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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돌: 멈춰버린 시계추 by 9959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옳은 정의란 없다. 서로의 정의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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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1    추천 0   덧글 0    / 2019.01.30 19:58:39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싫어!”

클라이프는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에반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에반스는 클라이프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하나 있는 제자가 스승을 외면하자 클라이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클라이프가 충격을 받든지 말든지 절대 상관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사를 내비친 에반스는 엘사를 쳐다봤다. 

서른을 넘긴 나이임에도 엘사의 모습은 십 년 전과 같았다. 처음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에반스는 피식 웃었다. 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엘사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지도 않았고 군살이 생기지도 않았다. 

에반스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씁쓸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막상 만나게 되니 안타까움만 더했다. 에반스는 엘사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마셨다. 엘사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꼬마 기사님.”

방긋 웃는 엘사를 차마 외면할 수 없던 에반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는지 엘사가 물었다.

“달갑지 않나보네, 에반?”

에반스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묘안을 떠올렸다. 에반스는 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제 성인인 남자를 보고 꼬마라고 말하면 누구나 달갑지 않을 겁니다.”

“뭐 어때?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키 작고 잘생겼지만 성격 나쁜 어린애인 걸.”

엘사의 친절한 어릴 적 설명에 에반스는 허허 웃었다. ‘아, 이 사람에겐 내가 아직도 남자로 보이지 않는구나.’ 그는 최대한 심술궂게 말했다.

“성인 남자 키가 177센티미터면 평균입니다. 선배님. 선배님 키가 여자 치고 너무 큰 거뿐이지 않습니까?”

“여자 키 170센티미터면 요즘 애들한테는 평균이라던데?”

에반스는 어이가 달아나는 걸 느꼈다. 이 세상 누가 성인 여성의 신장이 170센티미터가 평균이냐고 따지려던 그는 엘사의 얼굴을 보더니 그냥 허탈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엘사는 에반스의 다양한 반응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었다. 

엘사는 주방에서 김이 올라오자 황급히 자리를 떴다. 에반스는 혼자 남은 탁자에서 찻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에는 파문이 일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에반스의 얼굴이 투영되었다. 

에반스는 울상을 짓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보았다. 청년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에반스는 애써 웃어보았다. 그러자 찻잔 속에 비춰진 청년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테아, 전혀 위험하지 않다니까……, 악!”

클라이프는 난생 처음으로 여덟 살 소녀에게 맞았다. 클라이프는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몸을 난타하는 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구슬픈 눈으로 엘사를 바라보아도 그녀는 가벼운 눈웃음을 지어줄 뿐 도움을 주지 않았다. 에반스는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말의 기대를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있는 제자는 헤실헤실 웃으며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클라이프는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울고 싶었다. 

갈라테아에게 시달리던 클라이프를 구해준 건 다름아닌 페아르였다. 페아르는 클라이프에게 달라붙어 주먹질을 하고 있는 갈라테아를 간단히 떼어냈다. 하지만 난동피우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페아르는 갈라테아의 팔꿈치에 명치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페아르를 두들겨 팼다. 그 모습을 본 에반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일레나 님과 성격이 정반대군. 저건 선배 판박이잖아…….’

에반스 못지않게 클라이프도 당황했다. 마치 엘사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에반스의 넋 나간 얼굴을 보니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노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클라이프는 새삼 부모 된 자가 그들의 자식에게 얼마나 투영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당혹스러워하는 두 남자와는 달리 엘사는 페아르와 딸의 모습을 보며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우리 딸, 활기차 보이네.”

클라이프와 에반스는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게 활기차 보인다고?”

“……허.”

엘사는 두 사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클라이프와 에반스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물러나 엘사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고생하셨을 게 눈에 선합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힘이 될 줄은 몰랐다.’

에반스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프는 답답함이 듬뿍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석류차를 홀짝이던 엘사가 클라이프와 에반스를 번갈아 쳐다본 뒤 클라이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말해보라는 듯 턱짓하는 엘사를 보며 클라이프는 초조함이 묻어나는 눈길로 작은 나무상자를 엘사의 눈앞에 올려놓았다. 엘사는 클라이프에게 물었다.

“뭐예요?”

그 순간부터 에반스는 엘사의 분노를 예상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엘사는 그런 에반스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클라이프도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열어보라고 손짓했다. 엘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던 엘사의 손이 멈췄다.

그녀의 눈에 목줄이 백금으로 된 목걸이가 들어왔다. 목줄은 제법 세련된 디자인의 고리로 이어져 있었다. 에반스는 나무상자 사이로 보이는 목걸이를 보고 두 눈을 찡그렸다. 엘사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메마른 목은 침으로 적셔지지는 않았다. 멈춰있던 엘사의 손이 움직였다. 

상자를 끝까지 열어젖힌 엘사는 슬픈 눈으로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황금 테두리에 잘 가공된 돌멩이가 박힌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돌멩이는 완전한 원을 그리고 있지 않았다. 타원형으로 가공 된 돌은 엘사의 엄지손가락만 했다. 엘사는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일레나 언니…….”

엘사는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엘사가 소리칠 것이라 생각했던 두 남자는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조심스레 엘사의 반응을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사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벌써…….”

에반스는 엘사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녀를 알게 된 십여 년의 세월동안 이렇게 약해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에반스는 클라이프를 쳐다봤다. 클라이프는 이를 꽉 깨문 채 엘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에반스는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엘사는 클라이프의 몸을 밀어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엘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호흡한 뒤에야 진정할 수 있게 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상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 게.”

그녀의 손이 목걸이를 붙잡았다. 클라이프와 에반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엘사가 손에 쥔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목걸이에 박힌 돌을 만지작거리던 엘사가 입을 열었다.

“테아가……, 성인이 되면 내가 다 알아서 할 게. 그러니까 클라이프, 당신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에반. 넌 저 애를 부탁해. 보아하니 ‘불’도 넘겨준 거 같으니까. ‘사도’들에게 안전하게 테아를 지킬 수 있게 해줘.”

클라이프와 에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사는 페아르와 갈라테아를 보았다. 잠깐 안 본 사이 그들의 상황도 끝이 난 듯했다. 페아르는 갈라테아를 껴안은 채 그녀의 백은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마음 내키면 찾아올 수도 있고, 나 없을 때 게오르그나 알타이르가 찾아와서 놀아줄 거야. 심심하지는 않을 걸? 뚝.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면 되는 거야. 그리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걸? 스승님이 한 달만 있으면 된다고 했어. 한 달! 내가 날짜 세는 법 알려준 거 기억하지?”

“응.”

“금방 볼 수 있으니까, 애처럼 그만 짜.”

“애 아니야!”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갈라테아를 토닥이는 페아르를 보며 엘사는 피식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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