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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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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반스는 느닷없이 잔뜩 날이 선 진검을 던져주었다. 페아르는 진검이 날아와 꽂히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반스는 피식 웃더니 칼을 들어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페아르는 칼을 들었다. 손을 통해 칼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겁다. 페아르는 자신의 몸만 한 장검을 뽑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결국 칼을 뽑는데 성공한 페아르는 칼을 휘둘러보았다.

에반스는 칼을 휘두르는 페아르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자세는 엉망. 하지만 힘이 실려 있다. 에반스도 박혀 있던 장검을 가볍게 뽑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페아르를 겨냥하며 말했다.

“지금 네가 쥔 칼의 무게를 기억해라. 이제부터 너의 손에 죽어나갈 수많은 생명들의 무게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네가 빼앗을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짐이다. 그 무거움을 잃어버린다면, 네가 하는 모든 일에 신념은 메마르고 정의는 찾아볼 수 없는, 스스로가 정한 최소한의 기준조차 남지 않은 구제 불가능한 쓰레기가 되었단 소리니 빠르게 자살해라. 자살할 수 없다면 타인의 손을 빌려라. 그게 너를, 네 곁에 머무를 것들을 위한 최선이다.”

“…….”

페아르는 에반스의 눈을 마주보았다. 몸에 경기가 일어날 것만 같다. 클라이프와는 차원이 다르다. 페아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에반스는 칼을 휘둘러보았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페아르는 에반스가 준 칼로 방어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해보았다. 에반스는 허점이 눈에 드러나는 자세에 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자신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퍽 우스웠다.

에반스는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클라이프를 슬쩍 훔쳐보았다. 클라이프는 거목 사이에 숨어 에반스와 페아르를 보고 있었다. 클라이프는 에반스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걸 알고 더 깊숙이 숨었다. 에반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페아르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네가 지금부터 배울 건 ‘발라카스’라고 하는 거야. 네가 쓰는 무기에 따라 검술도 되고 창술도 되고 권각술도 되는 훌륭한 기술이지. 물론 지금 내가 너한테 알려줄 발라카스는 칼 다루는 기술이야. 난 이거밖에 안 배웠거든.” 

에반스가 익살스럽게 웃어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발라카스를 사용하는 인간은 나를 포함해 세 명. 갈라테아 님의 수호자이자 나의 스승 클라이프 더쉔 알터그라프와 이 사람의 스승 멕베스 콘클라이. 이렇게 둘에 나까지 셋. 미리 말해두지만 발라카스의 힘은 불이다. 언젠가 네가 기초를 끝마치면 내가 초월기를 계승해줄 거야.” 

“초월기……?”

페아르의 물음에 에반스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에반스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칼날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페아르는 기겁했다. 

불길은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금세 에반스의 오른팔까지 잠식한 불길은 이상하게도 더 진행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머리카락 바로 옆에 이글거리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은 한 올도 상하지 않았다. 그건 피부와 옷도 마찬가지였다. 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광폭한 기세를 가진 불은 페아르에게 주변 환경을 왜곡시켜 보여줄 만큼 뜨거웠다. 

에반스가 불길에 휩싸인 칼을 휘둘렀다. 닿지 않은 눈은 녹아내렸고 칼이 베고 지나간 바위는 마치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페아르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바위의 절단면은 지글지글 끓으며 흉측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에반스가 말했다. 

“이런 게 초월기야.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에 이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어……, 다룰 수 없는 걸 다루게 해주는 것? 초인의 힘으로 가 닿을 수 없는 한계를 넘게 해주는 것? 그게 초월기야.”

“무슨…….”

“나도 정의 내리기 힘들어서 그냥 뭉뚱그린 거니까 이해해줘. 아, 초월기는 초인적인 힘보다는 상위의 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뛰어나다는 건 아니야. 순수한 초인의 힘만으로 초월기를 꺾어버리는 괴물들도 허다하거든. 그리고 끝에 가선 결국 그 둘은 하나가 되더라. 걱정 마 나중에 천천히 알려줄 게. 그리고 너무 겁먹지 마. 앞으로 네가 만날 놈들은 더 황당한 초월기와 압도적인 초인의 힘으로 무장한 놈들일 테니까.”

페아르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에반스는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치솟던 불길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불길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에반스의 칼은 이미 녹아내리고 있었다. 에반스는 녹아버린 칼을 집어던졌다. 그는 혀를 찼다. 

“‘룬’이나 ‘균열’이 아니면 힘도 제대로 못 내니, 원. 나도 빨리 무기나 구해야하는데……. 흐음. 비싸긴 하지만 ‘흑철’이나 ‘영혼의 강철’을 쓸까?”

그런 뒤 페아르를 돌아보았다. 에반스는 녹아버린 칼을 대신할 물건으로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페아르를 겨냥하며 다가갔다.

“너에게 발라카스를 전수해주기 전에 실력을 볼 거다. 죽일 생각으로 달려들어라. 난 적당히 할 테니까.”

씩 웃는 에반스를 향해 겁먹은 듯한 얼굴의 페아르가 말했다.

“정말, 재수없네요.”

“어? 뭐지……? 누구한테 내가 자주 하던 말 같은데?”

에반스의 나뭇가지가 먼저 움직였다. 페아르는 나뭇가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에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에반스는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파고드는 페아르를 걷어찼다. 페아르는 눈밭을 미끄러지며 몇 미터를 날아갔다. 페아르는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 페아르를 보며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서 있던 에반스가 말했다.

“눈으로 칼 쫓지 마. 등신도 아니고 누가 싸우면서 칼만 쓰냐? 감을 자유롭게 쓰기 전까지 지금 네 눈이 봐야할 건 상대방의 어깨, 허리, 골반이다. 알겠냐?”

페아르는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발로 살살 걷어차인 것 같은데 알타이르의 무게 실린 발차기보다 더 강하다. 페아르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비틀거리는 페아르를 보며 에반스는 기분 나쁘게 이죽거렸다. 페아르는 짜증이 났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에반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페아르의 내부에서 서서히 피부를 찢을 것처럼 쏘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삼기 활성화 좋지. 그럼 투기도 나오셨으니 이제, 패기 차례인가?”

에반스는 나뭇가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투기가 활성화되어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고 육체 능력이 한껏 증폭된 페아르의 기세에 에반스는 여유롭게 맞섰다. 페아르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소리야. 보여줘라. 네 가능성을.”

에반스는 나뭇가지로 페아르의 칼을 쳐냈다. 페아르는 손목이 뒤틀리는 충격에 호흡이 틀어졌다. 이어서 에반스는 나뭇가지를 쥔 손으로 페아르의 얼굴을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페아르가 눈밭에 처박혔다. 에반스는 기다려주기 싫다는 듯 눈 속에 처박힌 페아르의 몸뚱이를 발로 차올렸다. 허공에 뜬 페아르의 몸을 에반스는 나뭇가지로 때렸다. 

‘오호?’

나뭇가지로 때리는 순간 페아르가 칼을 들었다. 몽둥이로 철주를 치는 듯한 둔탁한 음이 울려 퍼지며 페아르는 날아갔다. 에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속도 봐라? 투기의 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다음 순간 에반스의 몸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의 불덩이처럼 변한 몸은 어느새 페아르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불길이 꺼졌다. 에반스가 나뭇가지를 들고 내려찍었다. 페아르의 몸은 에반스의 공격을 반사적으로 피했다. 뒤로 구르는 페아르를 보며 에반스는 미소 지었다. 페아르가 쥔 칼이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제야 패기가 나오는군.’

“자, 달려들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페아르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도약한 페아르가 칼을 휘둘렀다.

페아르의 칼과 에반스의 나뭇가지가 부딪혔다. 그리고 에반스의 나뭇가지가 잘려나갔다. 그 기세를 이어 칼날은 에반스의 머리를 갈랐다.

멀리서 에반스와 페아르의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이프는 침을 삼켰다. 클라이프는 에반스의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살가죽에 찰과상을 입힌 페아르를 놀랍다는 얼굴로 마주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에반스도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살가죽을 베어낸 페아르의 칼끝을 노려보았다. 날카롭게 선 칼날은 페아르의 패기에 의해 더욱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물건이구만? 나뭇가지야 애초부터 패기로 생명력만 올렸으니 잘릴 수 있다 해도 내 몸을 두른 투기를 뚫고 상처를 내다니…….’

날카로운 칼을 맨손으로 밀어내는 에반스를 보며 페아르는 한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맛봐야 했다. 분명히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다. 에반스의 나뭇가지가 부러졌을 때만 해도 페아르는 에반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칼날이 에반스의 얼굴에 닿았을 때 인간의 피부가 아니라 마치 강철을 내려치는 듯한 느낌에 당황했다. 못해도 얼굴을 둘로 쪼개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반스의 얼굴에는 살짝 긁힌 상처가 나있을 뿐이었다. 

에반스가 칼을 밀어내자 페아르는 저도 모르게 칼을 놓아버렸다. 에반스는 털썩 주저앉은 페아르를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페아르를 보던 에반스는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주웠다. 그대로 페아르에게 장검을 내민 에반스가 말했다.

“축하한다. 너를 발라카스 정통 계승자로 임명하마. 이제부터 나는 너의 스승이자 넘어야할 벽으로서 함께할 것이다. 나를 넘게 되는 그날, 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어때?”

“예?”

당황하는 페아르를 보며 에반스가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내 스승님이 나한테 해준 말이거든. 앞뒤로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 어쨌든, 좀 그럴듯하지 않아? 난 그렇게 느꼈는데. 뭐, 어쨌거나 이제부터 널 가르칠 내 이름은 에반스 히들 크리스베일. 실반의 ‘제국기사’야. 제국에 속한 제국 기사가 아니라 ‘상급기사’ 위 직책이야. ‘준남작’이라고도 불려. 굳이 비교하자면 제국 발라의 바로네트? 아마 걔들도 바로네트가 준남작이니 맞을 거야. 내 소개는 여기까지. 넌?”

“페아르 딜워드…….”

에반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딜워드?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에반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가 곧 ‘위대한 벽’에 있는 세 명의 남녀를 떠올렸다. 그가 피식 웃었다. 

“책 좋아하나봐?”

“네?”

페아르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에반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있어. 삼위일체라고. 자, 페아르. 이제부터 전수를 시작할 건데, 아. 시작하기 전에 이걸 줄게.”

페아르는 에반스가 주는 책 한 권을 받아들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페아르를 보던 에반스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발라카스 정통 계승자에게 넘겨주는 일종의 표식 같은 물건. 어차피 그걸로 배우진 않을 거야. 말 그대로 표식 같은 거거든. 물론 그 안에 언젠가 네가 나를 뛰어넘게 해줄 막강한 초월기가 들어있긴 해. 사실 난 도중에 그만 둔 나쁜 제자라서 배울 수 없나보더라. 그건 클라이프 스승님한테 배우든가 직접 깨닫는 수밖에 없데. 마지막 장에 있을 거야. 한번 봐봐.”

페아르는 에반스의 말대로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쳐보았다. 페아르는 마지막 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에반스를 올려다보았다. 에반스는 왜 그러느냐는 얼굴로 페아르를 마주했다. 페아르는 말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장을 에반스에게 보여주었다. 에반스의 눈에는 적힌 글귀가 또렷하게 보였다. 페아르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뭔 소리야? 여기 이렇게 적혀 있잖아.”

에반스는 글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페아르는 재차 확인한 뒤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에반스는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페아르와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정작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은 건 에반스도 페아르도 아니었다. 어느새 둘의 곁으로 다가온 클라이프가 답을 주었다.

“페아르는 아직 발라카스의 기초도 알지 못해. 기초만 알게 되도 글귀는 보인단다. 하지만 글귀가 말하는 초월기는 ‘이걸’ 가진 계승자에게만 보이지.”

클라이프는 페아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클라이프의 손등이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페아르의 손등도 빛나기 시작했다. 에반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클라이프와 페아르를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후 클라이프의 손등에서는 빛이 사라졌다. 대신 페아르의 손등에는 빛이 머물렀다. 빛은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에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반스가 말했다. 

“저게 정통 계승자를 뜻하는……, ‘발라카스의 불’이군요.”

“그래. 원래는 네가 받았을 증표지.”

에반스는 어깨를 피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욕심은 나지만, 상관없습니다. 저런 거 없어도 할 만합니다. 전 천재니까요. 그리고 페아르는 어차피 이제 제건데요, 뭐.”

“그래. 그럼 전수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집으로 가자. 테아하고 엘사한테 말도 하고, 전해 줄 물건도 있으니까.”

“예, 예.”

에반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직도 손등에 새겨진 ‘발라카스의 불’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페아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자, 페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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