시아는 ‘루트글리사르의 번개’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예. 훨씬 더 강력한 힘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을 들어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뭔지 몰라도 이 번개를 뛰어넘는 힘이니 어디서 맞고 다닐 걱정은 안 합니다. 다만…….”

예복 안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유자차를 꺼낸 남자가 말했다.

“너무 강력합니다. 아르테미시아를 죽이고 있어요. 최대한 루트글리사르의 힘으로 억제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외로운 산에 잠들어 있는 ‘뷔르길리아스의 얼음’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각성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예. ‘영웅’들조차 손댈 수 없는 저 ‘위대한 벽’을 세운 그 ‘뷔르길리아스’입니다.”

남자가 유자차를 홀짝였다. 예상보다 뜨거웠다. 그는 입천장을 데였다. “앗, 뜨거!” 그가 인상을 썼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외로운 산에 남겨진 건 힘의 일부도 아닙니다. 조각 수준도 아니고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찌꺼깁니다. 찌꺼기라고 하는 것도 애매하군요. 

이 대륙을 포함한 ‘위대한 벽’ 너머와 ‘경계 밖의 전 세계’ 정도의 도화지에 연필로 찍힌 점이라고 하면 알맞을 겁니다. 만약 이 힘이 정말 ‘창세기’와 ‘신화시대’의 온전한 그들의 것이라면, 제가 저 ‘위대한 벽’을 없앨 수도 있었겠죠. ‘영웅’들을 소멸시킬 수도 있을 거고요. ……그런데 그게 가능키나 합니까? 눈 까뒤집고, 바지에 똥오줌 안 지리면 다행인 것을.”

남자가 허허 웃었다.

“뭘 어떻게 알아요, 알긴. ‘미친 공작, 란데스헤르’ 님에게 수수께끼 풀고 찾아갔었습니다. 아, 말씀 안 드렸던가요? 아무튼 가서 역사 공부 좀 하다 왔죠. 후, 제가 오러 사용자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한 게 태어나서 그때가 처음입니다. 
너무 격차가 심해서 위상은 느껴지지도 않는데 몸은 본능적으로 바들바들 떨더군요. 그때 눈 까뒤집고, 바지에 오줌 싸고, 똥 지리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위압감에 압사당해 죽을 것 같다는 느낌, 그들을 만난 사람이 아니면 못 느낄 겁니다. 
그분께 ‘루트글리사르의 번개’를 가지고 찾아가니 약속한대로 많은 걸 알려주셨죠. 자세한 건 못 알려드립니다. 예. 저만 알고 있으라 하신 것들입니다. 예.”

입안이 헐어버리는 걸 원치 않았기에 남자는 차가 적당한 온도로 식길 기다렸다. 

“이제 곧 출발할 겁니다. 예. 산책하면서 인재들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길을 헤매는 게 죄는 아니잖습니까. ……아니 누군 헤매고 싶어서 헤맵니까? 이러고 태어난 걸 어떻게 합니까. 이것도 다 밤과 그림자의……. 신성모독이라고요?”

남자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아뇨. 숙청할 거라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대로 말고르까지 걸어가며 인재를 훑어보고, 가서 숙청하고, 그 다음 대륙을 돌며 모집할 겁니다. 
……또 아르테미시아도 봐줘야합니다. 예. 제가 곁에 있으면 상관없지만 오래 떨어져 있으면 파괴됩니다. 걔가 어릴 때라 간신히 새겨 넣은 겁니다. 점점 힘이 커져가는 상태라 한 번 깨지면 다시는 막지 못합니다. 
저도 머리 아픕니다. 나중에 ‘발라카스의 불’을 가진 사람을 만나볼까 고려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불이 아니라 ‘발라카스의 불’이란 표식입니다. 예. 제 ‘루트글리사르의 번개’와 같은 표식이요. 불을 쓰고 못쓰고는 상관없습니다. 예. 발라카스와 루트글리사르가 모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단지 제 희망입니다. 
아무튼,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숙청이 끝나면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예. 귀찮으시더라도 한 번 더 멘토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 스승님도 강녕하시구요.”

남자가 유자차를 깨끗하게 비운 컵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는 석류와 귤껍질을 절벽 아래로 던졌다. 아직도 많은 겨울과일이 든 바구니도 품속에 집어넣은 그가 어깨를 주물렀다. 남자는 지도를 꺼냈다. 

“어디보자, 말고르는…… 이쪽으로 가면 되나? 페이서스를 경유하는 게 좋겠지?”

그는 지도를 집어넣었다. 예복에 달린 후드를 쓴 남자가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구름이 한가득 쌓인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었다. 남자의 예복 등판에 수놓아진 검은 모레시계가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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